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하늘에서 느닷없이 비가 쏟아졌다. 3시간 이상 진행된 인터뷰를 끝내고, 맥주 한 잔을 하려던 찰나였다. "이런, 아이들 비 맞는 거 아니야?" "국회에 있는 가족들은 괜찮을까요?" "어른은 괜찮아요. 아이들이 걱정이지."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부모 얼굴이 이런 모습일까. 명지대 김익한 교수는 물기를 머금은 눈을 껌뻑이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김 교수는 세월호 가족들(세월호 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과 완벽한 '라포(rapport)'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는 "5월 초 진도 팽목항을 찾았을 때부터 '가족화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라포는 상대와의 공감이고, 가족이 된다는 의미다.
"세월호 참사 기록 관리가 됐던, 진상 규명이 됐던, 4.16 특별법 제정이 됐던 모든 것의 출발은 세월호 가족과의 공감이다. 공감이라고 하면 그들의 입장에 서는 것인데, 그것만으로는 (나와 가족 간 라포가) 표현되지 않는다. 난 지금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다고 확신한다."
김 교수를 만난 지난 15일은 세월호 가족들이 '4.16 특별법 청원' 서명용지 350만 장을 416개 상자에 담아 국회에 제출한 날이었다. 또 단원고 '생존 학생' 40여 명이 안산에서 국회까지 1박 2일 도보 행진을 시작한 날이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서명용지를 지역별로 분류해 상자에 담고, 세월호 참사 희생자가 한눈에 보이게 사진을 정리하는 등 꼬박 2박 3일을 준비해 동행했다. <프레시안>과의 인터뷰 때문에 잠시 국회를 비우고 안산으로 달려왔지만, 날이 밝으면 다시 국회로 간다고 했다. 단식 농성으로 육체와 정신이 피폐해진 가족들이 염려돼서다.
"약속 어긴 정치권, 부끄러운 줄 알라"
박근혜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는 지난 10일 '4.16 특별법'을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16일 처리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난 현재, 특별법은 세월호처럼 침몰 위기에 놓였다. 새누리당이 세월호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을 부여할 수 없다며 '떼쓰기'에 돌입, 여야가 세월호 특별법 태스크포스(TF) 회의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정치권이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했다. 국회의원 개개인의 역량은 뛰어날지 몰라도 의회가 세월호 참사와 같은 국가적 재난의 실체적 진실을 밝힐 의지도 문화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세월호 가족들은 세월호 국정조사 과정을 보며, 정치 행위 자체에 부정적이 됐다"고 덧붙였다.
"지금과 같은 의회 문화에서는 좋은 정치인의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해도 작동하지 않는다. 세월호 가족들은 이것까지 다 알고 있다. 한국 정치권이 가족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한다."
국회 재적 의원 285명 중 80퍼센트(%)가 특별법 청원에 서명했다. 새누리당 의원 147명 중 95명이 동참했다. 그러나 김 교수의 지적대로, 특별법을 마음으로는 지지하지만 "자기의 위치를 인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정부 여당의 판단 배경에는 '우민관(愚民觀)'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번 사태를 경험하며, 한국 사회가 얼마나 엘리트 중심적이고 권력 중심적인지 깨달았다. 그동안 정치권(권력층)이 얼마나 대중의 지혜나 개인의 역량을 무시하고 압살했는지를 다시 느꼈다. 그러고 나니, 세월호 참사 이후 사회적 변화가 더 정확하게 보인다."
"세월호 싸움, 모순된 사회와의 슬픈 조우"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위한 사투가 길어지면서 '세월호 싸움'은 어느새 가족들만의 싸움으로 약화했다. 국회 앞마당에는 '잊지 말자 4.16'이 적힌 노란 종이배가 넘쳐나지만, 정치권의 모르쇠에 언론도 여론도 시들해졌다.
김 교수는 진보 진영에서조차 "(세월호 싸움이) 기득권 세력과의 직접적인 한 판 승부라는 인식이 없다"고 비판했다. 사건 초기에는 저들과 1대 1 충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지금은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일상으로 돌아갔다."
"소위 사회운동을 한다는 집단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싸움 현장에 없다면, 진보세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세월호 가족 옆에서 그들과 공감하고 함께 움직이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한국 사회의 진보는 어디 가 있나."
스스로도 많은 반성을 했다. "개인적으로 부끄럽지 않게 민주주의를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세월호가 침몰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그의 반성은 80년 '5월의 봄' 이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기형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자본(재벌)은 더 천박해졌으며, 권력(정권)은 더 추악해졌다. 두 세력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생존 또는 결합한다.
청해진해운 임직원과 해운조합 직원은 지난 4일 과적과 부실한 고박(賈舶)이 세월호 침몰과 관계 없다며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의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해운사와 조합이 세월호 운항과 안전 관리 업무를 서로 떠넘기며 '네 탓' 공방을 한 것이다.
또한, 청해진해운의 실 소유자로 의심받고 있는 전 세모그룹 회장 유병언 씨는 '5억 현상금'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종적을 알 수 없다. 앞서 해경은 수사 과정에서 세월호 선장 이준석 씨를 해경 관계자의 집에서 재웠으며, 해양경찰청은 '유병언 장학생'을 범정부사고대책본부 요직에 앉혀 불신을 키웠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는 대한민국의 민낯과 마주했다. 세월호 싸움은 모순된 사회와의 슬픈 조우다.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세월호 현상을 표피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기록이 문제야? 상황이 그게 아니잖아!"
김 교수는 국내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기록전문가다. 참여정부 시절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민간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한국국가기록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기록물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시민기록단 '세월호 기록넷'을 책임지고 있다.
"세월호 가족들의 어떤 현상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기록전문가의 일반적인 책무다. 그런데 가족들과 '공감의 세계(라포)'에 존재하면서 기록전문가의 목적보다 그들이 어떻게 판단하는지, 어떻게 느끼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됐다."
그는 자신의 변화에 대해 "어떤 의미에서는 교조주의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주변에서 "기록 안 해?"라고 물으면, 버럭 소리부터 지른다고도 했다. "기록 남기는 게 문제야? 지금 상황이 그게 아니잖아!"
"유가족들은 처음에 아이의 유품을 끌어안고 운다. 바닷속에서 건져 올린 신발과 옷 같은 경우, 진흙과 해초를 깨끗이 닦아낸다. 일주일 정도가 지나면 고민한다. 아이의 영혼과 함께 하늘로 올려보내야지 하다가도, 잊지 않기 위해 남기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 상태가 되면 가족들이 찾아온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하고. 그럼, '어머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죠'라고 답한다. 아이가 좋아하는 물건을 태우기도, 남기기도 한다. 그렇게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기록저장소에는 세 점 정도만 남기면 돼요'라고 말한다."
세월호 기록넷은 희생자의 유품을 받거나 가족과 인터뷰하는 등 기록을 위한 일련의 활동을 중지한 상태다. 대신 진도 팽목항과 안산시 고잔동에 작은 공간(세월호 기록저장소)을 열어 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다.
"세월호 가족 160명 이상이 안산시 고잔동과 와동에 거주하고 있다. 4월 16일 그날 이후,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가족들도 상당수다. 국회에서 단식 농성 중인 가족들과 또 다른 라포가 형성되어야 한다."
김 교수는 세월호 기록저장소가 일종의 '마당'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했다. 이 공간을 통해 가족들의 미래가 조금이라도 밝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록저장소 1호와 2호는 가족들과 이용자들의 편의를 위해 곧 실내 장식에 들어간다. 아름다운재단이 기록저장소 기본 유지비와 기록 관리 프로그램 개발에 각각 8000만 원을 지원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김익한'이라는 연구자는 새 인생을 살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세월호 기록넷을 중심으로 한 시민 아카이브 구축이 목표지만, 장기적으로는 안산시 공동체 운동을 계획하고 있다. 이미 그와 비슷한 뜻을 가진 많은 이들이 다양한 활동을 구상하고 있다.
"마침 세월호 가족들, 엄마 아빠들이 40대 중반이다. 세상을 알 만큼 알고, 힘도 있는 세대다. 이들이 자연스럽게 마을 운동을 이끌며, 경우에 따라서는 세월호 기록 관리를 전문적으로 할 수 있다고도 본다. 현재 가족대책위는 '세월호 가족재단'이 만들어져야 해체될 수 있다. 그렇게 가족들 스스로가 협동하며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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