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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청년에게 묻는다. "노동은 신성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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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청년에게 묻는다. "노동은 신성한 것인가?"

[프레시안 books] <그럼 무얼 부르지><청춘 파산> 외 한국의 젊은 소설들

2010년 7월에 문을 연 '프레시안 books'가 이번 5월 30일, 191호를 끝으로 잠시 문을 닫습니다. 지난 4년간과 같은 형태의 주말 판 업데이트는 중단되나, 서평과 책 관련 기사는 <프레시안> 본지에서 부정기적으로나마 다룰 예정입니다. 아울러 시기를 약속드릴 수 없지만 언젠가 '프레시안 books'를 재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실린 글을 편하게 검색하고 볼 수 있는 아카이브를 여름 내로 구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프레시안 books'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 참여해 주신 필자 여러분, 지켜봐주시고 도와주신 출판계 관련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프레시안 books'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 조합원으로 함께해 주세요! -프레시안 books 편집부 올림


1.

한때 글로벌 스탠더드가 우리를 구원해주리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후발 근대의 대표 주자였던 한국이 사회 전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기회라 믿었던 이들도 있었다. 돌이켜보건대 자기계발에 온 희망을 걸고 매진하던 짧은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민주화 이후 국민을 위한 권력이 한국사회를 이끌던 시절이었다.

의구심을 멈출 수 없었지만, 다수는 거대한 과도기를 지나고 나면 희망의 출구가 열리리라는 믿음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신자유주의가 우리를 구원해 줄 새로운 신이라 믿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신자유주의의 소용돌이에 눈 뜬 장님처럼 휩쓸려 들어간 것만도 아니었다.

2007년 대선은 헛된 희망 속에서 그저 사소한 부수효과로만 치부했던 의구심의 임계치가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를 보여준 뼈아픈 사례였다. 끝내 열리지 않는 희망의 출구에 대한 절망이 마지막 판돈을 올인한 결과는 참혹했다. 그렇게 정치적 퇴행이 시작되었다.

이후 자체 동력을 마련한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는 한국사회를 돈의 가치로 무장한 자본주의 지옥으로, 우리 모두를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괴물로 조형했다. '4·16 세월호 참사'를 통해 되돌릴 수 없는 우리의 치부로 드러난 바,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누구든 지옥이 되어버린 한국사회의 현재를 두고 책임 소재에서 자유로운 이는 없다.

▲ <조공원정대>(배상민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국가적 체질 개선과 조정의 결과가 뚜렷해진 2000년대 중반 이후, 학계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서 글로벌 자본주의가 서구의 경제적 곤궁 해소를 위한 정치적 기획이었음이 폭로되기 시작했고, 그 기획의 허구성과 그것이 야기한 이 땅의 삶의 척박함이 보고되기 시작했다. 개인의 일상 차원으로 침투되는 사회의 부조리에 기민한 문학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문학에서 청년을 중심으로 한 문학이 일군을 형성하며 대거 등장했다. 자기계발과 경쟁 논리 속에서 변형된 21세기형 주체상과 실업과 미취업 현실에 시달리는 알바 청춘들의 신빈곤기가 출현했고 자본의 시간을 거부하고 자본의 논리로 포획되지 않은 세계 상상이 시도되었으며, 무위의 시간을 흘려보내거나 세계의 끝을 상상하는 종말론적 상상력이 유포되었다.

배상민의 <조공원정대>(자음과모음 펴냄, 2013년), 박솔뫼의 <그럼 무얼 부르지>(자음과모음 펴냄, 2014년), 김종은의 <부디 성공합시다>(문학과지성사 펴냄, 2014), 김금희의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창비 펴냄, 2014), 김의경의 <청춘파산>(민음사 펴냄, 2014) 등 최근 작업만 꼽아보아도 그 수가 적지 않다.

▲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김금희 지음, 창비 펴냄). ⓒ창비
무엇보다 강고해지는 학력위계에 편입될 가능성이 희박한 청소년에서(김금희,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중 '아이들', '장글숲을 헤쳐서 가면') 사회가 요구하는 코스를 통과했으나 텅 빈 자아와 대면해야 한 청년까지(배상민, <조공원정대> 중 '안녕 할리'), 생계와 취업을 위해 고향을 떠나는 청년에서(배상민, <조공원정대> 중 '조공원정대'), '열심히'의 세계를 거부하고 도시를 떠나는 청년까지(박솔뫼, <그럼 무얼 부르지> 중 '안 해', '해만'), 그들을 지옥으로 떠민 이들에 대한 분노에서(김종은, <부디 성공합시다> 중 '살구') 떠밀려 배제된 이들에 대한 동료애적 연민(김금희,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중 '당신의 나라에서',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에 이르기까지,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청춘의 면모들에 대한 개별 작업들의 스펙트럼도 폭넓다.

이 작업들은 IMF 이후 한국사회의 풍경을 보고하고 글로벌 자본주의의 격랑에 휩쓸리며 망가지고 파괴되며 변형된 면모들을 포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쫒기며 밀려나고 배제되는 청춘 군상의 삶이 세대 초월적인 것이자(김종은, '부디 성공합시다', 김의경, <청춘파산>) 국경 불문의 것임(배상민, '어느 추운 날의 스쿠터')을 짚어내고, 삶의 밑바닥으로부터 솟아오른 질문들과 그럼에도 남겨진 인간적 자질들을 우리 앞에 부려놓는다.

2
따지자면 글로벌 자본주의가 망가뜨린 청춘의 면모들을 확인하고자 소설까지 들출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가령, 알바 경험으로 서울 유람기를 쓰고도 남을 정도인 슬픈 현실을 유쾌한 알바기로 풀고 있는 김의경의 <청춘파산>을 두고 보아도 그렇다. 상가수첩 돌리기 알바, 카페 알바, 백화점 점원, 학원 강사, 전단지 돌리기, 사탕 포장 알바, 좌담회 알바, 이벤트 알바, 방청 알바, 오전 알바, 야간 알바, 단기 알바 알바의 종류와 성격, 알바 수칙에 이르는 알바 세계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해주지만, 알바 목록의 확인이 뭐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겠는가.

▲ <레알청춘>(청년유니온 지음, 삶창 펴냄). ⓒ삶창
귀만 열고 눈만 뜨면 더도 덜도 보태지 않고 생계를 위한 돈벌이인 '텔레마케터, 국회위원 보좌관, 대형 마트 영업 관리직원, 학원 총무, 레스토랑 서빙, 한강시민공원 청원경찰, 샌드위치 전문점 점원, 돈까스&초밥 체인점 서빙 겸 배달, 한강시민공원 녹지관리, 남대문시장 도매점 배달원'을 전전하며 20대를 보낸 청년(<레알청춘>(청년유니온 지음, 삶창 펴냄, 2011년, 70쪽))을 만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이미 친숙한 일상이 되어버린 알바 천국의 실태 확인을 위해서라면 넘쳐나는 20대 청년들에 대한 사회학적 보고서 검토로 충분하다. 청년을 세대적으로 재호출하고 그들의 정치경제적이고 사회문화적 성격을 재점검하는 작업들이 줄을 잇고 있다. 청년을 학문적으로 대상화한 작업이 있고 청년 자신이 스스로의 상황과 처지를 발언한 보고가 있다. 청년이 더 이상 미래를 선취한/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는 선언이 있고 대표적 복지의 대상이 되었다는 판단이 있으며 현재의 청년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옹호가 있고 사회적 배제와 분리의 심화에 공모하면서 민주주의 훼손에 일조하고 있다는 고발이 있다.

이런 면모들이 개인의 내부에서 파편화된 채로 공존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자기계발의 함정에 빠진 채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 사이의 우정과 연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처우 개선과 정규직 전환의 문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대학생들이 왜 이렇게 고생을 합니까? 정규직이 되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입사할 때는 비정규직으로 채용되었으면서 갑자기 정규직 하겠다고 떼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행위인 것 같습니다." "해고자에 대한 사회적 연대가 왜 의무인가요?", "솔직히 인정하기 싫어요. 제가 지금 저런 상황에서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고생하는데"(<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오찬호 지음, 개마고원 펴냄, 2013년, 18쪽, 71쪽), 이런 식으로 '날로 정규직을 먹으려는 심보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청년들에게 공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도 있다.

▲ <위기의 청년세대>(송호근 외 지음, 나남 펴냄). ⓒ나남
세계화 전략이 불러들인 현재의 글로벌 자본주의가 '청년 세대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임(<위기의 청년세대>(송호근 외 지음, 나남 펴냄, 2010년) 중 조화순의 '빅맥 먹는 이태백'(314쪽))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희생의 성격과 내용은 청년 내부에서 천차만별이다. 문학적 보고의 스펙트럼을 통해서도 간략하게 확인할 수 있듯, 청년을 하나의 세대로 호명하는 일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취업만 한정해서 말해보아도 비정규직의 여성 비율이 턱 없이 높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강남과 강북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서울과 지방 청년의 삶의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부모의 삶이 그들의 삶 상당 부분을 선결정한다. 빈부와 계급 차이가 대물림되는 사정에 새삼 몰랐던 사실처럼 놀랄 수만은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권력과 학력, 젠더와 지역, 인종과 계급 위계가 불러온 온갖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무방비 상태로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20대 청년이야말로 한국사회의 모순의 핵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청년의 참혹한 사정에 대해 너무나 많은 말들이 있지만 사회적 축 위에 놓여 있으면서도 그 문제를 개별 삶의 층위에서 다루는 작업의 유의미성이 크다.

글로벌 자본주의에 의해 훼손된 삶에 관한 수많은 보고 사이에서 우리가 확인을 원하는 것은 청춘 파산의 현장 자체가 아니다. 자기계발의 허구성을 깨닫고 그 세계를 벗어난 다음에는 무엇이 열리는가. 그것이 개별 청년들에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청년은 왜 그런 처지로 내몰리게 되었는가. 청년은 파산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정작 알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닌가.

사회학적 보고가 끝나는 자리에서 여전한 현실을 살고 있는 삶 자체에 대한 문학적 보고가 시작된다. 문학적 보고는 청춘 파산이 특정 세대의 소유물이 아니며 우리 전체의 것임에 대한, 그 파산의 시간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성찰의 기록을 전한다. 그 기록을 통해 누구나 겪는 고통이고 그 총량이 서로 다르지 않다 해도, 한 개인의 고통의 정량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인지된다. 우리가 어떻게 이 지옥에 내몰리게 되었으며, 우리는 또 어떻게 이 지옥을 견디고 있는가, 이 시간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으며, 우리는 또 어떤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가에 대한 유용한 조언을 건네받는다.

3
▲ <청춘파산>(김의경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상가수첩 돌리는 알바로 서울 시내를 돌면서 자신의 20대를 회상하는 알바 유람기 <청춘파산>의 그녀는 왜 20대를 온전히 수십 개의 알바에 바쳐야 했는가. 그녀의 알바 인생은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가. 배제되며 떠밀리던 도망자의 삶은 그녀 자신의 실책의 결과가 아니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짐만으로 서울 시내를 전전하고 알바 전문가가 되어야 했던 그녀의 삶은 IMF 여파로 어느 날 갑자기 집안이 망하면서 그녀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던져졌을 뿐이다. 부모의 빚을 떠안으며 '한 달에 30만 원 이상 용돈을 써 본 적도 신용카드라고는 단 한 번도 사용해본 적도 없는 그녀는 하루아침에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개인파산자가 되었다. 빚쟁이의 삶을 10년 가까이 보내고서야 파산 면책 결정을 받았다.'(37쪽)

알바의 삶이 미래 기획이 불가능하며 단기적 계약 외에 어떤 계획도 불가능한 삶이라면, 빚 독촉에 시달리는 삶은 도망과 변장이 일상인 불안과 공포의 삶이며 포식자에 쫓기는 초식동물처럼 온몸의 신경 촉수를 곤두세워 "하루하루를 무사히 흘려보내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하는"(124쪽) 삶이다. <청춘파산>의 주인공은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망각하게 되며, 결국 그 삶이 "마당에서 기르는 개와 다를 게 없"(124쪽)어졌음을 고백한다. 지옥을 살아왔음에 대한 고백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난 시간을 그녀가 그저 지옥 같은 시간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청춘파산>의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알바와 함께 흘러왔음을 인정한 채로, 아르바이트를 성년의 통과의례로 규정한다. 그녀는 말한다. "사람들은 성년의 날이 되거나 성 경험을 하면 어른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어른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21쪽)이다.

희망, 미래, 성장, 꿈. 이런 말들은 더 이상 청춘의 연관어가 될 수 없는 시대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청춘파산>의 그녀는 빚 독촉을 피해 시달렸던 시간 또한 자신의 소중한 삶이자 성장의 시간으로 끌어안는다. 알바 생활을 그녀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의 성장통으로 정리한다. 회상에 따르면, 그녀는 알바를 하면서 친구를 만났고 사채업자에게 쫓기다가 연애도 시작했으며 바로 그 빚에 시달리다가 실연을 당했고 사회의 약자들과 만났으며 마음을 나눴고 삶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 <부디 성공합시다>(김종은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안정적' 일자리가 행복을 약속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다시 프리터가 되면 되지 않은가?"를 스스로에게 되물었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위해 알바를 하면서 사는 길을 택한다. "큰돈을 벌 순 없겠지만 삼시 세끼 밥을 먹고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할 순 있을 것"(221쪽)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파산 면책을 받은 다음 얻은 안정적 일자리를 스스로 그만두고 프리터의 삶을 선택한 것은, 알바로 보낸 그 시간의 힘 덕분이라 여긴다.

프리터의 삶을 철없는 청년의 선택으로 치부할 필요는 없으며, 평생 그렇게 살 수 없을 거라 지레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저 안이한 발상으로 프리터의 삶을 선택할 만큼 자신의 삶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의심하지 않아도 좋다.

단기 알바를 위해 연배와 성별이 서로 다른 이들이 헤쳐 모이는 상가수첩 알바 현장이나, 미술학원 모델에서 심야 극장 청소까지 환갑이 넘은 그녀의 엄마가 여전히 알바 중인 사정을 통해 <청춘파산>이 말해주듯, 단기 계약직, 비계약직 일자리가 생계수단이 된 이들이 늘어가는 현실에서 알바는 더 이상 특정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규직 삶에서 프리터 삶으로의 선택은 자신에게 소박한 행복을 약속하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마련한 진지한 해답이다. 그 선택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기계가 아니라 사람"(336쪽)임을 다시 새기듯 환기한다.

4
이 땅의 모두가 스펙 쌓기에 골몰하고 자기계발 논리를 내면화하는가.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지 않다. 수많은 루저와 잉여가 입증하듯 자발적이고 비자발적인 이탈자들의 수는 적지 않다. 루저와 잉여가 프리터로 자신의 삶을 재규정하고 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모든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는가.

근대 이후 노동의 가치 평준화는 노동을 통해 평등사회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신화를 유지하는 버팀목이 되었다. 노동윤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두고 지그문트 바우만이 지적한 바 있듯이, '세상에 공짜는 없으며, 따라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다른 이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고 돈을 받을 만하다고 여기는 일을 해야 한다는 전제, 손에 넣은 것에 만족해서 더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은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라는 전제'는 산업화 초기 단계 자본가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윤리다. 노동윤리는 근면하고 성실한 노동력 공급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토대로서 활용되는 한편, 노동윤리의 전제를 수용하지 않는 이들의 교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 <새로운 빈곤>(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수영 옮김, 천지인 펴냄). ⓒ천지인
특정한 형태의 삶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주장은 여기서 만들어졌다. 노동의 대가로 얻은 정당한 임금으로 유지되는 삶이라면 빈곤하더라도 윤리적으로 정당하다는 논리가 이렇게 만들어졌다.(<새로운 빈곤>(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수영 옮김, 천지인 펴냄, 2010년, 13~45쪽 참조)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진화한 노동윤리 뒷면의 실체는 앞서 확인했듯이, 노력하지 않는 삶에 대한 거부감 등으로 표출되고 있으며, 노동윤리의 신성함에 대한 고평은 부정의와 불공정을 지속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프리터의 삶을 선언한다고 해서 우리가 인간임을 입증하는 길이 가볍게 열리는 것도,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방법이 손쉽게 얻어지는 것도 아님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자족적으로 열심히만 산다고 버텨지는 게 세상이 아니다. 자신의 실패를 밑천 삼아 성공학 강사를 하든, 프리터의 삶을 살든, 소소한 편차는 있지만 이 삶들은 근본적으로 근대 노동윤리의 허구성을 믿는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가만히 있으라'는 국가와 권력의 목소리에 따르는 일이 작은 불이익 정도가 아니라 생명을 앗아가는 재난에 이르게 한다는 비극적 산교육 앞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노동윤리의 숭고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조차 없이는 이 부정의로 가득 찬 세상을 버티는 일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지만, '공장을 다니면서도 지각 한번 한 적이 없으며, 공장에서도 성실로 따지면 사장을 해야 할 정도의 삶을 살았던 아버지가 다단계에 빠져든 딸에게 전한 '사람은 그렇게[성실하게:필자] 사는 거다. 그렇게 허황되게 사는 게 아니야'(<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중 '아이들', 127~128쪽)라는 묵직한 말은 부와 성공을 위해 부나방처럼 달려가는 이들을 향한 진리의 한 말씀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태도가 지옥의 세기를 연장하는 밑불이 될 수 있다.

▲ <그럼 무얼 부르지>(박솔뫼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시대의 큰 어른들의 말씀처럼, 국가와 권력의 목소리가 아무리 '가만히 있으라' 다그쳐도, 옳지 않으면 거부하고 저항할 줄 아는 시민이어야만 안전하고 편안한 사회를 지킬 수 있다. (☞ 바로 가기 : "저항할 줄 아는 국민이어야만 안전한 사회 지킨다", <한겨레> 2014년 5월 17일자) 한국사회는 노동윤리의 신성성을 질문하는 더 많은 알바 청년이 필요하다. 말 잘 듣는 시민이 되려는 노력의 타당성을 근본에서 되묻지 않는다면, 권력의 위협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에서 미래는 없다.

어떤 다른 세계의 가능성도 직접 말하지 않지만, 박솔뫼 소설의 소중함이 여기에 있다. 노래방 주인이 이유를 불문하고 고객을 가둔 채 노래를 열심히 부르라고 강요하는 상황을 담은 박솔뫼의 단편 '안 해'가 폭로하고 있듯이, 숭고한 노동윤리의 다른 말인 '열심히'의 세계라는 것은 설득력 없는 우스꽝스러운 세계다. 노동윤리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도시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고 고이는 곳을 향해 떠나는 이들을 통해 그의 다른 단편 '해만'이 말해주듯,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텅 빈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바로 그 고인 시간인지 모른다.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 시간의 어디쯤일 것이며, 우리가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는 길도 거기 어디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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