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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두 종류의 지식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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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두 종류의 지식체계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김한민 감독의 <명량>과 이석훈 감독의 <해적>

I. 지배자(혹은 노예)의 지식과 자유인(혹은 유목민)의 지식

1847년에 세워진 아프리카 최초의 독립 공화국이었던 라이베리아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정치학자였던 에드워드 윌모트 블라이든(Edward Wilmot Blyden)은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유럽의 제국주의와 식민화를 정당화시키는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인종들(Identical but unequal races)"이라는 허구적 종족이론에 저항해 "독특하지만 평등한 인종들(distinct but equal races)"이라는 새로운 종족이론을 주장했다. 당시 라이베리아 국립대학교의 교수이자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블라이든은 자신의 새로운 종족이론을 토대로, 라이베리아 국가의 토대를 기독교적 종교체제와 이슬람식 정치체제 그리고 아프리카식 문화체제가 서로 상생하는 사회를 구성하고자 노력했다. 물론 그의 이런 노력은 영국과 미국의 폭력적인 간섭과 강요로 실패했고, 오늘날까지도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현실은 여전히 개인·종족·인종 모두가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서로 '동일하지만' 계급이나 성 혹은 국가의 차원에서 서로 '불평등한' 입장에 놓여 있다. 그러나 블라이든의 지적처럼 삶의 방식이 서로 다른 문화적 측면에서 우리 모두는 각각의 서로 다른 종교, 언어, 사랑, 우정을 지닌 '독특한' 존재임과 동시에 각각의 생명을 지닌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서로 '평등한' 존재이다. 블라이든의 평화적이고 상생적인 종족 이론은 몇몇 아프리카인에게 계승돼 마침내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까지 이어지는 '아프리카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문제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 종족과 종족의 관계 그리고 인종과 인종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친구나 연인의 문화적 관계로 보느냐, 아니면 지배와 피지배의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관계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 개인이던지 잡단이던지 간에 모든 인간은 근원적으로 친구관계나 연인관계의 가능성을 지니며, 그것이 옳든 틀리든 간에 사회화를 통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형성된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은 근원적으로 자유인(혹은 유목민)이고, 사회화의 과정을 통하여 지배자(혹은 주인)가 되거나 피지배자(혹은 노예)가 된다. 따라서 19세기 중반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의 지식인이었던 블라이든은 당시 서구 근대 인문학의 핵심이 바로 지배자(혹은 노예)의 지식임을 밝혀내며, 아프리카의 전통적 지식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유행하는 자유인의 지식적 토대를 제시한 것이다.

▲ 영화 <명량>(왼쪽)과 <해적>(오른쪽) 포스터.

그러나 블라이든의 종족 이론은 그것이 지니고 있는 올바름에도 불구하고, 서구 유럽과 미국 학계에서 거의 한 세기 이상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지배자(혹은 노예)의 지식이 아닌 블라이든의 종족 이론이 학계에서 논의되는 경우에 영국·미국의 제국주의와 아프리카 식민화의 지배 논리뿐 아니라, 영국·미국 내부에서도 근대 국민국가의 논리를 위협받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블라이든의 부활은 서구의 근대적 지식의 허구성을 밝히는 동시에, 그동안 억압됐던 자유인의 지식이 세계무대에 등장하는 것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블라이든이 제시하는 것처럼 서양·동양, 아프리카·유럽을 막론하고 인간이 살고 있는 모든 시대와 장소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와 이웃,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다른 지식이 존재한다. 하나는 서구적 근대의 자유주의적 인간관이 만든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개인이라는 입장에서 나와 이웃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19세기 라이베리아의 블라이든처럼 세계주의적 시각으로 '독특하지만 평등한' 개인이라는 입장에서 나와 이웃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전통적인 입장에서 전자가 플라톤과 공자의 국가철학적 지식이라면, 후자는 소크라테스와 노자의 노마돌로지(Nomadology) 지식이다. 오늘날 국가철학적 지식과 노마돌로지의 지식은 서로 상호보완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대립하면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통해 개인-사회-국가를 매개하고, 또한 상호 구성하는 서로 다른 지식으로 작동한다.

국가철학적 지식과 노마돌로지 지식이 상호 작동하는 것은 영화의 생산과 소비에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나 배우, 혹은 관객이나 비평가가 국가철학적 지식으로 영화적 사건을 바라보느냐와 노마돌로지의 지식으로 그것을 인식하느냐의 문제는 영화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에 개봉된 김한민 감독의 <명량>과 이석훈 감독의 <해적>은 영화가 다루고 있는 조선시대와 영화를 만든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인식하는 서로 다른 지식임과 동시에 상호보완적 지식임을 보여준다.

II. 국가철학적 지식의 영화 서사, <명량>

영화 <명량>은 '하나의 생명을 지닌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이순신 장군이나 선조 임금, 일본군이나 조선군 모두가 '동일하지만' 조선과 일본이라는 서로 다른 국가구조나 군대구조에 의해 서로서로 '불평등한' 개인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그 '불평등한' 개인의 관계가 정말로 '불평등한' 관계라는 사실은 임진왜란의 일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원균의 모함으로 옥고를 치르고 일본이 다시 침략하는 '정유재란' 당시에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는 것으로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런 상황 때문에 이순신뿐만 아니라, 이순신 진영에 있는 수많은 인사들이 '불평등한' 서열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불편한 '불평등한' 관계가 드러난다.

영화에서도 드러나듯이 이순신의 진영이나 선조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과 달리 당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경우, 최초로 일본 영토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중심으로 이뤄진 '불평등한' 서열관계가 희대의 영웅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충성심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영화 <명량>은 당시 조선이 지니고 있는 자연스럽지 않은 '불평등한' 서열관계 속에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사라지고 단지 두려움만이 판을 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이순신이라는 탁월한 인물이 어떻게 당시의 일본이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불평등한' 서열관계 속에서 서로 앞을 다퉈 충성심을 보이고자 일본 수군을 무찌르는 전투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두려움의 공포와 자부심의 용기!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개인의 관계라는 국가철학적 지식의 영화 서사로 구성된 <명량>의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두려움에 따른 공포와 자부심의 용기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순신(최민식 분) 장군이 지니고 있는 자부심의 용기는 그의 부관으로 있었던 아들뿐 아니라, 수많은 부하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어떤 경지의 세계이다. 일본 수군이 가지고 있는 330척 배와 싸울 수 있는 배는 단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고, 그들을 지휘하는 이순신 장군 또한 '불평등한' 서열관계의 최고 꼭대기에 있는 선조 임금으로부터 눈 밖에 난 사람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공포를 새로운 자부심의 용기로 대체할 수 있는 그 어떤 명분도 당시의 조선 수군의 진영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일본 수군은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옥에 티라고 할까? 일본 수군 수장인 도도(김명곤 분) 장군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의 공포는 이미 그 이전의 임진왜란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의 개인적 전략과 전술이 뛰어나 만들어진 것이다. 도도 장군이 지니고 있는 개인적인 두려움의 공포를 대체하기 위해 멀리 일본에 있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적이었던 구루지마(류승룡 분)를 장군으로 승격시켜 조선 수군을 격퇴하도록 임명한다. 따라서 구루지마를 대장으로 새롭게 모신 일본 수군은 자부심의 용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주)빅스톤픽쳐스

그러나 구루지마 장군과 일본 수군들의 자부심의 용기는 진정한 자부심의 용기가 아니라 12척의 조선 수군과 비교하여 330척이라는 수적 우세와 활이라는 구식 무기에 비교해 조총이라는 신식 무기를 지니고 있다는 계산에서 우러나온 것일 뿐이다. 이와 비교하여 이순신 장군의 일상에서 우러나오는 자부심은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개인들의 관계이지, 장군이라는 지위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자부심의 용기는 선조 임금이나 수많은 백성들이 모두 '독특하지만 평등한' 각각의 생명체라는 노마돌로지 지식의 입장에서 자신은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당시의 조선 지역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보호하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조선인이라는 자부심의 용기가 그의 병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지니고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러나 그 소망은 단지 하나의 소망일 뿐,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국가철학적 사유방식에 찌들 대로 찌들어있는 병사가 느끼는 수적 열세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공포를 자부심의 용기로 대체할 수는 없다. 이순신이 소망하는 죽음을 불사하는 자부심의 용기는 '유교'라는 국가철학적 사유체계의 바깥, 즉 불교의 승려들과 일반 백성 사이에서 생겨난다. 국가철학적 지식이 아닌 노마돌로지 지식으로 무장한 승려와 일반 백성의 도움으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불사한 자부심의 용기는 그를 불멸의 영웅으로 만든 것이다.

Ⅲ. 노마돌로지 지식의 영화 서사, <해적>

<명량>이 지니고 있는 국가철학적 지식의 영화 서사와는 달리 <해적>은 오늘날의 탈근대적 영화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서사 구조처럼 근원적으로 노마돌로지 지식의 영화 서사로 이뤄졌다. 영화 대부분을 구성하는 산적 두목 장사정(김남길 분)과 해적 두목 여월(손예진 분), 해적에서 산적으로 신분 이동을 했다 다시 해적으로 복귀하면서 중구난방 웃음을 선사하는 철봉(유해진 분), 아버지가 자신을 팔았기 때문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여월의 해적단에 머물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흑묘(설리 분) 등 사유체계는 분명히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개인과 집단이라는 국가철학적 지식체계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아주 분명하게 '독특하지만 평등한' 개인과 집단이라는 노마돌로지 지식으로 구성돼 있다.

물론 이 해적과 산적도 이성계(이대연 분)의 위화도 회군을 통한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과 마차가지로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서열관계가 존재하지만, 그 서열관계의 근본은 친구나 연인처럼 일대 일의 평등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집단 내부의 상생과 평화를 위한 동맹관계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노마돌로지 지식체계가 장사정으로 하여금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저항해 다시 산적 두목이 되게 했고, 여월로 하여금 개인의 권력과 부를 위해 동지를 죽이거나 파는 해적 두목 소마(이경영 분)에게 저항해 새로운 해적 두목이 되도록 만든 것이다.

노마돌로지 지식의 영화 서사가 <해적>의 근간을 이루면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국새 분실이라는 영화적 사건을 통한 대립과 갈등은 노마돌로지 지식 체계의 구성원과 국가철학적 지식체계의 구성원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대립과 갈등의 근간에는 '독특하지만 평등한' 개인과 집단이라는 -친구나 연인관계로 구성된 해적과 산적의 근원적인 노마돌로지의 지식을 지속하려는 장사정과 여월의 세력과 개인의 부와 권력을 위하여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개인과 집단이라는 서열관계로 구성된 이성계 국가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소마와 모흥갑(김태우 분)의 세력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한다. 그러나 문제는 원래 산적 두목이었던 모흥갑을 배반한 것은 장사정이고, 원래 해적 두목이었던 소마를 배반한 것은 여월임에도 불구하고, 장사정과 여월을 따르는 산적·해적은 영화를 관람하는 장사정과 여월이 배반자가 아니라 소마와 모흥갑을 배반자로 느끼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영화가 배경으로 하는 조선 초기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관객들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나 근대 식민지 세계체제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주로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개인과 집단을 전제로 한 -국가철학적 지식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관객들의 삶과 사유체계의 근간에는 바로 '독특하지만 평등한' 개인과 집단이라는 노마돌로지의 지식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하리마오 픽처스

해적과 산적의 집단 속에서 이루어지는 '배반'과 '모함'이라는 언어적 개념이 불평등한 관계를 토대로 한 국가철학적 서열관계가 구성하는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의 생명과 하나의 생명이라는 평등한 동맹관계의 노마돌로지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멸망한 고려와 건국된 조선이라는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는 언어적 개념 또한 근본적으로 국가철학적 서열관계를 토대로 한 이성계 한 개인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새롭게 구성된 조선이라는 국가가 근본적인 원칙으로 삼고 있는 새로운 동맹관계의 노마돌로지 지식에 근거한다.

따라서 영화 <해적>은 여월과 소마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장사정과 모흥갑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 산적이나 해적 집단이 아닌 조선이라는 국가가 고려라는 또 다른 국가와의 동맹관계 원칙을 부수고, 새로운 동맹관계의 어떤 원칙을 가지고 있는가를 질문한다. 이런 질문은 또한 수백 명의 어린 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세월호 참사로, 대한민국이 과거 일제 식민지 시대나 조선, 혹은 1970년대와 80년대의 독재국가와 어떻게 다른 동맹관계를 토대로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해적에서 산적, 산적에서 해적으로 끊임없이 갈팡질팡하는 철봉에 대한 연민과 소마와 모흥갑이라는 인물에 대한 분노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국가철학적 지식 또한 근본적으로 "독특하지만 평등한" 개인과 집단이라는 노마돌로지 지식을 근간으로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IV. 국가철학과 노마돌로지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국가철학적 지식을 토대로 한 <명량>의 영화 서사에서 불세출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의 '충성'이 조선을 왕과 동일시하지 않고 백성과 동일시하는 '독특하지만 평등한' 노마돌로지 지식에 토대를 두고 있고, '독특하지만 평등한' 노마돌로지 지식을 토대로 한 <해적>의 영화 서사에서 국가와 적대적 관계에 있는 여월의 해적과 장사정의 산적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국새의 분실이라는 영화적 사건을 통하여 조선이라는 국가의 건국이 지니는 노마돌로지의 정당성을 질문하듯 <명량>과 <해적>을 본 관객은 '천안암 사건'과 '세월호 사건'을 통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지니는 노마돌로지의 정당성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명량>과 <해적>의 관객들이 질문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개인과 집단이라는 오늘날의 국가구조가 진정으로 국민 개개인 모두를 포용하는 '독특하지만 평등한' 개인과 집단이라는 동맹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느냐라고 질문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명량>에 등장하는 이순신 장군과 같은 불세출의 영웅마저도 죽음을 불사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의 용기를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해적>에 등장하는 여월이나 장사정처럼 단지 불평등하기만 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구조에서 벗어나 친구나 연인의 관계를 구성하여 바다와 산으로 가서 대한민국의 국적 내팽개쳐버리는 무국적의 해적이나 산적이 되고 싶은 현실을 만든다.

물론 영화는 영화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여월이나 장사정처럼 해적이나 산적이 되는 것이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불사하는 자부심의 용기를 발휘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0년 혹은 500년 전의 역사적 사건을 오늘날 영화적 사건으로 되살려 21세기의 대한민국을 다시 질문하는 두 영화는 '독특하지만 평등한' 개인과 집단을 하나의 국가나 국민의 동맹관계로 전제하지 않는, 단지 불평등하기만 한 국가의 권력구조는 400년 혹은 500년 전과는 달리 결코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명량>의 마지막 장면에서 죽음을 불사하는 자부심의 용기를 발휘하는 이순신 장군을 백성이 구하는 것처럼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여월이나 장사정과 같은 수많은 개인이 산이나 바다로 탈영토화해 산적이나 해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대한민국을 '독특하지만 평등한' 대한민국으로 재구성할 것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대한민국의 탈영토화 과정을 우리는 임순례 감독의 <제보자>에서 분명하게 목도할 수 있다. <제보자>에 등장하는 제보자 심민호(유연석 분), 윤민철 PD(박해일 분) 그리고 방송국 국장(권해효 분)과 방송국 사장(장광 분)은 21세기 대한민국을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근대 국가철학의 식민지 국가로부터 탈영토화시켜 "독특하지만 평등한" 탈근대의 대한민국으로 재영토화시키고자 하는 <명량>의 이순신 장군이며 <해적>의 여월이고 또한 장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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