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해체가 민주주의야!"
성유보 선배님, 이사장으로 계신 '우리겨레하나되기 운동본부'(겨레하나)와 '희망래일' 일로 뵌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갑작스러운 부음(訃音)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요. 언론 민주화 운동을 시발로 해서 통일운동에 이르기까지 지난 50년에 가까운 세월을 뒤로하고 이리 훌쩍 가시다니, 더는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이 나라 돌아가는 꼬락서니 때문이던가요? 그렇지 않아도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이후 "세상이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구만…"이라며 다른 무엇보다도 분단체제를 깨뜨리지 않고서는 밤낮 이 모양이 된다고 개탄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눈에 거슬리기만 하면 "친북이요, 종북이요" 하고 입을 틀어막고 민주주의를 유린하기 일쑤인 권력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남쪽 사회의 대북 적대감을 해소시키는 길이 최선이자 그게 곧 민주화 운동"이라고 하시던 말씀, 요즈음 더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바로 그런 마음에서 '겨레하나'와 '희망래일'의 이사장으로 활동하시면서 한반도의 평화, 동북아시아의 평화 운동에 진력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얼마 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겨레하나' 회원들과 한반도기를 손에 들고 열심히 북측 선수들을 응원하시면서 기뻐하시던 장면이 생생합니다.
'성유보'라는 이름의 역사
사람들은 '성유보'라는 이름을 대체로 동아투위에서 시작된 언론민주화 운동, 그리고 '민주통일민중연합‘(민통련) 등 1970년대와 80년대라는 과거의 한 시기로 국한시켜 떠올리고 마는 경우가 있지만, 어디 사실이 그렇습니까? 90년대의 꾸준한 언론개혁 운동과 더불어 21세기 들어서서 정치개혁,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남북 방송교류 추진과 대북지원 사업에 이르기까지 '성유보'의 족적은 크고 넓었습니다. 그렇게 한시도 쉴 틈이 없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정세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고 자칫 낙담하기 쉬울 수 있는 젊은 활동가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도 뚜렷하게 기억하는 마른 얼굴에 날카롭게 빛나는 눈, 그러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운 미소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언제나 진지하게 경청하시는 태도는 후배들에게 많은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박정희가 철권을 휘두른 유신체제와 맞섰던 1970년대 중반 이후 성유보 선배님은 민주화 운동의 힘이 조직적으로 결집되어야 할 때마다 그 중심에 계셨고, 1984년 월간지 <말>과 1988년 <한겨레> 창간을 주도하면서 민주언론의 새로운 장을 여는데 혼신의 힘을 쏟으셨습니다. 그 덕에 우리는 말이 자유를 얻으면 사회가 변모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됐고, 우리의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남과 북 사이의 언로도 그렇게 뚫어나가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상황이 자꾸 암담해지자 성 선배님은 "야, 이거 다시 시작해야 되나 봐"라며 "김 교수, 민주화 운동은 아직도 낡은 말이 아니야" 하면서 각오를 다지셨지요. 불통도 이런 불통이 없고 날이 갈수록 포악해진다면서 "역시 그 아버지에 그 딸인가? 난 연좌제 반대하는데, 이건 뭐 자기가 스스로 연좌제에 묶이고 있는 꼴 아냐? 유신체제로 민주주의를 압살하던 자기 아버지가 어떻게 말로를 맞았는지 못 봤나?"라고 박근혜 정권을 통렬하게 비판하던 목소리는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적 퇴행에 대한 직격탄이었습니다.
'성유보'의 원고 주문
성 선배님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은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말>에 글을 쓰면서부터였지요. 그 이후 저는 <말>의 미국 특파원 임무를 부여받은 셈이 됐습니다. 그땐 <말>의 형편이 워낙 어려웠으니까 원고료 한 푼도 받지 못 한 일이었지만, 저에게는 열정을 불러일으킨 작업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있을 때는 <코리아 타임즈(The Korea Times)> 기자로, 미국에서는 유학생활을 하면서 미주 <동아일보> 기자로 있던 제게 성 선배님의 원고 주문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접하기 힘든 라틴 아메리카의 민주화 운동, 미국의 제3세계 군부 지원 정책, CIA의 개입 정책 등에 대한 분석 기사를 보내라고 하셨으니까요. 어디 그게 쉽게 취재가 되고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일이었나요? 그런데도 어떻게든 해보라고 하시기에, 고군분투하면서 원고를 작성해나가던 일이 생각납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누가 가로막고 있는지, 분단체제와 민주주의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다른 나라들은 어떤 과정을 겪으면서 자유와 인권을 지켜나갔는지 같은 문제에 대해 성유보 선배님은 대중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거지요.
<말>과의 인연이 지속된 이후, 지금은 인터넷 서점 '알라딘'을 경영하는 조유식, '오마이뉴스'를 이끌고 있는 오연호 등 새파랗게 젊은 청년 기자들이 제 글을 <말>에 싣는 작업을 했었지요. 다 성유보 선배님이 씨를 뿌리고 키워놓으신 열매들입니다. 그때 써놨던 글은 나중에 '한겨레신문 출판부'에서 <패권시대의 논리>, <밀실의 제국> 등으로 나왔으니, 이 역시 그 배후는 거슬러 따져 올라가면 성유보 선배님이신겁니다. 어제(9일) 세브란스 영안실에서 KBS 사장을 지냈던 정연주 선배를 보았습니다. 성유보 선배님과 동아투위 시절 함께 고생했던 정 선배 얼굴에 성 선배님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져 있더라고요. 정 선배가 절 보고 와줘서 "고맙다"고 하길래, "뭐가 고마운가? 당연한 건데…"라고 속으로 답하면서도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기도 하겠다" 했습니다. 저도 정 선배를 비롯해서 그 자리에 온 분들이 모두 고마웠으니까요. '성유보'라는 이름이 우리 시대에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모두가 뜨겁게 공감하고, 그런 마음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서로 고마워하는 뜻으로 통한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 40주년
송건호, 리영희 두 분 선생님 돌아가시고 이제 성유보 선배님 이리 가시니, 빈자리가 너무 큽니다. 그렇지 않아도 다가오는 10월 24일은 지난 1974년에 있었던 '자유언론실천선언' 4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날 성유보 선배님의 회고와 오늘의 현실에 대한 발언을 듣고 싶은 마음이 그득했는데, 그건 언젠가 하늘나라에서나 다시 만야 가능한 일이 됐습니다. 요즘 나이 71세면, 지금껏 살아왔던 인생의 경륜이 절정에 달해 청년의 기세로 활동할 수 있는 때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안타깝기만 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인명(人命)이 재천(在天)인데요. '다 하늘의 뜻이 있어 불려가셨겠지요' 하고 믿으렵니다.
오늘날 이 나라가 겪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 세월호 참사 이후 벌어지고 있는 권력의 독선과 고통에 대한 능멸, 언론의 굴종과 경박성의 현실은 성유보 선배님의 역할을 더욱 요청하고 있지만, 어찌 보면 이제는 그 힘겨운 짐을 벗고 쉬실 때가 왔나 하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너무 많은 짐을 안겨드렸던 게 아닌가 합니다. 너무 고된 삶을 사시게 한 것이 아닌가 싶기만 합니다. 그 덕분에 우리의 민주주의를 이만큼이라도 지킬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는 것을 평상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가, 이젠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정작 성유보 선배님에게는 한 번도 해 볼 기회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고맙습니다"
"성 선배, 고맙습니다."
이렇게 얼굴 마주 대하며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아쉽고 아쉬운 작별 인사를 대신하고 싶은 말입니다.
성 선배님의 평생 친구요, 동지인 이부영 선배(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회장)가 <오마이뉴스>에 조사를 쓰신 것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끝나는 글이었습니다.
"우리의 청춘, 우리의 꿈, 우리의 투쟁, 우리의 못 다한 이야기는 우리보다 나은 후배들이 이어받아 이루어낼 걸세. 고단한 삶의 짐 내려놓으시고 편히 가시게. 나도 곧 따라가겠네. 잘 가시게, 나의 동지여!"
그래요, 맞습니다.
"성유보 선배, 고단한 인생길의 짐 내려놓고 이제 편히 가시기 바랍니다. 성 선배 못다 하신 일 우리 후배들이 이어가렵니다. 두 분 선배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송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짐 나누어지고 가렵니다. 동시대에 살면서 함께 나누었던 꿈, 투쟁, 희망을 다시 일으키고 세워 우리 모두가 바랐던 세상 조금이라도 일구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성유보 형."
가을이 깊어가는 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가신 성유보 선배님, 부디 부디 평안하소서.
그리운 마음 가득 담아
아우 김민웅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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