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이란 입법, 행정, 사법권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식량 주권, 에너지 주권, 물을 비롯한 자원 주권을 비롯하여 환경과 건강, 교육 등 인민과 지역 공동체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모든 권력이 사실상 모두 인민주권에 속한다.
그런데 이 주권이란 사실 위임할 수도 위임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다. 천부인권과 마찬가지로 주권 또한 양도 불가능하다. 주권은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거나 양도하는 순간 다른 사람의 것이 되며, 주권자는 그 즉시 노예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인민이 자신의 주권인 행정권을 한꺼번에 대통령에게 위임하는 순간 대통령은 수많은 인민의 행정 권력 전체를 다 가진 엄청난 권력자로 제왕처럼 인민 위에 군림하게 된다. 5000만 인민의 주권을 몽땅 모아 대통령에게 위임하면 선거일 하루만 빼고 5년 동안 대통령의 권력과 인민의 권력은 약 1조 대 1로 차이가 난다. 지갑에 있는 1만 원으로 하루를 버텨야 하는 서민과 하루에 1조 원을 쓸 수 있는 사람의 힘의 차이를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을 주고 노예 계약서에 스스로 도장 찍는 날
우리는 인감도장을 잘못 찍어 패가망신하고 집안이 풍비박산된 사례를 주위에서 흔히 접한다. 그래서 인감도장은 누구나 엄격히 관리하고 계약서를 작성할 때는 꼼꼼히 계약서를 살펴본다. 만약 계약서에 불리한 조항이 있으면 수정하거나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다시 작성하는 것이 상식이다.
주권의 위임 양도 계약서란 일종의 인신매매 계약서이다. 신체 포기 각서와 똑같은 주권 포기 각서와 하등 차이가 없다. 주권은 공동체 사회생활의 핵심이자 삶의 근거이다. 주권이란 사회와 국가 차원에서 형성된 인민의 영혼과 육체로 분리 불가능한 것이다. 이 같은 금쪽같은 주권을 양도하는 노예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이 다름 아닌 선거일의 투표이다.
대한민국의 선거란 그런 주권 포기 계약서에 그저 도장만 꾹 눌러 찍는 요식행위의 날이다. 그것도 공짜로 말이다. 아니 오히려 주머니를 털어 세금으로 돈을 주면서 노예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참으로 희한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민은 주권을 누구에게 양도할 것인가, 몇 사람의 늑대 가운데 하나의 늑대만을 선택해야 한다. 착한 늑대이건 양의 탈을 쓴 늑대이건 인민을 잡아먹는 늑대이긴 매한가지이다. 그런 늑대에게 또 주권자인 양들은 막대한 봉급까지 주고 있다.
대한민국의 주인이자 불변의 '갑'은 인민이다. 대통령과 자치단체장을 비롯한 행정 관료와 사법 관료, 입법부의 의원은 인민을 섬기는 공복, 즉 공공의 머슴으로서 불변의 '을'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거꾸로다. 대통령을 비롯한 관료와 의원이 '갑'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인민은 이들에게 핍박받고 수탈당하는 '을'로 전락해 있다. 경찰과 검찰, 법원이 함께 인민 위에서 인민에게 제도화된 국가 폭력을 일삼는 이 어이없는 전도된 체제는 1948년 대한민국의 출범 당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조선을 지배한 미 군정은 조선 인민은 문명 개화한 일본인과 달리 무능하고 자치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이는 당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조선을 미, 소, 중, 영 등 4대 강국이 40년 내지 50년 동안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조선의 신탁통치안을 전후 조선 정책으로 확고하게 정해 두고 있었던 데 기인한다. 1945년 12월의 외무장관 회의에서 최대 5년으로 줄기는 했지만 이 같은 미국의 조선에 대한 보호 감독 정책은 미국의 일관된 정책이었다. 여기에 미 국무부 주요 관리들이 대부분 친일파였거나 비호 세력이었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었다. 조선에 대한 보호감독 정책은 엄연한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의 전시 작전권이 아직도 미군에게 있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가능케 해준다.
1945년 9월 4일 인천 상륙을 3일 앞두고 마닐라에 있던 미군 24군단 하지 중장은 장병들에게 급히 다음과 같은 통고문을 하달했다.
"조선인들은 미국의 적으로 규정되며, 따라서 항복에 부수되는 모든 조건을 이행할 의무를 지니는 한편 일본인은 우리의 우호 국민으로 간주한다."
- 정경모, <시대의 불침번>(한겨레출판 펴냄) 93~94쪽
일본이 항복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미국의 적국이었던 일본 국민은 우호 국민으로, 조선인은 적으로 규정된 이 통고문이야말로 해방 후 미 군정 조선 정책의 기본 원칙을 단순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나아가 지금까지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을 일이관지로 설명해주는 핵심 기준과 관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미군의 인천 상륙은 일본을 물리치고 조선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일본을 구하고 조선을 치려는 작전이었다. 실제로 9월 8일 미 제24군단이 21척의 함선을 타고 월미도에 도착했을 때 만세를 부르며 해방자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조선인 가운데 2명이 일본군의 발포로 즉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조선인은 절대 접근시키지 말고 말을 듣지 않으면 쏴 죽여도 좋다고 하지가 미리 일본군의 발포를 허가했기 때문이었다.
1945년 당시 미국은 국가 역사가 200년도 안 되는 일종의 신생 독립국이었다. 이들은 조선만 하더라도 자신들보다 훨씬 더 오랜 500년이 넘는 국가의 역사와 문화가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은 조선에 대해 무지했으며, 무엇보다도 해방자가 아니라 점령자로 남한에 진주했다.
앞서 말했듯 미국은 조선인은 오랫동안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받을 만큼 자치 능력이 없으며 우매한 민족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조선 사법제도의 철학과 경제육전(經濟六典), 대명률(大明律) 같은 법률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자마자 맨 먼저 한 일은 일본 제국주의의 강력한 식민지 지배 국가기구를 복원하고 승계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해방정국에서 조선총독부의 부활인 미군정은 분단된 한반도 남쪽에서 조선의 자주독립국가 수립에 막강한 결정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 조선 인민에게 비극이라면 비극이었다.
그래서 미군은 일제 식민지 총독부의 연장 선상에서 조선을 통치하면서 친일파를 중용하고 조선 인민이 사법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한국의 인민은 그렇게 사법 주권을 누구에 의해 강탈당했는지, 심지어는 사법주권을 빼앗겼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반세기 이상을 주권 부재의 인민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그런 주권을 위임하고 빼앗긴 적폐가 쌓이고 쌓여 마침내 세월호 참사를 당하고 만 것이다.
사법주권은 강탈당하고 나머지 국가 권력 또한 강탈당하도록 모든 인민주권의 위임을 제도화한 것이 대한민국의 헌정 체제이다. 인민이 공무원의 인사권을 대통령과 자치단체장에게 위임하는 순간 공무원은 인민의 공복이 아니라 대통령과 자치단체장에게 충성하는 주구가 된다. 사법권을 대통령과 사법부에 위임하는 순간 경찰과 검찰은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민중을 때려잡는 민중의 몽둥이가 된다. 자신에 대한 인사권이 인민과 지역 주민에게 있지 않고 대통령에게 있는데, 공무원과 경찰과 검찰이 인민에게 봉사하고 잘 보여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오직 인사권자의 지시 명령에 따라 충성하고 잘 보이면 되는 것이다.
위임 민주주의란 그래서 교언영색의 사기이며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위임 민주주의란 구소련과 북한의 민주집중제와 똑같이 엘리트 독재 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교활한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인민으로 하여금 엘리트 독재 체제를 민주주의 체제로 믿게 만드는 '빅브라더'의 체제 홍보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위임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는 서구 근대와 산업화 시대, 국민국가 시대의 낡은 제도이다. 짐이 곧 국가인 절대 왕정을 혁명을 통해 무너뜨린 서구에서 인민이 곧 국가인 주권재민의 민주공화정을 실천하고자 했을 때 부닥친 가장 큰 문제는 당시 인민의 대다수가 문맹이라는 사실이었다. 문맹이 곧 지혜의 부족과 무지는 아니다. 그러나 문맹자가 국가의 입법, 사법, 행정 업무를 직접 챙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 때문에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인민의 대리인으로 하여금 입법, 사법, 행정 등의 업무를 대신하도록 한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였다.
물론 당시 지배계급이었던 귀족과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던 유산자(자본가) 계급이 노동자와 농민 등 인민과 권력을 나누지 않고자 하는 기본 정책도 대의제 민주주의 출현의 핵심 요인이었다. 위임 민주주의와 대의제 민주주의는 하늘에서 떨어진 불가피하거나 보편타당하고 현실 적합한 제도가 아니라 당시 서구의 현실 조건과 역사에서 배태된 제도일 뿐이다.
그리고 권력의 집중과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 3권을 분립시켜 서로 견제 감시하도록 장치를 마련한 것이 3권 분립 제도였다. 물론 아무리 그런 장치와 각종 감시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할지라도 권력의 집중과 엘리트 관료 독재는 불가피한 필연의 결과였다. 나치 파시즘의 출현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일탈이 아니라 대의제 민주주의의 가장 가까운 도착점일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21세기는 문맹의 시대가 아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문맹률은 영에 가깝다. 더구나 지금은 인터넷 미디어의 시대이다.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소식과 정보가 디지털화된 신문, 방송, 잡지, 도서 등과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실시간으로 제공되는 정보화 시대이다. 인민이 입법, 행정, 사법 등 국가의 업무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와 소식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능력 또한 갖추고 있다.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사고의 관료보다 인민이 훨씬 뛰어난 실무 집행 능력과 소통 능력을 보이는 경우가 더 많다. 지금은 인민이 대리인 없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는 시대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바뀌지 않고 19세기에 머물러 있는 낡고 또 낡은 체제가 바로 한국의 위임 민주주의,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이다.
*이 글은 협동사회독립언론 '두레뉴스'에도 게재됩니다. 편집자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