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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시장 개방, 협상 시도조차 안 하고 무조건 정부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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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시장 개방, 협상 시도조차 안 하고 무조건 정부 믿어라?

[재반론] 정말로 '쌀 시장 보호 의지' 있다면 관세율 관련법 제정 요구 수용해야

내년부터 시행될 쌀 시장 전면 개방을 앞두고 사회적 논란이 뜨겁습니다. 정부는 "더 이상 개방 유예는 불가피하다"며 513%라는 높은 관세율을 반드시 지켜 우리 농업과 농민을 보호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농민단체들은 "정부가 협상 한 번 해보지 않고 식량 주권을 포기했다"고 반박합니다.

<프레시안>은 정부의 관세율 결정 이후, 농림부 장관을 지낸 김성훈 중앙대 명예교수와의 9월25일자 인터뷰에서 정부의 '개방 유예 불가피론'을 반박하는 주장을 전했습니다. (☞기사 보기)

이후 농림축산식품부가 1일 반론 기고문을 보내와 정부 측의 입장을 전하고 김 전 장관의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기사 보기)
정부 입장에 대한 재반박글을,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의 장경호 부소장이 보내왔습니다. 쌀 시장 전면 개방이 농촌 경제 및 식량 안보와도 직결된 문제인 만큼, 활발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장 부소장의 글을 전문 게재합니다. 이런 논의가 반목과 갈등이 아닌 건강한 사회적 논쟁으로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편집자>
"협상 한 번 해 보지 않고 식량주권을 포기한다."

이 말은 지난 9월25일자 <프레시안>에 실린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의 인터뷰 요지였습니다. 이 말은 정부의 쌀 전면 개방에 분노하는 농민들의 심정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말은 정부의 쌀 전면 개방 발표에 담긴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정확하게 비판하는 지적이기도 합니다. 인터뷰의 특성상 통계수치나 숫자에서 일부 정확하지 못한 점도 있기는 하지만 인터뷰 전반에 담겨 있는 맥락과 요지는 매우 정확하고 명쾌합니다.

평소 전직 농림부장관으로 기억되기 보다는 농업경제학자로서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해 왔던 그는 또한 통상 문제에 대해 풍부한 경험과 식견을 두루 갖춘 진짜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쌀 개방과 같은 중차대한 통상 현안에 직면한 우리 사회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많은 농민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절박한 심정에 공감해 주는 그에게 감사와 존경을 뜻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바른 말, 쓴 소리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곳도 있습니다. 아마 현재의 정부도 그의 말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김성훈 전 장관의 인터뷰에 대해 농식품부가 자신들의 입장을 합리화하는 장문의 반론을 게재했습니다. 농업통상과에 근무하는 이정석 사무관의 이름으로 반론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정부 내부에서 협의되고 조율된 정부의 입장이라고 생각됩니다. 10년 전인 2004년 쌀 협상 당시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진 바 있는데, 당시 김성훈 전 장관의 조언과 충고를 못마땅하게 여긴 정부가 공무원 한 명을 내세워 언론에 반박성 글을 기고한 바 있었지요. 희극이든, 비극이든 이런 식으로 반복되는 역사가 씁쓸하기도 합니다.

이 글은 농식품부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의 글입니다. 또한 정부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이해는 하면서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들을 다시금 상기시켜주기 위한 글이기도 합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사소한 것 하나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정부의 반론 글을 기고한 이정석 사무관은 자신이 농군의 아들로서 쌀 개방 문제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데, 본인의 그런 마음가짐은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쌀 전면 개방을 결정한 정부가 '농민의 아들'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내년부터 관세화로 쌀 시장을 전면개방 하기로 결정한 정부의 행태에 대해 '독단과 독선' 그리고 '불통과 독주' 등과 같은 비판이 곳곳에서 분노로 표출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이 '농민의 아들'을 강조하면서 지지를 호소하지만, 정작 당선된 이후에는 농민의 가슴에 피멍이 맺히게 하는 정책들을 추진하는 수많은 작태를 보아 왔던 많은 농민의 상실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10년 전 협상 실패를 다시 반복하는 정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정부의 반론 글에 보면 2004년에 있었던 쌀 협상 결과에 대해 농업계 대부분이 공감했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쌀 협상 결과에 대한 대다수 농민들의 평가는 '실패한 최악의 쌀 협상'이었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당시 국회도 그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하여 정부의 쌀 협상 결과에 대해 국정조사까지 시행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관계에도 불구하고 농업계 대부분이 공감했다는 식으로 자화자찬을 하는 것은 웬만한 철면피가 아니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것입니다.

특히, 당시 협상에서 현상유지(standing still)에 대해 결론을 내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쌀 개방 문제에 대한 사회적 갈등과 쟁점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당시 정부는 자동관세화론이라는 자승자박의 오류 때문에 2004년 내에 협상을 끝내기 위해 상대방 국가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정부는 자동관세화 주장이 오류였다는 점을 인정하였지만 이미 '실패한 최악의 쌀 협상'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협상 때문에 의무수입물량(MMA)이 4%에서 8%로 두 배 늘어났고, 올해 약 40만9000톤이라는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만약 그 때 당시에 정부가 성급하게 협상을 끝내지 않고 2005년 이후에도 협상을 지속했더라면 어떠했을까요? 그 결과를 지금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현상유지'가 가능한지에 대한 여부는 분명한 결론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이번 쌀 개방 문제에서 정부와 농민단체 사이에 가장 큰 쟁점이 되었던 '현상유지'의 실현가능성 여부 때문에 사회적 갈등을 겪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그 당시 협상을 지속했더라면 적어도 의무수입물량이 4%에서 8%로 두 배로 증가하는 것 보다는 더 나은 결과가 나왔을 것입니다. 최선의 경우엔 의무수입물량을 4% 수준으로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현상유지 위해 아무 노력조차 안한 정부

10년 전 실패한 협상 결과를 지금 되돌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어 잘못된 오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지금 쌀 개방 문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부의 반론 글을 보면 실패를 인정하지도 않고, 교훈도 얻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정부가 '현상유지' 실현 여부에 대해 최소한의 시도나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부는 지난 10년간 현상유지가 가능한지 여부에 대해 주요 상대방 국가와 협의를 하거나 WTO에 공식적으로 질의를 하는 것과 같은 그 어떠한 시도나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현상유지가 최선의 방안이라고 말로는 인정하면서도 정작 그 실현 여부를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관세화 전면 개방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왔던 것입니다.

특히, 작년 12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개최되었던 WTO 각료회의 결과를 고려하면 정부의 직무유기 내지 실책은 뼈아프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WTO 각료회의는 인도의 WTO 농업협정문 위반 문제에 대해 다른 모든 회원국들이 문제 삼지 않기로 한다는 합의문을 채택한 바 있습니다. 소위 '평화조항'으로 불리는 이 합의는 인도의 보조금 규정 위반 문제를 합법화시켜 주는 매우 주목할 만한 결정이었습니다. 당시 인도 정부는 G-33(개발도상국 33개국 그룹)의 지지를 등에 업고 미국, 중국, 유럽연합 등 주요 회원국과 협상을 통해 이 조항을 관철시켰습니다. G-33 멤버인 한국도 인도 정부의 제안에 찬성 의견을 표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왜 이 당시에 한국은 현상유지를 제기하지 않았는가, 혹은 못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인도를 비롯하여 G-33과 협력하여 한국 쌀의 현상유지 주장을 협상의 공식 의제로 제기하려는 그 어떠한 노력조차 없었습니다. 인도의 보조금 규정 위반 사항조차 WTO 협상의 의제로 제기되는 상황에서 한국은 정당한 현상유지 권리조차 제기하지 못하는 행태를 보였던 것입니다.

만약 당시에 현상유지 주장을 제기하였다면, 어떤 식으로든 현상유지 가능 여부에 관해 결론이 나왔을 것이며, 그 이후 쌀 개방 문제에 관한 사회적 논란과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그러한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난 7월7일에 개최된 쌀 개방 해법을 찾기 위한 국제토론회에 주제발표자로 참석한 아프사 제프리(인도)는 한국이 왜 현상유지 주장을 WTO 각료회의에 제기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인도의 비영리기구(NGO) 대표로 각료회의를 참관하면서 인도 정부가 제안한 '평화조항'이 WTO 각료회의에서 합의되는 장면을 현장에서 직접 지켜보았던 전문가입니다.

UR 농업협정문에서 개발도상국 지위를 받은 한국의 쌀은 최초 10년(1995∼2004년) 동안 의무수입물량(MMA)을 연차적으로 증가시키는 의무를 이행하였고, 여기에 추가하여 새로 10년(2005∼2014년) 동안 의무수입물량을 두 배로 늘리는 의무를 추가로 이행하였습니다. 만약 내년부터 쌀을 관세화로 개방한다면 한국은 또 다시 쌀에 대해 추가적이고 새로운 개방조치를 한 번 더 이행하는 결과가 발생합니다.

농민들이 요구하는 현상유지는 특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무이행의 '형평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미 20년에 걸쳐 의무를 이행한 것도 모자라서 또 다시 관세화 개방과 같은 추가적이고 새로운 개방조치를 취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즉, 정부의 관세화 개방론은 다른 나라의 의무이행 여부에 상관없이 한국만 일방적으로 새로운 추가적인 의무를 더 이행하자는 것이고, 농민단체의 현상유지론은 다른 나라의 의무이행과 '형평성'을 고려하여 한국도 현상유지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으로 대비됩니다.

그런데 정부가 쌀 전면개방을 발표하면서 내년부터 관세화로 개방할 경우 우리는 의무이행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회원국들과 동등한 의무이행 차원에서 현상유지를 제기하는 것은 WTO 회원국으로서 한국의 정당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정부 스스로 이런 권리를 포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협상 한 번 해 보지 않고 식량주권을 포기한다"는 지적은 정부의 오류와 문제점의 핵심을 매우 정확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관세화 유예하면 의무수입물량을 반드시 늘려야 하나?

분명한 사실은 관세화로 개방하지 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의무수입물량을 늘려야 한다는 규정은 우루과이라운드(UR) 농업협정문 그 어디에도 없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항은 어디까지나 주요 이해당사국과의 협상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지 사전에 미리 정해진 규정은 없습니다.

특히, 정부의 반론 글은 관세화 개방을 합리화하기 위해 필리핀의 사례를 들어 우리나라도 관세화 유예를 하고자 할 경우 상대방 국가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는 의무수입물량을 두 배 정도 늘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지난 7월7일 국제토론회에 참석하여 발표를 했던 필리핀의 농민대표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확인시켜준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농민을 대표하여 필리핀의 쌀 협상에 정부 협상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모든 과정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필리핀의 쌀 협상에서 상대방 국가가 필리핀에게 주요하게 요구한 것은 의무수입물량이 아니라 국가별 쿼터를 확대해 달라는데 집중되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이 중요한 사실은 한국의 의무수입물량(40만9000톤)을 국가별 쿼터로 할애하는 방법을 우리가 유력한 협상카드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시사합니다. 그러나 정부가 관세화 전면 개방 입장을 먼저 발표하면서 이 유력한 협상카드를 매우 제한적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안타까운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정부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필리핀의 사례를 의도적으로 악용해 왔던 측면에 대해서는 따로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지난 4월엔 아직 완전하게 합의되지 않았으니 협상을 계속하라는 세계무역기구(WTO)의 결정 사항을 마치 필리핀의 요청이 거부당한 것으로 호도한 바도 있지요. 정부는 필리핀이 상대국과의 쌀 협상에서 고립무원의 궁지에 빠진 것으로 협상 분위기를 국내에 알렸지만 나중에 필리핀의 농민단체가 한국 농민에게 알려온 바에 따르면 필리핀은 미리 중국, 인도 등 다수 국가로부터 지지를 얻어냈고, 다만 미국 등 소수의 몇 나라만 반대 입장을 고수하다가 결국 마지막엔 필리핀의 입장에 동의한 사실이 밝혀졌지요. 또한 정부는 필리핀이 관세화 유예의 대가로 가혹한 비용을 지불한 것으로 소개했지만 사실은 의무수입물량을 35만 톤에서 80만5000톤으로 늘리는 것이 필리핀의 입장에서는 별로 잃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게 되었지요. 쌀이 부족해서 매년 100만 톤에서 200만 톤의 쌀을 수입해야 하는 필리핀의 입장에서는 일반 수입물량의 일부를 의무수입물량으로 돌린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농민단체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지요.

정부, 협상도 하기 전에 포기했다

사실 정부가 주장하는 관세화 개방이든, 농민들이 요구하는 현상유지든 결국은 '협상'이라는 관문을 거치지 않을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예상되는 쌀 협상의 주요 당사국은 미국, 중국 등이 될 것이며, 쌀 협상의 양상은 우루과이라운드(UR) 농업협정문을 관리하는 세계무역기구(WTO) 협상 테이블에서도 이루어지겠지만, 양자 간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관련 협상 테이블에서도 협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쌀 개방 문제에 관한 최종적인 결과는 이와 같은 다양한 협상 테이블에서의 복합적인 협상을 통해 도출될 것입니다. 그 협상 결과는 정부가 주장하는 관세화 개방이 될 수도 있고, 농민단체가 요구하는 현상유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관세화 개방과 현상유지 사이에서 다양한 경우의 수가 조합되는 절충점도 도출될 수 있겠지요. 결국의 고차원의 수학문제를 푸는 것과 같은 고도의 복잡한 쌀 협상은 정부가 내세우는 관세화 개방을 최저수준으로 하고, 농민단체가 요구하는 현상유지를 최고 수준으로 하여, 그 사이에서 적정한 절충점을 찾아서 합의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부의 쌀 전면개방 발표로 인해 다른 모든 선택의 가능성이 배제되었고, 관세화로 전면 개방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협상도 하지 않은 채 처음부터 최저 수준으로 결정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도 익숙하게 보아 왔던 이러한 정부의 통상 협상 행태를 자승자박 혹은 자충수라고 불렀습니다. 10년 전 쌀 협상의 실패를 자초했던 정부의 자승자박의 논리가 지금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면서 스스로를 옭아매는 자충수를 두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협상 한 번 해 보지 않고 식량주권을 포기한다"는 김성훈 전 장관의 의견은 정부의 이런 오류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쳐다보는 것이 상식이지만 가끔은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면서 이런 저런 불평을 늘어놓는 비상식적인 경우도 종종 봅니다. 정부의 반론 글이 이런 비상식에 해당되지는 않는지 스스로 되돌아보길 정중하게 권합니다.

513% 고율관세, 지킬 수 있나

당초의 의도와는 달리 다소 글이 길어지게 되었습니다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정부의 반론에 대해 재반론을 하고자 합니다.

정부는 최근 513% 고율관세를 제시하면서 이것만 확보하면 의무수입물량 이외에 추가로 더 수입되는 쌀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일본과 대만의 사례까지 들어가면서 말이지요.

정부가 내세우는 고율관세에 대한 가장 핵심 이슈는 고율관세를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느냐의 여부입니다. 즉 WTO 농업협정문에 따라 513%에 준하는 고율관세를 확보하더라도 그 이후에 자유무역협정(FTA/TPP)을 통해 미국 및 중국 쌀에 대해 관세를 없애주거나 혹은 대폭 낮춰주는 경우를 우려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 지구촌에서 우리 국민의 주식인 밥쌀용 쌀을 한국에 수출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과 중국 밖에 없다고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하필 이 두 나라와 자유무역협정으로 연결되어 있고, 이 두 나라가 가장 큰 무역 상대국입니다. 만약 이 두 나라 가운데 어느 한 나라에게라도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쌀에 대해 관세 철폐 혹은 관세 감축 같은 조치를 취한다면 WTO 농업협정문에 따라 결정되는 고율관세는 한 순간에 유명무실한 빈껍데기로 전락해 버립니다.

일본과 대만은 그 당시 자유무역협정이 활발하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에 관세화로 개방하는 것을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자유무역협정을 활발하게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일본과 대만은 고율관세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고, 수입쌀이 그다지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아마 농식품부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정부의 고율관세 주장에 대한 김성훈 전 장관의 충고나 농민단체의 비판도 바로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고율관세에 관련된 주변 상황과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정부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농식품부 장관이 수차례에 걸쳐 "앞으로 모든 자유무역협정에서 쌀을 제외하겠다. 이러한 정부의 의지를 믿어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농민들은 지금 농식품부 장관의 말을 신뢰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유무역협정(FTA/TPP)에서 농식품부 장관이 그다지 결정권이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 농식품부 장관이 그만두고 난 후에 정부가 말 바꾸기를 하는 과정에서 그 어느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말을 지킬 수 있는 권한과 책임 자체가 신뢰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농민들은 장관이 아니라 대통령이 직접 약속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아직까지 이 부분에 대해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약속은 말로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문서로 하는 것이 더 확실한 방법입니다. 고율관세를 결정한 후에 정부가 마음대로 관세율을 변경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사회적 합의과정과 국회의 동의를 거쳐 쌀의 관세율을 변경하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법 제정을 농민들이 제안하고 있지만 정부는 아직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요. 정부를 믿지 못하는 농민과 국민을 탓하기에 앞서 정부 스스로 신뢰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쌀 개방과 같은 중차대한 사안에 대해 정부는 농민들로부터 그다지 신뢰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독단과 독선에 사로잡혀 관세화로 쌀 시장을 전면 개방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강행하고 있다는 비판을 더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농식품부가 해야 할 일은 농민과 국민으로부터 정부의 주장이 신뢰받을 수 있도록 만드는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농식품부 장관이 농민과 국민에게 정부를 믿어 달라고 말하기에 앞서 최고 결정권자이자 책임자인 대통령이 직접 농민과 국민에게 약속하도록 대통령에게 직언하는 일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쌀 관세율 변경에 대한 법 제정 요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믿어달라는 정부의 말이 진심이라면 법 제정을 마다할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정부는 말로 정책을 하는 곳이 아니라 법률과 제도로 정책을 하는 곳이란 점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하다못해 자유무역협정 때문에 쌀 관세율이 철폐되거나 대폭 감축되는 상황이 올 경우 농식품부 장관을 비롯하여 사무관급 이상 모든 공무원이 그만두겠다는 정도의 결연한 의지라도 밝히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정부가 주로 인용하는 일본이나 필리핀의 사례에서 진정으로 정부가 배워야 할 것은 대화와 소통, 그리고 신뢰입니다. 그 나라들이 각각 선택의 결과는 달랐지만 소통과 신뢰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간 과정은 농식품부를 비롯한 정부가 쌀 개방 과정에서 반드시 배워야 할 부분입니다. 정부가 입만 열면 강조하는 국격이라는 것은 경제력이나 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성숙도에 의해 평가받는 것입니다. 소통과 신뢰를 통해 쌀 개방 문제를 풀어나간 일본과 필리핀의 정부에 비해 우리 정부의 후진적 행태에 대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난달 30일 오후 열린 쌀 전면개방 저지, WTO 통보 규탄 기자회견. ⓒ프레시안(서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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