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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 실미도와 소무의도 해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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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인천 앞바다 실미도와 소무의도 해안길

9월 섬학교 당일 답사

9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는 개교 이래 첫 당일 답사입니다. 9월 13일(토) 하루 일정으로 섬에 다녀옵니다. 행선지는 추석 명절 뒤끝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나들이 할 수 있는 인천 근교의 섬, 실미도와 소무의도입니다. 인천공항이 있는 영종도에서 배를 타고 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섬들입니다. 실미도는 북파공작원들의 이야기를 다룬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의 실제 무대였습니다. 들물이면 잠겼다가 썰물이면 들어나는 신비의 바닷길을 건너 실미도로 갑니다. 소무의도는 본섬인 대무의도와 인도교로 연결된 작고 아름다운 섬입니다. 인천 앞바다의 그림 같은 풍경을 감상하며 느릿느릿 걸을 수 있는 소무의도 둘레길은 휴식 그 자체입니다.

▲첨단과 시원의 갯벌 사이로 가뭇없는 시간이 흐른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9월 답사지인 실미도와 소무의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섬들의 우두머리, 큰무리섬

갯벌의 한쪽에서 첨단의 항공기가 뜰 때 갯벌 또 한쪽에서는 어부들이 원시의 뻘밭을 일군다. 인천공항이 들어선 곳은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 갯벌이다. 그래서 공항 주변의 섬들은 아직 가지 않은 과거와 미처 도달하지 못한 미래, 그 어느 조간대(潮間帶) 쯤에 위치한다. 첨단과 시원의 바다 사이로 가뭇없는 시간의 물살이 흐른다. 저 물살이 우리를 어디로 실어다 줄 것인지 우리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용유도와 연도교로 이어진 잠진도는 무의도로 가는 통로다. 두 섬은 5분 거리에 불과하지만 아직 다리가 놓여있지 않아 뱃길이 살아있다. 갯벌에서는 주민들이 허리를 굽혀 호미질을 한다. 그때마다 씨알 굵은 바지락들이 알몸을 드러낸다. 그야말로 뻘밭의 농사다. 뱃머리를 돌리자마자 여객선은 무의도 큰무리 선착장에 도착한다. 2층 선실에 올랐던 여객들은 앉을 틈도 없이 내릴 준비를 한다. 늙은 선원 한 사람이 다 왔다고, 어서 내려오라고 연신 호각을 불어댄다.

무의도가 널리 알려진 것은 영화 <실미도>와 <천국의 계단> 같은 드라마를 통해서다. 영화와 드라마의 흥행 이후 섬에는 개발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쳤다. 제일 먼저 팬션들이 들어섰고 뒤이어 조립식 주택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지금 섬에는 비슷한 형태의 조립식 주택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다. 조악한 형태의 조립식 가옥들은 다가가서 들여다보면 내부가 텅 비어있다. 무의도가 관광단지로 개발됐을 때 보상을 노리고 외지의 투기꾼들이 지어놓은 가짜 집들이다.

면적 9.432㎢, 해안선 길이 31.6㎞의 무의도는 대무의도라고도 한다. 무의도 주민들은 큰무리섬이라 부른다. 무의도에 대한 지명 유래는 “말을 탄 장군이 옷깃을 휘날리며 달리는 모습 같기도 하고, 선녀가 춤추는 것 같기도 해서 무의도(舞衣島)라 했다”고 되어 있지만 이는 견강부회다. 무의도 주변에는 소무의도, 실미도, 해리도, 상엽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무리지어 몰려있다. 본디 무리지어 있는 섬들 중 가장 큰 섬이라 해서 큰무리 혹은 무리섬이라 했을 것이다. 실제로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도> 등에는 모두 무의도(無依島)로 표기되어 있고 <1872년 지방지도>에만 무의도(舞衣島)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아마도 무리섬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무의도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서남해의 많은 섬들처럼 무의도 또한 여말선초의 공도정책으로 오랫동안 비어있었다. 내내 군사용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 이용되다가 조선 후기에 와서야 다시 주민들의 입도가 허락됐다.

▲썰물의 시간, 맨살을 드러낸 무의도 앞바다 ⓒ섬학교

섬의 북쪽에는 당산이 있고 중앙에는 국사봉이, 남쪽에는 호룡곡산(245m)이 있다. 국사봉에서는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사가 지내졌다고 전해진다. 또 정상에서는 절터와 금동불상, 토우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인천 지역의 섬들에는 무의도만이 아니라 국사봉이란 이름을 가진 산들이 많다. 덕적도와, 영흥도, 자월도 등에도 국사봉이 있는데 이들 모두가 국가에서 하늘에 제사를 모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섬들이 개경, 한양 등 왕도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왕도 방어의 군사요충지이기 때문이었지 싶다. 호룡곡산에는 호랑이와 용이 싸웠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섬에는 하나개해수욕장, 실미도해수욕장 두개의 아름다운 모래 해변이 있는데 모두 유원지로 이용되고 있다. 실미도해수욕장은 앞바다에 실미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하나개는 큰 갯벌이란 뜻이다.

실제를 허구로 만들어버린 영화와 국가의 범죄, 실미도사건

썰물 때면 영화 <실미도>의 배경이 됐던 실미도와 무의도는 하나의 섬으로 연결이 된다. 지금 실미도는 무인도다. 영화 이전에 북파공작원을 훈련시켰던 비극적 역사의 섬, 실미도와 실미도사건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실미도사건을 현실로 인식하지 못한다. 영화를 통해 실미도사건은 허구가 되고 말았다. 영화 배경이 됐던 장소의 경우 대체로 허구가 실제처럼 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실미도는 그 반대가 된 것이다.

실미도 안내판에도 실제는 없다. 실미도는 그저 영화 <실미도>의 촬영지로만 소개되고 있다. 실미도는 허구일까 실재일까. 제작자는 영화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려 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영화로 인해 역사의 진실은 허구처럼 돼버린 것은 아닐까. 이제 고통의 땅은 그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가 됐다. 연인들은 더 이상 실미도에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영화는 허구라고 믿기 때문이다. 고통마저도 상품으로 만드는 자본의 힘.

오랜 시간 풍문으로만 떠돌던 실미도사건. 사건의 실체는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와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를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그 이전까지 사건은 그저 하나의 낭설에 불과했다. 1971년 8월 23일, 인천 실미도에 있던 684부대 북파공작원 24명은 기간병 18명을 살해한 뒤 무기를 들고 탈영했다. 북파공작원들은 8월 23일 낮 12시 20분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로 향했다. 인천에서 육군과 첫 교전을 벌인 공작원들은 버스가 고장나자 두 번째 버스를 탈취해 14시 15분경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앞까지 진격했다. 진압군과 교전을 벌이던 북파공작원들은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했다. 20명이 죽고 4명이 잔존했다. 하지만 생존자 4명도 이듬해인 1972년 3월 서둘러 사형 집행됐다. 이런 참혹한 사건이 벌어졌으나 박정희 정권의 통제로 언론에는 단 한 줄도 보도되지 못하고 역사에 묻혀버렸다. 정부는 그저 실미도난동사건으로만 규정하고 30년간이나 철저한 비밀에 붙였는데 소설과 영화를 통해 세상에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사건의 실체는 상당 부분 은폐되어 있다.

북파부대인 684부대가 탄생한 배경은 1968년 벽두에 있었던 이른바 1.21사태다.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원 31명이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하기 위해 남파됐고 이들은 감시망을 뚫고 청와대 인근인 세검정까지 침투에 성공했다. 하지만 124군 부대원들은 국군에게 제압당해 김신조를 제외한 전원이 살해당했다. 바로 이 1.21사건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탄생한 것이 684부대였다. 그래서 부대는 북한의 124군 부대원과 같이 31명으로 구성됐으며 평양에 침투해 주석궁의 김일성을 암살하는 것이 목표였다. 684부대는 형식적으로는 공군 소속이었지만 실제로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창설되고 유지됐다. 1968년 4월에 창설되었기에 684부대였다. 일반인, 전과자, 죄수 등 다양한 신분에서 차출된 북파공작원들은 실미도에 마련된 훈련장에서 단 3개월 만에 인간 병기로 거듭났다. 기간병이 1대1로 붙여졌고 훈련은 실전처럼 이루어졌으며 훈련과정에서 7명이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북한 침투 훈련을 마치고서도 부대원들은 침투 명령을 받지 못하고 실미도에서 3년 4개월을 대기 상태로 있어야 했다. 동서냉전의 벽이 허물어지던 국제정세의 변화 때문이었다.

소위 핑퐁외교로 불리는 1971년 4월 미국 탁구선수단의 중국방문과 뒤이은 키신저와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세계는 화해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런 와중에 북파공작원, 특히 김일성 암살을 위해 만들어진 684부대는 박정희 정권에 부담스런 존재였다. 그래서 정부는 이들 전원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80년대까지도 북파부대가 존재했던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들에 대한 제거명령은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다른 북파부대에 합류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러지 않았던 것일까. 아무튼 제거명령을 받은 기간병들은 오히려 인간병기가 된 북파부대원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소위 실미도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기간병 중에서는 단 6명만 생존했다. 이들의 증언이 소설 <실미도>와 영화 <실미도>의 바탕이 됐다.

▲실미도사건은 영화보다 더 영화스럽다. ⓒ섬학교

1,000만 관객이 들었던 영화의 흥행으로 역사 속에 영영 묻힐 뻔했던 실미도사건은 수면으로 올라왔고 진상규명에 한발짝 다가가는 듯했다. 2004년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에서는 ‘실미도사건진상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고, 국방부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에서도 실미도사건을 파고들었다. 2005년 11월에는 벽제시립묘지에서 부대원들의 유골 일부를 발굴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진척은 없었다. ‘실미도사건’은 정권의 필요를 위해서는 국민들의 생명마저도 파리목숨 취급했던 박정희 군사정권의 실체를 보여준 추악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실미도사건의 북파부대원들 대부분을 사형수들로 기억한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으니 억울할 게 무어 있냐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형수일지라도 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국가가 함부로 그들의 생사를 좌우할 권리가 없다. 하물며 684부대원들 대부분이 사형수와는 무관한 죄 없는 민간인이라면 어쩔 것인가. 결국 이들 부대원들 대다수가 민간인이었다는 물증의 일부가 드러나기도 했다. 2004년 초, 1968년 3월 충북 옥천의 한 마을에서 실종된 7명의 청년들 모두가 684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이 국방부에 의해 확인된 것이다. 684부대원 제거명령은 박정희 정권시절 국가 범죄임이 일부 확인된 것이다. 하지만 실미도사건의 실체는 여전히 미궁 속이다. 철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박정희와 미 대사관 직원들이 바비큐파티 하던 섬

무의도 광명선착장, 어느 식당 앞에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철망 안에 갇혀 애절하게 울어댄다. 아기는 탈출을 위해 철망을 긁어도 보고 매달리기도 하고, 야옹야옹 울음 울며 바깥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보기도 하지만 가망없는 일이다. 갇힌 아기에게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다. 밥그릇의 갈치구이도 거들떠보지 않고 그저 울며 자유만을 애타게 갈구한다. 아직 부질없는 줄 깨닫지 못한 어린 아기는 철망을 오르내리기를 수도 없이 반복한다.

광명선착장은 다리가 놓여지기 전 소무의도행 나룻배가 오가던 곳이다. 지금은 사람만 다닐 수 있는 414m 길이의 인도교가 놓여져 더 이상 나룻배는 없다. 예전에 두 섬 사이를 오가는 나룻배 선장을 만났던 적이 있다. 선장은 소무의도 태생이었다. 지금은 퇴락한 어촌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작은 인천’이라 했다고, 선장은 소무의도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었다. 면 소재지 세금의 7할을 소무의도에서 낼 정도였고 수협출장소까지 있었단다.

소무의도 선착장 들머리에는 해태(김) 양식을 준비하는 어민들의 손놀림이 바쁘다. 지금은 소무의도에 들어오려면 무의도를 거처야 하지만 옛날에는 하인천에서 출항한 여객선이 가장 먼저 소무의도로 바로 왔다. 바다 가운데 여객선에서 중간 연락선인 전마선으로 200명이 내리면 그중 150명이 소무의도로 들어왔다. 그만큼 소무의도가 호황이었다. 월미도와 하인천도 지척이다. 당시에는 여객선 한 척이 인천 앞바다 모든 섬들을 다 돌아다녔다. 하인천을 출발한 여객선은 영종도-소무의도-자월도-덕적도까지 갔다가 덕적도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인천으로 돌아왔다. 이작도나 승봉도는 이틀에 한 번씩밖에 안 갔다.

선장은 1950년대 후반 서울의 무학여고와 수도고녀 수영부 선수들과 정구 선수들이 소무의도로 전지훈련을 왔던 일을 기억한다. 여름이면 몇 백 명씩 다녀가곤 했다. 여학생들은 군용 텐트를 치고 생활했다. 여학생들은 꽁치통조림이랑 양파 등의 부식을 싣고 와서 직접 밥을 해먹으며 훈련을 했다.

선장의 나이 열다섯 살 무렵에는 섬에 휴양 차 온 박정희 대통령과 미 대사관 직원들의 파티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선장은 “박정희가 세 번쯤 이 섬을 다녀갔다”고 기억했다. 동네 어른들은 섬의 뒤편 해안에 대통령이 온 것을 몰랐다. 아이들이 전마선으로 노를 젓고 놀러 갔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요리사들이 파티하고 남은 음식을 아이들에게 나눠주었고, 까만 선글라스에 반바지 수영복을 입은 사람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소식을 알렸지만 어른들은 마을 뒤쪽 해변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권총을 찬 경비원들이 통제했기 때문이다.

▲오늘 실미도 가는 길은 더할 데 없이 평화롭다. ⓒ섬학교

사람만한 민어들이 몰려들던 바다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이 섬에는 조기잡이 중선 배들이 7~8척 가량 있었다. 봄 조기철이면 배를 타는 선원들만 100여 명이 넘었다. 저인망 어선도 한 척 있었다. 이승만 때 북쪽의 어로저지선을 넘어갔던 배를 압수해서 섬에 준 것이다. 지금은 고작 35가구에 노인들만 60여 명 살 뿐이지만 그 무렵에는 90호, 500여 명의 주민들이 살았고 초등학생만 80~90명이 될 정도로 섬이 흥청거렸다.

“지금 저 산비탈들이 다 대지요. 다 집터였지.”

섬사람들은 굴비도 많이 만들었다. 연평도 바다에서 잡아온 조기를 소금에 절여서 굴비로 만들었다. 굴비는 마산, 진해에서 온 배가 사서 실어갔다. 조기를 말릴 때면 하루는 배가 남쪽을 보게 널고 하루는 북쪽을 보고 널었다. 법성포처럼 덕장에 널어 말리는 것이 아니니 매일 뒤집어줘야 잘 말랐기 때문이다. 섬 근해에서는 새우도 많이 났다. 대하, 꽃새우 등은 말려서 미국이나 대만으로 수출했다. 김장에 넣는 새우인 동백하도 많이 났다. 그것이 큰돈이 됐다

“생새우 한 광주리 들고 인천에 나가면 돈이 한 광주리였어.”

50년대에는 섬에 미군 켈로부대(3840부대) 유격대가 주둔하기도 했었다. 섬사람들은 미군의 전투식량인 C-레이션을 그때 먹어봤다. 선장은 광명선착장이 있는 무의도 샘꾸미마을을 가르치며 웃었다.

“저기는 우리가 다 지배하던 데야. 다들 선원으로 여길 왔었지. 거긴 배가 달랑 두 척밖에 없었거든.”

소무의도와 팔미도 사이 바다에는 민어가 많이 잡혔다. 민어를 쫓아 무의도와 소무의도 사이 해협으로 상어떼도 뒤따라 왔다.

“민어가 엄청 많았어. 이 골로 상어떼도 엄청 많이 다녔지. 상어들이 민어 머리하고 내장은 안 먹어.”

어장마다 잡히는 민어의 크기가 달랐다.

“풀치끝 큰골 민어는 사람만큼 컸어. 왕산이 민어는 어른 팔뚝만 했고, 덕적도 뒤 뺄골 것은 빨래 방망이만큼밖에 안 됐어.”

민어는 계량 단위가 ‘층’이었다. 한 층은 1백 근. 큰 것은 두 마리면 한 층이었다. 민어 한 마리가 돼지 한 마리만큼 컸다는 이야기다. 민어는 우는 소리가 꼭 개구리 울음소리 같았다. 울대라는 대나무통을 바닷물에 꽂은 뒤, 귀에 대고 민어가 오는 소리를 감지했다. 하지만 민어가 많을 때는 굳이 울대가 필요없었다. 민어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 크고 많던 민어들이 어느 때부터 사라져버렸고 섬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선장은 그 이유를 낚시로만 잡다가 그물배가 들어오면서부터라고 생각한다.

“삼천포, 통영, 여수에서 온 유자망 배들이 그물로 씨를 말려버렸어. 산란기고 뭐고 없이. 그렇게 몇 년 긁으니까 씨가 마르더라고.”

▲섬과 섬을 잇는 노둣길 ⓒ섬학교

곡식을 지키는 고양이들

소무의도의 옛 이름은 떼무리다. 떼는 여럿이 함께 모여 있는 무리란 뜻이니, 떼무리란 그냥 무리 중 하나란 뜻일 게다. 섬의 앞뒤로 마을이 있다. 동쪽은 해변이 넓지만 무의도쪽은 가파르고 옹색하다. 요즈음도 섬에서는 꽃게잡이가 주업이다. 섬은 유난히 폐가가 많다. 제법 규모 있어 보이는 집, 담장도 빨간 벽돌이다. 잠겨진 대문 틈으로 보니 이 집도 폐가다. 그 옆집은 다 허물어져 간다. 해변 갯돌밭에서 할머니 두 분이 타작한 들깨를 바람에 키질 하고 있다.

“어째 이리 버러지가 많어. 나가지도 안 해. 버러지들이 여기서 뺑뺑 돌아.”
“약 안 줘서 그렇지 뭐.”
“바람에 후달려서 키질도 못하겠어.”
할머니들은 들기름을 짜서 자식들에게도 주고 자신들도 먹을 생각이다.
“뭐든지 약 넣는다. 약 넣는다 하잖아. 이런 건 해먹으면 오리지날이자나. 애들 먹는 과자까지 약 넣는다잖아.”

한동안 쇠락의 길을 걷던 소무의도가 요즈음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2011년 무의도 광명선착장과 소무의도 떼무리선착장을 잇는 인도교가 놓이고 섬 둘레를 따라 2.5㎞ 코스의 ‘무의바다누리길’이 조성된 까닭이다. 주말이면 트레킹을 위해 찾아드는 여행객들이 줄을 잇는다.

이 섬에는 대부분의 집들이 고양이를 개처럼 묶어 키운다. 어떤 밭 한가운데도 고양이 집이 있다. 곡식을 탐하는 쥐를 쫓기 위해서다. 하지만 영리한 쥐들이 묶인 고양이를 언제까지나 무서워할까. 쥐들은 쉽게 눈치채고 말 것이다. 그래도 고양이들은 풀려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광명선착장의 철망에 갇힌 새끼 고양이도 그렇게 평생을 묶여 살게 될 것이다.

섬학교 제31강, 9월 13일(토) <실미도·소무의도 걷기>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09:00 서울 출발(뱃시각에 대야 하니 출발시각 엄수 바랍니다. 08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31강 여는 모임
10:00 영종도 잠진도항 도착
10:30-12:30 실미도 걷기(3km)
13:00-14:00 점심식사 겸 뒤풀이(막걸리를 곁들인 데침쌈밥)
14:30-17:00 소무의도 둘레길 걷기(3km)
17:30 서울 향발
18:30 홍대입구역 도착(지하철 2호선), 해산
※서울 도착 후 홍대입구역 근처, 싱싱한 맛집 <포항막회>에서 섬학교 번개 있습니다(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2번 출구에서 직진, 주유소 조금 지나 골목 입구. 02-334-1516). 이날 답사 참가자와 답사가 어려운 섬학교 동문 여러분의 많은 참석 바랍니다(번개 참가는 자유선택이며 회비는 1인 2만원).

▲섬학교 제31강 답사로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다음의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을 걷다>
http://www.yes24.com/24/goods/3261557?scode=032&OzSrank=1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http://www.yes24.com/24/goods/5185914?scode=032&OzSrank=1
<어머니전>
http://www.yes24.com/24/goods/6996168?scode=032&OzSrank=1

섬학교 제31강 답사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2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한때는 대물 민어와 상어 떼가 헤엄쳐 다니던 소무의도의 바다ⓒ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 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 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러싸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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