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6일 오전, 청와대에서 <주간 프레시안 뷰> 마감을 하던 차에 박근혜 대통령이 '정홍원 국무총리 유임'을 발표했습니다. 마감 시간이 임박해 황급히 글을 수정하는 번거로움은 기자들에겐 이골이 난 일입니다. 하지만 발표와 동시에 인사에 관한 박 대통령의 '오기'가 느껴지는 탓에 국정 운영의 변화를 기대했던 저로서는 흥이 나지 않는 작업이 되어버렸습니다. 박 대통령이 발표하기 전에도 정홍원 총리를 그대로 유임시키라는 주장이 진보진영에서 나온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거듭되는 인사 참극에 대한 참담함의 표현이자, 박 대통령의 인사 정책에 대한 짙은 불신을 드러낸 역설로 읽어야 온당합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인사 실패의 책임자를 묻고 제대로 된 시스템을 통해 도덕성과 능력을 인정받는 인사를 내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홍원 유임'이라니요. 총리 파동 '삼진아웃'을 면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자 '높은 눈높이'를 가진 국민들을 탓하며 오기를 부리는 모양새입니다. 게다가 정 총리는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한 사람입니다. 그를 붙잡은 이상,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정부의 인적 책임은 없던 일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책임 총리제는커녕 시한부 총리의 수명을 연장시켜 '대독 총리', '방패 총리'로 계속 쓰겠다는 겁니다.
국민들이 왜 문창극 파동을 겪어야 했는지 허탈해지기까지 합니다. 김용준, 안대희 전 내정자에 이어 박근혜 정부 들어 총리 후보가 세 명씩이나 국회 인사청문회에 서보지도 못하고 물러난 인사 참사입니다. 지난 2000년 인사청문회 제도가 도입된 이래, 중도 하차한 6명의 총리 후보자 가운데 절반이 박근혜 정부의 1년 4개월 동안 나온 겁니다. 이대로라면 박근혜 정부는 인사 문제와 관련한 각종 기록을 갈아치울 기세입니다. 자진사퇴하겠다는 총리를 유임시켜버린 결정도 헌정 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이명박 정부의 '끼리끼리 인사'가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이 정부만큼 청와대의 인사 실패로 국정 공백이 길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 나라에 그토록 총리감이 없어서일까요?
인사는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국회 인사청문회라는 만만치 않은 과정이 있고, 국민의 기대수준도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 문창극 씨의 경우, 이를 탓할 수 없는 인사라는 점에서 총리 지명부터 낙마까지 가장 나쁜 과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인사청문 과정에서 물러난 장상, 장대환 총리 후보자와는 경우가 다릅니다. '국무총리로 적합하다'는 의견이 단지 9%(한국갤럽 조사)에 불과했다는 건, 문 씨가 박근혜 지지층조차 납득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총리 후보를 내세워놓고 국민의 눈높이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무엇보다 박근혜 대통령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선, 물러나는 방식을 놓고 문 씨와 흥정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대통령이 스스로 지명철회 카드를 뽑아들기 부담스러우니, 문 씨에게 자진사퇴를 설득하느라 몇 날 며칠을 허비하는 무책임한 모습이었습니다. MBC는 지난 20일 밤 갑자기 긴급대담을 편성해 문 씨의 교회 강연 동영상을 방송하는가 하면, 국가보훈처는 23일 문 씨가 제적등본을 제출한 지 단 하루 만에 조부의 독립운동 경력을 확인하는 기민함을 보였습니다. 모두 문 씨의 명예회복을 위한 막후의 조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샀습니다.
거듭된 인사 실패가 국정 진행을 가로막고 있음에도 문 씨 본인이나 청와대로부터 어떠한 사과의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문 씨의 사퇴 직후 박 대통령이 내놓은 말은 "인사청문회까지 가지 못해 참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게 고작입니다. 국회에 임명동의안을 보내지 않은 건 박 대통령인데, 마치 자신과 무관한 제3자의 입장에서 또다시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한 겁니다. 극우적 진영논리와 식민사관을 가진 사람을 총리 후보로 발탁해 놓고도 여론 탓, 언론 탓, 야당 탓으로 돌린 꼴입니다. 급기야 정홍원 총리를 유임시킴으로써 인사청문회에 대한 박 대통령의 불신이 노골적으로 드러났습니다.
특히 여권에선 문 씨의 낙마 원인으로 “KBS의 왜곡 보도”를 지목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문제의 교회 동영상을 짜깁기해 마치 문 씨가 친일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듯이 몰아갔다는 겁니다. 반공 우파 진영에서도 왜곡된 언론 보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문창극 카드를 지키지 못한 박 대통령에게 볼멘소리를 합니다.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은 "좌파 매카시즘"이란 표현을 썼더군요. 좌파들의 마녀사냥과 박 대통령의 무책임으로 인해 문 씨가 희생양이 됐다는 뜻이겠죠. 청문회에도 세우지 못하고 정치적 손실 최소화에 몰두한 박 대통령이 못내 마뜩잖은 겁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도 "문창극을 지키지 못한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겠다"는 투의 게시글들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있습니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신경을 건드리는 대목은 이처럼 보수층의 분열입니다. 중도에 가까운 보수 진영의 한쪽에선 문창극 총리 발탁을 부적절하게 보는 반면, 극우 쪽에선 박 대통령의 무책임을 질타하고 있으니 난감할 수밖에요. 박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정홍원 총리 유임을 결정한 정권의 속내를 닮아있습니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에 대한 비판론도 골칫거리입니다. 이제 김 실장의 거취 문제는 야당만의 정쟁거리가 아닙니다. 새누리당 내에서 오히려 논란이 격화되고 있는데, 김무성 의원이 대표적으로 ‘비서실장 교체론’을 이끕니다. 김 의원이 누굽니까. 당권 경쟁에서 친박(親朴) 서청원 의원과 대조돼 비박(非朴)계 주자로 분류되지만, 지난 2012년 대선 때 선거대책총괄본부장을 맡아 야전침대에서 숙식하며 박 대통령의 당선을 적극 지원한 공신입니다. 문제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유세장에서 낭독해 훗날 논란이 되었을 정도로, 음으로 양으로 뛰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김 의원이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현재 위기에 봉착했다"면서 "소수의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 독선으로 흘러 국정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김기춘 비서실장의 전횡을 정면으로 겨냥했습니다. 이를 단지 여권 내부의 주류와 비주류의 권력 다툼으로만 볼 수는 없는 일이죠. 무엇보다도, 반복된 인사 참사에도 불구하고 인사위원장인 김 실장이 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건재하다는 사실 자체가 비정상적인 정권의 민낯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와 반대로 '김기춘 옹호론'도 묘한 파장을 내고 있습니다. 옹호론의 요지는, 문창극 씨가 천거된 과정이 김 실장을 책임자로 하는 공식적인 인사 시스템에 의한 것이 아닌 만큼, 김 실장에게 책임을 묻기는 무리라는 겁니다. 실제로 청와대 인사위원회에 관여하는 참모들도 이번 문창극 발탁의 내막을 모르는 눈치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럼 누가 문창극 씨를 천거했느냐는 의심으로 번집니다. 공식 직함을 갖지 않은 소위 '비선 라인'이 인사를 주무르고 있다는 논란입니다.
이른바 '7인회'로 불리는 원로급 인사들이 주목받았습니다. 특히 7인회 멤버인 안병훈 전 조선일보 부사장이 문 씨와 서울고 동문이라는 이유로 천거의 주역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하지만 안 전 부사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가 (추천)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라며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같은 7인회 멤버인 김용갑 의원도 "7인회 멤버 누구도 천거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언론과의 접촉을 극구 마다해 온 7인회 멤버들이 잇따라 언론을 통해 비선 논란을 일축하면서 의혹은 몸집을 키웠습니다.
일각에선 박 대통령의 숨은 측근인 정 모 씨가 문 씨를 추천했을 거란 소문이 사실처럼 돕니다. 사석에선 막후 비선 그룹들 사이의 알력이 문창극 사태를 계기로 표면화된 게 아니냐는 해석까지 오갑니다. 권력에는 늘 확인되지 않은 뒷소문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지만, 이를 깔끔하게 정리할 책임 또한 권력의 몫입니다. 정설처럼 되어버린 ‘문창극 비선 천거론’의 사실 여부를 떠나, 권력은 문제를 노출한 인사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일부터 팔을 걷어야 합니다. 인사위원장 직함을 가진 김 실장이 총리 천거에서 배제됐다면, 그조차 김 실장이 책임져야 당연하겠죠.
하지만 청와대는 정권 초기부터 지적받았던 '수첩 인사', '비선 인사' 문제를 외면합니다. 인재 풀을 넓히고 공식적인 인사 시스템에 당의 의견까지 반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어제오늘 나온 게 아닌데도 여전히 청와대는 모른 척입니다. 배신하지 않는 사람, 박 대통령이 잘 아는 사람만을 골라 쓰려다 보니 인사 참극이 반복되는데도 말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한 탓에 여권의 위기 돌파 전략은 엉뚱한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인사청문제도 자체를 손볼 요량인가 봅니다. 인사 실패가 모두 인사청문제도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겸 비상대책위원장이 25일 박 대통령을 만나 이같은 의사를 밝혔고, 박 대통령도 수긍하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이던 2013년 1월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인사청문회가 능력에 대한 검증보다 신상털기에 집중하는 것 아니냐. 새롭게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또한 "신상에 대한 문제는 비공개 과정에서 검증하고 국회에서 공개적으로 검증할 때는 정책 능력이나 업무능력만을 검증하면 좋겠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완구 비대위원장이 박 대통령에게 밝힌 인사청문제도 개정 방안과 일치합니다. 미국처럼 도덕성 검증을 비공개로 하는 '청문회 이원화' 방식을 도입하자는 얘깁니다.
허무맹랑한 주장이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정권마다 반복되는 인사 파동의 사례 가운데에는 비교적 사소하다고 할 만한 사유가 야당에 의해 꼬투리 잡혀 낙마한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정책과 자질에 중점을 둔 제대로 된 청문회를 하고 싶다면, 1차 검증 시스템부터 제대로 작동하게 해야 당연합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미국은 고위공직자 인준동의안을 의회에 보내기 전에 연방수사국(FBI), 국세청(IRS), 정부윤리실(OGE) 등이 실시한 조사를 토대로 대통령 법률보좌관실이 샅샅이 신상을 텁니다. 1차 검증의 신뢰도가 높으니, 자연히 도덕적 자격을 갖춘 고위공직자에 대한 품격 있는 청문회가 가능한 것이죠.
이와 달라 '정실 인사', '비선 인사', '수첩 인사' 지적을 듣는 집권세력이 인사청문제도 개정을 주장하고 있으니 문창극 파동에 대한 물타기라는 비판을 받는 겁니다. 아울러 국회가 대통령의 인사권을 신중하게 행사하도록 견제하고, 공직에 지명된 사람의 업무능력과 도덕성을 검증토록 한 인사청문제도 도입 취지 자체를 무력화할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 되는 겁니다.
6월 19일 자 <주간 프레시안 뷰> 43호에서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박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을 경고했는데요, 레임덕의 현실화 여부를 떠나 정권의 반복적인 조기 붕괴는 국민적 비극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성공해야 국민도 성공합니다. 출범한 지 1년 6개월도 안 된 정부입니다. 박 대통령이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정권의 성공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상황은 비관적이지만 비관과 절망에 머무르지 않는 힘은 '민중의 비판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간 프레시안 뷰>는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만의 차별화된 고급 칼럼지입니다. <프레시안 뷰>는 한 주간의 이슈를 정치/경제/남북관계·한반도/국제/생태 등 다섯 개 분야로 나눠 정리한 '주간 뉴스 일지'와 각 분야 전문 필진들의 칼럼을 담고 있습니다.
정치는 임경구 프레시안 정치 선임기자 및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번갈아 담당하며, 경제는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남북관계·한반도는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국제는 이승선 프레시안 국제 선임기자, 생태는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맡고 있습니다.
이 중 매주 한두 편의 칼럼을 공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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