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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세대, 돈·권력·일자리부터 내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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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기성세대, 돈·권력·일자리부터 내놔라"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한국 전쟁 직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학교에 들어갔을 때 검정 고무신 대신 운동화에 코르덴 바지를 입은 몇 안 되는 아이 중 한 명이었다. 철학, 종교, 사상을 탐닉하던 조숙한 소년이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선봉이 되기까지, 그의 삶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스스로의 사유에서 탈출하는 것. 오늘의 '주대환'을 만든 것은 트라우마가 돼버린 생각의 감옥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40년 넘게 사회민주주의자로의 사는데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사유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꿈꾸고 시도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시절, 운동의 논리를 구성해 제공하는 이론가 역할을 했다. 급진적인 학문과 사상을 섭렵해 번역하고 선전하며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그로 인한 감옥살이는 훈장이 아니라, 민주화를 갈망하는 동료, 동지들의 사랑을 경험했던 주옥같은 시간이었다. 노동운동의 최종 종착지인 정치 세력화를 위해서도 일했다.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고 '민주노동당 사회민주주의자 선언'을 기초했기에 "2004년 민주노동당과 같은 한국에서의 노동정당의 실현이라는 꿈은 2008년에 포기했다. 평생 한국에서 진보정당을 만들어보겠다고 노력했는데 그것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는 그의 말이 더욱 뼈아프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희망을 갖고 계속 전진하고 있다.

현재 그는 '복지 한국 미래를 여는 사회민주주의 연대'의 공동대표로,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아닌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가 지금 한국이 나아갈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그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기대하는 바는 무엇일까.

"노동운동이든 정치의 영역이든 앞으로 청년들이 어떻게 할 지 주시하고 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지금 2030세대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낼 것이다. 현재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가 더 다수이고 그들의 생활은 지극히 불안정하다. 이들을 대변하는 새로운 세대의 노동운동이 등장해야 한다. 이것은 다음 세대의 몫이다."

그는 과거의 기억에 갇혀 사는 기성세대가 문제이며, 우리가 먼저 돈과 권력과 일자리를 내놔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요즘 젊은 사람들과 다양하고 자유로운 생각을 이야기하는 게 더 좋다고도 한다. 그와 그의 동지들이 꿈꾸는 사회민주주의의 길을 언제쯤 실현될까.

▲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프레시안(최형락)


- 2007년에 발표된 '민주노동당 사회민주주의자 선언'을 기초했다. 선언문에서 '사회민주주의자'는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 현실주의자'라고 이야기했는데, 무슨 뜻인가.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온갖 오해에 시달리고 있다. 선언문은 그런 오해를 풀기 위한 노력의 하나다. 민주노동당 내 정파였던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자율과 연대' 회원들이 장시간 토론하고 표결하면서 '민주노동당 사회민주주의자 선언' 최종안을 채택했다.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경험이 녹아있는 문서라고 할 수 있다. 누가 혼자서 탁상에 앉아서 쓴 문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문건이다.

첫 문장에서 "우리는 모든 종류의 독재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어떤 선험적 이념을 영원불변의 진리로 믿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대중을 가르치고 계몽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반대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국민을 가르치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민주주의자'란 국민이 민주정체의 왕이니, 국민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다. 이를 가장 먼저 이야기한 이유는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 자본주의에 대해서 "자본주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라면서 "지난 60년의 역사는 (중략) 토지개혁의 심대(深大)한 효과에 힘입고 노동자 농민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놀랄만한 자본주의 경제 발전과 그를 물질적 기초로 하는 6월 시민혁명과 민주화를 실현했다"고 주장했다. 후자의 관점으로 보면 자본주의는 사라져야 할 것이 아니라 효과적으로 관리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의 자본주의가 과연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굉장히 철학적인 문제다. 무엇보다 지금 자본주의는 자원을 물 쓰듯이 쓰고 있어서 장기적으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 이다.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지금 당장 사라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관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에는 관리가 되어야 한다.
- '우리는 대한민국이 새로운 복지국가로서, (중략) 대한민국만의 사회적 합의와 사회투자 모형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중략) 지식인들과의 소통을 확대하고 노동자 계급의식의 성장에 힘쓰며…'라고 했다. '지식인'에 대한 거리감이 살짝 느껴진다. 새삼스럽게 지식인과의 협력 관계를 강조한 이유는?

지식인 중에는 국민들이 사회민주주의나 복지국가가 좋은 줄을 몰라서 우리나라가 그 길로 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국민을 가르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사람들 마음에 깊이 파고들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과 문화, 사람들의 독특한 삶의 방식과 정서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 같은 활동가들이 국민을 가르치려는 지식인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거리를 두는 이유다.

- 1954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밥상머리에서 친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고 가르치셨다"라고 했는데,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친구까지 배신한 아픈 현실을 이야기한 것 아닐까. 유년기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전쟁 초기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렸다 다시 압록강으로 올라가기를 반복하며 격렬하게 진행됐다. 전선이 지금 휴전선 근처에 머물고 휴전협상이 시작되면서 오히려 사상자가 많이 났다. 이에 비해 남쪽은 전쟁이 일찍 끝난 편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쟁 중에 결혼했다. 내가 태어나던 해 우리 동네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는데, 학교에 들어갈 때는 교실에 책걸상이 부족할 정도였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를 보통 55~63년생으로 보는데 내가 54년에 태어났으니, 남쪽 지방은 일찍 베이비붐이 시작됐던 것이다.

어릴 적 동네에서 우리 집을 동네에서 부자라고 했다. 당시 내 또래 친구들은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입학식 때 보니 나하고 두어 사람만 코르덴 바지에 운동화를 신었더라(웃음). 그때는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는 그래도 빈부격차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최소한 밥을 굶는 친구는 없었다. 그것이 바로 농지개혁의 효과였는데, 당시 국민의 70퍼센트(%)가 농민이었는데 땅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1950년대 대한민국은 자영농의 나라였다. 그래서 전 국민이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나라였다. 동시대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평등지수가 굉장히 높았다. 살림살이는 어렵지만, 결혼해 자녀도 기르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있다. 가난한 부모를 둔 젊은 사람들이 결혼도, 아이 낳기도 포기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사춘기 때부터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시절이 궁금하다. 특히 유신 직후인 1973년 서울대 종교학과에 입학했는데, 이유가 있나.

사춘기는 고통과 행복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그때 독서하고 사색한 그 밑천이 평생을 가는 것 같다. 그때의 독서는 백지에 밑그림을 그리는 거다. 지금은 책을 읽어도 금방 잊어버리기도 하고 정신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데, 사춘기의 독서는 정신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논어를 읽는데 손에서 놓지를 못하겠더라. 성경도 재밌어서 몇 번을 읽었다. 그때는 조금 건방진 생각이 들어 이런 고전을 언급하지 않는 선생님들이 우습기까지 했다. 입시공부에 매달려 있는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유치한 자부심이 나름의 힘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사춘기에 인생의 가치와 목적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에 잠겼으니, 종교는 바로 그런 의문에 답을 주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부처님이나 예수에 대해, 불교나 기독교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말하자면 '진리'를 탐구하고 싶었던 거지. 하지만 종교학은 종교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지 종교 그 자체는 아니니, 종교학이 어떤 학문인지도 모르고 대학에 들어갔던 셈이다(웃음).

- 입학 한 달 만에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1974년 민청학련, 1978년 광화문 시위, 1979년 부마민중항쟁으로 여러 차례 구속 수감되기도 했는데 20대 모든 시간을 학생운동과 수감 생활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 대학에 들어가 한 달 만에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선배들을 따라 들어간 공부모임에서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기 시작하면서 점점 모임에 빠져들었다. 처음엔 역사철학이니 헤겔이니 등을 공부하더니, 선배들이 슬슬 데모 이야기를 꺼내는 것 아닌가. 그렇게 나도 모르게 참여하게 된 것인데, 평생 이렇게 살 줄은 몰랐다(웃음). 자꾸 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직업이 되고 운동가가 된 것이다.

민주화운동하면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김석준 부산시 교육감 등도 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사람들이다. 70년대 함께 운동하던 친구 대부분은 학자가 될 만한 사람들이나, 목사나 승려가 될 만한 내성적인 사람들이었다. 결국 나중에 공부를 계속해 교수가 된 사람이 많다. 권력 지향적인 인물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권위주의 정부의 탄압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감옥에 가서도 공부하고 도 닦는 사람들도 있었다.

- 구속돼 수감됐을 때 억울하지 않았나?

뭐, 재밌었다(웃음). 1972년부터 87년까지 민주 헌정이 중단된 시기가 내 나이 19살부터 34살까지였다. 그러니 인생의 가장 좋은 시기를 민주화운동으로 보낸 것이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도 은근히 지지를 받았다. 착실하게 직장 생활하던 선후배 친구들도 많은 도움을 줬다.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힘이 됐다. 도망 다니면 숨겨주기도 했다. 그래서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직 건강하게 살아남았으니, 운이 좋았던 편이다. 운이 없던 분들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통당하고 다치고, 또 후유증으로 죽은 사람도 있다. 그들에게 많이 미안하다. 그러나 우리 아들딸, 지금 청년세대에게 '우리가 민주화운동 할 때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고…'라며 과장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고통만 당했다면, 어떻게 민주화운동을 할 수 있었겠나. 가혹 행위도 당하고 고문도 받았지만, 조사가 끝나면 나름 대접도 받았다. 교도소에서도 일반 죄수들하고는 대접이 달랐다.

- 1981년부터 1985년 말까지 마산, 창원에서 무크지 <마산문화>를 만들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이라는 지하조직에 가담해 '김철순'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다. 당시 세상을 향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20대와 30대 초반은 '어떻게 하면 한국을 민주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밤낮으로 고민하고 탐색하던 시기였다. 세상에 나온 급진적인 혁명 사상은 모두 공부했다. 해방신학, 마르크스주의 등 미국·소련·남미 등에서 나온 온갖 혁명 이론을 공부하면서 이것들이 한국에 적용 가능한지 연구하고 번역하고 선전했다. 당시에는 금서가 많았는데, 그런 금서를 영문판이나 일문판으로 번역해 뿌리고 다녔다.

평생 문필 활동을 해온 셈인데, 젊은 시절 주로 지하 출판물에 가명으로 글을 썼다. 혁명을 선동하며,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외쳤다. '자유와 평등이 실현된 나라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런 활동이 사회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는 모든 사람의 다양한 활동이 어우러져야 유지되고 발전한다. 나 역시 하나의 역할을 한 것이니, 후회하지는 않는다.

- 공부한 이론이 한국적 상황에 잘 받아들이지 않을 때 허무하거나 답답하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쓸데없는 공부를 참 많이 한 것 같다. 특히 우리는 1980년 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한 '전두환'을 악마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 악마를 이기기 위해서는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요즘으로 말하면 '친북' 경향이 그때 생겨났다. 북한과 손을 잡고 전두환을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주사파는 그렇게 등장했고, 한동안 민주화운동을 지배했다. 나는 처음부터 반대했다. 그러다 보니, 지난 30년 동안 민주화운동권 내부에서 비주류 취급을 받았다.

우리가 노동운동에 참여한 것은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와 함께 생활하면서 노동자가 혁명의식을 갖도록 교육하고 조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황당한 생각들이다.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르는 대학생들이 공장에 갔다.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이었다. 먹물 같기도 하고 재수생 같기도 한 친구들이 들어와 일도 제대로 못하니, 얼마나 우습게 보였겠는가(웃음).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건 사실 힘들다. 오히려 우리가 노동자에게 배웠다. 그래도 재밌었다(웃음).

- 노동운동이 당면한 문제와 사회 현실을 글로, 나아가 이론으로 정립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시절, 논리를 구성해 제공하는 게 내 일이었다. 말하자면, 투쟁 일선 행동가가 아니라 이론가 역할을 맡았다. 황당한 주장과 이론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유치한 것도 많고 비현실적인 것도 많다. 그때 썼던 글을 보면 부끄러운 점이 많다.

ⓒ프레시안(최형락)

- 핵심 주장 중 하나가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정당으로의 발전이다. 그리고 이것을 현실화시키는 노력을 계속 해왔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 했다.

우리나라에서 영국의 노동당 같은 것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이걸 2008년에 포기했다. 다음 세대에는 모르겠지만, 내 세대에서 '순수 노동당'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다. 100년 전 영국에서는 노동당이 자유당을 밀치고 제2당이 되면서 보수당과 자유당의 양당체제를 무너뜨리고 노동당-보수당의 양당체제를 성립시켰다. 이를 우리나라에서 재현해 보고 싶었다. 2004년에 기회가 잠깐 왔지만, 그 역사적 기회를 살리지 못 했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

- 2008년 민주노동당을 탈당했다. 한국에서 의미 있는 노동당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때 마음이 어땠나.

평생 한국에서 진보정당을 만들어보겠다고 노력했는데, 그것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맨발로 등산하는 고행을 하면서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후부터 미국 정치사를 공부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빈부격차가 심해지자 미국 남부 지역당이자 현 공화당 보다 더 보수적이었던 민주당이 '정책정당, 진보정당, 전국정당'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공부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도 그런 변화가 일어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민주당을 영국식으로 말하면 '노동+자유당'이라고 생각했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를 현실화 하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얘기했다.

- 사회민주주의는 우파에게는 위험한 좌파로 공격당하고, 좌파에서는 개량주의로 비판받았다. 본인 역시 개량주의자로 비판받으며, 좌파 내에서 고립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보수 언론을 피하지 않는 채 진보 진영에 대한 과감한 비판으로 '변절자'라는 말까지 들었는데, 서운하지 않았는가.

나는 항상 좌파에게 가장 중요한 문서인 1848년의 '공산당 선언'과 1951년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1951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에는 1848년부터 1951년 사이 세계 사회주의운동 경험이 녹아 있다. 우리가 사회민주주의를 받아들였다는 건, 좌파가 겨우 1951년을 넘어선 것이라고 본다. 난 혁명주의에서 전향한 개량주의자다. 하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 한국 진보 정당의 등장이 불가능한 핵심 이유는 무엇인가.

소선거구제가 가장 큰 장애다. 지금의 선거제도로는 제3정당, 진보정당이 등장할 수가 없다. 유명한 '뒤베르제의 법칙(Duverger's Law)'이고,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진보정당을 하거나 정당 체제를 바꾸고 싶은 사람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선거제도는 전통이고,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사상 선거제도가 바뀌는 것은 오랜 시민운동의 결실이다. 그러나 오랜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영국과 프랑스는 여전히 소선거구제다. 영국에서도 소선거구제를 바꾸려는 시민운동과 정치권 일부(자유민주당)의 노력이 있었지만, 최근에야 프랑스 식 결선투표제가 도입된 것으로 알고 있다.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를 비롯한 여러분이 '합의제 민주주의'와 '비례대표제'를 주장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찬성한다. 하지만 두어 가지 충고하고 싶다.

먼저 최근 고인이 된 박권상 선생을 기억하라. 이 분이 한국 비례대표제 운동의 선구자이다. 일찍부터 광역시도를 하나의 선거구로 하는 대선거구제를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1997년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이를 받아들여 정치권에 선거제도 개혁을 건의했다. 우리나라의 지적, 운동적 전통을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프랑스 식 결선투표제가 더 현실성이 있는지 의문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맨땅에 새 집을 짓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있는 집을 리모델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국의 경우처럼 소선거구제라는 집을 리모델링하는 것이 차라리 현실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대화문화아카데미의 개헌안에서 양원제를 제안하고, 하원은 소선거구제로 그대로 가고, 새로 만드는 상원은 비례대표제로 가자는 박명림 연세대대학원 교수의 제안도 검토할 가치가 있다.

- 최근 알바연대, 알바노조도 생겼다. 청년들의 노동문제와 관련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청년유니온도 있다. 이들이 노동정당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나.

노동운동이든 정치의 영역이든 앞으로 청년들이 어떻게 할지 주시하고 있다. '안철수 현상' 또한 앞으로 나타날 새로운 움직임의 전조(前兆)라고 본다. 지금은 '안철수 현상'이 주저앉았지만, 앞으로 이런 현상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지금 2030세대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낼 것이다. 지금 기성세대는 이런 2030세대를 기백이 없고 눈치만 빠르고 자신들이 젊었을 때와 다르다고 보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오히려 기성세대가 문제다. 기성세대가 꽉 붙잡고 있는 돈과 권력과 일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 지금의 2030세대는 어릴 적부터 노동조합, 노동자 의식, 노동의 권리 등에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세대이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과거 노동운동이 앞으로의 노동운동까지 감당할 수는 없다. 지금 2030세대의 노동운동은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에서 나와야 한다. 현재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노동운동은 대기업과 공기업, 즉 노동자 중에서도 상층의 안정적인 노동자를 주로 대변하고 있다. 그런데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가 더 다수이며 그들의 생활은 지극히 불안정하다. 이들을 대변하는 새로운 세대의 노동운동이 등장해야 한다. 이것은 다음 세대의 몫이다.

지금 2030세대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젊은 세대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살아온 세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예들 들면, 지금 기성세대는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뉜 채 한쪽은 다른 한쪽을 종북 또는 친일파라고 비난한다. 종북은 한국전쟁이라는 트라우마에서 나온 것이고, 친일은 식민지시대의 트라우마에서 나왔다. 그래서 친일이라고 하면 민족의 반역자고, 종북이라고 하면 빨갱이가 되는 것이다. 기성세대는 상대를 그렇게 규정하고 욕한다. 이런 구도가 지금까지 진보-보수의 구도를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진짜 진보'와 '진짜 보수'가 나올 때가 됐다. 선진국에서 볼 수 있는 좌파와 우파 말이다.

- 노동운동(정치) 세력가운데 주체사상 즉, NL 계열을 가리켜 "'친북'이라기보다는 '김일성주의자'이고, 이들을 정치라는 시장에 놔두면 국민들이 선택할 것이기 때문에 사상의 자유를 줘야 한다, 제거가 아니라 '치료의 대상'이다"라고 한 적도 있다.
'친북'은 지나간 역사의 유물이다. 지금 청년들이 '이석기 사건'을 보면서 '저 사람들이 왜 저럴까?' 하는데, 그들도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과 전두환 시대에서 청년기를 보낸 불쌍한 사람들이다. 또 '빨갱이는 물러가라'고 외치는데 반공애국 할아버지들도 전쟁을 겪은 불쌍한 분들이다. 지금 청년들이 이것을 이해하고,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기 바란다.

ⓒ프레시안(최형락)

- 젊은 세대 중에는 기성세대가 어떤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새로운 흐름을 만들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청년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은가.

청년들이 기성세대에게 기대할 건 없을 것 같다. 선진국 사람이 후진국 사람들에게 뭘 기대할 수 있겠나. 오히려 자기들 입장과 생각에 충실한 것이 좋다. 우리나라가 너무 빨리 발전하다 보니, 후진국 사람과 선진국 사람이 함께 살고 있는 나라가 됐다. 그래서 대화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청년들이 좀 더 힘을 냈으면 좋겠다. 기성세대에 기대지 말고 스스로 느끼는 대로 주장하고, 용기를 가지고 불의를 고발하고, 그렇게 살면 좋겠다.

- 청년 '주대환'은 민주화운동을 했다. 지금 청년들은 어떤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우파 성향을 가진 청년들은 진짜 통일운동을 하고, 좌파 성향을 가진 청년들은 진짜 노동운동을 해야 할 것 같다. 특히 노동운동이야말로, 사회민주주의운동의 핵심이다. 이를 중심으로 빈부격차 해소와 평등 가치 실현을 위한 운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나타날 다양한 실천은 아마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이 아닐까.

- '주대환'에게 자유란?

나에게 자유란 '생각의 자유'다. 권력에 의해 탄압받을 수 있지만, 자신을 동굴에 가둘 수도 있다. 이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유'인 것이다. 젊은 시절, 자유를 위해 투쟁한 결과 민주화를 이룬 나라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하지만 친구 중에는 지금도 당시의 트라우마에 갇혀 사는 이들이 있다. 사상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 '생각의 감옥'에서 탈출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서 어떤 세대가 어떤 운동을 통해 무언가를 이룬 나라에서 살 수 있었나. 흔치 않다. 민주화운동을 해서 민주화된 나라에서 사는 건 행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우 행복한 세대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나의 자유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 손어진 연구원이 했으며, 정리는 손어진 선임연구원과 조경일 연구원이 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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