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에는 상대방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는 자가 경쟁력을 갖습니다. 전환기는 오지 않은 미래가 지금을 지배하는 때입니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그저 지금에 충실하자는 격언은 별 쓸모가 없어집니다. 전환기에는 지금에 충실하기 위해서도 오지 않은 미래를 그려내야 합니다. '미래의 그림'이 바로 전환의 계곡을 넘어설 밑천입니다. 미래를 멀지 않아 곧 올, 혹은 와야만 할 시간으로 인식하고, 지금의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이리 저리 연결시켜야 합니다. '미래의 큰 그림'을 그리는 일에 그 누구보다도 앞장 서야 하는 것이 바로 정치인들과 정당입니다.
새누리당이 그림을 크게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보수혁신위원회'를 꾸리고, 당내 대권 주자 중 한 사람인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원희룡 제주지사, 홍준표 경남지사가 자문역을 수행하기로 했습니다. 이들 모두 차기 대권 혹은 당권 주자로 꼽히는 인물들입니다. 김무성 대표가 김 위원장에게 전권을 줄 수는 없다 했고, 김태호 의원은 '혁신위가 대선 놀이터냐, 지자체장까지 동원해야 하느냐'라며 불만을 터뜨렸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중량감 있는 혁신위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듯합니다. 게다가 개헌론에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혁신의제를 '큰 것'으로 골라잡은 것입니다.
당내 유력 정치인들을 내세워 큰 의제를 들고 나온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궁극적 목표는 당연히 '정권 재창출'입니다. 현재 새누리당은 지지율에서 큰 차를 보이며 새정치민주연합에 앞서고 있습니다. 제1야당으로 130석이나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10퍼센트(%)대로 떨어진 새정치민주연합과 달리, 새누리당은 40%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40%대로 떨어진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현재까지도 반등의 기미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지속적으로 증가, 긍정적 평가를 넘어선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정권 재창출을 노리는 새누리당의 유력 정치인들이 불안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국민의 눈과 귀를 붙잡는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기 시작할 때인 것입니다. 앞서 7.30 재보선을 앞두고서 혁신을 기치로 내걸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지금 새누리당에는 이명박·박근혜 두 전·현직 대통령같이 삶 그 자체가 전설인 정치인이 없습니다. 드라마적 요소와 신화를 보유한 정치인이 없는 것입니다. '이명박=샐러리맨의 성공신화', '박근혜=박정희 경제성장의 계승자 신화'라는 식으로 역사와 삶에 기반을 둬 긍정적 혹은 대세 이미지를 만들어낼 정치인이 없습니다. 새누리당은 이제 2016년 4월 총선 때까지, 즉 1년 반 정도 남은 시간 동안 그것에 준하는 인물을 만들어내야만 합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보수 혁신'입니다. 큰 그림을 그리는 실천의 주역들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것도 혼자서가 아니라 대권주자 군에 속한 이들이 함께 그리는 모양새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국민의 관심을 끌어낼 실천입니다. 이를 통해 새누리당을 집합적 에너지를 가진 당으로 우선 채색하고, 그들 중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인물을 대선 후보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보수 혁신을 위한 주자들의 협력과 경쟁에서 정권 재창출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헌은 전환기에 정치권이 그리는 큰 미래 그림의 핵심입니다. 개헌론이 등장한 것은(개헌 필요성을 일각에서 제기한 것은) 10여 년이 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개헌에 보다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개헌 자체가 전환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우리에게 지금과 다른 미래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크게 생각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개헌론은 오지 않은 미래의 구상을 정세적 진리 효과를 내는 지식으로 만들어 지금을 지배하고 주조하는 담론입니다. 한국의 민주화가 1980년대 내내 야당이 주도했던 '직선제 개헌'으로 귀결된 과정을 보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개헌에 대한 공감대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 대선과 총선 시기의 불일치에 따른 폐단, 통일 시대에 걸맞지 않는 영토 조항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점차 커져왔습니다. 현재 국회의원 중 국회개헌연구모임 회원이 139명에 달한다 합니다. 개헌론에 불을 지피고 있는 새누리당의 의석 수는 158석, 단독으로 개헌 발의를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개헌에 동의하면 굳이 국회에서 발의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지난 18대 국회를 거치면서 국회의장 주도로 개정안도 만들어져 있습니다. 결국은 개헌 논의를 국회가 주도할 것임을 감안할 때, 그 어느 때보다도 개헌의 실현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 도달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새누리당이,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했던 것처럼 경제민주주의 같은 진보·개혁 의제의 포괄 혹은 담론의 창출 수준에서 새로움을 충족시키며 지지를 확장시킬 수 없는 상황이기에 개헌은 큰 의제로서 더욱 현실성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다시 박근혜 식 집권전략을 반복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 그 핵심 취지가 무엇이든 간에 의제-담론을 넘어, 구체적인 정책과 제도의 수준에서 승부를 봐야 하는 단계에 다다랐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도 학계(특히 법학계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치학계 일각)를 중심으로 '87년 체제'의 한계를 이유로 개헌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습니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비롯한 권력구조 문제도 해결해야 하지만, 행복추구권을 실질화하기 위해 -자유권 중심의 현행 헌법에서 더 나아가- 사회권을 보다 강화하는 방향에서 개헌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어 왔습니다. 재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경제민주주주의(혹은 경제정의) 부분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어 왔습니다. 이에 재계는 경제정의보다, 기업의 자유권을 더 강화하는 방식으로 개헌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사회집단별로 그 방향과 내용에는 차이가 있고, 그들 간에 치열한 담론 경쟁을 가져오겠지만, 의제의 수준에서 개헌론은 그야말로 공적 의제로 설정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은 분명치는 않습니다. 새누리당이 개헌 의제를, 어떻게 정권 재창출이라는 목표와 보수혁신을 위한 대권주자들의 조기 경쟁이라는 전략과 내용적으로 결합시켜낼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새누리당은 필요할 때, 눈길을 끌 수 있는 사람들과 의제를 동원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꽤나 효과적으로 시의적절하게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중에 박 대통령은 유엔 연설을 통해 '통일'을 다시금 강조했습니다. 역시 큰 의제입니다. 그리고 실질적 과정에서 개헌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의제입니다. 산업화와 같은 큰 국가 프로젝트를 가동시키며, 그것의 실현을 위해 개헌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그 과정에서 정국을 주도하고 국민의 관심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발생시키는 정책들도 쏟아내겠지요. 다음 총선과 대선을 준비하면서 말입니다.
아마도 이런 행보는 제1야당 새정치민주연합 꼴새에 비견되면서, 경쟁력 우위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온갖 소란이란 소란은 다 펴놓고 결국 비상대책위원회를 계파 수장들의 모임으로 꾸리고선, 그것도 중도파를 배제했다는 비판을 듣는 모양새로 만들어 놓고선, 기껏 국회도서관 관장을 국민들의 의견을 들어 실력 있는 분으로 뽑겠다는 정도의 아이디어를 정치 혁신 방안으로 내세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전환기에 큰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제1야당, 집권여당보다도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제1야당에게 누가 관심을 갖겠느냐는 것입니다.
새정치민주연합도,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말한 바 있으나, 세월호 모멘텀의 관점에서 큰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보수혁신도, 개헌 논의도 그런 선상에서 자리매김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개헌 찬반을 넘어서서 개헌 논의의 방향과 내용을 다잡아야 합니다. 그럴 역량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래야 합니다. 그런 게 안되면 그래도 국민의 신뢰와 기대를 받고 있는 정치인들 중심으로 새로운 움직임을 시도해야 합니다. 제3당이 아니라, 새로운 제1야당의 건설이라는 움직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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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임경구 프레시안 기자 및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번갈아 담당하며, 경제는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국제는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이 맡고 있습니다. 생태와 세월호는 각각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과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원장이 격주로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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