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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골든타임이 남아 있다면

[창비주간논평] 깨어있는 시민을 힘껏 연기해보자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개혁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영원히 개혁을 이뤄내지 못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대통령의 5월 19일자 대국민담화에 나오는 대목이다. 지난 몇 년 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그토록 무겁게 짓눌러온 불안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을까. 하지만 이 대목을 포함하여 담화 전체가 진정성의 어설픈 모방에 그쳤다는 사실은 그것이 전달되는 순간에도 분명했고 이후 한층 분명해지는 중이다.

솔직히 내게 그 담화는 보는 동안은 일종의 당혹감을, 보고 난 다음에는 상당한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개혁할 대상을 '해체'라는 이름으로 분산시킨 것부터 시작해 세월호 참사의 대책으로 제시된 것들의 부적절함은 이미 여러 사람이 지적한 바 있다. 더욱이 가족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애타게 부르고 또 부르고 있는 실종자들을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은 어찌된 까닭이며 난데없이 끼워 넣은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은 또 무엇인지.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더 직접적으로 당혹감을 준 것은 그것들이 전달되는 방식이었다.

미개한 관객으로 취급된 국민

이 담화가 철저히 연출된 퍼포먼스였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끊임없이 대중에 노출되고 대중을 설득해야 한다는 점에서 정치가에게는 배우의 기질이 상당히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고작 과거 초등학교 웅변대회 풍의 대사로 일관하다가 정확히 예상된 지점에서 눈물을 방류하는, 그러고도 마치 대단한 클라이맥스의 임팩트를 준 양 표표히 사라지는 그 시대착오적인 연기는 뭐란 말인가. 이윽고 당혹감이 사라지면서 우리는 한갓 미개한 관객으로 취급되었음을 깨닫고 불쾌할 따름이다.

실상 세월호 참사 이후 무려 34일이 지난 마당에 우리가 대통령에게 원한 것은 차라리 제대로 된 연기였는지 모른다. 일찍이 연기(playing)의 목적이 삶을 거울로 비추어 그 진정한 생김새를 보여주는 것이라 한 <햄릿>의 한 대목을 참조하면, 설사 '바람직한 정치인의 진정한 생김새'를 미처 못 갖추었더라도 그것을 보여주려 연기함으로써 그 생김새에 다가가려는 정치인이라면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리라. 하지만 세월호 참사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실은 이 나라를 이끌고 간다는 이들이 각자 맡은 공적 역할을 충실히 연기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기본적인 '사람노릇'마저 제대로 연기하지 못하는 부류라는 것이다.

대국민담화가 결국 안대희 전 대법관의 국무총리 지명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그나마 내놓은 대책도 실현할 생각이 없거나 어쨌든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담화는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끼리끼리 문화와 민관유착이라는 비정상의 관행이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강조하면서 퇴직공직자의 취업제한을 말하고 공직자 윤리를 말하고 공직사회 개혁을 말했다. 대법관을 퇴직하고 변호사로 전관예우를 받으며 한 달에 수억 원을 번 안대희 지명자의 모습을 '끼리끼리'의 '민관유착' 말고 달리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늘 개혁 대상을 개혁 주체로 호명하는 것이야말로 비정상을 넘은 도착적인 관행이 아니면 달리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여기까지가 당혹감의 연장이라면 불쾌감은 안대희 지명자의 기자회견으로 증폭된다.

저들이 실패한 '사람노릇' 연기, 이제 우리가 해보자

"법 정신에 의거해 어려운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려 노력"한 결과로 번 소득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라면 그런 정당한 소득을 왜 토해내겠다는 건지 정리는 해주어야 기본적인 소통이 시작될 수 있다. "지금까지 한 치의 부끄럼 없이 살아가려 했으나 모든 면에서 그렇지 못"하다는 말은, '한 치의 부끄럼 없이 살아가려 한 인간'으로 존경해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면에서 적어도 한 치 이상의 부끄럼이 있는 인간'으로 짐작해달라는 것인지 분간할 길이 없다. 그저 던져주는 말을 가만히 들어먹어야 한다는 것인가. 대통령에 이어 아직 국무총리로 임명되지도 않은 인물에게마저 미개한 관객 취급을 받고 만 것이다.

이 와중에 대통령의 눈물연기를 선거에 활용하라는 공문을 보낸 자들이나 국민의 눈물이 아닌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자는 자들의 몰골도 드러났지만, 나아가 세월호 참사는 우리들 대다수의 인간으로서의 바닥을 들추어 거기 씌어진 '돈'과 '욕심'과 '오로지 나 자신'이라는 문구들을 거울로 비추어주었다. 이 거울을 닦고 또 닦으며 앞으로도 계속 부끄러워해야 하겠지만, 그 바닥의 어느 한 귀퉁이에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개혁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영원히 개혁을 이뤄내지 못하는 나라가 될 것"을 진정으로 염려하는 마음을 발견하는 한 변화의 골든타임은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른다. 또 한 번의 선거를 앞둔 지금, 깨어 있는 시민 역할이 멀게 느껴지더라도 우리, '사람노릇'은 힘껏 연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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