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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맹비난' 박정희, 사실은 대부분 따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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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장면 맹비난' 박정희, 사실은 대부분 따라 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3> 5.16쿠데타, 열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5.16쿠데타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5.16쿠데타,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연재는 왜 그 신문에서 사라졌나

[5.16쿠데타, 두 번째 마당] 오랜 꿈 이룬 '박통'…대한민국은 짓밟혔다

[5.16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는 왜 한국인의 '노예근성'을 주목했나

[5.16쿠데타, 네 번째 마당] 청와대·참모총장의 위험한 선택…헌법은 죽었다

[5.16쿠데타, 다섯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 미국이 개의치 않은 이유

[5.16쿠데타, 여섯 번째 마당] 정치 깡패 이정재는 진정 죽어 마땅했나

[5.16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나라 구한 박정희? 장준하는 왜 그리 판단했나

[5.16쿠데타, 여덟 번째 마당] 청와대 '부정 선거' 앞잡이, 정보부…어쩌다?

[5.16쿠데타, 아홉 번째 마당] '전 재산 헌납' 삼성 약속은 왜 물거품이 됐나

[5.16쿠데타, 열 번째 마당] 박정희 거듭 구한 은인, 제대로 뒤통수 맞다

[5.16쿠데타, 열한 번째 마당] '박통'의 특별한 선배, 왜 간첩으로 죽어야 했나

프레시안 : 5.16쿠데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서중석 : 5.16쿠데타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하려면 박정희 정권이 장면 정권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이걸 밝히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간 살핀 것처럼 최고회의 의장 시절이건 대통령 시절이건 박정희가 장 정권을 워낙 부정적으로 봤기 때문에 '장 정권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대부분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한 번 역사를 봐라. 청나라는 명나라를 쳐서 새로운 제국을 세웠다. 그때 일부 한족은 자신들이 야만족으로 여기던 여진족이 청나라를 세웠다며 반발했다. 그렇지만 명나라와 청나라는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와는 성격이 다르고, 명과 청이 비슷한 체제였다고 보고 있지 않나. 예컨대 황제의 권한이 그 이전과 많이 다르다. 명나라, 청나라 때 황제의 권한을 새롭게 세운다. 그전엔 재상의 위치가 중요했는데 주원장이 없애버리지 않나. 그러면서 내각 비슷한 것이 중요한 권한을 갖게 되는 점도 비슷하고 지방 통치 방식도 비슷하다. 또 성리학을 국가가 관학으로서 장려하고 과거 시험에서 필수로 한 것, 그리고 경제 제도, 서양에 대한 태도 등 많은 것에서 명·청기는 한 시기라고 여러 사람이 보고 있다.

또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가 만날 하는 소리 아닌가.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박정희 때 뭔가 갑자기 이뤄진 것처럼 대부분이 믿고 있는데 참 이상한 신화, 말도 안 되는 신화다. 자유당은 특히 말기에 가서는 여러 조건이 달라지고 있었는데도 1960년 정부통령 선거 승리에 너무나도 심하게 매달렸다. 그 때문에 당시 꼭 필요했던 여러 정책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 중 상당 부분을 장면 정권이 이어받고, 그걸 또다시 5.16쿠데타 정권이 이어받는 것이다. 그런데 더 많은 부분을 장면 정권과 5.16쿠데타 정권이 공유하고 있었다. 이런 점을 굉장히 중시해야 한다.

프레시안 : 장면 정권과 박정희 정권이 공유한 게 많다는 이야기를 낯설게 여길 이들이 적잖을 것 같다.

서중석 : 장면 정권이 하려고 한 것들 중 5.16쿠데타 정권이 실제로 정면 부인한 건 별로 없다. 놀라운 이야기라고, 내가 억지 주장을 한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 생각해봐라. 사실은 장면도 속으로는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것도 있다. 5.16쿠데타 정권처럼 무자비하고 무단적으로 혁신계를 처단할 생각은 안 했지만, 장면도 제일 골칫거리로 여긴 것이 혁신계였다. 이렇게 장면 정권과 박정희 정권은 여러 면에서 공유하는 게 있었다. 구체적인 면에서 차이가 난 건 그 당시의 상황 그리고 장면과 박정희의 차이 같은 것 때문으로 보는 게 좋다. 박정희 정권이 제2공화국을 계승했다는 점이 지금까지 너무나 무시됐는데 이를 중요시해야 한다. 이걸 거듭 강조하고 싶다.

통일 정책만 봐도 장면 정권이 '유엔 감시 아래 남북 총선거'를 내세웠는데 이걸 박정희 정권이 그대로 이어받았다. 더 중요한 것은 장면 정권도 사실상 '지금 통일 논의를 하지 말자', 이런 주장을 많이 한다는 점이다. '지금은 건설을 해야 할 때인데, 통일 문제를 갖고 국력이 소비되고 있다. 혁신계가 지나친 통일 주장을 하고 있다. 중립화 통일 논의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이야기다.

심지어 장 총리가 "용공 통일이면 분단된 것이 도리어 낫다"고 해서 크게 쟁점이 되고 그러지 않았나. 반공 통일만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통일이라는 주장을 장 총리는 여러 차례 명시적으로 이야기했다. 신상초 민주당 대변인도 '우리 통일 정책은 사실 이승만 정권 때와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한다. 유엔 감시 아래 남북 총선거란 "대한민국의 유효한 지배를 북한에까지 확장하자는 주장인데 그것은 반공 통일인 점, 이승만식의 북진 통일론과 오십보백보의 차(差)밖에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만이 정당하고 북한은 괴뢰라는 주장이다. 유엔 감시 아래 총선거도 공산당을 당으로 인정하고 경쟁하자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범위 안에서 유엔 감시 아래 총선거를 하자는 것이다. 이건 국회에서도 한 번 결의하지 않았나. 그런 점에서 박정희 정권의 통일 정책과 차이나지 않는다.

어느 것이나 '통일 논의 그만하자. 통일 운동은 반대다. 혁신계는 처단하는 게 좋다. 혁신계의 통일 운동은 위험하다', 이런 생각을 공유하는 면이 컸다. 이승만 정권은 북진 통일론으로 통일 논의를 막았지만, 장면 정권은 그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공 통일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선건설을 내세웠다. 박정희 쿠데타 정권은 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힘으로 탄압했다. 세상에, 특수 반국가 행위라는 기가 막힌 죄목으로 대거 검거해 처단하지 않나. 또 장면 정권이 데모 규제법과 함께 반공법도 만들려고 했지만, 같은 보수 세력으로서 야당이던 신민당이 반대하고 혁신계가 2대 악법 반대 투쟁을 펴고 하면서 결국 성공을 못 시키지 않았나. 5.16쿠데타 세력은 반공법 제정 시도를 바로 이어받았다. 최고회의에서 장면 정권의 반공법을 거의 그대로 공포하지 않나.

장면 비난한 박정희, 경제·통일·외교 등 정책은 대부분 이어받아

프레시안 : 두 정권이 같은 정책을 펴는 건 다른 분야에서도 나타난다.

서중석 : 외교 정책에서 이미 허정 과도 내각 때부터 일본과 통상하는 문제를 제일 중요시하겠다고 이야기했다. (1960년 5월 3일 허정은 한일 관계 정상화가 외교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이라고 발표했다. 일본과 대립각을 세우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미국이 원하던 한·미·일 안보 체제 구축을 향한 흐름이 힘을 받게 된 것이다. <편집자>) 장면 정권도 똑같은 주장을 하고 활발한 활동을 구체적으로 한다. 일본과 교섭을 여러 면에서 하지 않나. 그것도 박정희 정권하고 똑같다. 다만 장면 정권은 '민의를 존중해 서서히 하겠다', 이런 태도를 취했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일본 자금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거기 재일 교포 자금이 있지 않았나. 이 점도 박정희 정권하고 비슷하다. 다만 박정희 정권은 훨씬 졸속으로, 성급하게 처리하려 하지 않았느냐는 비난을 받게 된다.

장면 정권은 제3세계에 대해서도 폭넓은 외교 정책을 주장한다. 이것도 놀라운 일이다. 장면 정권은 극단적인 반공 정권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때쯤 와서는 시대가 변한 것을 수용해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조금 있다가, 시간 차이를 두고 이런 태도를 취한다.

무엇보다 경제 정책에서 비슷한 점이 아주 많다. 경제 건설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게 장면 정부 때라고 정치학자인 이용희 교수가 말하지 않았나. 장면 정부는 인프라 건설, 전력 개발과 석탄 생산 증진에 전력을 기울이고, 산업 철도도 놓고, 도로와 항만, 해운 사업에도 적극 임하겠다고 했다. 이거야말로 박정희 정권이 그대로 이어받는 것이다. 또 장면 정권은 국토 건설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사방 사업, 산림녹화 사업을 진행하고 소양강댐, 춘천댐, 남강댐 같은 걸 만들겠다고 했는데 이것도 박정희 정권이 그대로 이어받는다. 장면 정부는 이런 정책들을 빠르게 만들어 1961년 3∼4월부터 구체화한다. 이때 국장이었고 나중에 부총리까지 하는 이한빈은 민주당 내에 소수이긴 했지만 일류의 정책 고안자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당면한 과업에서 이 사람들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프레시안 : 장면 정부는 공무원 공채를 본격적으로 실시한다.

서중석 : 공채가 대규모로 이뤄진다. 국가공무원법도 장면 정권 때 개정되지 않나. 이승만 정권 때와는 아주 다르게 인사 관장 기관의 독립성 인정, 공무원 신분 보장 등을 골자로 해서 개정된다. 1963년 4월 17일 국가공무원법이 또 개정되면서 직업 공무원 공채가 더 구체화되는데, 장면 정부 때 세운 기본 원칙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다.

자유당 정권 때는 사실상 친일파 관료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편협한 시험 제도, 일관성 없는 충원 제도 때문에 대학 교육을 받은 새 세대한테는 오랫동안 거의 폐쇄되다시피 했다고 이한빈은 썼다. 장면 정부의 새로운 계획을 계기로 5급 공무원 채용 시험이라는 괄목할 인사 행정 개선이 이뤄지고 그것이 관료제에 눈에 띄는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이런 것들을 상당 부분 이어받는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것도 장면 정권에서 만든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고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쿠데타 정권이 책상 서랍에서 꺼내 그대로 썼다고들 말한다. 또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이 테크노크라트(기술 관료)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건 누구나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테크노크라트 문제만 해도, 내가 강조하는 것처럼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 가서 교육을 받은 새로운 세대, 새로운 관리들이 등장한다. 1958년에는 부흥부 내에 산업개발위원회가 만들어진다. 그 위원회가 중추가 돼서 1959년에는 3개년 경제 개발 계획안을 만든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5.16쿠데타 없이 민간 정부가 계속 집권했다면 어땠을까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은 이 계획안을 시행하지 않는다.

서중석 : 이승만 정권은 부정 선거 생각에만 골몰해 이걸 4.19 직전인 1960년 4월 15일에야 통과시킨다. 자유당 정권은 1959년, 1960년 그 소중한 때에 정치 논리를 앞세웠다. 5.16쿠데타 세력이 4대 의혹 사건을 일으킨 것처럼, 자유당 정권도 정치 자금 문제가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어쨌든 테크노크라트가 장면 정권에서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장면 정권은 여러 유혹을 물리치고 고참자를 퇴직시키고 중견 관료를 승진시켜 새 기풍을 조성하려 했다고 이한빈은 썼다. 특히 경제 부처에서 과감한 인사 정책으로 젊고 과업 지향적인 관료를 책임 있는 지위에 대거 승진시켰다고 말한다. 물론 국영 기업체는 좀 나눠먹기 인사를 했다. 예나 지금이나 거긴 변함없나 보다.

그런데 군사 정권은 등장 직후 관료를 대거 내쫓고 소위 군인 정신이라는 걸 가지고 경제 정책을 폈다. 교육 정책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식으로 관료들을 경원하고 불신했다. 내각을 최고회의 직속 기관으로 만들어놓고 내각에 힘을 싣지 않았다. 처음에 내각이 다 군인으로 구성됐는데도 그랬다. 나중에 김현철(미국 유학파, 이승만 정권 때 재무부 장관 등을 지냄)이 송요찬 대신 내각 수반이 되는데, 이 사람도 처음엔 군인들 때문에 제대로 정책을 펼 수가 없었다.

군사 정권에서는 정치 논리가 너무나 지배적이었다. 고리채 정리 사업도 현실을 무시한 군인들의 정치 논리가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화폐 개혁도 정치 논리가 경제 논리를 우선한 것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4대 의혹 사건(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 당구기(세칭 '파친코') 사건, 증권 파동, 워커힐 사건)이라는 것이다. 주가 조작, 횡령 등의 방식으로 자금을 빼낸 사건들로, 그 돈을 중앙정보부는 민주공화당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정치 자금으로 썼다. 예컨대 증권 파동을 보면, 장면 정권과 5.16쿠데타 정권을 거치며 한국에서도 경제의 중요한 부분으로 겨우 등장한 증권 시장에 엄청난 파동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증권거래소의 정상적인 활동을 방해하고 경제를 큰 혼란에 몰아넣지 않았나. 정치 논리를 앞세운 결과다.

프레시안 : 경제 개발 계획안을 만든 것은 1950년대식에서 벗어나 경제의 틀을 새롭게 짜겠다는 것을 뜻한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은 수출 중심 경제로 바뀐다.

서중석 : 장면 정권은 환-달러 환율을 1300 대 1로 했다. 500 대 1이던 것을, 미국이 강요하다시피 하는 통에 이승만 정권이 650 대 1까지 높이기는 했다. 이승만 정권은 원조 물자를 받아먹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 정책, 즉 원조 경제 위주였기 때문에 수출 중심 정책을 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환율을 비정상적으로 아주 낮게, 우리 화폐 중심으로 묶어뒀다. 그러면 수출이 되겠나. 장면 정부 때 와서 1300 대 1로 고쳤다. 무려 2배로 했으니 야당과 언론에 얼마나 두들겨 맞았겠나. 그러나 박정희 정권도 1964년 엄청나게 환율을 올린다. 그러면서 수출 정책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는 것 아닌가. 환율을 정상적으로 안 해놓고 어떻게 수출 정책을 쓸 수 있겠나. 장면 정권이 그렇게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대단한 걸 했다고 본다.

(1953년 2월 이승만 정권은 화폐 개혁(100원->1환)을 하면서 환-달러 환율을 180 대 1로 고정하고자 했다. 통화량이 계속 늘어 고정 환율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최대한 평가 절상해 더 많은 원조를 받고자 한 것이다. 미국은 강력히 반대했다. 박태균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의 통화량 증가를 억제하는 한편 통화 가치가 30퍼센트 이상 떨어지면 환율을 조정할 수 있게 했다. 그에 따라 1955년에 500 대 1로, 4월혁명 직전에 650 대 1로 조정됐다. 그러나 이는 공식 환율일 뿐이었다. 시장에서 실제로 적용되는 환율은 공식 환율의 2배가 넘었다. 장면 정권의 환율 대폭 인상에는 공식 환율과 시장에서 실제로 적용되는 환율을 맞추는 의미도 있었다. 한편 박정희는 1963년 11월, 물가 문제는 장면 정권이 환율을 대폭 인상한 탓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도 환율을 약 2배로 올렸다. <편집자>)

장면 정부는 수출 위주 정책을 많이 썼다. 수출 위축을 방지하고자 수출 보상금을 책정하겠다고 했고, 미국이나 서독에서 기술 원조와 장기 차관을 도입하겠다고 했다. 이것도 박정희 정권이 다 하는 정책이다. 장면 정권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 다만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잘못된 경제 정책을 많이 썼다. 시행착오도 거듭했다. 그래서 1963년 대선에서 얼마나 고전하나. 서울, 경기에서 압도적으로 윤보선 표가 많이 나왔다. 윤보선이 좋아서 그랬겠나.

프레시안 : 1963년 대선 후 박정희 정권은 수출 증대를 밀어붙인다. 이 무렵 한국 경제가 도약하는 데 매우 유리한 국제 환경이 만들어진다.

서중석 : 박정희 정권은 1964년 환율 정책을 바꾸고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강력하게 편다. 1965년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청구권 자금이 들어왔다. 재일 교포 자금은 그 이전부터 들어왔다. 또 베트남 파병을 하면서 그쪽에서도 돈이 들어온다. 미국도 1963∼1964년 무렵부터는 경제 정책에서 박정희 정부를 상당히 많이 도와줬다. 그리고 서독에서 차관을 주고 우리는 광부, 간호사를 파견하게 된다. 이러면서 우리 경제가 1964∼1965년경부터 크게 달라지지 않나. 그렇게 경제가 발전하면서 근대화라는 것이 반공과 함께 가장 중요한 정치 이념, 구호로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근대화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듣다 보니까, '박정희 정권이 쿠데타를 할 때부터 그랬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난 장면 정부가 1∼2년만 더 해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꼭 장면 정부가 아니더라도, 그러니까 내각 불신임과 선거 등을 거쳐 새로운 민간 정부가 들어섰을 경우에도 어차피 장면 정부처럼 적극적인 경제 정책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본다. 그것을 1년이고 2년이고 두고 봤으면, 군사 정권만이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겠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군사 정부가 쿠데타 후 2∼3년 동안은 너무나도 잘못된 정책을 많이 펴지 않았나. 우리가 이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봐야 한다.

장면 정권에 대해 내가 꼭 잘했다고 하는 건 아니다. 장면 정부에서 하려고 했던 것의 의미가 뭔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고, 장면 정부에서 한 일이 생각보다 많다는 이야기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그럼에도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혁명? 5.16은 반혁명 쿠데타

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헌정이 중단되긴 했지만 그 결과 근대화에 성공했으니 5.16은 성공한 군사 혁명 아니냐', '5.16혁명이 없었으면 한국이 어떻게 됐겠느냐'고 주장한다.

서중석 : 5.16쿠데타에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큰 논쟁거리다. 쿠데타 주도 세력이 어떤 국가, 어떤 사회를 만들려 했는가에 따라 평가가 이뤄질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5.16 반혁명 쿠데타라고 부르는 게 제일 사실에 부합하는 것 아닌가, 난 그렇게 본다. 국사 교과서에서는 5.16 군사 정변이라고 보고 있다. 쿠데타와 비슷하게 정변이라고 보고 있다는 점에서 예전처럼 5.16혁명으로 규정하는 건 사라졌지만, 그 쿠데타가 중남미형에 가까운 반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혁명이냐 반혁명이냐 하는 문제와 관련해 몇 가지 기준을 생각할 수 있다. 자유 또는 민주주의와 관련해 그것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 또 사회적 혁명과 경제적 혁명을 하려고 했는지 여부 등이 주된 초점이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든지, 뉴라이트까지 대부분 인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민주적 합헌 정부를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헌정을 2년 이상 중지시켰다는 점은 틀림없지 않나. 이런 점에서 우선 5.16쿠데타의 기본적인 성격을 엿볼 수가 있다.

프레시안 : 5.16쿠데타를 거치며 자유와 민주주의는 명백히 퇴행했다.

서중석 : 그렇다. 자유가 크게 제한을 받았다. 우선 언론의 자유를 보자. 장면 정부 때는 언론의 자유가 너무나 많아 심지어 <경향신문>조차 장면 정부를 때렸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가톨릭 재단에서 만든 <경향신문>은 이승만 정권 때 가톨릭 신자인 장면에게 우호적이었다. 5.16쿠데타 당시 <경향신문> 사장이던 한창우는 장면의 사돈이었다. <편집자>) 언론이 무조건 때리기만 한 것이 장면 정부가 무능하고 부패하고 갈등과 파쟁만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5.16쿠데타 세력은 언론에 너무 심하게 했다. 1961년 5월 23일 포고령으로 정기 간행물 1200여 종을 다 폐간시켰다. 이건 전두환 신군부가 언론 통폐합을 했던 것보다 더 심한 것이었다. 물론 이때는 계엄 시기이기 때문에 그랬기도 했겠지만 하여튼 언론이 상당 기간 동안 큰 어려움을 겪었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언론이 또 얼마나 강한 압력을 받나.

언론에 철퇴 가한 후 "언론인들의 기개 부족" 운운한 박정희

프레시안 :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1961년 7월 19일, 박정희는 최고회의 의장 취임 후 처음으로 정례 기자 회견을 열었다. 여기서 외신 기자가 '정부가 두려워서인지 한국 신문들이 제대로 비판과 논평을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답했다. "혁명 일주일 만에 신문에 대한 통제를 해제했으며 언론인들이 두려워한다든지 겁을 내기 때문에 논평이나 비판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언론인들의 기개가 부족하기 때문." 박정희가 말한 "혁명 일주일 만에"는 언론에 철퇴를 가한 1961년 5월 23일 그날이다. 언론을 짓밟은 다음 "언론인들의 기개"를 운운하는 매우 인상적인 풍경이다. 기개가 있던 일부 언론인은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편 미국 언론 <타임>은 1961년 8월, 한국 신문은 벙어리 신문이라고 꼬집었다.

서중석 : 양심과 사상의 자유도 크게 제약을 받았다. 1961년 7월 3일 최고회의는 '인신 구속 등에 관한 임시 특례법'(인신 구속 특례법)을 통과시킨다. "국가 재건 과업 수행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죄를 범한 자"는 형사소송법에 구애됨이 없이, 법관의 영장 없이 구속, 압수, 수색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으로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에 규정된 죄"를 명시했다. 이건 법치주의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에 제일 큰 장애가 된 건 같은 날 통과된 반공법이라고 볼 수 있다. 반공법에서 제일 무서운 건 '북괴를 이롭게 한다'는 이적죄 조항이다. 반공법 제4조 1항을 보면 "반국가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 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한 자 (…) 이러한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구성하거나 이에 가입한 자", 2항을 보면 "전항(前項)의 행위를 할 목적으로 문서, 도화 기타의 표현물을 제작, 수집, 복사, 보관, 운반, 반포, 판매 또는 취득한 자"라고 돼 있다.

이 조항은 내면의 자유까지 무섭게 짓눌렀다. 이건 북한에 대한 사실을 이야기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평양에 전차(電車)가 다니고 고층 건물이 여럿 있다', 이렇게 해도 반공법에 걸릴 수 있었다. 금강산이나 백두산을 찍은 북한 사진을 가지고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을 알아야 반공 투쟁도 할 수 있다고 배웠는데,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다. 북한에 대해 철저히 무지하게 만드는 것이 극우 반공 세력한테는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북한에 대해 사실을 이야기하더라도 이적죄로 단죄되게 한 것이다. 북한 라디오를 우연히 들어도 반공법에 걸릴 수 있었다. 서해안 지방에서는 북한 방송이 잘 들렸다. 우리 방송을 틀다 보면 경우에 따라 북한 방송이 나올 수도 있는 것 아니었나. 이걸 당국이 알면 반공법에 걸릴 수 있었다.

그럼 남한에 대한 비판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나? 박정희 정권 비판이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소지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니 남쪽에 대해 어디까지 비판할 수 있는가, 이게 굉장히 어려웠다. 내가 학생 운동을 할 때 학생과장이던 교수는, 우리가 발표하는 박정희 정권 비판 내용에 "되도록 북한도 비판하는 문구를 하나씩 넣어라", 이 이야기를 항상 하다시피 했다. 그래야 남쪽 비판이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당국이 안다는 것이었다. 그게 말이 되나. 그 정도로 비판하기가 어려웠다.

▲ <오발탄>. ⓒ대한영화사

5.16쿠데타가 만든 테러·감시·가위질의 시대

프레시안 : 예술가들도 가위질의 공포에 일상적으로 가위눌려야 했다.

서중석 : 영화를 비롯한 수많은 창작물도 반공법에 걸릴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항상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일기 하나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잘못하면 나중에 어떤 건으로 저들이 집을 뒤지거나 할 때 '이거 북한을 이롭게 하려고 쓴 것 아니냐',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유현목의 영화 <오발탄>만 하더라도 장면 정부 말기에 개봉했는데, 군사 정부가 상영 중인 <오발탄>에 대해 재검열 지시를 내렸다. 그 바람에 상영이 중단됐다. 이유는 내용이 너무 어둡고 사회를 부정적으로 그렸다는 것이었다. 또 늙은 어머니가 "가자" 하고 발작적으로 외치는 대사가 있는데, 그걸 '북한으로 돌아가자'로 해석한 것이었다.

1955년 이강천 감독이 만든 영화 <피아골> 건하고 똑같은 논리다. 1950년대 영화 중 제일 우수한 작품으로 꼽히는 것 중 하나인데, 검열에 걸려 많이 고쳐야 했다. 그러니 영화를 얼마만큼 사실적으로 만들 수 있느냐, 이게 참 문제였다. 이만희 감독도 1965년 <7인의 여포로>를 만들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한국전쟁 때 여성 포로를 겁탈하려는 중국군을 사살한 북한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게 죄였다. 이때 이만희를 옹호한 유현목도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또한 검찰은 유현목이 만든 영화 <춘몽>을 외설로 몰아갔다. <편집자>) <7인의 여포로>는 문제의 장면을 삭제, 수정한 후에 <돌아온 여군>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됐다. 이렇게 한국전쟁에 관해서건 뭐건 어떻게 표현할 것이냐 하는 것이 반공법 때문에 정말 어려웠다.

프레시안 : 사람들을 옥죈 건 인신 구속 특례법과 반공법만이 아니었다.

서중석 : 5.16쿠데타 세력은 1962년 9월 국가보안법을 개정했다. 반국가적 범죄를 범해 유죄 판결을 받고 5년 내에 다시 국가보안법을 위반하면 법정 최고형인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중앙정보부도 국민을 감시했다. 특히 유신 체제 때는 물샐틈없이 감시했다. 자유를 얼마만큼 제한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감시, 연행, 구금, 연금 같은 것이 그 당시 얼마나 많았나. 공권력에 의한 테러도 많았다. 언론도 1960년대에 참 테러를 많이 당한다. 정치인에 대한 테러도 많이 일어났다. 김영삼 초산 테러 사건이 유명한데, 배후가 어디냐를 두고 그때 국회에서 한 말들이 있지 않나. (3선 개헌 반대 투쟁이 한창이던 1969년 6월 20일, 괴한들이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의 차에 초산을 부었다. <편집자>)

이러니 혁신계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혁신계의 통일 운동, 정치 활동 같은 걸 특수 반국가 행위로 철저히 처단하지 않았나. 혁신 정당을 표방한 게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걸 혁신 정당, 진보 정당이라고 볼 수 있느냐는 비판을 받았다. 한마디로 정치적 자유가 과연 이 시기에 있었나? 그렇지 않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 각종 의혹 사건에 대해서도 입도 뻥끗하기 어려웠다. 현대사에서 연구할 수도, 교육할 수도 없던 분야는 또 얼마나 많았나. 이처럼 5.16쿠데타는 자유, 민주주의, 인권, 남북 관계와 자주성, 그리고 시민들의 자율성에 기반을 둔 시민사회 형성 같은 걸 후퇴시켰다. 그러니 혁명은 고사하고 오히려 반혁명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볼 수밖에 없지 않나.

프레시안 : 반혁명적인 성격은 여러 분야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서중석 : 그렇다. 정당 정치와 의회주의가 1960년대에 제대로 시행됐나? 그것보다는 행정 정치, 정보 정치를 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다. 여당이 앞장서서 날치기 통과도 많이 하고 그야말로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노동 운동 같은 걸 제대로 할 수가 있었느냐, 이 말이다. 포고령 제6호(1961년 5월 22일)로 정당, 사회단체, 노동조합 해산령을 내리고 수백 명의 노조 간부를 구속한다. 5.16쿠데타 후 어용 노조라고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산별 노조를 만들지 않나. 권력 기관에서 통제하기 좋은 엉터리 산별 노조로 바꾸면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을 만든다. 그러면서 이승만 정권 말기부터 민주적인 노동 운동을 한 김말룡 같은 노동 운동가들이 심한 탄압을 받지 않나. 노조가 권력에 종속되고 노동 운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농협이 전국적인 조직으로 탄생하고 활동에 들어가는 건 5.16쿠데타 이후다. 그전에 이야기가 무성했는데, 자유당 정권은 이걸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옛 농업은행과 옛 농협이 5.16쿠데타 후 통합해 새로운 농협이 출범했다. <편집자>) 어이없는 건 농협 조합장도 농민들이 선출하는 게 아니라 임명제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농협 조합장 직선제 쟁취를 위한 100만 서명 운동' 같은 것이 1980년대 중반에 거세게 일어난다. 농민들의 농협이라고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관권에 의해 처리되는 농협이었다. 중앙 농협 같은 것은 다 관권에 의해 임명되는 것이지만, 금융을 더 중시하지 않았나. 또 농지개량조합 조합장도 임명제였다. (6월항쟁 이후 농협 등의 조합장 선출 방식이 직선제로 바뀌고, 1989년 첫 선거가 치러졌다. <편집자>)

지방 자치도 뿌리 뽑혔다. 지방 자치는 1991년에 와서야 부분적으로 부활한다. 이런 여러 면에서 퇴행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군인들이 관권, 행정권을 비대화하고 사회를 획일화했다. 일사불란한 통제 체제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 국민에 대한 감시 체제 구축과 함께 이뤄지고 상명하복, 이분법적 사고가 군사 문화에 의해 한층 심화된다.

▲ 박정희 소장이 5.16쿠데타를 일으켜 만든 나라는 4월혁명이 가져온 자유, 민주주의, 인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진은 1973년 국군의 날(10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는 동안 스탠드에 펼쳐진 대통령 초상화 카드 섹션. ⓒ연합뉴스

5.16쿠데타는 합리적 반공과도, 현상 타파와도 거리가 멀었다

프레시안 : 4월혁명이 꿈꾼 새로운 나라의 토대를 5.16쿠데타 후 박정희 정권이 만들었다는 시각도 있다.

서중석 : 쿠데타 주동 세력의 정치 이념은 반공 태세를 재정비하고 강화한다는 '혁명 공약' 제1호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이건 4월혁명이 가져온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을 발전시키기 위한 합리적인 반공이라기보다는 1950년대의 수구적인 냉전 이념을 보호하기 위한, 곧 현상 유지를 위한 반공이라고 볼 수 있는 측면이 더 강하다.

5.16쿠데타는 현상 타파적이던 조선 왕조 개창, 갑신정변이나 갑오개혁, 독립 운동(반제·반봉건 민족 해방 운동), 3.1운동, 8.15 해방, 4월혁명과 다르다. 왕정을 타파하고 반제 민족주의를 앞세워 변화를 추구했던 이집트 등의 아랍 쿠데타와도 다르다. 중남미 쿠데타처럼 혁명을 예방하겠다는 반동적이고 반혁명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5.16쿠데타의 의도는 냉전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통일 세력, 진보 세력에 타격을 가하겠다는 것, 역사의 정상적인 진행에 제약을 가하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쿠데타 주동 세력 중엔 일본(만주국 포함) 군대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있지 않았나. 일부는 일제 말 군국주의 파시즘 문화를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측면도 있다. 1932년 5.15쿠데타, 1936년 2.26쿠데타를 일으킨 일본 군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대일본제국을 민간인들의 의회주의, 정당 정치로부터 구할 참신한 혁신 이념을 가졌다고 확신했다. 도쿄 전범 재판에서 연합국이 각별히 단죄한 그런 이념의 영향을 받은 군인도 5.16쿠데타 주동 세력 중에 없지 않았던 것 같다.

박정희는 철학을 기반으로 한 정치 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5.15쿠데타, 2.26쿠데타에 심취한 상태에서 저열하다고 믿은 한국인의 민족성을 개조해야 한다는 사고, 의회주의와 정당 정치에 대한 반감, 극단적인 반공 정책이 결합한 모습을 보였다. 의회주의와 정당 정치에 대한 반감은 서구 문화, 특히 개인주의에 대한 혐오감과 직결돼 있다.

그렇지만 5.16쿠데타 세력이 장면 정권을 계승한 것 중에는 진보적인 면도 적지 않게 들어 있었다. 아울러 4월혁명이 열어놓았고 추구했던 4월혁명 정신을 어떤 형태로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역사적 상황이 5.16쿠데타 직후에 뒤섞여 있었다. 이런 점을 어떻게 볼 것인가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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