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염치없는 정치라는 생각이 듭니다. 4.16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두 달이 돼가는 지금까지도 12명의 실종자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부와 정치권은 6.4 지방선거를 분기점으로, 세월호 국면을 털고 가려는 분위기입니다. 국민들은 선거를 통해 정부의 존재 의미와 정치의 효능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냈음에도, 여야는 각자의 방식으로 선거 결과를 곡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겸손을 잊은 정권은 졸속으로 쏟아낸 대책을 '국가개조'라는 포장지에 욱여넣은 채 독불장군식 통치에 여념 없습니다. 새누리당의 '세월호 국정조사 대책회의'에선 농담 따먹기에 웃음소리가 넘치는가 하면, 이완구 원내대표는 "국가개조의 핵심은 규제 완화"라는 아찔한 주장까지 했습니다. 세월호 국정조사를 둘러싼 여야의 협상이 공회전하자, 보다 못한 유가족들이 중재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집권세력에게선 '심판받지 않았다'는 오만이 피어오르고, '뼈를 깎는 반성을 하겠다'는 야당은 뼈만 깎는 무기력을 반복합니다.
지방선거 뒤, 박근혜 대통령이 내놓은 첫 작품은 문창극 총리 지명입니다. 고르고 골라서 내놓은 인사가 윤창중 씨에 버금가는 '극우 논객'입니다. 정말 박 대통령은 문 내정자가 세월호 참사로 분열된 우리 사회를 통합하고 무너진 정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킬 적임자라고 판단한 걸까요? 아무리 도덕성의 기준을 충족할 만한 깨끗한 총리감 찾기가 어려웠다고 한들, 한쪽 진영의 논리만을 수십 년간 옹호해 온 사람을 총리로 발탁한 건 스스로 반쪽짜리 정부라고 자인하는 꼴입니다.
문 내정자의 과거 칼럼에서 드러난 '반공 우파' 본색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어느 교회 특강에서 일본의 식민지배와 남북 분단이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는 망언까지 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 지는 게 우리 민족의 DNA"라는 그의 궤변은 마치 정몽준 의원 아들의 "미개한 국민" 발언을 연상시킵니다. 일부 몰지각한 목사들이 '미개한 국민' 발언을 적극 두둔해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요, 문 내정자 역시 똑같은 인식을 드러낸 겁니다.
우리나라 보수의 본산으로 한국전쟁을 전후해 대규모로 월남한 지주계급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손꼽히는데, 월남자 출신으로 4대째 기독교 집안 내력을 가진 문 내정자는 자연스럽게 반공 보수의 성향을 뼛속까지 체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망상에 가까운 역사인식에 기초하다 보니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한 국민들이 ‘복지병’에 걸렸다는 현재적인 해석에까지 이른 것 같습니다.
게다가 문 내정자는 이미 전직 대통령이 정부를 대표해 사과까지 한 '제주 4.3 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하는 발언까지 했습니다. 또한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면서 "일본으로부터 위안부 문제 사과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태도와도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내각을 통괄하는 국무총리가 정부와 대통령의 입장과 정반대의 신념을 가진 셈입니다. 논란이 일어난 직후, 문 내정자가 "사과할 게 있냐"며 발언에 관한 사과를 부정한 대목에서도 그의 '신앙화된 신념'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사설] ‘청문회 통과용’만으론 청문회 통과 어렵다)
충청권 출신에 사상 첫 언론인 총리 발탁이라는 깜짝 효과를 노렸던 청와대는 스텝이 꼬였습니다. 내각 개편을 통해 분위기를 반전하려 했던 계획이 또다시 총리 인선 파동으로 엉클어졌기 때문입니다. '문창극 카드'까지 실패하면 조각 당시 김용준 총리 내정자의 사퇴, 최근 안대희 전 총리 내정자의 낙마에 이어 세 번째 총리 인사 실패라는 진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내각과 청와대 개편을 시작으로 정국 주도권을 장악해 나가려던 계획도 차질이 불가피합니다. 섣불리 '문창극 카드'를 거두기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큰 문제가 드러난 인사를 그대로 밀어붙이자니 여론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 부담입니다. 오죽하면 야당이 "안대희보다 더한 인사 참사"라며 들고 일어섰겠습니까.
하지만 문창극 내정자보다 더 큰 문제는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입니다. 박 대통령은 말로는 "지방선거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했으나 변화의 기미가 전혀 엿보이지 않습니다. 국민을 둘로 쪼개 지지층을 동원하는 방식의 통치술을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겁니다. '국가개조'가 그러한 발상에서 나왔고, '이념 전사'인 문 내정자를 국가개조의 적임자라며 발탁한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갈등형 국정의 상징이 된 김기춘 비서실장을 그대로 둔 국정 혁신은 어불성설입니다.
박 대통령의 이 같은 '마이웨이'는 지방선거를 비교적 선방했다는 자체 해석에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국민들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정부 심판, 세월호 심판'을 유보한 것은 사실입니다. 임기 초기의 대통령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준 겁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국정을 쇄신하라는 경고장도 함께 보냈습니다. 새누리당이 서울에서 대패하고 충청권에서 몰락하고 영남에서 고전한 까닭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여권이 무기력한 야당의 반사이익을 본 측면도 있습니다.
이런 복합적인 민심을 외면하고 일방독주 국정을 고집하는 까닭은 성과에 대한 조급증 때문일 겁니다. 5년이라는 제한된 임기는 한국 대통령제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2~3년 차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않으면 국민들의 기대는 순식간에 식어버립니다. 그 뒤에 찾아오는 레임덕을 누구도 피해 가지 못했습니다. 이를 잘 아는 박 대통령이기에 청와대가 주도권을 틀어쥐고 2~3년 차를 돌파해 나가려는 겁니다. 2016년 총선까지 전국단위 선거가 없는 일정을 십분 활용하려는 거죠.
걱정되기는 새누리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당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당권주자들 가운데 누가 당 대표가 된들 박 대통령에게 '감히' 고언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너나없이 '박근혜 눈물'의 수혜자인 데다, '배신이냐 의리냐'로 피아를 가르는 박 대통령의 스타일을 잘 아는 '친박(親朴)' 인사들이기에 그러합니다. 오히려 국가대개조의 선봉이 되겠다는 투의 저자세는 여전히 당이 청와대 하명을 받드는 거수기임을 자인하는 듯합니다. 일부 당권주자들이 공천권을 당원들에게 돌려주겠다고 하지만, 청와대가 당을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 공천 영향력을 스스로 포기할 리는 만무합니다.
당·정·청을 줄 세우는 이런 통치방식은 엄청난 저항과 갈등을 상시적으로 불러일으킵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드러난 바와 같이 우리 정치의 지형은 51 대 49라는 긴장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49를 적으로 돌려세운 통치가 성공할 가능성은 대단히 낮습니다. 속도전에서 벗어나 반대세력과도 타협하는 '더딘 정치'가 오히려 성과를 내는 지름길입니다. 전임자인 이명박 전 대통령이 그토록 밀어붙인 4대강 사업이 임기 내내 갈등만 일으키다 실패한 정권으로 가는 통로가 됐던 것이 반면교사입니다.
박 대통령의 돌격형 통치에 이골이 나다 보니, 남경필 경기도지사 당선인, 원희룡 제주도지사 당선인이 추구하는 지방정부 연정 실험에 관심이 갑니다. 생산적인 연합정부 모델로 자리를 잡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갈등의 정치에 익숙한 우리 정치 풍토에서 신선한 시도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야당은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거두지 않고 있지만, 대승적 차원에서 적극적인 검토가 필요해 보입니다. 반대 세력과의 협치가 성공적으로 안착한다면, 중앙 정치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적지 않을 것이란 기대입니다.
박근혜 정부와 다른 모델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는 야권에도 있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재선과 13명의 진보교육감의 대거 진출입니다. 무엇보다 서울이라는 상징성이 큰 지역에서 박원순 시장과 조희연 서울교육감 당선자의 협력적 관계에 주목하는 눈이 많습니다. 서울은 시장-구청장-의회-교육감을 모두 야당이 집권한 만큼, 그 성패 또한 고스란히 야당의 책임으로 돌아갑니다. 서울에서 경제민주화와 복지, 교육에 관한 거대한 인식 전환에 성공한다면 야당에게도 새로운 활력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국 13명의 진보교육감들이 불러일으킬 교육 혁명에 관한 기대도 대단히 큽니다. 유권자들은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를 망설이면서도 친환경 무상급식, 혁신학교 등의 체감 효과가 큰 성과를 보여준 진보 교육감들에게는 주저 없이 표를 던졌습니다. 여기엔 물질만능과 경쟁일변도의 한국 사회가 세월호 참사를 일으켰다는 반성적인 마음도 담겨 있을 겁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성찰이자 '생활 진보'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또 졌다"며 아직도 한참 남은 총선과 대선 걱정에 세월을 보내느니 국민들이 만들어준 거점에서부터 활로를 찾는 게 현명해 보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야당이 살 길은 박근혜 정부와 다른 '대안'을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이대근칼럼]박원순·조희연의 서울 모델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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