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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사람들

[창비주간논평] 우리사회가 강요하는 '투명인간'의 모습

H. G. 웰즈(Wells)가 투명인간의 꿈을 꾼 최초의 인물은 아닐 테다. 웰즈의 소설에서 투명인간은 결국 혐오와 공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려는 꿈에는 분명 은밀한 해방의 계기가 있다. 기실 어릴 적 한번쯤 투명인간이 되는 공상에 잠겨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투명인간(The Invisible Man, 1897)>의 괴팍한 과학자 그리핀 이후로도 누군가 세상 한구석에서 그 꿈의 실험을 계속해왔대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싶다.

그런데 이즈음 우리에게 투명인간의 꿈은 이상한 방식으로 도착하고 있는 듯하다. (얼마간의 비유적 의미를 포함해서) 사실상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할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런 존재의 증가가 뚜렷한 사회적 징후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기는 바로 그런 맥락에서 ‘투명인간’의 모티브가 한국소설의 중요한 테마로 부상한 지도 꽤 되었다.

우리 시대 ‘투명인간’의 모습들

황정은의 단편 <모자>(2006)에서 집 안 아무데서나 모자로 변해 가족들의 발에 차이기 일쑤인 무력한 아버지의 존재는 환상의 느낌 없이 담담한 리얼리티 속에 제시된 바 있다. 생일날 장난으로 시작된 투명인간 놀이가 이미 보이지 않는 거나 진배없던 아버지의 ‘투명’을 섬뜩하게 환기하는 손홍규의 단편 <투명인간>(2009)의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근자 누구나 공감할 만한 대목이 역시 황정은 소설에 나온다. 이번에는 독거노인의 형상이다.

“연체금이 있을 때나 호명되는 사람들. 노인은 아마도 그런 사람이었고 죽은 지 몇 달 만에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고 뉴스에 나올 만한 사람이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누가>, 『문예중앙』 2013년 겨울호)

그런데 소설화자인 ‘그녀’가 이사 갈 집의 전 세입자로 맞닥뜨리게 된 이 독거노인은 5년간 어떻게 생활한 걸까. 노인은 방 둘에 거실이 있는 조그만 연립주택에서 작은 방 하나만 쓰고 나머지 공간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사용하지 않은 방이야 말할 것도 없고 부엌과 거실 바닥 역시 먼지로 덮여 거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는데, “잘 보니 현관에서 노인의 방까지 좁다란 길이 나 있었다.” 그리고 노인이 5년 동안 머물렀던 방의 벽엔 둥글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노랗다 못해 붉은색을 띤 기름얼룩.” 그녀는 얼룩을 보며 바로 그 자리에 노인이 머리를 대고 앉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텔레비전도 없는 방에서 그렇게 앉은 노인의 시선이 갈 곳이라곤 맞은편 벽감뿐이다. 두개의 문짝이 달린 벽감은 꼭 관처럼 보인다. 딱히 이 ‘관’의 이미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노인은 이미 ‘살아 있는 주검’(living dead)이며 사회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존재다.

물론 황정은 소설은 이 대목에서도 독거노인에 대한 사회적 보고를 보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통상의 사회학적 조망이 포착하기 힘든 지점을 건드린다. 그것은 모종의 죄의식에 대한 환기라고 할 수 있는데, 보통은 그 책임이 사회나 세상의 몫으로 돌려지는 부분이겠다. 그러니까 ‘그녀’는 정당한 계약에 의해 그 집으로 이사했음에도 자신이 노인을 내쫓은 것 같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노인은 아마 이보다 더 좋지 않은 곳으로 가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게 내 탓인가. 내가 내쫓았나. 그녀는 이불을 발로 차며 돌아누웠다. 노인은 방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을 뿐이고 내게는 있었을 뿐. 그냥 그것뿐. 만사가 그뿐.”

맞는 말이다. 그런 생각에 잠시 사로잡혔다 하더라도 실상은 ‘그뿐’이다. 더 어쩌겠는가. 그러나 네 번의 ‘뿐’이 반복되는 투정 같은 혼잣말이 ‘뿐’ 이상의 것―문제의 사회적 구조와 연관 속에서 ‘그녀’와 ‘노인’이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박적으로 지시하고 있음을 누가 모를 수 있겠는가. 게다가 비정규직 전화상담원(은행이나 신용카드회사의 연체자에게 독촉 전화를 거는 일을 한다)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내일’은 또 어떠할 것인가. 사실 조용한 곳을 찾아 이사 온 노인의 집에서 그녀가 겪게 되는 층간소음의 지옥도는 그녀의 현재 역시 벗어나기 힘든 그 사회적 악순환의 굴레 속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하기에 족하다.

이 사회가 강요하는 투명인간으로서의 삶

성석제의 문제적 장편 <투명인간>(창비 2014)에서 ‘투명인간’이란 개념은 반드시 부정적 함의로만 쓰이는 것은 아닌 듯하다. 선의의 인간 김만수가 감내하는 경제적 곤경을 포함한 세상만사의 고통이든, 연탄가스중독 이후 가족의 짐으로 살아가는 누이 명희의 고통이든, 자폐와 ‘틱 장애’를 앓으며 왕따로 괴롭힘을 당하는 아들 태석의 고통이든, 그녀 자신 신장병을 앓으면서 명희와 태석을 건사하는 아내 송진주의 고통이든, 어떤 고통이 극한으로 치달아 견딜 수 없을 때 자신의 몸으로부터 떠올라(혹은 몸을 지우고) 투명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축복이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말한다 한들 그들이 자신의 의지나 바람과 무관하게 이 사회에서 버텨내지 못하고 밀려나는 존재,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지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투명인간>론을 쓰는 자리가 아니므로 하나만 덧붙이기로 하자. 소설의 마지막, 투명인간 김만수와 또 다른 투명인간(다소 모호하게 되어 있지만 소설의 처음과 끝을 책임지는 이 인물은 동생 석수일 것이다. 세상의 악마적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면 영혼까지 내줄 작정으로 살다―이게 우리 평균적 모습이 아니고 무엇일까―사라진 석수. 소설의 마지막 절규, “형. 만수 형”은 석수의 자책과 개심을 말해주는 걸까)이 나누는 대화 한 토막. 투명인간 이전의 삶도 긍정했듯 투명인간 이후의 삶도 긍정하는 듯한 김만수에게 상대는 망가진 세상의 시스템을 거론하며 반문한다. “나 혼자 깨끗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363면)라고. 그러자 김만수가 답한다.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라도 굴러가는 것이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노력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그렇게 하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364면)

당신은 혹 알고 계신가. 이 소설을 읽으며 늘 세상의 좋은 쪽만 보는 선의의 인간 김만수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기에 나도 물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이 방법뿐인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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