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도상국을 중심으로 세계의 에너지 소비량이 매년 증가하고 있습니다. 에너지 자급률이 낮은 일본으로서는 안정된 에너지 자원의 확보가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장기적으로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 그리고 저탄소사회 실현을 위해 발전 시에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발전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2010년 8월 26일 <마이니치신문> 5단 광고 가운데)
에너지를 만든다. 이산화탄소는 만들지 않는다.
연간 7억 톤의 이산화탄소 감소에 공헌. 지금 지구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가장 큰 해답일 것이다. (2008년 10월 24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도시바 사가 낸 컬러 15단 광고 문구)
에너지도 재활용으로.
헌 옷의 재활용은 현명한 어머니의 지혜. 재활용 가능한 ○○○에너지는 자원이 부족한 일본에 딱 맞는 지혜입니다. (1993년 10월 26일 자 <아사히신문>에 일본 과학기술청이 낸 5단 광고 가운데)
퀴즈. ○○○에 들어갈 말은? 태양광이나 풍력 등 재생에너지를 떠올린 독자들은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었다. 놀랍게도 답은 '원자력(핵)'이다. 위 <마이니치신문> 광고의 광고주는 2011년 3.11 후쿠시마(福島) 사태 이후 그린피스인터내셔널 선정 '가장 무책임한 기업' 2위에 빛나는 도쿄전력이다(2012년 조사). <니혼게이자이신문>에 광고를 낸 도시바는 핵발전기 제조업체다.
일본을 대표하는 신문들에 버젓이 나온 이 광고들은 혼마 류(本間 龍)가 쓴 <원자력 프로파간다>(클, 2014년 8월 펴냄)에 수록된 것 가운데 일부다. 저자는 전직 광고인답게, 전체 540쪽 가운데 300쪽 이상을 자신이 수집한 핵발전 관련 광고에 할애하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이 책에서 인용한 광고들은 너무나도 기만에 차 있으며 제작자와 출연자의 양심이 느껴지지 않는 괴로운 기록"이다.
도쿄전력 등 전력 회사들과 이들의 연합체인 전기사업자연합(전사련), 방사성폐기물관리기구(NUMO) 등 핵발전 관련 일본 정부 기구들은 1970년대부터 천문학적인 광고비를 들여 핵발전이 안전하고 환경친화적이며 효율적이라는 신화를 만들어 왔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물론 이 같은 광고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3.11 사태 이후 산산이 깨어지다시피 했다.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원자력발전소는 괜찮을까요?
지질조사 시굴과 과거 지진 데이터를 철저하게 조사해 그 지점에서 예상되는 최대급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지어졌다. 철근콘크리트로 안정된 암반 위에 강력한 기초를 만들기 때문에 지진으로 인한 균열의 영향을 최소한으로만 받는다는 이야기다.
(1994년 3월 13일 자 <요미우리신문>에 일본 통상산업성 에너지관리청이 낸 반5단 광고 가운데)
일본 정부 기구가 이렇게나 안전성을 호언장담했던 핵발전소는 2011년 3월 일본 동북부 해안을 강타한 쓰나미(지진해일)에 제 기능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멜트다운(노심용융)을 일으킬 수 있다는 공포에,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에서 2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수도 도쿄(東京)에까지 대피령을 내리려 하기도 했다. (☞ 관련 기사 보기 : "후쿠시마 '악마의 연쇄 반응'…도쿄 포기도 고려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리 없다'고 우기는 꼴인 이 광고들을 다시 보며, 아직도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후쿠시마 주민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대지진 직후 고작 며칠 동안 일본 동북 지방 현지 취재를 다녀오며 느꼈던 공포가 격렬한 분노로 바뀌는 것을 보면, 이들의 마음을 가늠하기가 난망하다.
(2011년 3월 일본 동북부에 급파된 <프레시안> 특별취재팀은 미야기(宮城)현의 항구도시 시오가마(鹽釜)에서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아 가며 주민들을 만나고 사진을 찍고 돌아다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지역은 한국 구조대가 구조 활동을 벌이면서 방사능 방호복에 측정기를 갖추고 30분에 한 번씩 방사능 농도를 측정하던 곳이었다. <한국일보>에 따르면, 한때 방사능 낙진을 우려해 구조대가 철수하기도 했었다.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방사능 수치 검사를 받을 때 기자는 절로 기도하는 심정이 됐었다.)
핵 마피아들의 언론 길들이기
저자는 "유권자인 국민을 세뇌시키는 것이 원자력 광고의 첫 번째 목적이라면, 두 번째 목적은 거액의 광고비를 투자해 모든 미디어를 회유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책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핵발전 업계가 지출한 광고비는 연간 300~500억 엔에 달한다. 1970년대부터 2011년까지 전체 기간을 대상으로 하면 NUMO와 전사련 등을 제외하고 9개 전력 회사가 지출한 광고비만도 2조4000억 엔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상시적으로 광고를 싣고 광고비를 언론사에 지급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보도가 나오면 광고를 끊겠다고 압박하는 일은 결코 일본 핵발전 관련 업계만의 일은 아니다. 책에는 전력 회사가 광고대행사를 통해 방송사에 압력을 행사하는 사례도 등장한다.
언론사를 대상으로는 광고비를 미끼로 핵발전에 대한 부정적 보도를 억제했다면, 기자들을 대상으로는 철저한 '관리' 작업을 폈다. 홋카이도 지방지 월간 <홋포>에 2012년 9월부터 연재된 '원자력 세뇌 일기'라는 연재 기사에 따르면, 핵발전 업계는 취재 경비 지원, 정보 제공, 접대 등 입체적인 방법을 동원해 기자들을 구워삶았다. 다소 길지만, 저자가 재정리한 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처음에는 "꼭 원전을 보러 오십시오"라는 말을 듣고 시찰에 나섭니다. 당연히 경비는 신문사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만 전력 회사에서도 교통비를 부담하고 싶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게다가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면 숙박을 해야 하는데 이것도 전력 회사 측에서 준비하고 밤에는 호사스런 접대가 이뤄집니다. 실제 견학에 들어가면 전력 회사 직원이 찰싹 달라붙어 이것저것 편의를 봐줍니다. "이건 기자님에게만 가르쳐드리는 겁니다"라는 달콤한 말을 하면서 무언가 정보를 건네줍니다. 그렇게 되면 기자도 독자적인 취재를 하지 않고 그저 전력 회사로부터 얻은 정보만 받아 적는 식의 무난한 기사를 쓰게 됩니다. 이윽고 상의할 게 있다는 명목 하에 긴자(銀座)의 클럽 같은 곳에서 밤 접대가 시작됩니다. 이것도 모두 전력 회사가 부담하며, 게다가 "식대나 술값은 모두 저희 회사 앞으로 달아두시면 됩니다"라는 등의 말을 들으면 대개의 기자들은 원자력에 비판적인 기사 같은 건 쓰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접대가 모든 신문사와 텔레비전 방송국, 출판사의 전력 담당자에게 철저히 이뤄졌습니다.
일본의 언론 문화가 그대로 수입된(좋지 않은 부분은 특히나 그대로 수입된!) 한국 언론계에서도 그다지 낯설지만은 않은 풍경이다. 위 사례에서처럼 신문사가 출장 경비를 대지만 실제 지출은 취재 대상이 되는 기업이나 기관이 한다면, 신문사가 지급한 출장 경비는 그대로 기자의 용돈이 된다. 취재 대상 기관이 언론사에 예상 출장 경비를 요청하고, 기자들이 그만큼의 경비를 지급받아 취재를 가면 그 가운데 일부만 수령하고 영수증은 미리 통지한 총액에 맞춰 끊어주는 치밀함(?)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건 기자님에게만 가르쳐드리는 것'이라는 말의 달콤함은 다른 언론사 기자들은 쓰지 못하는 이른바 '단독', '특종'에 목마른 기자들에게 적절한 미끼다.
그러나 저자의 말대로라면, 일본 핵발전 업계의 기자 '관리'는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섰다. 따로 홍보실을 두고 경제부 기자들을 '관리'하는 한국 대기업들 가운데서도 유난하기로 이름난 '관리의 ○○' 재벌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는다. 압권은 전력 회사도 아니고 일본 정부 기구인 과학기술청이 1991년 원자력문화진흥재단에 발주한 '원자력 PA(Public Acceptance, 공적 수용) 방책 제안'이라는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일본 사회가 핵발전을 용인하고 긍정하게 하기 위해 어떤 홍보 전략을 사용할 것인가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성들에게는 문화계 인사를, 아이들에게는 만화를 활용한 홍보 방법을 사용하라는 등의 구체적 조언도 담겨 있다. 특히 보고서에는 "홍보 담당관은 매스컴 관계자와 개인적 친분을 쌓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가. 접촉해서 여러 가지 정보를 자연스럽게 주입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기자의 소속 부서가 변동돼도 정보 제공은 계속한다. 다른 부서로 옮기더라도 정보 자료를 우편으로 보낸다. 소속 부서는 거의 2년마다 바뀌기 때문에 줄곧 대상을 넓혀 간다면 강력한 지원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된다"는 내용도 담겼다.
심지어 "전력 회사나 관련 기관 광고에 반드시 '3분의 1은 원자력'을 넣는다. 작게라도 어딘가에 넣도록 한다. 싫어도 머리에 남을 것이다", "홍보성 광고가 최고다. 어떻게 PA처럼 보이지 않게 하느냐가 포인트다. 재료(정보)를 제공하고 요리(언론 게재) 방법은 위탁한다", "드라마 안에 저항이 적은 형태로 원자력을 집어넣는다. 원자력 관련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도 괜찮다" 같은 부분처럼, 홍보라기보다는 거의 세뇌에 가까운 내용까지도 이 보고서는 포함하고 있어 섬뜩함마저 느끼게 한다.
일반 유권자들에게는 이처럼 집요한 홍보를 해나가고, 언론사와 기자들을 미끼로 꾀는 한편 핵발전에 비판적인 보도를 하는 기자들에게는 철퇴를 가했다. 유명 언론인인 다하라 소이치로(田原総一朗)도 방송국에 재직할 당시, 핵발전 반대 주민운동 관련 연재를 기획했다가 방송국 고위층으로부터 '연재를 그만둘 건지 회사를 그만둘 건지 택하라'는 말을 듣고 방송국을 나오게 됐다고 고백하는 대목이 나온다. 다하라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부장과 국장까지 징계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히로시마(廣島)의 지역 방송국에서도 핵발전 문제를 다룬 보도 프로그램 제작팀이 보도국에서 영업국으로 좌천된 사례가 있었다. 지역 전력 회사와 전사련의 집요한 항의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만의 일인가…한국은?
핵발전소 안전 문제는 국경 안에 갇혀 있지 않다. 한국에서는 지난 8월말 폭우로 부산 고리 핵발전소 가동이 전면 중단됐던 일이 있었다. 지난해에는 핵발전소에 불량 부품이 납품돼 신고리 2호기와 신월성 1호기의 가동이 중단됐다. 불량 부품은 한국 핵발전계의 구조적 비리로 인한 것이었고, 결국 정홍원 국무총리가 대국민 사과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한국은 일본과 달리 민간 전력 회사들이 아니라 한국전력공사가 전력 사업을 독점하고 있고, 핵발전소 운영도 한전이 지분 100퍼센트를 소유한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하고 있다. 한전과 한수원은 다른 공기업들과 마찬가지로 부채도 많고, 공기업이라는 성격상 홍보·광고비를 공격적으로 집행하기도 애매한 처지다. 실제로 한수원 자체 홍보 예산은 연간 50억 원 규모다. 대신 전기 요금으로 충당되는 전력산업기반기금에서 원자력문화재단을 통해 연간 100억 원 규모의 홍보비가 핵발전 홍보에 사용되고 있다.
한수원 홍보 예산과 원자력문화재단이 쓰는 홍보비를 합쳐도 일본 도쿄전력에 비하면 아주 많다고는 할 수 없다. 도쿄전력은 2010년 한 해 269억 엔을 광고비로 지출해 일본 기업 가운데 10위(같은 해 1위는 파나소닉, 734억 엔)에 올랐다. 한수원은 2012년 기준 홍보비로 52억1082만 원을 썼고, 원자력문화재단은 85억 원을 썼다. 같은 해 국내 기업들의 광고비 지출 규모는 1위 삼성전자 2조7727억 원, 2위 LG전자 5941억 원, 3위 현대자동차 3699억 원 등이었고, 10위 KT&G 1735억 원, 20위 LG디스플레이도 1040억 원으로 1000억 원대를 기록했다.
다만 생각해볼 지점은 있다. 2012년 총선에서 핵과학자 민병주 의원을 비례대표 1번으로 내세운 새누리당이 과반 의석을 보유한 1당이 되고, 대선 당시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긴 했지만) '탈핵'을 내세운 문재인 후보는 낙선하고 사실상 핵발전 유지 입장을 밝힌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는 등 한국은 '탈핵 무풍지대'였다는 점이다. 조직적 '프로파간다' 규모가 일본에 못 미친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지, 광고비를 굳이 더 많이 쓸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여론이 핵에 우호적이라는 점을 더 주목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음은 책에 실린, 지난 2010년 12월 30일 전사련이 일본 <주간신초>에 낸 광고의 일부다.
원자력에 대한 국민의식은 어떨까요? (한·일) 양국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원자력발전은 필요'하다고 대답한 사람은 한국이 88.4%인데 비해 일본은 67.4%입니다. '원자력발전은 안전'하다고 대답한 사람의 비율은 한국은 70.2%이지만 일본은 28%에 그치고 있습니다. 이 수치를 보면 한국 국민이 원자력발전에 대해 긍정적인 정도는 일본의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