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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용 수천 첩 복용하고도 23세 요절,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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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용 수천 첩 복용하고도 23세 요절, 왜?

[낮은 한의학] 헌종의 건강학

조선 왕의 건강을 살펴보는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전 대구한의대학교 교수)의 '낮은 한의학' 연재가 매주 수요일 계속됩니다.

이상곤 원장이 조선 왕의 건강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당시 왕들의 모습이 오늘날 현대인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왕들은 산해진미를 섭취하였지만 격무와 스트레스, 만성 운동 부족 등으로 건강 상태는 엉망이었습니다. 이 원장은 "왜 왕처럼 살면 죽는지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현대인의 바람직한 건강 관리법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번 연재의 주인공은 헌종입니다. 정조, 순조를 이은 헌종 대에 이르면 조선의 망국은 시간문제로 보였습니다. 안동 김 씨, 풍양 조 씨를 비롯한 세도 정치가 조선의 근간을 흔들었고, 물밀 듯이 들어오는 외세의 풍랑에는 천주교 박해와 같은 쇄국 정책으로 일관했죠. 헌종의 뒤를 이은 철종 또 그 뒤를 이은 고종은 결국 망국의 왕이 되죠.

이번 '낮은 한의학'은 헌종이 목숨을 잃기까지의 100일간을 복원하면서, 헌종의 건강을 살핍니다. 헌종은 평생 녹용과 같은 귀한 약재가 든 약에 의존했지만 후사를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건강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예전보다 훨씬 더 약물 의존도가 큰 현대인에게 헌종의 삶은 어떤 교훈을 줄까요? <편집자>

헌종(1827~1849년, 재위 1834~1849년)은 순조(1790~1834년, 재위 1800~1834년)의 아들 효명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와 효명세자는 외척의 발호, 홍경래의 난, 19세기 초의 대기근 등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왕권을 강화하면서 조선 생존의 불씨를 살리려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효명세자(1809~1830년)가 급서하고, 이미 평생 세도가의 틈바구니 속에서 고생하다 기력이 쇠한 할아버지 순조마저 승하하면서 헌종이 8세의 나이로 조선 24대 왕으로 등극했다. 처음에는 순조의 왕비이자 할머니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지만, 헌종 7년(1841년) 3월 7일부터 자신이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이미 나라꼴은 엉망이 된 상태였다.

헌종은 23세를 일기로 후사가 없이 승하하고, 그 뒤를 이른바 '강화 도령' 철종이 잇는다. 행장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행장은 권도인이 지었다. 추사 김정희의 만년 친구로 기록되는 권도인은 도제조로서 헌종의 질병 진료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당대의 실세 중 한 명이었다.

"봄부터 병환이 들어 점점 시일이 갈수록 피곤함을 보이셨으나 오히려 만기(萬機)를 수작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태묘(太廟)에 전성(展機)하는 일과 기예(技藝)를 시험하고 선비를 시험하는 일 같은 데에 이르러서도 편찮다 하여 행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대개 절제하여 고요히 조섭하시는 방도를 또한 잃은 바가 많았다."

ⓒwikipedia.org
이 행장은 과연 진실일까? 헌종은 17세 되던 해에 두창을 앓았던 기록이 유일하다. 이후 큰 질병을 앓은 예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두창이 헌종에게 치명적인 후유증을 남겼을까? 아니다. 조선 후기 왕실에서는 두창 치료의 노하우가 상당히 축적된 상태였다. 할아버지 순조 역시 두창을 앓았지만 완치되었고, 헌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두창이 시작된 다음 날인 9월 28일 가미활혈탕, 10월 1일 가미귀용탕, 10월 2일 귀용보원탕, 10월 3일 귀용보원탕에 녹용과 계피를 가미하고, 10월 4일 계피를 빼고 녹용과 인삼을 가미하여 처방했다. 10월 6일에는 감로회천음으로 처방을 마무리해 두창을 완치했다. 이는 순조의 두창 치료 방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헌종의 목숨을 앗아간 건강상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헌종 15년(1849년), 23세가 되는 4월 10일, 실록은 도제조 권돈인이 헌종과 나눈 의미 있는 증상을 기록하고 있다.

"옥색이 여위고 색택(色澤)이 꺼칠하시니 아랫사람의 심정이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에 괴로운 것은 처음부터 체기(滯氣)가 빌미가 되었고 별로 다른 증세는 없었다. 근일 이래로 체기가 자못 줄었고 잠도 조금 나아졌다."

이 글의 말미에서 권돈인은 헌종에게 약을 대내에서 직접 지어 드시기 때문에 불안하다면서 약방과 제조를 거쳐서 복용할 것을 당부한다. 왕들은 약원의 입진 과정을 불편하게 여겼기 때문에 정식 입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처방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승정원일기>는 이런 내밀한 처방을 왕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일 체기와 설사 증상이 심해지자 의관들은 양위탕을 처방한다. 이때 헌종은 '양위탕을 복용하고 체기와 설사가 나아지면 지금처럼 군자탕을 복용하는데 문제가 없느냐'고 질문하다. 귀용군자탕에 들어가는 녹용, 당귀, 인삼, 숙지황 등이 체증을 유발하지는 않을지 물은 것이다. 이런 기록으로 헌종이 귀용군자탕을 계속 복용해온 점이 드러난다.

헌종은 왜 귀용군자탕을 복용했을까? 권돈인이 식욕을 묻자 '정월보다는 조금 낫다'는 말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헌종은 식욕 부진으로 고생했고, 그에 대한 처방으로 녹용, 당귀, 인삼, 숙지황 등이 들어 있는 귀용군자탕을 복용한 것이다. 그런데 양위탕 처방에도 불구하고 헌종의 병은 잡히지 않는다. 11일에도 복통이 계속되고 체증과 설사가 이어졌다.

헌종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소변을 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는 '오령산이라는 이뇨제를 복용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헌종은 가미이공산 처방으로 치료를 받다가, 13일은 계강군자탕이라는 속을 데우는 약을 투여 받았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네 차례나 반복되던 설사가 그쳤고, 소변도 순조로워지면서 맑아졌다.

하지만 이런 치료는 일시적이었다. 다음 달인 윤4월이 되어서도 헌종의 체기가 이어져 불환금정기산이라는 감기와 소화 불량 증상을 동시에 치료하는 약물을 복용한다. 밥맛이 없어 물에 밥을 말아 겨우 먹었는데도, 식욕 저하와 소화 불량 증세가 이어지며 속이 더부룩한 증상도 계속되었다.

최초로 증상이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난 5월 14일이 되면서 현종의 증상은 다시 악화일로를 걷는다. 우선 얼굴과 발에 부기가 생겼다. 소변을 보기가 곤란해져 이뇨제를 복용한 후에는 밤사이에 요강을 반이나 채울 만큼 많은 소변을 보았다. 이후의 진료 기록은 구체적인 내용이 전혀 없다.

다만 6월 5일에는 가미군자탕을 3첩 복용했으며, 6월 6일 목숨을 잃은 날에는 계부이중탕과 가미이중탕을 각각 한 첩씩 투여 받았다. 점진적으로 설사와 체기의 증상이 반복되면서 악화되는 과정에서 결국 헌종은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권돈인과 현종 사이에는 계속적으로 오가는 의학적 대화가 하나 있다. 바로 녹용, 인삼, 숙지황에 대한 것이다.

4월 11일 헌종은 설사를 놓고서 권돈인과 의논하면서도 귀용군자탕에 들어갈 숙지황 제법을 물으며 어떻게 하면 설사 후에 복용할 수 있을지 묻는다. 4월 13일에도 권돈인이 귀용군자탕이 '몸에 좋다'고 찬사를 하자 왕도 '앞으로 더 자주 복용하겠다'며 다짐하며 장단을 맞추는 장면이 나온다.

14일에도 헌종은 향사군자탕을 복용하여 체증을 가라앉히고 나서는, '귀용군자탕으로 몸의 균형을 맞추고 조리도 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한다. 18일에는 헌종이 '치료 후에 녹용과 당귀가 든 보약 100첩을 연달아서 복용하고 싶다'고 밝히자 권돈인이 맞장구를 치면서 1000첩을 복용해야 한다고 한술 더 뜨는 답변을 한다.

권돈인의 죽이 맞는 답변에 헌종은 녹용, 당귀를 극상품으로 준비할 것을 부탁한다. 25일 체증과 설사가 지속되자, 권돈인은 평진탕 처방을 왕에게 먹이면서 녹용이 극상품으로 약방에 들어왔음을 귀띔한다. 녹용 중에서도 무산녹용이 가장 귀한데 뿔의 뿌리까지 각화되지 않은 최고의 품질이 들어왔다고.

헌종은 왜 이렇게 녹용을 강조했을까? <본경소증>은 녹용의 효능은 이렇게 설명한다.

"묵은 뿔이 떨어진 자리에서 피가 쌓여서 솟아오른 것으로 피를 빨아 당기는 힘이 가장 왕성하다. 녹용은 피를 강력히 밀어 보내는 힘으로 위축된 것을 왕성하고 힘차게 변화시킨다."

한의학의 논리를 염두에 두면, 소화는 삭히는 부(腐)와 찌는 숙(熟)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삭히고, 찌기 위해서는 아궁이에서 불을 떼 에너지를 공급해야 한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양기'가 바로 이것인데, 녹용은 바로 이 양기를 보하는 대표적인 약물이었다.

헌종처럼 양기가 허약한 이들은 소화 기능이 약해서 위장의 유동 운동이 느리고, 소화를 충분히 시키지 못해서 설사를 하게 된다는 것이 한의학의 사유였다. <동의보감>이 설사 증상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런 논리다.

"대체로 신기가 허약해지면 진양이 허해져서 비위로 더운 기운을 보내지 못하고, 비위가 허하고 차면서 소화가 잘 되지 않으면서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데 혹 헛배가 부르며 토하거나 설사가 난다. 비유하자면 솥에 쌀을 넣고 불을 때는데 불길이 약해지면 해가 저물도록 익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런데 무엇을 소화할 수 있겠는가."

헌종은 바로 이런 양기를 보하고자 주야장천 녹용 타령을 한 것이다. 하지만 녹용을 아무리 복용한들, 그의 건강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에는 소화기 장애 증상으로 고생하다가 기력이 다해서 목숨을 잃었다. 감히 짐작해보건대, 헌종은 어릴 때 왕위에 오르고 나서부터 약에 의존하는 생활을 하면서 건강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 녹용과 인삼이 든 귀용군자탕 복용은 헌종이 대를 잇고자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정력을 보하려는 목적으로 쓰였을 가능성도 크다. 낮에는 세도가의 등쌀에, 밤에는 쾌락에 몸을 맡기는 생활이 반복되었으니 녹용 수백, 수천 첩을 복용한들 건강해질 리가 없다. 헌종의 건강은 약물에 의존하는 현대인에게도 주는 교훈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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