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시점에서의 한반도 브리핑은 다음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을 위한 국가는 없고, 국민이 누리고 싶은 진정한 평화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세월호 침몰로 마치 전쟁이 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냉전은 이미 20여 년 전에 끝났지만 남북관계 악화와 주변강대국의 세력다툼으로 우리는 다시 위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사회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했다. 헌법도 명시하듯이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녕을 지켜내는 가장 기본적인 의무를 지녔다. 그런데 실패했다. 최선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이 비극적인 결과는 문제인데, 변명과 거짓, 그리고 무책임이 이어졌다. 정부는 수천 명의 잠수부를 파견하고 수백 척의 배를 띄워 대대적인 구조작업을 펼쳤다고 했지만 거짓이었다. 생존자 구출의 골든타임에서 구조작업은 거의 없었고, 결국 희생자 294명 중 단 한 명도 살려내지 못했다. 대통령을 포함해 국가를 담당하고 운영하는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가수 이승환은 세월호 참사 100일을 추모하는 음악회에서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참 불쌍한 국민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는, 지켜주지 않는 국가의 무관심과 무능함을 알아차려버려서 그렇습니다. 국가가 국민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하지 않으려는 것을 알게 되어 너무 슬픕니다.” 백번 공감한다.
배신감이 커지는 것은 국가의 최소한의 존재이유와 책임은 망각하지만, 정치(기)술은 나날이 교묘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국가권력을 책임진 정권은 자신들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승객을 버리고 도망간 선장과 유병언을 앞세우고, 무능한 야당으로 방패막이한다. 그리고 애타게 저항하는 유족의 자격요건을 들먹이고, 절차를 거론하며, 대통령에 대한 예의를 문제 삼으며 본말을 전도하는 전형적인 수법으로 빠져나간다. 유족들에게 어떤 특권이나 보상도 해준 적도 없으면서 이미 특권행사하고 있는 것처럼 매도함으로써 국민들에게 피로감을 심어 서로 이간질시킨다.
언제부터 국민이 정부나 대통령을 비판하는데 자격이 필요했던가? “순수 유족” 운운하며 이념의 굴레까지 씌우는 색깔론까지 동원했다. 국가의 무능과 부패로 인한 참사의 재발방지를 위해 요구하는 특별법을 떼쓰기로,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소재를 밝히려는 노력을 위헌과 월권행위로 격하시켜버렸다. 사악하기까지 한 정치적 조작이다.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국가는 무능과 부패로 되돌아갈 것이고,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의 삶과 죽음은 다시 전적으로 ‘재수(luck)’탓이 된다. 그것도 '나쁜 재수(bad luck)'다.
국가의 태생적 기원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안보의 개념은 국경선을 지키며 외부의 적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을 더 많이 강조해왔는데, 현 정권이 그렇다. 국가안보는 보수기득권 세력이 가진 전가의 보도였으며, 국민들도 관성처럼 신화처럼 그러려니 해왔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럴까? 큰소리치니까 국가안보는 잘한다고 믿어야 하는가?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나라 공권력이 하나같이 권력의 시녀가 되어 시민불복종에만 위력을 발휘하는 현실이 국방영역이라고 예외적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방의 책임을 맡고 있는 군과 국정원은 안보위기 조장에만 위력을 발휘할 뿐 거의 모든 영역에서 함량미달을 노정한다. 게다가 선거개입이나 종북몰이에 나서기도 했다. 군내부의 폭력과 인권유린을 대하는 군 지휘부의 태도는 세월호를 대하는 정부여당과 너무도 닮아있다. 은폐와 책임회피로 일관함으로써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는 점점 멀어진다.
북한에 대한 강경대응과 군비증강, 한미동맹 강화를 거론하며 국가안보는 문제없다고 강변할지 모르겠으나 이 역시 알맹이보다는 이미지에 방점이 찍혀있는 안보포퓰리즘적 성격이 강하다. 대북 단절과 봉쇄는 핵위협을 감소시키기커녕 북한의 핵무장능력 증대에 대한 방치 또는 무방비와 다름없다. 킬체인과 KAMD 실효성에 대해선 의문이 깊어지고, 전투기사업을 포함한 군현대화는 방향타를 잃은 지 오래다. 아무리 전시작전권 환수 연기를 위한 논리가 궁색했다고 하더라도 군 수뇌부 스스로 북한과의 단독대결에서 승리를 확신할 수 없다는 말까지 하는 상황이다. 현 정부가 국가안보를 잘한다는 평가의 근거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이렇게 따져보니 우리 국가의 실체는 그야말로 누더기에 가깝다. 사실 국민을 최우선으로 하지 않는 권력자들이 이끄는 국가가 처음부터 안으로나 밖으로나 온전할 리가 만무했다. 그냥 정부는 기만하고 국민은 기만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현 정부의 안보 및 평화관은 국내정치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고, 적대적 공생을 기반으로 한 냉전적 반공주의에서 한발짝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세계 각국이 인간안보를 추구하는 것과 비교하면 이는 너무도 시대착오적이다.
유엔개발계획의 1994년 <인간개발보고서>에서 처음 공식 거론된 인간안보는 국경선과 영토를 지키는 전통적 국가안보의 개념을 초월해서 개인의 안녕과 행복을 위한 확장된 안보 및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물론 남북이 여전히 분단 상태에 적대적인 군사대치를 하고 있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국가가 있어야 국민이 있다는 식으로 국가존립을 최상위에 두는 국가주의적 사고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우선하는 인간안보와 적극적 평화를 추구하는 인식전환이 없다면 세월호 참사는 다시 반복될 것이며, 군비확장과 반공주의의 가면아래 갇혀버린 진짜 평화는 영영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안보의 개념 가운데 전쟁 이외의 환경, 질병, 빈곤 등의 다양하고 새로운 위협을 환기시키는 것도 군사력 위주의 단선적 사고를 극복하는데 중요하지만, 정말 주목해야할 부분은 안보의 궁극적인 대상을 국가가 아니라 인간, 곧 국민으로 본다는 점이다. <인간개발보고서>는 평화는 무기를 통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며, 사람의 존엄성을 보장해야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단지 연명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될 수 없듯이, 한편으로는 무기를 쌓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의 공포를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평화가 아니다. ‘핵을 머리에 이고 살 수 없다’는 대통령의 문제제기야말로 군비증강으로만 해결될 수 없는 일이다. 머리에 이고 있는 핵무기는 화를 내고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것만으로 가벼워질 수는 없다. 그러는 동안 점점 더 무거워질 뿐이다. 우리가 원하는 평화는 전쟁이 잠시 중단된 휴전상태가 아니라 전쟁의 가능성이 소멸되는 평화이다. 남북이 관계를 회복하고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달성함으로써 전쟁의 공포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수년전 <남쪽으로 튀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국민을 괴롭히는 국가라면 차라리 거부하겠다는 주제를 다루었다. 영화 속의 주인공은 국가가 국민을 지나치게 간섭하고 부당한 의무를 요구한다고 불만을 터뜨렸으며, 결국 대한민국의 국민이기를 포기해버리고 가족들을 데리고 남쪽의 외딴 섬으로 간다. 영화의 주인공이 국가를 버린 이유는 보지도 않는 TV 수신료를 징수하고, 원하지도 않은 국민연금을 내라고 강요하는 것 정도이다. 주인공은 떠나면서 이렇게 소리친다. “국가가 내게 해준 것이 뭐니? 나 오늘부터 국민 안 해!”
이 정도로 국가를 포기한다면, 지금처럼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죽음으로 내모는 국가라면 골백번도 더 버려야 마땅할 것이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국가가 어디 그리 버리기 쉽던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진짜 주인은 국민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당위에라도 다시 희망을 담아내야 할 것 같다. 그래서라도 없어진 국가를 찾아내고, 사라진 평화를 불러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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