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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슬람국가(IS)를 키웠나?

[분석] 시리아 내전이 이라크 내전 불러왔다

2011년 5월 1일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이 사살되고 그해 12월 이라크 주둔 미군 전투병력이 철수하면서 부시가 시작한 테러와의 전쟁은 막바지 단계에 접어든 듯 보였다. 그즈음 오바마 정부가 ‘아시아로의 회귀’를 선언한 것은 이러한 상황인식의 반영이었다. 중동지역에 대한 군사개입을 줄이고 아시아정책에 역량을 쏟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6월 10일 수니파 이슬람 무장단체 이라크시리아이슬람국가(ISIS)가 이라크 제2 도시 모술을 사실상 무혈 점령하면서 이러한 상황인식은 완전한 오판임이 드러났다. 6월 30일 ISIS는 ‘이슬람국가(IS)' 건국을 선포하고 수도 바그다드를 향해 거침없는 기세로 밀고 내려왔다. 결국 미국은 8월 8일 이라크 내 IS에 대한 공습에 나서면서 군사개입을 재개했고 9월 10일에는 시리아에 대해서도 공습을 가하겠다고 선언했다. 오바마판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또한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이 완전히 실패했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전쟁의 규모는 훨씬 커졌고 그 해결의 전망은 더욱 더 멀어졌다. 앞으로 수십년 중동지역의 전쟁이 계속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우선 알카에다를 대신해 이슬람 무장세력의 대표 주자로 떠오른 이슬람국가는 알카에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슬람국가는 이라크 국토의 4분의 1 이상(서부와 북부)을 비롯해 시리아 동부와 북부 등 영국에 맞먹는 지역을 장악하고 있다. 시리아 동부 지역의 유전을 장악해 원유를 터키 등에 밀수출하고 주민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며 이슬람식 교육을 강제하는 등 이미 국가 행세를 하고 있다. 2003년 미군 점령 이후 축출된 후세인 시절의 이라크 정규군들이 대거 합세했다. 2006년 이후 말리키 정부의 시아파 독재에 진절머리를 낸 수니파 주민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지난 6월 10일 모술 함락이 결정적 계기였다. 당시 6000명에 불과했던 이슬람국가의 병력 규모는 이후 불과 3개월 사이에 3만 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 미국은 시아파와 수니파, 쿠르드족이 공존하는 통일국가 건설을 추진해 왔다. 그 꿈은 6월 10일을 계기로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세 정파는 무장투쟁 외에는 달리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처지에 몰리게 됐다. 공존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끝을 알 수 없는 내전이 이라크에서, 그리고 시리아에서 계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재 이라크에서는 무기 구입 열풍이 불고 있다. AK-47 소총은 웃돈을 줘도 살 수 없는 지경이며 탄알 값은 3배(2달러)로 뛰었다고 한다. 권총도 이전에 비해 3배로 값이 뛰었다. 바그다드 시내의 교통경찰이 경기관총을 휴대하고 다니는 등 거의 모두가 총을 소지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최고 종교지도자 알리 시스타니의 호소에 따라 시아파 민병대에 입대하는 젊은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2011년까지만 해도 쇠퇴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던 이슬람 무장세력이 이처럼 무시무시한 힘을 과시하며 어느날 갑자기 세계무대에 등장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지난 3년여간 이라크와 시리아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6월 모술 함락 직후 대부분의 서방 정치지도자와 언론들은 말리키 정부의 독단과 전횡을 위기의 원인으로 꼽았다. 소수파인 수니파를 배제한 말리키 정부의 일방적 독단이 ISIS의 급성장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 <인디펜던트>의 패트릭 콕번 기자는 이보다 더 큰 원인으로 시리아 내전을 꼽는다. 그리고 말리키 정부의 극단적 부패를 지적한다. 하나 하나 짚어보기로 하자.

ISIS는 당초 지난 2006년 알카에다 이라크지부(AQI)로 수니파 거점 지역인 팔루자에서 걸성됐다. 창시자는 요르단 출신의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였다. 당시는 반미 무장투쟁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이라크 내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내전도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슬람의 양대 종파이기는 하지만 세계적으로는 수니파가 압도적 다수파다(90%). 전 세계 57개 이슬람 국가 중 시아파가 다수파인 국가는 이란, 이라크 등 4개국에 불과하다. 이라크의 경우 인구로는 시아파가 다수(60%)지만 건국 이래 정권은 소수파인 수니파(20%)가 독점해 왔다. 그러다가 미국 침공 이후 선거를 치르면서 정권은 시아파에게 넘어갔다. 아랍 국가에서 시아파 정권이 탄생한 것은 1171년 이후 830년만의 일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역설적으로 미국의 최대 숙적인 이란(이란은 아랍 국가가 아님)에게 최대의 전략적 이득을 안겨주었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이라크 수니파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침공으로 주권을 빼앗긴 데다 그동안 자신들이 독점해왔던 정권마저 빼앗기는 이중의 수모를 당한 것이다. 그래서 이라크 수니파의 반미 저항은 더욱 거셀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등 다른 수니파 국가들의 이슬람 전사들이 가세해 이라크 내전을 격화시켰다.

그런데 2007년 이라크 수니파의 반미 항쟁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과 협력하기로 태도를 바꾼 것이다. 시아파 주도의 정부에 참여해 소수파로서 일정한 권리를 인정받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수니파의 각성’이다. 이라크 수니파는 ‘사와(각성)’ 등 민병대를 조직해 AQI 등 외국 출신 이슬람 무장세력과 싸웠다. 이라크의 내전 상황이 안정된 것은 바로 이러한 수니파의 태도 변화 때문이었다. 미국은 2007년 부시 행정부가 단행한 이른바 “병력 증강(Surge)' 덕분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는 수니파의 태도 변화가 결정적이었다. 2010년이 되면 AQI는 거의 유명무실한 존재가 된다. 바로 이즈음 ISIS의 현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가 AQI의 지휘자로 등극한다.

바그다디는 이라크인이다. 1971년 바그다드 북쪽 수니파 지역인 사마라에서 출생했으며 본명은 아와드 이브라힘 알리 알바드리 알사마라이다. 바그다드의 이슬람대학에서 이슬람학(시, 역사, 족보학 등)을 공부했고 후세인 시절 바그다드 동북쪽 디얄라 지방에서 이슬람 설교사로 활동하며 반정부 활동을 벌였다. 2003년 미군 침공 이후에는 자신만의 무장세력을 결성해 반미 항쟁을 벌였다. 2005년 미군에 잡혀 2009년까지 이라크 남부 보카 캠프에서 감옥생활을 했다. 2010년 AQI의 지휘권을 쥔 바그다디는 철저한 비밀 유지와 함께 후세인 시절 이라크 군과 정보기관 소속이었다가 미군에 의해 축출된 수니파 장교들을 영입해 세를 불려갔다. 그러나 AQI가 성장한 결정적 계기는 시리아 내전이었다. 2011년 여름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자 바그다디는 경험 많은 전사들과 자금을 시리아에 보내 알카에다 시리아 지부(자바트 알 누스라 JAN)를 결성했다. (이후 조직 주도권을 놓고 내분이 일어나 JAN은 파키스탄에 본부를 둔 알카에다 지휘 아래 들어가고 AQI는 이라크시리아이슬람국가(ISIS)로 조직의 이름을 바꾼다. 또 2014년 1월에는 JAN 등이 ISIS에 대해 공격을 가하면서 시리아 내 반군세력 간에 무장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시리아 정부군은 ISIS를 제외한 이른바 온건파 무장세력만을 공격함으로로써 반군간의 분열이 계속되도록 하고 있다.)

시리아 내전, ISIS 급성장의 결정적 계기

시리아 내전은 두 가지 측면에서 ISIS의 급성장을 도왔다. 우선 아사드 정권 제거를 노리는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수니파 국가의 거의 무제한적인 무기와 군자금 지원을 받았다. 아사드 정권은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나 종교적으로는 시아파의 분파인 알라위파에 속하며 이란의 동맹국이다. 그런데 시리아에서는 수니파가 다수파(60%)다. 따라서 시아파를 이단시하는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아사드 정권 제거를 위해 시리아 반군 세력을 적극 지원한 것이다. 물론 ISIS는 사우디 등이 지원하는 반군 세력은 아니었지만(시리아에는 1300개의 반군 단체가 있다고 한다) 군사적으로 우세한 ISIS는 사우디를 비롯한 서방측이 제공한 무기 등을 언제든 빼앗을 수 있었다. 이라크 정규군 출신들이 포진한 ISIS는 “바위 틈 사이로 뱀처럼 이동한다”는, 무자비하지만 효과적인 군사전략으로 다른 반군 단체들을 압도하는 최강의 세력으로 군림했다. 시리아에 인접한 한 중동 국가 정보관리는 “ISIS는 어떤 성향의 반군 단체로든 서방의 첨단무기가 공급되는 것을 흐뭇해한다. 무력으로 위협하든 돈을 주든 언제든지 이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13년 3월 ISIS는 시리아 동북부 라카주의 주도 라카를 점령했다. 라카는 시리아의 14개 주 중 유일하게 반군에게 점령된 도시다. ISIS는 라카 점령 이후 이 지역의 유전에서 나는 원유를 터키 등에 밀수출하면서 막대한 군자금을 챙겼다. 이미 이 시점에서 ISIS는 시리아 반군 세력 중 최강의 부대였다.

2004년 1월 3일에는 팔루자를 비롯해 이라크 서부 안바르 주 대부분을 점령했다. 수니파 거주지역이자 2006년까지 반미 항쟁, 수니 대 시아파간의 내전이 가장 치열했던 지역이다. 이라크 정부는 5개 사단을 동원해 안바르 지역의 탈환에 나섰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사상자 5000명, 탈영병은 무려 1만2000명이나 됐다. 영국 <인디펜던트> 패트릭 콕번 기자가 지난 4월 이라크 전직 장관으로부터 들은 얘기에 따르면 당시 이라크 병사들은 AK-47 소총용 탄약 네 클립만으로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데다 군 장비를 움직일 석유마저 부족했다. 또한 전투에 투입된 실제 병력이 장부상 숫자의 4분의 1에 불과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병사들의 식비를 떼먹고 전투용 석유를 빼돌리는 등 이라크 군에 만연한 총체적 부패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바르 전투의 실상은 서방 언론에 일체 보도되지 않았다. 6월 10일의 모술 함락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서방 세계에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6월 10일 인구 100만의 이라크 제2 도시 모술이 함락됐다. 이라크 군은 변변한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한 채 모술을 ISIS에 내주었다. 군사령관이 가장 먼저 사복으로 갈아입고 안전한 쿠르드지역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모술은 후세인 정권 당시 이라크군 장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후세인은 관행적으로 모술 출신을 국방장관에 임명해 왔다. 모술 함락 당시 현지 수니파 주민들도 ISIS에 협력했다고 한다. 현지 주민에 따르면 “모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중앙정부의 권력이 미치지 않았던 곳”이었다고 한다. 6월 이전에도 ISIS는 야채 행상에서 휴대폰 가게, 건설회사에 이르기까지 모술 주민 모두에게 세금을 걷어왔고 이 세금 수입이 월 800만달러(80억 원)나 된다. 모술 이후에 점령된 (후세인의 고향) 티크리트에서도 세금을 걷고 있는데, 주민들은 세금 납부 기한이 지난 식당에는 가지 않는다고. 식사하고 있는 동안 폭탄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구 이라크 정규군 출신, 수니파 주민들의 협력 속에 ISIS는 이미 사실상의 정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 수니파, 타협에 의한 공존 포기하다

다른 하나는 당초 아사드의 폭정에 항거하는 시리아 국민들의 민주화 운동이 사우디 등 외세의 개입으로 수니파 대 시아파(알라위파)간의 종파간 무장 투쟁으로 변질되면서 이라크의 수니파들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2013년 4월 23일, 이라크 정부군이 키르쿠크 서남부의 하위자에서 평화시위를 벌이고 있던 수니파 주민을 습격해 50명을 살해하고 110명을 부상시킨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나아가 말리키 정부는 수니파 지역인 서부 안바르 주의 팔루자와 라마디 등에 대한 무차별 포격으로 주민 110만명 중 50만명이 다른 지역으로 도피하게 만들었다. 그때까지 시아파 주도 정부에 참여해 공존을 도모했던 수니파 주민이 말리키 정부에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협상에 의한 공존보다는 무장 투쟁에 의한 생존을 도모하게 된 셈이다.

패트릭 콕번은 “미국 및 서방국가들은 자신들이 시리아의 무장봉기를 지원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이라크의 불안정을 초래했고 새로운 종파간 내전 상황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면서 현재 이라크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2011년 이전이라면 시아파정부가 보다 포용적 태도로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랍의 봄에 의해 촉발된 시리아의 반아사드 봉기가 (수니파인) 사우디와 걸프 왕정국가, 그리고 터키의 지원을 받는 수니파 국민의 봉기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중동지역의 종파적 세력균형은 변화하기 시작했다...이전까지 이라크의 수니파 국민들은 2003년 이후 형성된 시아-쿠르드의 지배를 마땅치는 않지만 받아들였다. 2006-2007년의 내전으로 바그다드의 수니파 대다수를 몰아낸 시아파 민병대, 군과 경찰 등의 대량 학살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중동지역이 수니-시아파의 종파적 대립으로 바뀌면서, 특히 지난 6월 ISIS에 의한 모술 점령 이후 이라크 시아파들도 긴장하고 있다. 시아파는 현재 상황을 정부의 압제에 대한 수니파의 정당한 저항으로 보기보다는 과거의 수니파 정부를 복원하려는 노력으로 보고 있다. 수니-시아파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전면적이고 피에 가득 찬 종파간 대결은 불가피해졌다”

그는 이어 “그동안 서방정부들은 이라크와 시리아의 상황을 완전히 오판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지난 2년간 이라크 정치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시리아 내전이 계속된다면 이라크의 취약한 현상 유지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모술이 함락되자 많은 사람들이 말리키를 비난했다. 물론 그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지만 이라크 대파국의 진정한 원인은 이라크 국경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시리아 내전)에 있다.”고 지적한다.

이라크 군의 처참한 패배의 윈인은?

그런데 백만(정규군 35만, 경찰 65만) 병력에 2011년 이후 416억 달러(42조 원)의 국방비를 지출한 이라크 정부는 지난 6월 어찌하여 그토록 허망하게 모술을 빼앗겼을까? 당시 모술을 공격한 ISIS 병력은 고작 1300명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물론 모술 함락은 ISIS의 대변인 아부 모하메드 알 아드나니가 “적들은 물론이고 우리들도 경악했다”고 말했을 정도로 군사적 대이변이었다.

이에 대해 최근 퇴역한 한 이라크 장성은 “부패! 부패! 부패!”라고 외쳤다. 그에 따르면 이라크 군의 부패는 2005년 미국이 이라크군의 식량을 비롯한 군수품을 외주화 하면서 시작됐다. 예를 들어 실제 병력 200명을 가진 연대장이 600명 분의 식비를 신청해 차액을 가로채는 식이다. 현재 이라크 군은 고위 장교들에게 엄청난 돈벌이 수단이다. 예를 들어 사단장이 되려면 200만 달러(20억 원), 장교가 되려면 5만 달러의 뇌물을 바쳐야 한다. 사단장이나 장교가 되고 나서는 온갖 명목으로 ‘투자금’을 회수한다. 심지어 검문소를 지키는 일반 병사들도 민간인들을 상대로 돈을 뜯는다. 또한 수니파 출신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주요 보직에 임명될 수 없다. 한 이라크 정치인은 “총체적 부패의 결과다. 사람들은 월급을 받기 위해 돈을 내고 군대에 들어간다. 그들은 투자자이지, 군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바그다드의 한 시민은 “사담 후세인 시절의 병사들도 탈영을 꿈꿨다. 봉급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엔 탈영했다간 죽을 게 뻔했기 때문에 감히 탈영할 수 없었다. 차라리 전투하다가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지금 군인들은 오로지 봉급에만 관심이 있다. 탈영 이후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이라크에는 국민의 군대가 없다”고 강조했다.

부패는 군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부에도 만연해 있다. 말리키 정부는 측근들에게만 이권과 주요 보직을 주고 이들을 관리한다. 만일 이들이 배신할 조짐을 보이면 부패 사실을 폭로하겠다면 이들을 협박한다. 금권과 이권에 의해 정치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의 한 전직 장관은 “현 이라크정부는 금권정치의 결정판”이라고 지적했다. 정치학자이자 시민활동가인 가산 알아티야는 “(이라크의) 부패는 상상 이상”이라면서 “돈을 내지 않으면 군대에 들어갈 수 없고, 돈을 내지 않으면 교도소에서 석방될 수 없다. 판사가 석방 판결을 내렸다 해도 서류 작업에 필요한 돈을 내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설사 석방된다 해도 재수 없게 돈이 필요한 군인들에게 붙잡힐 수 있다. 이들은 군인에 들어가기 위해 1만 달러에서 5만 달러를 지불했고 이 돈을 회수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개탄했다. 한 재소자는 샤워 한 번 하기 위해 간수에게 100달러를 지불하기도 했다. 한 사업가는 송유관 위에 자신의 집을 짓고 송유관에서 막대한 석유를 빼내 팔아먹었다.

이라크가 극도로 부패한 이유는?

이처럼 이라크가 극도로 부패한 이유에 대해 바그다드 시민들은 “1990년대 유엔 경제제재로 이라크 사회가 파괴됐고, 2003년 미군 침공 이후 이라크 정부가 붕괴됐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국은 6주에 걸친 무자비한 공습으로 전기, 통신, 수도 등 이라크의 사회기반시설을 거의 완전히 파괴했다. 이후 2003년 침공 때까지 10여년에 걸친 경제제재로 어린이 50만 명이 사망하는 등 이라크 사회는 붕괴 직전으로 몰린다. 1972년 석유산업 국유화 조치로 이라크는 1980년대까지 아랍권에서 가장 높은 생활수준(1인당 GDP 3000달러)과 가장 높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자랑했으나 1990년 쿠웨이트 침공 이후 미국의 집요한 공격에 의해 결국 사회와 국가 모두 붕괴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사실 오늘날 중동지역이 끝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 연원은 1980년 미국과 사우디, 파키스탄이 주도한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외세의 개입이 오늘날 중동의 비극의 근원인 것이다. 다음 차례에 그 실상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계속)

ⓒ프레시안 그래픽


ISIS의 활동 연혁

2006 알카에다 이라크지부(AQI)로 팔루자에서 결성.
2006. 6. 7 지도자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 미군 폭격으로 사망
2010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 지도자로 등극
2011. 12. 18 이라크 내 미군 전투병력 완전 철수
2012 내전 중인 시리아로 진출. 알카에다 시리아 지부(자바트 알 누스라, JAN) 결성. 이후 조직 주도권을 놓고 내분. JAN은 파키스탄에 본부를 둔 알카에다 본부 지휘 아래 들어가고 AQI는 이라크시리아이슬람국가(ISIS)로 조직 이름 바꿈
2012. 12 말리키 정부의 시아파 독재에 대한 수니파 주민의 평화적 항의 시위 시작
2013. 3 시리아 14개 주 중 하나인 라카주의 주도 라카 점령
2013. 4. 23 이라크 정부군, 키르쿠크 서남부의 하위자에서 평화시위를 벌이고 있던 수니파 주민 습격 50명 살해, 110명 부상. 또한 수니파 지역인 안바르 주의 팔루자와 라마디 등에 대한 무차별 포격으로 주민 110만명 중 50만명이 다른 지역으로 도피. 수니파 주민이 말리키 정부에 등을 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됨
2013. 여름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습격으로 이슬람 전사 500명이 탈출하는 등, 모두 8차례의 교도소 습격 작전(Breaking the Walls)으로 탈옥한 이슬람 전사들이 ISIS 휘하에 들어감
2014. 1 수도 바그다드 서쪽 64킬로미터에 있는 수니파 거점 도시 팔루자를 비롯해 서부 안바르 주 점령
2014. 1 JAN 등 이슬람 무장단체가 ISIS에 대한 공격에 나서면서 시리아 내 무장 반군간의 무장투쟁 시작
2014. 6.10 이라크 제 2 도시인 모술(인구 백만) 점령.
2014. 6.30 이슬람국가(IS) 건설 선포
2014. 8.8 미국, 이라크 내 IS에 대한 공습 시작
2014. 9.10 오바마 대통령, 시리아 내 IS에 대한 공습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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