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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당신 마음의 장소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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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나는 매일, 당신 마음의 장소로 가고 싶다

[정여울의 '마음이 머무는 곳'] 왜 하필 여행인가요?

2010년 7월에 문을 연 '프레시안 books'가 이번 5월 30일, 191호를 끝으로 잠시 문을 닫습니다. 지난 4년간과 같은 형태의 주말 판 업데이트는 중단되나, 서평과 책 관련 기사는 <프레시안> 본지에서 부정기적으로나마 다룰 예정입니다. 아울러 시기를 약속드릴 수 없지만 언젠가 '프레시안 books'를 재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실린 글을 편하게 검색하고 볼 수 있는 아카이브를 여름 내로 구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프레시안 books'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 참여해 주신 필자 여러분, 지켜봐주시고 도와주신 출판계 관련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프레시안 books'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 조합원으로 함께해 주세요! -프레시안 books 편집부 올림
문학평론을 하던 내가 왜 갑자기 여행기를 썼냐는 질문을 들을 때가 있다.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춘기 시절부터 가장 쓰고 싶은 글이 여행기였다. 힘들게 번 돈을 왜 여행에 다 쓰냐는 핀잔을 들은 적도 많다. 여행은 어렵고 피곤한 일인데, 왜 하필 여행을 다니라고 충동질 하냐는 원망도 들어봤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여행은 돈이 들고, 힘도 들고, 마음도 많이 쓰인다. 하지만 왜 나는 일상에 지칠 때마다 몸에 좋은 음식을 찾거나 요긴한 물건을 사기보다는 그저 멀리 떠나기를 원하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물건을 사고 나면 사는 순간에 최고의 만족을 느끼고 그 후로는 내리막길이다. 모든 상품에는 감가상각이 있기에, 쓰면 쓸수록 물건의 가치는 떨어지곤 한다. 그러나 여행은 다르다. 오히려 오랜 시간이 지날수록, 여행지에서 겪은 수많은 우여곡절은 지금의 나를 다독여주고, 일깨워주고, 쓰다듬어 준다. 상품은 사는 순간 가치가 떨어져버리지만, 여행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덧붙여져 더욱 풍요로운 감각의 보물창고가 된다. 경험에는 감가상각이 없다. 경험을 곱씹을수록, 추억을 되새길수록, 여행지에서 겪은 모든 일들은 지금 여기의 삶을 가꾸어나가는 데 영양제가 되고 진정제가 된다.


여행의 효용은 현실을 이용해 상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떨 것이라고 추측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한다.
-새뮤얼 존슨

▲ 독일 남부의 작은 마을 엘마우로 가는 기차. ⓒ이승원

상상은 힘든 현실을 잊게도 해주고, 멋진 아이디어를 얻게도 해주지만, 때로는 잘못된 상상 때문에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상상 속에서는 환상적이기만 했던 곳이 막상 가보면 흠결투성이일 때, 사람들은 너무 쉽게 실망한다. 여행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일과 사랑과 우정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지나친 상상'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여행 초보 시절에는 화려한 볼거리에 치중했지만 지금은 조용히 생각할 거리에 집중하게 된다. 아무리 현란한 구경거리를 자랑하더라도 그곳이 차분한 생각의 장소가 되지 못하면 오래 기억에 남지 못한다.

패키지여행의 달인이라 자부하시는 한 멋쟁이 여성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께서 "난 유럽은 거의 다 가봤어, 이제 더 볼 것도 없어"라고 하시길래, 그러면 어디가 특히 좋으셨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기억이 안나. 정말 많이 다녔는데, 늘 패키지여행만 다녔더니 기억이 안 나. 그냥 파리 갔었지, 베니스 갔었지, 이 생각밖에 안 나." 패키지여행은 더 빨리 더 많이 보게 하지만, 더 깊이 더 오래 가는 기억을 만들기는 어렵다. 적극적으로 내가 계획을 짜고 내가 묻고 내가 방향을 잡아 가는 여행이 아니기에 '편안함'과 '양적 만족'은 주되 주체적인 즐거움을 느끼기가 어려운 것이다.

"다음엔 자유여행으로 다녀오세요"라고 조언을 드렸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신다. "말이 통해야 말이지. 나 영어 못해." 영어 못해도 정말 괜찮다고 말씀 드렸지만 영 내 말을 믿어주시지 않는다. 바디 랭귀지도 통하고 콩글리쉬도 결국은 통하니 자신의 운을 믿고 가보라고 권해드렸다.

▲ 엘마우의 도서관. 언젠가는 나도 이런 작고 아늑한 도서관을 만들고 싶어졌다. ⓒ이승원
안타깝게도 세상살이의 즐거움은 쉽고 편안하게는 얻어지지 않는다. 첫 여행에서 뭣도 모르고 그저 많이 빨리 많이 보겠다고 런던에서 택시를 타고 다녔던 것은 지금도 후회가 된다. 두 번째 여행에서 전철을 타고, 걷고, 버스를 타면서 훨씬 깊숙한 런던, 훨씬 따뜻하고 은밀한 런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철 타면 힘들겠지', '버스 타면 복잡할 거야'라는 나의 상상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아주 조금 복잡하고 힘들긴 했지만, 버스 타며 전철 타며 '그들처럼 살아보기'의 즐거움에 비하면 그 상상 속의 힘듦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은 내가 힘든 만큼, 내가 위험을 감수한 만큼, 딱 그만큼만 자신의 은밀한 속살을 보여주는 것 같다.

<다른 길>(느린걸음 펴냄)을 통해 진정으로 다르게 여행하는 법, 다르게 살아가는 법을 보여주신 박노해 선생의 여행 사진을 보며 나는 또 한 번 깊이 내 자신의 신체적 무력함을 반성해 보았다. 아무리 떠나도 계속 설레기만 하는 유럽이 이제는 어느새 편안해져버렸기 때문에 나는 자꾸 유럽을 고집했던 것이 아닐까 반성도 해본다.

▲ 런던 내셔널 갤러리 앞 광장. 내게 그림을 사랑하는 법, 그림 앞에서 한참동안 망연자실하는 일의 기쁨을 깨닫게 해준 곳. ⓒ이승원

당신이 혼자 여행할 수 있다면, 당신은 혼자 살 수 있는 용기와 능력 또한 지닌 것이다. 혼자인 나를 견디고, 가꾸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여러 사람과도, 어떤 상황에서도 잘 지낼 수가 있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그 시간 동안 내가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을 버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시간동안 내가 벌 수 있는 돈을 포기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행하는 시간 동안 내가 내 집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안락함과 익숙함과 평화로움과 작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행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절제와 이별과 인내의 지혜다.

여행을 위해 너무 이것저것 많이 준비하느라고, 여행지에 대해 너무 많이 공부하느라고 오히려 여행 자체를 제대로 못 즐긴다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엉성한 짐이라도 좋으니, 여행지에 대해 잘 몰라도 좋으니, 일단 떠날 수 있는 가벼운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다.

오랫동안 혼자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잃어버린 신체성과 주체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내 몸이 어떤 순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내 몸이 얼마나 휴식과 명상을 요구하는지, 내 몸이 어떤 상황에서 진정으로 깊은 희열을 느끼는지. 그런 것들을 여행 속에서 깨달을 수 있다면 그 여행은 평생 약효를 잃지 않는 보이지 않는 명약이 된다.

아무리 매주 열심히 등산을 해도 그것이 단지 오래 살기 위한 목적이라면 그것은 산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즐기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등산을 자기 건강에 이용하는 것에 그친다. 우리의 여행이 기쁜 이유는 목적지뿐 아니라 그곳에 가는 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우연의 소용돌이 속으로 우리 자신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앞 잔디밭. 내게 아무데서나 벌러덩 누워 햇살바라기를 하는 것이 인간의 소중한 권리임을 알려준 사람들. ⓒ이승원

얼마 전 마포의 한 초등학교에서 '작가의 삶'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작가가 되면 어떤 인생을 살게 되는지, 작가가 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작가로 사는 것은 어떤 점이 힘든지 또는 좋은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이 집중할 수 있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나는 딴청 부리고 엉뚱한 질문을 하는 아이들을 달래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면서 간신히 40분을 채웠다. 성인들을 위한 2시간 강연보다 감정노동 강도가 훨씬 세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대단한 인내심과 내공을 지닌 분들이시구나, 속으로 감탄하기도 했다.

그런데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아이들이 마지막 순간에 던졌던 질문들이 오랫동안 마음의 문을 똑똑 두드린다. 내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아이들의 천진무구한 질문들이 마음의 문을 열게 한 것이다. "선생님은 몇 살이세요?" "애인은 있으세요?" 이런 귀여운 질문부터 시작해서 별의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다 던지는 아이들 덕분에 난처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그 중에 몸이 불편한 한 여자아이가 나에게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은 왜 외국에 가세요?"

나는 그 아이의 질문에 몹시 당황했다. 어른의 질문이라면 곧바로 대답할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그 아이가 마치 '외국에 안 가면 선생님처럼 글을 쓸 수 없냐'고 묻는 것 같아서, '다리가 불편한 나는 외국에 가고 싶어도 가기가 어렵다'고 고백하는 것 같아서, '외국에 가야만 좋은 글을 쓸 수 있냐'고 항변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둘이서 마주보고 앉아 좀 더 깊고 긴 이야기를 시작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때 그 사랑스러운 소녀에게 마저 다 하지 못했던 대답을 하면서 '내 마음이 머무는 곳'의 이야기를 갈음해야 할 것 같다.

작가가 되고 싶다며 나를 보고 싶어했던,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소녀, 지우야. 외국에 꼭 갈 필요는 없단다. 외국에 가야만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그런데 나는 내 나라, 내 동네, 내 가족에게만 묶여 있는 삶을 오랫동안 계속했기 때문에, 다른 세상, 다른 사람, 다른 인생을 경험해보고 싶었던 거야. 그 다른 삶의 길을 국내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그때는 몰랐기 때문에.

그렇다고 외국에 나가는 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너는 씩씩하고 담대한 아이니까, 외국에 나가 새로운 문물을 배우는 것쯤이야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거야. 중요한 것은 외국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든 그 장소를 누군가 불쑥 방문하고 싶은 장소로 만드는 일이야. 중요한 것은 유럽여행이 아니라 내가 있는 장소를 내 마음이 머물고, 쉬고, 사랑할 수 있는 장소로 가꾸는 일이야.

네가 내 강의를 듣고 전보다 전보다 훨씬 더 부지런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정말 뛸 듯이 기뻤단다.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작가에게는 최고의 여행이란다.

지우가 어른이 되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쯤, 그때 우린 더 깊고 더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겠지? 작가에게는 때로 아픈 경험이야말로, 쓰라린 추억이야말로 아름다운 이야기의 재료가 된단다. 내 삶이라는 장작더미를 이야기의 불로 피워 올려서, 세상의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의 심장을 따스하게 데워줄 수 있는 것. 그것이 작가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니까.

2014년 5월 30일
-당신의 마음이 머무르는 곳을 찾아 오늘도 떠나고 싶은 사람, 정여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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