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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후보가 야권 표 갉아먹는다? 새빨간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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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후보가 야권 표 갉아먹는다? 새빨간 거짓말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진보 정당이 선전할 때 수혜자는 민주당 세력

"노동자 후보가 나서면 결국 야권끼리 표를 갉아먹게 되어 새누리당이 반사이익을 얻는다."

이른바 '야권 연대'의 주된 근거로 사용되는 위 논리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새빨간 거짓말이다. 만일 정치적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 분들이 저런 얘기를 한다면, 사소한 실수라고 봐줄 수 있다. 하지만 책임 있는 정치 세력이 저런 논리를 구사한다면 그건 대중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저 논리가 거짓임을 잘 알면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위의 논리를 반박할 수 있는 간단한 반증 하나만 들어보겠다. 지난 글에서 얘기한 것처럼 평택을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 후보는 3번 출마한 적이 있다. 2004년 총선에서 11.86퍼센트, 2008년 총선에서는 8.16퍼센트, 그리고 이번 7.30 재선거에서 5.64퍼센트를 득표했다. 그런데 선거 결과는 어떠했을까? 2004년과 2008년에는 열린우리당과 민주통합당이,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는 새누리당이 당선되었다.

위의 논리대로라면 진보 후보가 야권 표를 많이 갉아먹을수록 야당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낮아져야 한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야권 표를 많이 '갉아먹을수록(?)' 야당 후보의 득표율은 높아졌고, 가장 덜 '갉아먹은(?)' 이번 재선거에서 오히려 여당이 당선되었으니 말이다.

2004년, 2008년과 이번 재선거에서 기호 2번 측은 모두 동일 인물인 정장선 후보였다. 인물의 차이가 가져온 결과도 아니라는 말이다. 똑같은 인물이 나선 선거에서 위 논리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는데, 이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건가?

실제로는 정반대의 결과가!

그렇다면 진보 정당 또는 노동자 후보가 야권 표를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새누리당·한나라당 세력의 표를 갉아먹는단 말인가? 놀라지 마시라. '인사이드 경제'는 그렇다고 본다. 지금부터 증거들을 제시해 보겠다. 아래 그래프는 지난 2004년에 치러진 총선에서 평택을 선거구에 출마한 후보들의 득표율을 읍면동 단위로 그려본 것이다.

ⓒ오민규

강조를 위해 초록색 점선으로 표시된 구간에서 매우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민주노동당의 득표율 높낮이와 한나라당 득표율이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상대적으로 열린우리당의 득표율은 민주노동당과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이런 현상은 2008년 총선에서도 똑같이 확인할 수 있다.

ⓒ오민규

2008년 총선 역시 한나라당 득표율이 가장 요동을 치는 초록색 점선 구간을 주목해서 보자. 민주노동당 득표율이 한나라당과 정반대로 움직인다는 점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민주통합당의 득표율은 민주노동당이나 한나라당과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아울러 2004년 그래프와 2008년 그래프를 비교해 보자. 민주노동당의 득표율이 전반적으로 4퍼센트 가까이 하락한 가운데, 한나라당의 득표율이 소폭 높아지면서 당선자인 정장선 후보와 격차가 줄어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점 역시 민주노동당의 세가 약해질수록 한나라당 득표율이 높아진다는 점을 반증한다. (공정한 비교를 위해 두 개의 그래프 축과 높이를 동일하게 맞춰놓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민주노동당으로 옮겨 탔다는 말일까? 그런 사례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은 더 복잡한 공정을 거친다. 진보 정당이 출마하면 기호 1, 2번에 대해 모두 공세를 펼치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기호 1, 2번이 얘기하지 않는 새로운 가치를 얘기하게 된다. 노동자들의 권리와 민주주의, 복지와 분배에 대한 얘기들 말이다.

진보 정당의 그런 목소리가 높아지고 조직력과 지지율이 늘어날수록, 선거판 전체가 왼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기호 1, 2번 모두 복지와 분배,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 저마다 한마디씩은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보수층을 대변하는 기호 1, 2번의 스텝은 꼬이기 시작한다. 특히 한나라당·새누리당 입장에서는 너무 어색한 얘기를 해야 되는 상황에 빠진다. 그러면 그럴수록 한나라당·새누리당에 대한 지지는 계속 떨어지게 된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가치에 눈을 뜬 지지자들이 이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수 진영을 배신했다는 비판 때문에 지지자들이 이탈한다. 배신감 때문에 이탈한 지지자들 중에는 아예 투표장에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새로운 가치에 눈을 뜬 지지자들은 민주당 또는 진보 정당으로 자신의 지지를 변경하게 되는데, 당연히 가장 큰 혜택을 입는 쪽은 진보 정당이 아니라 민주당이다. "그래도 될 사람 밀어주는 게 낫지 않겠어?"라는 심리를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소수이긴 하지만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민주노동당으로 지지를 변경하는 사례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저 친구들이 얘기하는 것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어. 당선은 안 되더라도 무시 못 할 지지율을 기록하면 정부 정책도 좀 바뀌지 않겠어?"

진보 정당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반대로 민주당 세력의 지지율이 오르게 된다. 진보 정당의 활동이 노동계급 내부를 깊이 파고들게 되면, 노동자와 그 가족들 안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의 일부가 민주노동당으로 지지를 변경하게 된다.

요약해 보자면, 진보 정당의 독자 출마와 선전은 한나라당·새누리당이 아니라 민주당 세력에게 더 많은 이득이 되어 왔다. 진보 정당의 지지율도 올라가긴 하지만, 민주당 세력은 그보다 더 큰 부분의 혜택을 얻게 된다.

(물론 이런 공정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한다. 우선 진보 정당이 민주당과 분명히 다른 목소리를 내야 한다. 민주당과 별다른 차별성이 없는 얘기를 한다면 실제로 서로 표를 갉아먹는 상황이 벌어진다. 다음으로, 최소한 대중의 눈높이에서 민주당이 한나라당·새누리당보다는 왼쪽에 있다고 보여야 한다. 두 세력이 거의 동일하게 느껴진다면 지지층의 이탈과 변화는 매우 드물게 벌어지게 된다.)

진보 정당 또는 노동자 후보의 역할

2004년 총선부터 지금까지 평택을에서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 중에서 유일하게 진보 정당 또는 노동자 후보가 출마하지 못한 선거가 있다. 바로 2012년 총선이다. 그해 치러진 평택을 국회의원 선거는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의 1:1 대결 구도로 진행된다. 진보 정당 또는 노동자 후보가 출마한 선거와 2012년 선거 결과를 비교해보면, 이들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민규

마찬가지로 공정한 비교를 위해 앞의 두 개 그래프 축과 높이를 동일하게 맞춘 것이다. 처음으로 진보 정당 후보가 출마하지 않은 이 선거의 결과는 새누리당의 승리였다. 진보 정당을 지지해온 이들 상당수가 민주통합당에 투표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도 말이다. 맨 앞에 얘기했던 논리가 허구임을 말해주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

진보 정당 후보가 출마했던 앞의 두 개 그래프와 비교했을 때, 민주통합당의 득표율이 상당히 요동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04년, 2008년의 경우에는 민주당 세력의 읍면동별 득표율이 매우 고르게 나타난 바 있다. 뒤집어서 얘기하면 진보 정당의 독자 출마가 민주당 세력에 대한 지지율을 고르게 만들어줬다는 뜻이다.

ⓒ오민규

마지막으로 이번 7.30 재선거 결과를 보자. 6년 만에 진보 진영이 노동자 후보를 출마시킨 이번 선거에서도, 2004·2008년 총선 때와 마찬가지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김득중 후보의 지지율과 새누리당 지지율이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김득중 후보 지지율은 새정치연합 지지율 추세와 유사하게 움직이기까지 한다.

아울러 2004년, 2008년, 2012년의 추세와 비교를 해보면, 새누리당을 상징하는 빨간색 선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위로 이동하고, 반대로 새정치연합을 상징하는 파란색 선이 계속 하락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진보 정당 및 노동자 후보의 지지율도 계속 하락하고 있다. (단, 2014년 재선거 그래프는 새누리당의 동별 득표율 최고치가 68퍼센트까지 나온 탓에, 앞선 3개 그래프 축과 일치하진 않는다.)

반(反)새누리당 영역을 넓혀온 진보 정당과 노동자 후보

자, 그럼 다시 한 번 평택을 선거구의 노동자 밀집 지역인 안중읍에서 각 정당들의 득표율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펴보자. 2004년 총선부터 지난 7.30 재선거까지 기호 1, 2번과 진보 정당 또는 노동자 후보의 득표율을 아래 표로 나타내봤다.

ⓒ오민규

민주당 세력은 45~48퍼센트를 기본으로 해서 진보 후보가 출마하지 않은 2012 총선에는 진보 정당지지 세력 일부의 표를 흡수해 54퍼센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진보 정당 또는 노동자 후보의 득표율은 계속 하락해왔다. 그와 정반대의 경향을 보이는 한나라당·새누리당은 지속적으로 득표율을 올려왔다. 자, 이래도 진보 정당 또는 노동자 후보가 야권의 표를 갉아먹는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진보 정당 후보가 출마한 2004년과 2008년 총선의 경우 민주당 세력과 진보 정당의 지지율을 합하면 안중읍에서만 2/3 안팎을 차지한 반면, 2010년 야권 연대 전략이 시작된 이후에는 오히려 두 세력을 합해 절반을 겨우 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따라서 진실은 이것이다. 진보 정당 또는 노동자 후보가 야권의 표를 갉아먹는다는 말은 거짓이다. 반대로 그들의 역할은 전체적으로 반새누리당의 영역을 넓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작업의 가장 큰 수혜자는 아이러니하게도 민주당 세력이었다.

그러나 새누리당을 꺾자는 명분 아래 진행된 야권 연대 전략 이후 오히려 반새누리당 영역이 계속 좁아지고 있다. 노동자 정치가 노동계급 속에 깊이 뿌리박으면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할 때에만 새누리당을 꺾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 진실이다.

왼쪽에서 뛰는 심장이 있어야만

"모든 게 야권 연대 때문이란 말인가?" 지난 글(환멸 부른 야권 연대, 진보 정당의 자충수)을 읽고 몇몇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해오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진단은 옳지 않다. 야권 연대가 핵심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야권 연대를 낳은 좀 더 근본적인 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2004년 이후 거의 모든 정치 세력이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진보 정당 또는 노동자 후보가 반새누리당 영역을 넓힐 수 있었던 전제 2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들이 진짜로 민주당 세력과는 분명히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대중이 보기에 민주당 세력이 새누리당보다는 왼쪽에 있다는 판단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2004년 이후 이 2가지가 모두 약해지기 시작했다. 진보 정당들이 내는 목소리가 민주당과 점점 비슷해지기 시작했다는 점, 즉 진보 정당이 우경화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새정치연합이 정의당을 향해 통합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겠는가. 국회에 있어보니 자신들과 얼마 다르지 않더라(!) 하는 게 새정치연합 일각이 제시한 근거이다. 사실 야권 연대 역시 진보 정당이 오른쪽으로 이동한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새정치연합의 행보 역시 도대체 새누리당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얘기는 최근 들어 거의 대중의 상식 수준이 되어버린 것 같다. 유가족이 곡기를 끊고 수천리 길을 행진하면서 요구하고 있는 세월호 특별법, 그마저도 새정치연합은 새누리당과 함께 수사권·기소권 배제에 합의하고 말았다.

오히려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민생과 복지 문제를 적극적으로 공약하며 쟁점화한 것은, 민주당 세력이 아니라 새누리당 박근혜 세력이었다. 대중의 눈높이에서 보더라도,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 어느 쪽이 더 왼쪽에 있는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오민규

그 결과, 7.30 재선거에서 노동자 후보가 과거 민주노동당 후보에 비해 파괴력이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반새누리당 영역을 넓히는 힘 또한 과거에 비해 상당히 부족했다. 하지만 위 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진보 후보가 출마하지 않았던 2012 총선에 비해 반새누리당 영역을 미약하나마 넓힌 측면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제 제대로 진실을 얘기해야 한다. 평택을에서 김득중 후보의 5.64퍼센트가 있었기에, 그나마 새정치연합이 42.30퍼센트라도 받을 수 있었던 거다. 2004년과 2008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8~12퍼센트의 지지를 받았기에 그나마 민주당 세력이 당선될 수 있었던 거다.

동작을에서 김종철 후보의 1.40퍼센트가 노회찬 후보에게 보태졌으면 나경원 후보를 꺾을 수 있었을 거라고? 그 얘기 역시 진실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야권 연대의 온갖 허상을 깨고 김종철 후보를 지지한 1.40퍼센트가 버티고 있었기에, 그나마 노회찬 후보가 48.69퍼센트를 얻어 나경원 후보 턱밑까지라도 쫓아갈 수 있었던 거다.

김종철 후보가 사퇴했다면 1.40퍼센트의 상당 부분은 노회찬 후보 쪽으로 이동하기보다 투표장을 찾지 않는 편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1.40퍼센트가 눈 부릅뜨고 살아 있었기에 반새누리당 영역이 넓어지고, 그 속에서 노회찬 후보가 지지를 넓힐 여지가 커진 것이다. 1.40퍼센트를 죽인다면 노회찬 후보의 지지가 넓어질 여지도 함께 죽었을 것이다. 이게 진실이다.

▲ 7.30 재보선에서 평택을에 출마한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 ⓒ김득중 선거대책본부

그렇다면 왜?

이런 선거 공학의 원리를 과연 민주당 세력은 모르고 있었을까? 선거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뛰어본 전문가들도 있을 텐데? 그렇다. 그래서 처음에 얘기한 거다. 만일 책임 있는 정치 세력이 노동자 후보가 야권 표를 갉아먹는다는 얘기를 한다면 그건 사기 치는 짓이라고 말이다.

민주당 세력은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를테면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이 이회창을 꺾은 드라마틱한 선거에서, 그 누구보다 권영길 후보가 끝까지 완주했기에 노무현이 당선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특히 이제 새로운 진보의 기치를 내걸고 열심히 뛰신 권영길 후보님, 선전하신 데 대해 축하드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큰 발전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2002년 12월 19일 밤, 선거 연대를 했던 정몽준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당선을 확정지은 시점에, 노무현 후보가 준비된 연설문 없이 기자들 앞에서 밝힌 소감의 한 대목이다. 물론 이 대목 앞에는 이회창 후보의 노고를 위로하는 내용이 있긴 했지만, "앞으로 큰 발전이 있기 바란다"는 덕담까지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다.

진보 진영이 1997년 이후 치른 4번의 대통령 선거 중에서, 2002년 대선이 가장 성공적이라 평가받은 선거전이었다. 100만 표에 가까운 득표수도 그러했지만, 권영길 후보가 TV 토론에 노무현·이회창 후보와 함께 등장해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까지 만들며 민주노동당의 인기를 한껏 올려놓기도 했다.

특히 아직까지도 대중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는 선거 슬로건이 있었고 무상 교육, 무상 의료 등 '무상 시리즈' 정책이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선거판 자체를 왼쪽으로 이동시키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이회창·노무현 후보 역시 노동자의 권리, 비정규직 문제, 복지 쟁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TV 토론이 양자 대결 구도가 아니라 권영길 후보를 포함한 3자 토론으로 진행될 때, 많은 이들이 권영길 후보가 노무현의 표를 갉아먹어 이회창이 낙승할 것이라 내다봤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우선 자기보다 확실히 왼쪽에 서 있는 권영길 후보가 있다는 점에서, 노무현 세력은 지긋지긋한 '빨갱이' 공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노동과 복지에 대한 다양한 쟁점을 권영길 후보가 얘기하는 가운데, 노무현 후보 역시 비정규직 차별 시정 등의 쟁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거기서 이회창 후보의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다. 이미 낙승을 확신했기에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심리가 발동한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 권영길 후보의 공세는 끊임없이 이회창의 지지율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러니 드라마틱한 역전승을 거둔 노무현 후보 입장에서, 당선이 확정된 그 순간에 가장 고마운 이가 바로 권영길 후보 아니었겠는가.

사실 민주당 세력은 이런 원리를 매우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왼쪽에 진보 정당 또는 노동자 정당이 우뚝 서 있는 것이 선거전에서는 분명한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민주당 세력은 선거 승리만을 위해 존재하는 세력이 아니다. 그들 역시 보수 진영이자 자본가 정치 세력의 일원으로서, 선거에서 승리하면 국가를 통치하는 자리에 서게 될 세력이다.

만일 통치자의 자리에 앉게 된다면, 그들 입장에서 가장 골치 아픈 세력이 바로 진보 정당 또는 노동자 정당이다. 독립적인 정치 세력을 만들고 권력에까지 근접하는 꿈을 꾸는 이들이 노동계급 속에서 늘어나는 건, 새누리당만이 아니라 민주당 세력에게도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독립적인 정치 세력의 성격을 중화시키기 위한 '야권 연대'에 그들 역시 동참했던 것이다.

그리고 민주당 세력이 쳐놓은 덫에 진보정당들은 보기 좋게 걸려들고 말았다. 아니, 어쩌면 스스로 그 덫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해야 할까? 야권 연대 속에서 국회의원 몇 자리가 생기게 되고, 점점 더 큰 파이를 향해 내부 경쟁과 분열이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그 뒤의 얘기는 모두 아는 스토리이다. 진보 정당의 분열과 타락은 이제 국민들에게 존재감마저 상실할 위기 앞에 서게 되었다.

그러자 민주당 세력은 더 이상 야권 연대 카드를 써먹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자신의 왼쪽에 올곧게 서 있는 진보 정당, 노동자 정당만이 자신을 위협할 뿐, 지리멸렬한 진보 세력을 무서워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7.30 재선거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당 대 당 야권 연대의 필요성'을 성명으로 내어놓는 진보 정당들을 보면서, 민주당 세력은 또 얼마나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있을까. 비록 미시적인 영역인 평택을만 파본 것이지만, 지난 10여 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배우고 또 고민해야 한다. 지난 글에서 얘기한 것처럼, 야권 연대에 환멸을 느낀 조직 노동자들 속에서 어떻게 다시 희망을 만들 것인지, 그리고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20~30대 미조직 젊은 노동자들의 마음을 담을 그릇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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