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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닷! 통영의 맛과 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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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가을이닷! 통영의 맛과 멋

9월 통영학교

코발트블루, 청보석처럼 푸른 통영 바다에서는 여름이 가기도 전에 가을이 먼저 옵니다. 천고마비(天高馬肥)의 시절, 가을은 맛이 넘쳐나는 계절입니다. 그중에서도 통영(統營)은 깊은 맛의 본향(本鄕)입니다. 통영은 맛있습니다. 그리고 멋있습니다. 자다가도 일어나 가고 싶은, 여행자들을 한없이 유혹하는 도시 통영. 통영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여행자)의 초가을, 제8강은 9월 20(토)∼21(일)일 1박2일로 통영 일대에서 열립니다. 통영의 맛도 보고 내내 푸른 물결 넘실대는 삼칭이 해변 십리 길도 걷습니다.

▲해무에 쌓인 통영 바다가 선경을 방불케 한다. Ⓒ이상희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시인, 에세이스트, 여행자이며 인문학습원 <섬학교> 교장선생님이기도 합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에 등단했으며, 문화일보 ‘평화인물 100인’에 선정되었습니다. 2006년부터 사람 사는 한국의 모든 섬을 걷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그동안 300여 개의 섬을 걸었습니다. 지금도 섬들을 걸으며 섬의 문화와 풍속, 사람 사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011년 3월부터는 통영 동피랑 마을에 거주하며 통영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일도 병행해 왔고, 프레시안에 <통영은 맛있다>를 연재한 뒤 같은 제목의 책으로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저서로 <통영은 맛있다>(문광부 우수교양도서) <어머니전>(문광부 우수문학도서) <자발적 가난의 행복>(문광부 우수문학도서)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섬-통영의 섬들> <그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이다> <바다의 황금시대, 파시> <보길도에서 온 편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등 다수가 있습니다. 특히 교장선생님의 책 <통영은 맛있다>(생각을담는집 刊)는 통영학교의 교재인 셈입니다.

교장선생님은 <통영학교>를 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통영은 경상도지만 경상도가 아니다!”
경상도 음식은 짜장면도 맛없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속설을 보기 좋게 깨주는 곳이 경상남도 통영입니다. 통영은 맛있습니다. 왜 유독 통영만 맛있을까요. 통영은 경상도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행정구역은 경상도지만 맛의 유전자는 경상도 혈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통영(통제영)이라는 군사도시가 생긴 1605년부터 통제영이 폐지된 1895년까지 300년 가까이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라 삼도수군통제영 소속이었습니다. 삼도수군통제영은 경상, 전라, 충청 해안 지방과 섬들의 군사기지가 하나로 묶인 ‘특별자치구역’이었고 통영은 그 중심도시(본영)였습니다. 통영이란 이름도 삼도수군통제영의 줄임말입니다.

통영이 경상도가 아니었으니 맛의 유전자도 경상도 혈통이 아닌 것은 당연합니다. 통영의 맛은 전라, 충청, 경상도의 맛이 한데 어울어져 만들어진 아주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한 맛이었습니다. 그러니 행정구역이 경상도로 편입된 지금까지도 유독 통영의 음식이 맛있는 것입니다. 입맛 까다로운 전라도 사람들도 통영에 와서는 음식이 맛있다고 감탄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통영은 또 변방의 소도시지만 통영(統營)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합니다. 사람들은 통영을 ‘동양의 나폴리’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항구란 뜻이지요. 통영은 예향(藝鄕)입니다. 박경리, 윤이상, 유치환, 김상옥, 전혁림, 김춘수 등 수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한 곳이지요.

▲통영 미륵산 정상에서 본 야소골 풍경 ⓒ이상희

통영은 또 이순신 장군이 한산해전을 승리로 이끈 구국의 땅이기도 합니다. 통영은 300년 가까이 삼도수군통제영의 사령부가 있던 군사도시였지요. 통영이란 이름도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 역사, 문화적 전통이 통영 사람들의 자부심을 키운 자양분이었을 것입니다. 박경리의 <토지>에도 꼬마 아이의 입을 통해 그 자부심이 표출됩니다.

“갯가라 카지마는 옛날에는 사또보다 높은 수군통제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명정리에는 이순신 장군을 모시놓은 사당도 있고요. 저어기 저, 왜놈들을 몰살시킨 판데목도 있고 통영 사람들 콧대가 얼마나 높으다고요? 그래서 왜놈 서장도 보통내기가 와서는 맥도 못춘다 안캅니까?”

아직도 통영과 충무를 별개의 도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통영과 충무는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통영의 일부가 한때 충무였던 때가 있었지요. 본래 통영은 하나였으나 1955년 통영군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되면서 통영은 충무시와 통영군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의 통합으로 충무란 이름은 사라지고 통영시만 남았습니다. 통영이 다시 하나가 된 것이지요. 면적 234.8㎢, 인구 14만. 바다의 땅, 통영은 250여 개(최근에는 바위섬들까지 포함해 500여 개라고도 합니다)의 섬이 있는 ‘섬나라’이기도 합니다.

1603년 제6대 이경준 삼도수군통제사가 두룡포란 작은 포구에 터를 닦고 1605년 세병관, 백화당 등 삼도수군통제영 건물을 지으면서 통영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군사도시 통영이 생기면서 살림을 뒷받침 해주는 12공방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통제영은 이경준 통제사부터 208대 홍남주 통제사까지 300년 가까이 존재했지요.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통영은 예향인 동시에 맛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멋은 맛에서 왔다 합니다. 맛이란 물산이 풍부할 때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배를 채우기에도 급급하다면 맛 같은 거 따질 여력이 없습니다. 척박한 지역일수록 음식이 맛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풍요로워야 맛이 생기고 마침내는 음식에 멋까지 부리게 됩니다. 그렇게 문화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통영은 풍요로운 땅입니다. 그래서 통영의 음식은 각별히 맛있습니다.

통영의 바다는 사철 풍성합니다. 계절을 타는 동해나 서해와 달리 남해바다는 어느 계절이나 다양한 해산물이 넘쳐납니다. 동서남해 모든 바다의 해산물들이 모여드는 까닭입니다. 그 남해에서도 통영은 가장 많은 해산물들의 집산지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통영을 걸으며 통영의 맛있는 해산물 음식과 역사와 문화를 맛보고 느낄 것입니다. 통영학교는 그 길라잡이가 될 것입니다. 맛있는 통영, 멋있는 통영. 여행자라면 누구나 통영의 맛과 멋에 깊이 중독되고 말 것입니다.

▲통영다찌 상차림. 다찌는 다양한 해산물 음식을 모두 맛볼 수 있는 통영의 보물입니다. ⓒ이상희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에 대한 설명을 듣습니다.

해산물 요리의 알파와 오메가, 통영 다찌

싱싱한 제철 해산물은 발품만 팔면 어느 바닷가에서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딜 가든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요리는 제한적입니다. 봄이면 쭈꾸미나 도다리회 한 가지만 수북하게 쌓아놓고 배가 터지도록 먹어야 하고 가을이면 대하만 질리도록 먹어야 합니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물리도록 한 가지만 먹어야 하는 것은 고역입니다.

맛있는 해산물을 조금씩 다양하게 맛 볼 수는 없을까요. 생선회도 조금, 생선구이도 조금, 쭈꾸미도 조금, 꽃게도 조금, 멍게도, 굴도, 도다리도, 물메기도 조금씩 다 맛볼 수는 없는 걸까요. 통영에서는 가능합니다. 다찌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통영의 다찌집에서는 계절마다 제철 생선회와 해산물들이 다 있습니다. 싱싱함과 맛깔스러움, 무엇 하나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경상도 음식은 맛없다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주는 곳이 통영의 다찌집입니다. 술을 시키면 안주는 주인이 주는 대로 먹는 술집이 다찌입니다. 다찌집에서는 그날그날 시장에 나온 식재료에 따라 메뉴가 바뀌고 계절마다 제철 음식이 나옵니다.

전주의 막걸리 골목처럼 다찌는 본래 술값만 받고 안주값은 안 받는 술집문화입니다. 대신 술값이 좀 비쌉니다. 술값에 안주값이 포함되니 그렇습니다. 하지만 안주를 생각하면 결코 비싼 것이 아닙니다. 음식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를 하고도 남지요. 요즘은 다찌에서도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려워 기본요금을 받기도 합니다.

대체로 통영 사람들은 다양한 해산물 안주를 원하지만 안주를 많이 먹는 편이 아닙니다. 맛있는 안주를 고루고루 조금씩 먹는 것을 즐깁니다. 다찌 문화가 유행할 수 있는 배경이지요. 통영 사람들도 다찌의 어원은 잘 모릅니다. 통영문화원 김일룡 향토사연구소장은 다찌가 “일본 선술집을 뜻하는 다찌노미(立(ち)飲み)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름의 유래야 어떻든 다찌집은 통영 해산물 요리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입에서 살살 녹는 졸복 수육. 그야말로 천상의 안주, 천계의 옥찬이다. ⓒ강제윤

천계(天界)의 옥찬(玉饌) 마계(魔界)의 기미(奇味), 복국

통영에서의 아침 해장은 복국입니다. 통영은 이 땅에서 복국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고장이지요. “복어는 천계(天界)의 옥찬(玉饌)이 아니면 마계(魔界)의 기미(奇味)다. 복어를 먹으면 신통하게도 체내의 불화(不和)가 사라지고 엄동설한의 추위도 잊어버리게 한다.”

<미미구진(美味求眞)>이란 책에서 인용했다는 정문기 선생의 <어류박물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독이 있는 물고기들은 대체로 맛이 뛰어납니다. 한중일 세 나라만이 아니라 동남아, 이집트 사람들도 복어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 위험한 물고기를 탐식합니다. 복어 중에서도 맹독을 가진 복어일수록 맛이 일품이니 그 유혹 또한 강렬합니다.

미국 FDA도 복어회를 캐비아, 푸아그라, 트뤼플(송로버섯) 등과 함께 세계 4대 진미 식품으로 정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소동파는 복어를 먹어본 뒤 “복어의 신비한 맛은 생명과도 바꿀만한 가치가 있다”고 찬양했습니다.

복어가 독이 있는 위험한 물고기지만 전문가의 손길을 거치면 안심하고 먹을 수 있습니다. 아가미와 알, 내장을 따내고 뼈를 다져서 물에 담가 핏물을 빼내면 무탈합니다. 더한 자극을 즐기려는 욕심이 화를 부르지요. 술꾼들에게 복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혹입니다. 복어회 한 접시는 천상의 안주이고 북국 한 그릇은 술독을 푸는데 명약입니다.

요즘 통영 복국집들의 주재료는 졸복입니다. 통영 복집들이 본래부터 졸복을 썼던 것은 아닙니다. 졸복은 작아서 손질하기 성가시고 품이 많이 드는 까닭에 예전에는 잘 취급하지 않고 밀복류를 썼다 합니다. 그러나 크기는 작아도 졸복의 맛이 밀복류보다 더 깊고 더 개운합니다. 육질도 더 쫄깃하고 국물도 시원합니다. 복국으로 속을 달랬으니 이제 통영의 길을 걸으러 가봅시다.

▲내내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삼칭이 해안길 Ⓒ통영학교

바닷길 4km, 삼칭이 해안길

평지가 드문 통영에서 삼칭이 해안길은 더없이 걷기 좋은 길입니다. 미륵도 마리나리조트 옆에서 영운리까지 4km를 내내 바다만 보며 걸을 수 있으니 흔치않은 해안길이지요. 이 길은 자전거 도로인 까닭에 시멘트 포장인 것이 조금 아쉽지만 시리도록 푸른 바다는 그 정도 아쉬움이나 불편쯤 잊게 해주기에 충분합니다. 무엇보다 자동차가 다니지 않으니 안전하게 걸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삼칭이란 이름은 삼천진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길의 끝자락 마을인 지금의 영운리에 삼도수군통제영의 수군진인 삼천진이 있었습니다. 진장은 종9품의 권관이었습니다. 삼천진은 본래 삼천포에 있었으나 1619년(광해군 11년) 영운리로 옮겨오며 삼천진이란 이름도 함께 왔습니다. 과거에는 진이 옮겨가면서 이름도 옮겨갔습니다. 선유도에 있던 군산진이 지금의 군산시 땅으로 옮겨가면서 군산이란 이름도 따라갔고 남양에 있던 영종진이 영종도 땅으로 옮겨가면서 이름도 따라갔습니다. 삼천포란 이름은 고려시대 개경에서 뱃길로 삼천리 거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

이 길에는 수륙리 마을이 있습니다. 삼도수군통제영 시대 죽은 군인들의 원혼을 달래던 수륙제를 행하던 장소라 해서 수륙리입니다. 이 바다는 얼마나 많은 영혼들의 거처인가요. 임진왜란으로 죽은 수천, 수만 적과 아의 영혼들, 무고한 백성들의 영혼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훈련 중 많은 수군이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공납을 하기 위해 물질하다 숨을 거둔 백성들의 원혼 또한 부지기수겠지요.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극락으로 천도하던 곳, 수륙리. 그 바다가 오늘은 더없이 평화롭고 무심하고 푸르기만 합니다.

▲삼칭이 해안길의 바위섬들 풍경이 마치 수묵화 같다. Ⓒ통영학교

통영 소녀 금이, 박경리가 되다! - 박경리기념관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본명은 ‘금이’였습니다. 통영에서 태어나 통영국민학교에 다녔던 소녀 금이는 수업시간에도 소설책을 볼 정도로 책을 좋아했다 합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 공부는 잘 하지 못하고 중간쯤 했다고 합니다.

"집이 가난해 엄마가 바느질 등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지만, 어린 금이는 언제나 당당하고 궁색한 법이 없었다. 그리고 자립심이 강하고 무슨 일이던 최선을 다했지. 평생 그랬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해 보면..."(<한산신문> 김영화 기자의 홍봉연 할머니 인터뷰 중)

소녀 금이와 어린 시절 친구였던 홍봉연 할머니의 증언입니다. 박경리는 1946년 김행도와 결혼했지만 한국전쟁 때 남편이 납북되어 홀몸이 됐습니다. 박경리는 아들, 딸 둘을 데리고 고향 통영으로 내려왔습니다. 생계를 위해 항남동 오거리 부근에서 수예점을 열었습니다. 당시 친구들이 수예점을 드나들며 물건을 많이 팔아주었다 합니다. 자존심 상하지 않게 도와준 것이지요. 후일 박경리는 통영을 떠나 50년 동안 통영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통영과의 불화라는 피치 못할 사연이 있습니다. 그러다 다시 통영을 찾은 것은 1994년. <토지> 5부 집필이 끝난 뒤 통영시민문화회관에서 열린 초청강연회를 통해서였습니다.

세병관에서 충렬사 방향으로 가다보면 나오는 동네가 소녀 금이가 어린 시절 살던 동네, 간창골입니다. 간창골은 삼도수군통제영 관아가 있던 마을인 관청골이 와전된 이름이지요. 금이가 태어난 뒤 아버지는 젊은 기봉이네와 딴살림을 차려나갔고 어린 금이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적삼 하나만 갈아입어도 서문안 고개가 환해졌다”고 할 정도로 고왔다지요. 아버지는 새터(지금의 서문시장 일대)에서 차부를 운영했다 합니다. 통영에 하나뿐인 화물차 터미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통영에서 생선을 싣고 진주로 보내면 진주에서는 과일을 싣고 오던 화물차 차주였으니 제법 유지였지요. 차부에는 살림집이 딸려 있었고 아버지는 거기서 젊은 여자인 '기봉이네"와 딴 살림을 차렸습니다. 어린 금이는 그 시절부터 상처를 먹고 자랐습니다.

통영시 산양읍 신전리 양지농원 입구에 박경리기념관이 있습니다. 기념관 뒷산 중턱 양지바른 곳에는 박경리 선생의 묘지도 있구요. 기념관 전시실에는 <토지> 친필 원고와 여권, 편지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유럽 5대 작곡가, 사상 최고의 음악가 44인에 꼽힌 윤이상 - 윤이상기념관

통영이 낳은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선생의 선조는 세병관을 세우는데 공헌한 사람 중 한 분이었고 증조부까지 선조들은 대부분 수군 장교로 통제영에 복무했었다 합니다. 윤이상 선생은 그의 자서전격인 루이제 린저와의 대화 <상처 입은 용>에서 고향 통영에 돌아가 노년을 보내다 그곳에 묻히고 싶다고 소망했습니다.

"어느 날 은퇴해 고향으로 돌아가 그저 조용한 바닷가에 앉아 물고기를 낚고 마음속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위대한 고요함 속에 내 몸을 뉘였으면 합니다. 또 나는 그 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내 고향 땅의 온기 속에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도천테마파크에는 윤이상의 동상이 있고 2층 전시실에는 윤이상의 흉상이 있습니다. 살아 생전 그토록 고향에 오고 싶어 했으나 조국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회한을 품고 이승을 하직했겠지요. 그 대신 그의 동상이 고향 통영으로 왔습니다. 2층 전시실의 흉상은 평양 윤이상연구소에 있는 흉상을 만수대창작사에서 복제해 준 것입니다. 윤이상평화제단의 의뢰로 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흉상 또한 2009년 6월 인천항으로 반입됐으나 북한의 핵실험 후 정부의 반입보류 조치로 오랫동안 인천세관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통영예총의 탄원으로 어렵사리 통영으로 왔습니다.

윤이상의 흉상 또한 생전의 윤이상처럼 고초를 겪었으니 그는 분단의 비극을 사후에까지 온몸으로 체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윤이상은 생존 당시 현존하는 유럽 5대 작곡가에 선정됐고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의 교수들에 의해 사상 최고의 음악가 44명 중 한명으로 뽑혀 이름이 동판에 새겨지기도 했습니다. 20세기 작곡가로는 윤이상과 스트라빈스키 등 네 명뿐입니다.

서호 시장 뒤편, 도천동 윤이상 선생 생가 터에 윤이상기념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는 윤이상기념관이란 사실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건물 외부에는 기념관 간판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원 입구 표지석에는 도천테마파크란 이름만 눈에 띌 뿐이지요. 도천테마파크는 원래 유이상 기념공원으로 계획되었었는데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부 사람들의 반대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윤이상 선생은 동백림 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투옥생활을 했지만 후일 고문에 의해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져 누명을 벗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껏 근거 없는 주장으로 선생을 비난하고 욕되게 하는 이들이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윤이상기념관은 유품 전시실과 실내공연장과 실외 공연장인 경사광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공원에는 윤이상 선생이 살던 독일의 집 정원에서 가져온 가문비나무가 기념 식수되어 있습니다. 전시관은 2층입니다. 전시관 안에는 윤이상 선생의 어머니가 쓰던 함지박과 호리병, 독일유학 시절 쓰던 바이올린, 친필악보, 그가 입던 옷들과 중절모, 그가 어린 시절 썼던 요강까지 전시되어 있습니다.

▲저 바다 밑 터널의 끝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까? Ⓒ강제윤

왜구들의 영혼을 떠받들기 위해 팠다! 해저터널

해저터널 위를 흐르는 좁은 해협은 통영운하입니다. 통영의 야경은 어느 항구도시보다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운 야경은 상당부분 통영운하에서 비롯됩니다. 미륵도와 통영을 잇는 통영대교와 충무교 두 다리 아래 바다가 통영운하입니다. 오랜 옛날 통영반도와 미륵도

는 하나로 이어진 땅이었습니다. 미륵도는 섬이 아니라 육지였는데 뱃길을 단축시키기 위해 미륵도와 통영 사이의 좁은 목을 파 운하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미륵도는 섬이 되었습니다. 충남 안면도와 같은 경우입니다.

통영운하 아래에 뚫린 해저터널은 1931년 7월 26일 착공하여 1년 4개월만인 1932년 11월20일 완공됐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일제는 해저터널을 파기로 한 것일까요. 그 당시에도 미륵도와 통영 사이에는 나무나 돌로 된 다리가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대체하고 새 다리를 건설하면 될 터인데 굳이 해저터널을 판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도 야담이 전해집니다. 해저터널 부근 바다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이 수없이 빠져 죽은 곳입니다. 일제는 이곳에 다리를 놓게 되면 그들 조상들의 영혼을 밟고 다니게 되는 형국이기 때문에 터널을 팠다고 합니다. 터널을 파고 바다 밑으로 다니면 오히려 자기 조상들의 영혼을 받들고 다니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 다리를 놓지 않고 해저터널을 팠다는 것이지요. 기록이 없으니 확인할 수 없지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통영운하 야경.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이상희

마을공동체의 ‘오래된 미래’, 동피랑 벽화마을

동피랑 마을은 가파른 비탈에 들어선 통영의 대표적인 달동네였습니다. 용역들에 의해 철거될 뻔했던 낡은 집과 오래된 골목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동피랑 마을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개발의 바람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던 통영의 대표적인 달동네 동피랑이 이제는 마을 만들기와 공동체 복원의 대표적인 사례가
됐습니다.

이미 동피랑은 이 나라 마을공동체의 ‘오래된 미래’가 된 것이지요. 동피랑은 본래 산이었습니다. 48.5m의 야산에 불과하지만 동암산(東岩山)이라는 번듯한 이름까지 가지고 있었지요. 동피랑. 통영말로 ‘피랑’은 벼랑 혹은 비탈을 뜻합니다. 동쪽 벼랑이 곧 동피랑입니다. 동피랑은 오랜 세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온 동네입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요. 동피랑의 집들은 대부분 10평 내외의 작은 주택들입니다. 골목의 어떤 집에서는 아직도 저녁마다 군불을 지펴 난방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피랑은 이제 더 이상 달동네가 아닙니다. 누구나 오르고 싶어하는 꿈의 언덕입니다. 파괴를 통한 개발이 아니라 낡고 오래된 것의 보존을 통해 이루어낸 작은 기적입니다.

▲동쪽 벼랑의 달동네, 동피랑이 이제는 통영의 랜드마크가 됐다. ⓒ이상희

은하수 물을 끌어와 병장기를 씻다, 세병관

국보 제305호 세병관은 통영의 상징입니다.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였습니다. 객사란 본래 고려, 조선시대 관아의 중심 건물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객사의 형태가 표준화되었으며 전국에 360여 개의 객사가 설치됐었지요. 현재는 그중 10여 곳만이 남아 있습니다.

지방관청에서 수령이 집무를 보는 동헌이 높은 건물인 줄 알지만 실상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은 객사였습니다. 국왕을 상징하는 건물이기 때문이지요. 동헌은 객사 동쪽에 있다 해서 동헌입니다. 객사에는 국왕의 전패를 모셨습니다. 그래서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은 가장 먼저 객사를 찾아 예를 올려야 했습니다.

세병관 현판은 36대 통제사 서유대의 글씨입니다. 세병관의 세병은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의 ‘만하세병’이란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만하세병은 ‘은하수를 끌어와 병장기를 씻는다’는 뜻입니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安得壯士挽天河(안득장사만천하) 淨洗兵甲長不用(정세병갑장불용)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다가, 병기를 씻어내어 길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두보는 안녹산의 난(755∼763) 때 포로가 되는 등 숱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평화에 대한 바람이 그토록 간절했던 것이지요. 은하수 물로 무기를 씻는 뜻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전쟁을 영원히 끝내기 위함입니다. 임진왜란이란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이 땅의 평화를 바라는 열망이 이 건물의 현판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이순신공원에서 평화의 의미를 묻다

이순신공원은 한산해전의 현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만들어진 공원입니다. 한산 바다의 전망이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선조 25년(1592) 7월 8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 등과 연합하여 왜군과 일전을 치릅니다. 이순신은 거제와 통영 사이의 바다 견내량해협은 좁고 얕아 전투가 용이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왜적을 큰 바다로 유인해 격파할 작전을 수립하지요. 조선 수군은 견내량을 빠져나와 도망치는 척하다가 왜군 함대가 한산도 앞바다까지 쫓아오자 갑자기 학익진을 펼치고 대포와 화살을 쏘아대며 왜적을 초토화시키는 대승을 거둡니다.

한산도 전투에서 왜군의 총대장은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라는 장수였습니다. 육전에서 그는 3천 병사로 조선군 5만 명을 혼비백산하게 만든 자였지요. 당시 함포는 조선이 절대적인 우세였지만 화약에 불을 붙여 철환을 날리는 함포 공격은 사이 간격이 너무 길었습니다. 배 숫자가 적은 조선으로는 불리한 조건이었지요. 와키사카는 조선수군이 배 숫자를 많게 보이게 하기 위해 일자진을 펼칠 거라 예상했습니다. 숫자가 월등한 자신들이 일자진을 깨버리고 포위해 들어가면 절대적으로 우세할거라 확신했다는군요.

그러나 이순신은 일자진이 아니라 학익진을 펼쳤습니다. 조선의 주력선은 판옥선이었습니다. 판옥선은 직사각형 모양의 평저선(바닥이 평평한 배)인데 앞뒤로 2문, 옆으로는 8문씩, 모두 20문의 포를 장착하고 있었습니다. 판옥선은 속도가 느린 대신에 360도 회전이 가능합니다. 앞쪽에서 포를 쏘면 배가 바로 돌면서 옆쪽 포문에서 연달아 포탄을 쏟아냈고 다시 뒤쪽, 옆쪽으로 쉬지 않고 이어집니다. 1척이 앞쪽에서만 포를 쏘는 전함 10척의 몫을 해냈지요.

그런 전함들이 학날개처럼 펼쳐져서 왜선을 향해 연달아 포를 쏘아대니 왜선은 감당해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1592년 7월 8일 조선군 연합함대 55척이 거의 손실이 없이 왜군 전함 73척 중 46척을 부수고 12척을 나포하는 대승을 거둔 것은 전적으로 이순신의 학익진 전법에 힘입은 바 크다 합니다.

학익진 전법은 함대함 진법의 전형이고 근대적 전법의 시작이라 합니다. 한산대첩의 또 하나 의미는 전면전 최초의 승리라는 점입니다. 한산대첩 전에도 전투에서 연승했지만 그것은 기습전이었지요. 전면전을 통한 한산대첩 승리로 조선군은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했으니 한산대첩은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집은 아주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이순신공원 앞 한산 바다는 비할 데 없이 평화롭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이순신공원에서 한산해전의 승리에 도취하기보다는 이 바다의 평화가 영원히 지속되길 기원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세병관. 통제영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이상희

▲수백년 세월의 손때가 묻은 세병관 마루 ⓒ통영학교

통영학교 제8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9월 20일(토)>

07:00 서울 출발(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통영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8강 여는 모임
11:00 통영 도착
11:30-12:30 점심식사
(통영의 맛, 싱싱한 생선구이)
12:40-13:10 윤이상기념관 관람
13:30-16:30 삼칭이 해안길 걷기
(4km)
영운리→수륙터마을→마리나리조트
16:30-17:50 박경리기념관 관람 및 묘소 탐방
18:10-18:30 해저터널 지나 서호 해안길을 따라 숙소까지 걷기
18:30-18:40 숙소 도착 및 방 배정
(여객터미널 앞 <캘리포니아호텔>, 다인실)
19:00-21:00 저녁식사 겸 뒤풀이(통영 최고의 다찌집에서 제철 해산물 요리의 향연)
20:30 자유시간 및 취침

▲통영학교 제8강 답사로 약도 ⓒ통영학교

<9월 21일(일)>

07:00 기상
08:00-09:00 아침식사
(통영 제일의 복집에서 졸복국, 해물된장, 성게비빔밥 중 택일)
09:00-11:20 가볍게 통영 걷기
동피랑 마을 탐방→세병관→백석시비
11:30-12:40 이순신공원 산책
13:00-14:00 점심식사
(제철 생선회와 장어구이, 해물뚝배기 등 통영식 한정식)
14:00-15:00 중앙시장에서 장보기 혹은 강구안 거북선 산책. 제8강 마무리모임
15:00 서울 향발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따뜻한 여벌옷, 윈드재킷, 우비,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숨막히게 아름다운 통영의 일몰 ⓒ이상희

통영학교 제8강 참가비는 왕복 교통비, 숙박비, 4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23만원입니다. 좌석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통영학교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통영학교 카페http://cafe.naver.com/tongyoungschool에도 놀러오세요.^^ 통영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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