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6일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 씨의 손을 맞잡는 장면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줬다. 교황은 순교자 124위 시복 미사 집전을 위해 광화문광장으로 이동하는 카퍼레이드 도중 수많은 인파 속에 섞여 있던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직접 만났다. 세월호 참사로 딸 유민 양을 잃은 김영오 씨는 제대로 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한 달 넘게 단식 중이었다.
이 감동적인 장면은 역으로 비극적인 한국 정치를 상징하는 장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영오 씨가 18일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 것처럼 5일간의 짧은 방한 기간에 교황이 세월호 유가족을 만난 횟수가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유가족을 만난 횟수보다 많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요구하는, 재발 방지를 위한 진상 규명을 목적으로 하는 특별법은 국회에서 여전히 표류 중이다. 대중을 상대로 유가족의 입장을 대변하고 설득하는 역할을 주로 맡은 것도 야당 정치인이 아니라 김장훈, 이승환, 김제동 등 연예인들이다.
"유가족이란 말 자체가 영어에는 사실상 없는 개념이라서 세월호 정국을 외국인들에게 설명하기가 참 난감하다."
한 정치학자의 말이다. "딸을 잃고 사선에 선 애비를 외면하지 말아 달라"는 절규에 한국 정치는 무반응이다.
박근혜의 등장과 '87년 체제'
박근혜 정부 1년 반, 한국 사회에서는 저자가 던진 질문을 유효하게 하는 일들이 숱하게 발생했다. 김기춘으로 대표되는 유신 세력 내지 그 자녀들의 전면 부상, 구세력의 재등장과 영남 지역 독점에 따른 인사 참사(소위 '수첩 인사'라고 비판된다), 국가정보원 등 국가 기관의 선거 개입 의혹, 전교조의 법외노조화로 대표되는 노동 운동 탄압, 세월호 참사 이후 난맥상까지.
성공적이라고 하기 힘든 국정 운영을 하고 있음에도 박근혜 정부는 집권 후 사실상 모든 선거에서 이겼다. 특히 7.30 재보선은 대권 주자 중 하나였던 안철수가 전면에 나선 선거였지만, 야당이 처참히 깨졌다.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여전히 50퍼센트 안팎의 '콘크리트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정말 묻고 싶은 질문이다.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 '독재자의 딸'이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됐으며, 집권 1년 반 동안 수치상으론 전임 대통령들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원인은 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아버지(는 물론 그에 못지않은 어머니)의 정치적 후광 효과도 무시 못 할 요인이다. 또 사실상 박근혜 대 문재인의 1 대 1 구조로 치러진 선거에서 확인했던 3.6퍼센트의 표차가 의미하는 '기울어진 운동장'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서울시장 선거에서 떨어진 여당 후보의 아들이 냉소적으로 지적한 '국민 미개론'을 꼽고 싶은 이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독재자의 딸이 집권하게 된 '불행'의 씨앗은 바로 민주화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87년 체제'에 있었다고 진단한다. 엘리트와 군부의 오랜 독재 정치를 종식시킨 '87년 체제'는 기존 정치 엘리트들 간의 타협의 산물이었다는 것.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6.10 항쟁에 가려졌고, 1980년 광주는 '민주화 운동'으로 자리매김되면서 윤상원을 비롯한 도청 사수파의 기억이 지워졌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는 일찍이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도 누차 강조했던 한국 민주주의의 특징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87년 민주화는 민주화라기보다는 군부 독재의 종식이며 구세력의 다른 형태의 지배의 시작"이라고 평가했다.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 가능성을 열었지만 공안 기구의 존속, 기업별 노조 체제의 정착과 노동자 정치 참여 제한 등의 이유로 지배층이나 국가 성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는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
386 세력과 안철수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제도적으로 정권 교체 가능성을 연 '87년 체제'를 통해 박근혜가 등장하게 된 것은 '대안(저항) 세력'의 부재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런 의미에서 386세대(저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386을 486으로 고쳐 부르는 것에 반대한다)에 주목한다. "공동체주의를 통해 한때 사회주의 또는 급진적 민족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386세대가 개인의 권리와 사유재산을 옹호하는 자유주의의 입장과 결합하면서 체제 내로 순치됐다"는 것. '87년 체제'를 이끈 한 축이었던 386세대는 기성세대가 되면서 부동산과 사교육 열풍을 심화시켰다. 전쟁에서 비롯된 대한민국 사회의 기본 원리인 '각자도생'에 충실히 따를 뿐 어떤 균열도 내지 못한 셈이다.
특히 정치로 인입된 학생 운동 세력은 체제 순화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이들이 "87년 체제의 과실을 가장 많이 취득할 수 있었던 집단이었다"며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등장은 그나마 과거의 습성에 기대어 명맥을 유지했던 민주화 운동 세력을 소진시켰고, 이런 모습은 다분히 민주화 세력을 기득권으로 비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1996년을 전후해 정치권에 '젊은 피'로 수혈됐던 운동 세력은 정당 혁신에도, 새 리더십 형성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전대협 리더' 격이었던 임종석, 이인영이 최근 <조선일보> 인터뷰를 통해 '중도 회귀'와 '성장 노선'을 주장해 논란이 일었다. 이는 이들의 '기득권화'를 보여주는 한 단면일 뿐이다.
386 세력의 '기득권화'는 정치인 안철수의 공간을 열어준 배경이기도 하다. '노동 정치의 배제'로 애초부터 협소할 수밖에 없었던 진보 정당의 입지가 두 번의 분당 사태로 더 곤궁해진 것도 안철수에게 힘을 보탰다. 안철수는 새로운 리더십과 정치 노선을 바라는 대중의 열망에 떠밀려 정치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삶의 궤적이나 정치적 입장을 따져보면 그의 '새로움'은 여당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정치인이 야권을 재편할 인물로 호출된 것이다. 저자는 "한국 진보를 구성하는 자유주의의 원칙을 복원하자는 것이 안철수 현상을 밀고 간 핵심적인 욕망이었다. '두 개의 인민'을 '하나의 인민'으로 합치시키려는 시도가 안철수 현상에 내재해 있었다"고 평가했다. 대선 당시 '안철수 현상'은, 똑같은 자유주의에 기초하고 있지만 '다름'을 이유로 소선거구제에 기반을 둔 선거 체제에서 의석 나눠먹기 싸움을 하던 여야의 행복한 동거를 뒤흔들어 놓았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안철수는 기존 야당으로 흡수됨에 따라 그 상징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됐다.
그래서 박근혜는 정말 '무엇의 이름'인가?
자본주의가 극단화됨에 따른 신(新) 세습 신분 사회, 구좌파의 몰락과 신좌파의 취약함, 국민국가의 통합성 약화 등 현재 한국 사회가 보이는 모습은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지구적 조건까지 겹쳐보면, 애초에 저자가 던졌던 질문의 답은 더 찾기 어려운 듯하다.
저자는 자유주의에 입각한 '쾌락의 평등'에 기반을 둔 도시 중간 계층의 선택이 이명박에 이은 박근혜 정권을 낳았다고 봤다. 박근혜가 지난 대선에서 진보의 담론을 차용해 '경제 민주화와 복지국가'라는 공약을 내세운 것에 주목한다. 박근혜는 '국민 행복 시대'라는 모토를 내세우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박정희라는 후광이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저자가 지적하듯 박정희와 박근혜의 '균열' 지점은 정치와 자본의 역관계에서 발생하고 있다. 도시 중간 계층의 '평등'에 대한 욕망을 실현해줄 수 있는 정치인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민주주의 없는 자본주의'는 박근혜 정권에 국한된 위기가 아니다. 권력을 시장에 넘겨준 국가에서 국민은 다른 형태의 정치를 고통스럽게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두 개의 인민'을 넘어 '세 개의 인민'(국가가 보호할 의지조차 없는 버려진 범주인 '잉여')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고착화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월호 유가족을 대하는 박근혜 정권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에서 바로 이런 통치 방식의 작동을 엿볼 수 있다. 과연 박근혜를 선택한 도시 중간 계층의 '정치적 각성'이라는 결말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르코지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이라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글 제목에서 따온 <박근혜의 이름은 무엇인가>를 읽고 여전한 의문이 바로 이 지점이다. "사르코지는 쥐인간"에 비견할 만한 속 시원한 일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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