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라
2014년 4월 16일
진도 팽목항 앞바다
세월호 침몰 참사의 비극을
나만 살겠다고 먼저 빠져나간 선장과 선원들
탐욕스런 대자본
눈먼 국가권력의 죄악에 대해
슬퍼하라
분노하라
다시 기억하라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세월호에 진실과 정의의 빛을 비추라
다시는 이런 비극이 재발하지 않게
우리 모두 차가운 가슴을 데워
우리 안의 죽음의 문화를 넘어
참사없는 안전한 나라
돈보다 사람이 먼저인 나라
돈보다 생명이 먼저인 나라
이 나라에서 모든 아이는 모두의 아이
이 모두의 나라를 위해
정의의 기억을 세우라
달이 차고 기울고를 몇 번 하더니 어느새 봄이 침몰하고 가을이 찾아왔다. 머지 않아 세월호 침몰 참사가 일어 난지 200일을 맞게 된다. 우리 사회 한쪽에는 이 사건이 매우 불편한 사람들, 하루 빨리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들, 제발 잊어 달라고, 단지 ‘교통사고’에 불과하다면서 ‘포겟 0416’로 몰아가려는 강력한 흐름이 있다. 그러나 정반대로 다른 한쪽에는 이 참사를 꼭 기억해야 한다는 사람들, 잊지 않겠다고 가만히 있지 말자고, 세월호 참사는 생명보다 돈을 먼저 앞세우는 물구나무선 우리 대한민국의 집약판이라면서 “리멤버 0416”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까지 빨리 잊자는 사람들과 꼭 잊지 말자는 사람들 간의 공방에서 저울추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전자 쪽에 유리하게 기운 것 같다.
첫째, 정부 여당은 세월호 참사 이후 치른 선거에서 두 번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인천시장 선거의 경우, 세월호 참사에 중대 책임을 져야 할 유정복씨가 시장으로 당선되는 일까지 일어 났다(유씨의 출마에 박대통령은 ‘지원 덕담‘을 해 선거법 위반 논란을 일으켰다). 왜 이런 참담한 결과가 나왔는지 깊은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여하튼 그렇게 되고 말았다.
둘째, 아무런 근거없이 세월호 유가족들이 이런 저런 특혜를 요구한다는 등 특별법제정 촉구의 진정성을 왜곡 비방한다거나, 대통령 모독이 도를 넘었다(누가 누구를 모독했나?)고 목에 힘주고 검찰이 사이버 검열에 나서는 식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거나, 세월호 문제보다 ‘민생’(이 정부가 언제 진짜 민생을 걱정했나?)와 경제활성화가 먼저라는 식으로 국민들에게 세월호 피로감을 마구 불어넣은 정부/여당의 전략이 상당히 먹힌 것 같다. 그 기반위에서 유가족들의 광화문 광장 단식농성을 조롱하는 일베의 폭식 투쟁, 지난 시기 백색테러 집단이었던 서북청년단 재건시도 같은 광기까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셋째, 무엇보다도 계속 헛발질을 해오던 새정치연합이 마침내 세월호 특별법과 관련한 9월 30일 3차 합의안을 덜컥 수용해 버렸다. 참 슬프게 타결된, ‘세상에서 가장 슬픈 법’이라는 이 3차 합의안에 대해 세월호 국민대책회의는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확보할 아무런 방안을 담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특별법 제정 요구에 담겼던 가족과 국민의 바람에 역행한 것이라는 취지로 비판했다. 그리고 국민의 힘으로 성역 없는 진상규명의 길을 멈추지 않을 뜻을 밝혔다. ‘작은 몸짓이 큰 기적을 낳는다’는 정신으로, 전국 각지역에서 활동하는 동료 시민들과 함께 “리멤버 0416”의 길에 동참한 ‘가만히 있지 않는 강원대교수 네트워크’의 생각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3차 합의안은 어떤 면에서 2차보다 더 나빠진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3차 합의안은 특검추천위원회에 특별검사후보군을 제시할 수 있는 권한을 배제되어야 마땅한 여당측에는 주면서도 오히려 유가족의 참여는 배제해 버렸다. 그리하여 여당의 영향력 제한을 통한 특별검사의 권력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성(independence) -중립성이 아니라- 확보와 이를 통한 성역없는 수사라는 대원칙이 크게 깨어진 것이다.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이 서명한 3차 합의안을 전환점으로 이제 제도 정치권은 ‘포겟0416’ 구도로 선회했다고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점점 진실을 밝히는 길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강원대 교수 네트워크가 “9.30 여야 합의안은 진실을 밝힐 수 없습니다”라는 피켓을 들고서, 9월 22일이래 시작한 강원도청앞 1인 시위에 다시 나서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진실이 결코 침몰하지 않음을 믿는다. 그러나 진실은 스스로 말하지는 않는다. 진실을 밝히는 길은 멀고 험난하다. 늘 그랬다. 그 일이 쉽다면 어찌 지금까지 유사한 재난과 참사들이 줄이어 반복되었을까. 우리는 세월호의 진실을 차가운 바다속에 영영 묻어 버리려는 강력한 권력의 전략과 마주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안의 유혹도 간과할 수 없다. 대충 끝내고 싶은 마음, 밀려오는 피로감, 상호간의 이런 저런 불신, 그리고 나만 살면 된다는 각자도생의 차가운 가슴이 우리 안에도 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안팎의 여러 유혹들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진실과 정의의 길은 꺾기고 말 것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깊은 상처와 슬픔은 치유할 수 없을 것이고, 비극적 재난은 또 다시 재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4.16의 희생과 교훈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너와 나, 아이와 어른, 여성과 남성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대한민국에 드리운 ‘죽음의 문화’도, 위험과 불안으로 가득찬 이 땅의 ‘새로운 가난’(프란치스코 교황 )도 걷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포겟 0416’의 의도대로 빨리 잊는다고 해서, 단순 정치논리로 세월호 문제를 ‘처리' 한다고 해서 근원적인 문제가 묻어질까. 언제든간에 이 문제는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세월호의 희생자들은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그들은 깨어나 천개의 바람이 되어 어둠속의 별들이 되어 산자를 부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시민정치의 시각에서 볼 때, 죽어서 살아난 타자들의 산 자들에 대한 요청은 단순한 연민을 넘어 서는 것이다. 말없는 타자들은 이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새롭게 진실과 정의를 세워 달라고 우리를 부르고 있다. 제발 울고 있지만 말고, 꼭 그렇게 해 달라고 울고 있다. 바로 이런 세월호의 타자의 요청에 대한 진정어린 반성적 수용력이야말로 그들과 우리를 이어줄 것이다. 또 살아 있지만 잠들어 있는 너와 나를 다시 깨어 이어 줄 것이다. 정의는 추상적인 규범만으로, 당위적 외침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정의는 기억의 바탕위에서 비로소 세워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포겟0416‘ 구도가 세월호 사건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부인하는 것이라 비판하고 그 대척에 서는 근본적인 이유다. 우리는 수많은 희생자의 죽음을 댓가로 반드시 정의의 기억을 세워야만 한다. 그기서 불의 교훈을 얻으며 공유 경험위에 설 때 비로소 희생자의 목소리에 응답할 수 있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길을 열 수 있다.
깨어난 시민이라면 죽임당한 모든 아이들이 다름아닌 모두의 아이들임을, 희생당한 아이들의 꿈이 모든 살아있는 아이들의 꿈임을 알지 않을까. 세월호의 진실 규명과 참사없는 안전한 나라, 돈보다 사람, 돈보다 생명이 먼저인 나라를 세우는 것이 곧 나의 일, 내 아이를 위한 일, 내 가족을 위한 일임을 알지 않을까.
리멤버 0416의 길위를 걷고 있는 깨어난 시민, 가만히 있지않는 시민이란 각자도생의 자폐적 개인이 아니라 진실과 정의, 정의의 기억을 위해 협력하는 서로 주체적 인간이며, 공공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눈먼 무책임권력을 규율할 줄 아는 ‘이타적 징벌자’이기도 하다. 기억하라. 세월호에 진실과 정의의 빛을 비추라. 정의의 기억을 세우라. 리멤버 0416의 길은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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