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북한의 아시안게임 폐막식 특사단 파견은 사실 바둑으로 치면 북한의 기막힌 타개점이었다. 이 한 수는 박근혜정부 들어와 북한이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쥐지 못하고 끌려 다녔다거나 혹은 남측 당국의 강수에 말렸다는 평가에서 벗어나, 남북관계 개선의 의지를 과시하면서 북한이 주도하는 새로운 대화의 국면을 여는 것이었다.
이 한 수를 통해 북한은 남측의 고위급회담 제안을 북한 특유의 방식으로 수용하면서 남북관계의 공을 박근혜정부로 넘기게 되었다. 이는 북한을 대변하는 재일총련의 기관지 <조선신보>가 "평양에서 민족화해의 사절들이 내려와 북남관계 개선의 단초가 만들어진 것만큼 이제 공은 서울의 청와대에 넘어갔다"고 설명하고 있는 데서도 그대로 나타난다.(1)
한편 북한의 특사 파견 동기를 최근 동북아에서 형성되고 있는 패권동맹의 형성과 관련해 설명하는 의견도 있다. 북한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통 큰 정치'를 통해 한미일 군사동맹 구축에 깊숙이 몸담으려는 박근혜정부의 발길을 일단 잡은 것이라는 평가다.(2) 말하자면 북핵을 명분으로 한 대중봉쇄 군사동맹 구체화 움직임이 북한으로 하여금 남북대화의 결단을 이끌어냈다는 매우 역설적인 해석이다.
'대화와 대결'의 널뛰기 남북관계
그런데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북한의 당·군·정 2인자들이 대거 몰려와 남북관계의 새로운 돌파구가 생길까 기대하던 차에,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아 이번에는 대북전단 살포를 둘러싸고 서해에서 남북이 다시 포격을 주고받았다. 남북관계가 그야말로 널뛰기하고 있다.
대북전단 살포를 둘러싼 군사적 공방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가 다시 대화국면으로 넘어가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의 남북관계 상황에서는 설사 고위급회담이 성사된다 하더라도 '대북전단 살포문제'를 둘러싼 남북 간의 공방은 쉽게 정리되기 어려울 것이며, 이는 결국 남북대화의 수준과 결과를 매우 제한할 것이 분명하다. 또 이런 널뛰기 남북관계는 대화가 시작된다 하더라도 이것이 언제 다시 대립국면으로 넘어갈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한 남북관계를 주조해나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남과 북은 '대립과 대화의 반복' 속에서 지속적인 상호신뢰를 형성해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널뛰기 남북관계를 넘어 지속성 있는 대화와 신뢰 형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 남북관계 상황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특사 방남 이후 내년 광복 70년의 남북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을 거론하는 등 국민의 기대는 매우 높지만, 이번 삐라살포 공방에서 보듯이 이런 기대는 좀 더 근본적인 성찰과 변화가 없으면 헛된 기대에 그칠 수도 있다.
북한의 특사 파견 이후 남북관계 운영에 대해, 새정치민주연합 등 야당은 물론 여당 일각에서도 북한이 먼저 통 큰 조치를 취했으니 이를 기회로 삼아 우리 정부도 5.24조치 해제 등을 통해 남북관계의 주도권과 실리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정부와 여당은 북한 고위급의 '깜짝 방문'만으로는 북한 정권의 진정성을 확인했다고 볼 수 없으니 북한의 태도 변화에 따라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5·24조치의 해제 등은 북한의 추가조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신중한 입장이다.
물론 남북관계 현실은 관계 정상화까지 매우 많은 장벽이 놓여 있다. 천안함 사건과 5.24조치, 금강산관광과 이산가족문제, 북핵문제와 한미합동군사훈련 문제, 비방·중상 중지와 대북전단 살포문제 등 하나같이 쉽지 않은 문제들이다. 그런 점에서 '깜짝 방문'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합의한) 고위급 접촉이 단발성 대화에 그치지 않고 남북대화의 정례화를 이뤄 평화통일의 길을 닦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박근혜 대통령의 언급은 수긍할 만하다. 물론 이런 언급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진정성 있는 행동으로 보여줄 것이라 기대한다"는 식의 북한에 대한 일방적인 추가조치 선행 요구의 태도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고 있다.
삐라문제와 비방중상 금지의 '약속'
박근혜 대통령의 이러한 언급이 진정성 있다는 평가를 받으려면 몇 가지 전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북한의 진정성 있는 조처' 촉구는 마찬가지로 우리 정부에 대해서도 그대로 해당하기 때문이다.
북한 입장을 대변하는 재일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특사 방남에 대해 "화답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번 북한의 특사파견을 가리켜 "지금까지 요구사항이던 전단(삐라) 살포 중단과 인권 공세에 대해 한국의 태도 변화를 지켜보겠다는 선불(先拂) 외교를 하고 있다"고 해석한 한 언론의 분석처럼, 아마 북한이 행동으로 화답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비방·중상 중단, 특히 삐라살포 중단문제일 것이다.
북한은 이미 9월 13일자 북남고위급접촉 북측대표단 대변인 성명에서 삐라살포 중단이 고위급회담의 전제조건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리고 특사 파견 직후인 지난 10월 9일에는 조평통 서기국 보도를 통해 다시 한 번 "만일 남조선당국이 이번 삐라살포 란동을 허용하거나 묵인한다면 북남관계는 또다시 수습할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될것"이라면서 "북남관계가 다시 파국에 처하는 불미스러운 사태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재차 이 문제를 강조하였다.(3)
북한이 삐라살포 문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보다 정확하게는 지난 2월의 고위급회담에서 남북이 합의했던 비방·중상 중지 약속을 지키라는 뜻이다. 그런데 삐라 살포 중단을 재차 요구한 10월 9일 자 북한 조평통 보도에 대해 통일부는 "대북전단 살포 문제는 해당 단체가 자율적으로 판단하여 추진할 사안"이라며 "정부는 민간단체의 대북전단 살포와 관련해 해당 단체가 신중하고 현명하게 판단해 주기를 바란다는 입장"이라고 대응하였다.(4) 또 국방부는 "북한이 마치 우리 정부나 군이 대북전단 살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담화를 발표했는데, 우리 군은 6·15선언 후속조치로 2004년 6월 15일 이후로 대북 심리전을 중단한 상태"라고 "북한의 담화는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이라고 주장하였다.(5)
여기서 보듯이 삐라살포 등 비방·중상 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기본적인 태도는 '정부가 나서서 북한을 비방·중상하거나 한 일이 없으며, 일부 민간단체가 대북전단 살포 등의 행위를 하는데 정부가 이를 막을 수 있는 법적 장치가 없다. 그리고 비방·중상은 우리 대통령에 대한 심한 모독적 언사 등 오히려 북한이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부 스스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정부의 공식적인 부인에도 불구하고, 우리 군은 천암함 사건 이후 대북 심리전의 일환으로 전단 살포를 재개하였고 이는 숨길 수 없는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한국군은 남북 장성급 회담의 합의에 따라 2004년 6월부터 대북 심리전을 중단했지만, 2010년 3월 북한의 천안함 격침 이후 FM 전파를 이용한 라디오 방송과 대북 전단 살포 등 심리전을 일부 재개했습니다."(6) 또 2011년에 국방위 소속 당시 한나라당 의원 송영선은 우리 군이 연평도 사건 이후 최근까지 300여만 장의 대북전단지를 살포했고 관련예산은 6억 2천만 원이었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한 일이 있다.(7)
가장 최근에는 "남북이 2월 14일 고위급 회담에서 상호 비방 및 중상 중단에 합의했지만 군 당국은 대북 심리전 활동은 지속적으로 강화(…) 올해 키리졸브(KR)와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한미 연합군사연습에서 대북 심리전의 연합작전 비중을 크게 늘리기로(…) 한국군은 또 대북 전단을 더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는 K-9 자주포용 신형 전단탄 개발도 올해부터 시작" 등의 내용이 <동아일보>를 통해 보도되었다.(8) 이러한 보도들은 민간만이 아니라 우리 정부 역시 대북심리전의 일환으로 대북전단 살포를 직간접적으로 추진해왔다는 분명한 반증이다.
정부 여당이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북한인권법 역시, 현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 하에서는 대북전단 살포단체의 대북 비방활동을 정부 차원에서 직접 지원하고 조직하는데 이용될 것이라는 의구심을 피하기 어렵다.(9)
또 민간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막기 어렵다는 정부의 '변명'은 그럴 듯해 보이기는 해도 별로 설득력은 없다. 정부는 그간 이른바 '남북관계 상황 때문'이라는 매우 포괄적인 이유로 민간단체들의 대북접촉이나 인도지원을 금지하고 제약해왔다. 이는 교류협력법과 그 하위 시행령이나 규칙 등을 통해 통일부장관이 남북관계 상황에 대해서 매우 자의적으로 민간활동을 통제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남북관계 상황에 큰 영향을 미치는 대북전단 살포행위들에 대해서도 정부는 마찬가지 이유로 이를 적절히 제한할 수 있어야 하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법리적으로도 일관성이 있다.
북한은 '비방·중상'의 문제를 제1차 고위급회담에서 이루어진 남북 사이의 '약속'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으며, 그 내용도 언어의 난폭성 차원이 아니라 '상호 체제인정'의 초보적 실천이자 남북공동선언의 이행이라는 좀 더 근본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북한이 삐라문제에 대한 남측의 태도 변화를 남북관계 전도와 연계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난폭한 언어로 점철된 북한의 대남비방도 중단되어야 하지만, 우리 정부 역시 '비방·중상'의 문제, 특히 대북전단 문제나 수시로 반복되는 정부여당 인사들의 북한체제 부정 발언에 대해서는 우리 정부가 북한에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정부의 '능동적인 선행조치'가 필요한 것이다.
되돌아본 2014년의 남북관계
또한 고위급회담의 정례화 등 남북관계의 지속성을 위해서는 정부가 남북관계를 국내정치에 이용하고 있다는 의구심도 불식해나갈 필요가 있다. 현재 북한은 남쪽 민간단체의 대북지원을 사실상 거부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북한은 '일부 민간단체만 예외적으로 그것도 눈곱만큼 지원하면서' 이를 정부가 민간의 인도지원이 정부 제약 없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선전하는데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북한은 정부 통제가 강화된 민간교류나 대북지원에 대해 이를 정부가 대북 대결정책의 옹호 수단이자 정권홍보용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2월의 고위급회담 이후 상황에서 보듯이 필요에 따라 일시적으로 과실만 챙기고 약속은 이행하지 않았던 우리 정부의 행태도 남북관계의 지속적 신뢰구축을 위해서는 반드시 성찰이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다.
당시 정부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로우키(low-key)로 진행하겠다고 약속하고 이산가족상봉행사를 한미합동훈련 기간 중인 2월 20일에서 25일까지 예정대로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헤이그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북핵 불용 발언과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가 합의되었고, 한미합동군사훈련은 약속과 달리 언론의 공개 아래 사상 최대 규모로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북한은 "우리의 핵문제를 가장 악랄하게 걸고들고 있는 것이 바로 박근혜"라며 노골적인 배신감을 드러냈던 것이다.(10)
이는 지난 8월 정부가 고위급회담을 제안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북한은 우리 정부가 남북고위급회담을 제안하면서 그 날짜를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진행 중인 8월 19일로 지정한 것에 대해, 이는 결국 대화를 하려면 남측의 대북 한미군사훈련을 사실상 인정하라는 뜻이고 이는 결국 북한을 모욕주려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즉 북한은 남측 당국의 8월의 고위급회담 제안이 결국 대화를 대결수단에 악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11)
신뢰형성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상호작용의 문제이다. 2014년의 남북관계 경색에 대해 우리 정부는 대부분의 책임을 북한에만 묻고 있지만, 위에서 보듯이 이는 매우 일방적인 인식일 뿐이다.
'진화하는 대북정책'은 패러다임의 변화 있어야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하는 단발성을 넘어선 남북대화의 정례화와 지속성 있는 신뢰형성을 위해서는 또한 그에 맞는 대북정책의 진화가 있어야 한다.
박근혜정부 대북정책을 홍보하는(?) 키워드의 하나인 이른바 '진화하는 대북정책'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북핵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에서 기존 패러다임으로부터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사실상 북한과의 대화를 차단한 지난 몇 년 동안 한국과 국제사회는 북핵문제 해결에 사실상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의 핵능력은 계속 강화되고 있지만, 미국은 북한을 변화시킬 어떤 유의미한 노력도 할 수 없거나 할 의지가 사라진 상태로 보이며, 중국의 북한 압박도 한국이나 미국의 기대와 달리 한계가 분명해지고 있는 듯하다. 이명박 정부 이래로 한국 정부는 북핵문제 해결에 유의미한 이니셔티브를 행사하지 않고 있으며, 사실상 북핵문제에 발목만 잡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로 인해 보수진영 일각에서조차 북한의 핵개발과 이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군사적 압박이 반복되는 ‘안보딜레마’를 풀기 위해 현재의 대북정책을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핵문제 해결을 모든 문제에 우선하는 입장을 재검토해야 합니다. (…) 핵문제의 완전한 해결 시점을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과 남북의 공동 번영이 상당하게 진전되는 시점으로 늦춰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핵문제 해결을 너무 서두를 경우 북한의 붕괴 이외에 다른 모든 전망과 대책이 설 자리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이들은 핵문제 해결을 단계적이고 장기적인 과제로 다루되, 현 단계에서는 "북한이 더 이상 핵개발을 진전시키지 않고 핵보유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수준"이 최선이며 이를 통해 '안보 딜레마'에서 벗어나 남북관계의 진전을 추구해나가자고 주장한다.(12)
또한 이들은 "삼성 등 한국의 대기업들은 특히 중국을 포함해 아시아 전역에서 대규모 기업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정작 문밖의 북한에서만 활동이 전혀 없다"면서 "이런 상황은 바뀔 수 있고 또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북한 정부의 잘못된 행태에 보상을 주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으나, 그것은 경협을 통해 북한이 얻을 이득은 미미한 것에 불과하고 그것을 통해 북한의 핵이나 미사일 개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기 어렵기 때문에 ‘핵심을 잘못 짚은 비판’이라는 것이다.(13)
이런 맥락에서 이른바 ‘5.24조치’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재검토가 있어야 한다. 5.24조치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를 주장한다고 해서 그 원인이 된 ‘천안함 사건’을 이대로 덮어버리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천안함 사건은 반드시 그 진실이 규명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책임규명과 처벌 등의 후속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북한이 천안함 사건을 자신의 소행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조건에서는, 5.24조치에 대한 재검토와 북한의 사과 등 선행조치를 연계하는 것은 남북관계의 동결 외에는 어떤 변화도 만들어낼 수 없는 족쇄가 될 것이다.
5.24조치 재검토와 남북관계 정상화를 천안함 사건 규명과 분리하라는 주장은 천안함 사건 진실 규명을 남북관계 재개 이후에도 근본적인 조사와 조치를 지속하자는 것이다. 또 이러한 주장은 5.24조치로 인한 한국경제의 막대한 기회비용 손실과 위기 탈출구의 상실, 그리고 대북지원과 사회문화교류 중단 등 민간교류의 경색이 가져오는 통일과정의 근본적 왜곡문제가 천안함 사건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라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5.24조치는 완전 폐기하거나, 국내 일부 보수층의 정서를 고려해 상징적인 수준에서만 유지하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 즉 민간 차원의 경제협력과 지원, 교류들은 모두 정상화하고 정부 차원의 일부 조처들만 남겨두는 방안 같은 것이 가능할 수 있다.
대화 없이 '진화' 없다
물론 남북관계의 변화를 위해서는 북한 역시 '남조선당국자들의 뼈속까지 슴밴 동족대결본색'부터 완전히 들어내지 않으면(남한이 먼저 선제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대화할 수 없다는 식의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이번 대북삐라 사건에도 불구하고 약속된 남북 고위급대화는 반드시 재개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북한이 제기하고 있는 대북삐라문제도 남북이 마주 앉아 대화국면을 열어야 일시적 미봉이 아닌 근본적 해결의 단서가 열릴 수 있다. 만약 이번 삐라사태를 문제 삼아 이대로 남북 고위급회담이 무산된다면 광복 70년이자 6.15공동선언 발표 15주년이 되는 2015년을 조국통일의 대전환의 해로 만들자는 북한의 희망은 그 시작부터 좌초하고 말 것이다.
1차, 2차 남북정상회담을 했던 국민의정부나 참여정부 시기에도 남북관계는 많은 곡절과 굴곡을 겪었고, 심지어 참여정부는 대북포용정책을 재검토하겠다는 의사를 내보이기도 했다. 이는 대화국면이 지속되어도 누적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북 사이에 더 많은 약속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반증이다. 하물며 대화조차 시작되지 않는다면, 남과 북은 단 하나의 문제조차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정부는 북한에 '선행조치'를 일방적으로 요구하기 이전에 먼저 남북관계 개선에 장애가 되는 문제들에 대해 스스로 성찰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 정부가 말하는 '단발성'이 아닌 지속가능한 남북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만약 우리 정부의 이런 선행적인 고려와 조치가 없으면 설사 남북대화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발성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앞으로도 남북관계는 대화와 대결이 교차하는 널뛰기가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부가 말하는 '진화하는 대북정책'은 탁상이 아니라 대화를 위한 정부 스스로의 능동적인 선행조치와 기존의 패러다임 변화 추구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 필자 주석
(1) "인천의 열기로 민족화해의 대통로를 열어가자", <조선신보> 2014. 10. 5.
(2) 현재 미국은 고고도미사일요격시스템인 사드(THAAD)의 배치를 통해 한국을 미국 MD체제에 완전히 편입시키려 하고 있고 이를 위해 한미일 군사정보공유 양해각서 체결을 집요하게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상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봉쇄하는 새로운 한‧미‧일군사동맹의 완성을 의미하며, 동시에 이는 동아시아에서 '집단적 평화협력체제' 대신 패권동맹 중심의 신냉전적 질서 재편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3)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보도 제1075호, "남조선당국은 상대방을 중상모독하는 삐라살포놀음을 중지시켜야 한다", <조선중앙통신> 2014. 10. 9.
(4) "[외신이 본 한국] 쌍십절 … 北으로 날아가지도 못한 전단지들", <국민일보> 2014. 10. 10.
(5) "국방부 "대북전단 살포 北주장 전혀 근거없어", <연합뉴스> 2014. 9. 15.
(6) "K-9 자주포로 대북전단 쏜다", 심진섭 건국대 심리학과 교수 인터뷰, 자유아시아방송 2013. 10. 21.
(7) "이미 보도된 대북전단내용 비공개라는 국방부",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2011. 4. 5.
(8) <동아일보>, 2014. 2. 17. 이 기사는 김연철이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정부가 직접 대북전단 살포에 관여하고 있는 몇 가지 반증을 제시한 것 중의 하나이다.
(9) 새누리당의 윤상현, 황진하, 조명철 등의 의원이 대표발의한 북한인권법안의 핵심내용은 이 법안을 발의한 조명철 등이 주장하듯이 ‘북한인권재단’ 설립이다. 이들 법안에는 북한인권재단의 예산규모를 100억으로 책정하고 있으며, ‘북한인권 관련 민간단체 지원’을 북한인권재단의 기본활동 내용으로 명기하고 있다. 제316회 국회 임시회 공청회 자료집, 『북한인권 관련 법안에 대한 공청회』,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2013. 6. 13.
(10) "통일드라이브와 종북공세의 이중주", <창비주간논평>, 2014. 4. 23
(11) 2014년 8월 30일 6.15북측위원회 인사들과 필자와의 대화에서 북측 인사들이 강조했던 내용.
(12) "'한반도포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기조연설 전문", 2014. 9. 29.
(13) "통일 한국의 출발점은 개성공단의 성공이다", 홍석현, <허핑턴포스트코리아>, 2014. 9. 22.,'원칙' 위주에서 '실리' 위주의 현실주의적 대북정책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가에서 제기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경제가 현재 처한 위기의 상황과 그 출구 모색에 대한 한국 재벌들의 인식과 깊이 연동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