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간의 대립구도가 현실에서 가시화되고 있으며, 지정학적으로 중간에 위치한 한국은 국가와 동북아시아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이 추락하고 있는 미국은 '아시아 중시' 또는 '아시아로의 재균형' 정책으로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 미국의 중국견제 전략은 중국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기 보다는 일본을 통한 것이다. 즉 한편으로는 일본과 더불어 추진하고 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통해 나날이 커지는 중국 경제 확장력에 제동을 걸고, 또 한편으로는 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여 (일본 스스로 무장하는 것을 허용하여) 중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고 영향력이 확장되지 않도록 봉쇄 (contain)하겠다는 것이다.
미·일간의 경제적 협력을 통한 중국 견제는 TPP의 부진으로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지만 군사적 협력을 통한 중국 견제는 실질적으로 가시화 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4월 25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 후 개최한 공동 기자회견에서 센카쿠열도가 미·일 안보조약의 적용 범위에 들어간다는 점을 재확인하고 미·일 동맹과 지역 안보 방위협력 등을 강화해 나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미·일 양국 정상들간에는 센카쿠열도 문제 이외에 미·일 군사동맹에 관하여 보다 근본적이며 중요한 문제가 협의되고 합의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그로부터 약 3주 후 있었던 아베 일본 총리의 헌법 수정에 대한 강력한 의지 표명 그리고 미국 국무성의 지지 성명을 통해 뒷받침된다.
5월 15일 아베 총리는 총리 자문기구로부터 집단 자위권에 관한 헌법 해석의 변경을 요청하는 보고서를 정식으로 제출받은 뒤 자위대가 자국 방위와 국제 평화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안을 찾을 것임을 약속하였다. 즉 일본의 대외 무력행사를 금지해온 헌법 제9조를 수정함으로써 국제분쟁에서 일본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지금의 일본 헌법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헌법 (제9조)에 명시하였기 때문에 '맥아더 헌법' 또는 '평화 헌법'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미국의 동의 또는 승낙 없이 일본 스스로 헌법 제9조를 수정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헌법수정을 하겠다는 아베 총리의 발언이 결코 일본의 단독 결정이 아님은 마리 하프 미 국무성 부대변인을 통해 확인된다. 아베 총리의 발언이 나온 직후 하프 부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집단자위권을 둘러싼 일본 내부 논의를 환영하고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어떤 결론을 내릴지는 전적으로 일본 정부와 국민 몫이라면서 "일본은 60년 넘게 평화와 민주주의, 국제안보에 기여했으며 앞으로도 평화를 존중하는 전통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프가 국무성의 부대변인임을 감안할 때 그의 브리핑은 결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미국 외교를 총괄하는 국무성의 입장이며, 미국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아베 총리의 도발적인 발언이 나오고 곧이어 미국 국무성 부대변인의 지지 성명이 나온 것은 우연히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이미 4월 25일 미·일 정상 간에 합의를 보고 조율이 되어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다. 미국의 일본을 통한 중국견제정책이 구체화 그리고 현실화된 것이다.
한편 중국도 여기에 대해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중국은 러시아와 지난 5월 20일 상하이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중·러 정상회담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롯한 11개국 국가원수와 1명의 정부 수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포함한 10명의 국제조직 고위 인사 등 모두 46개 국가와 국제조직 지도자들이 참석한 제4차 아시아신뢰회의 중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의장국인 중국과 참여국 중의 하나인 러시아 간 의례적 만남(courtesy meeting)이라는 형식을 띄고 있다. 그러나 중·러 정상회담에서 협의된 내용들 그리고 그것들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것이 단지 주최국과 참여국 간의 의례적 만남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중·러 관계 및 북핵 문제를 포함한 국제 정세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전면적 전략협력동반자 관계'를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로 합의하였다.
시진핑 주석은 그동안 (중국과 러시아는 시 주석의 취임 이후 15개월 만에 벌써 7차례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 전화 통화, 서신 교환으로 신뢰를 쌓고 소통을 이어갔으며 이를 통해 양국 관계의 발전을 이뤘다고 평가하면서 "중국과 러시아는 우호적인 이웃이자 세계무대에서 중요한 역량"이라고 하면서 "양국관계의 격상은 국제적 공평·정의 촉진, 세계의 평화·발전 수요를 충족하는 동시에 세계 다극화를 위한 필연적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시진핑 주석의 발언은 외교상 수사적 차원을 넘어서 현실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다. 즉 중국은 현재 미국을 중심축으로 하고 있는 일극 질서를 불공평하고 정의를 촉진시키지 못하며 세계 평화와 발전에 저해되는 요소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중국과 러시아가 세계질서를 이루는 또 다른 축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시진핑은 집권 초 중국 외교가 세계 규칙의 추종자(追從子)에서 제정자(制定子)로 변하고 있다며 국제 지위에 걸맞고 국가 안보와 이익에 부응하는 강한 군대를 건설하는 것이 전략적 임무라며 과거의 저자세 도광양회(韜光養晦) 외교정책이 끝났음을 선언하였지만 도광양회의 틀에서 벗어난 중국의 외교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었다.
항간에서는 미국에 비해 아직 경제적·군사적으로 현저히 열등한 위치에 있는 중국이 취할 수 있는 옵션이 별로 없기 때문에 수사적으로는 중국의 외교가 추종자에서 제정자로 변하고 있다고 선언하였지만 현실적으로 도광양회의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였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제 러시아와의 동반자적 관계를 통해 미국 일극 체제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각론으로 들어가서 양국은 경제적으로 에너지, 첨단기술, 우주항공, 기초시설건설 등에 대한 투자, 개발 그리고 협력을 추진하며 중국의 실크로드 경제지대 건설과 러시아의 유라시아 철도 건설을 통해 경제 교류를 늘리고 유라시아 시장을 함께 건설하여 2015년 이전까지 양국 간의 무역액이 1000억 달러가 되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미·일이 주도하고 있는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군사·외교적으로 시진핑은 복잡한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양국이 상하이협력기구(SCO)에서 마련한 틀 내에서 안전 협력을 강화하고 지역 안정을 지켜야 한다며 연합훈련과 군사기술, 반(反)테러 등 분야에서의 협력을 심화시켜 반테러 훈련도 차질 없이 해 나가자고 제안하였다.
양국의 군사·외교적 협력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시진핑 주석이 우회적이긴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경계 경고성 발언을 했다는 것과 이에 대한 푸틴 대통령의 화답이다.
시진핑 주석은 "내년은 세계의 반파시스트전쟁 및 중국 인민의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으로 양국이 경축 기념활동을 거행키로 합의했다"면서 "2차 대전 승리의 성과와 전후 국제질서를 수호함으로써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야만적' 침략이란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푸틴 대통령은 공동 기자회견에서 "세계의 반파시스트 전쟁과 중국 인민의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을 공동으로 경축할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중·러 양국정상이 일본의 군국주의적 부활에 (나아가 미·일 군사동맹 강화에)대해 공동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을 공식화 한 것인데 이것은 단지 외교 수사적 발언이 아니었다. 5월 20일부터 26일까지 7일간 진행되는 중국과 러시아간의 '해상연합-2014' 훈련으로 가시화됐기 때문이다.
원래 중·러 간 군사합동 훈련은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훈련 기간에 맞춰 푸틴 대통령이 방중을 한 것은 이번 일정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중국과 러시아가 미·일 군사동맹에 맞서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공식화한 것이다.
21세기 들어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고 있는 동북아시아에서 미국과 일본을 한 축으로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를 또 다른 한 축으로 하는 대립구도가 가시화 되고 있는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미·일 동맹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강하게 받고 있다.
한·미·일 삼국은 이미 2008년부터 매년 한미일 안보토의(DTT: Defense Tri-lateral Talks)를 갖고 있다. DTT가 세 나라 간 정보공유와 정책 공조를 강화하기 위한 회의라고 하지만 이것만을 위한 회의라고 보기는 어렵다. DTT는 언론에 공개되지 않게 비밀스럽게 진행되었으며, 3국 국방 실무의 최윗선이라 할 수 있는 한·미·일 국방부의 차관보급 인사가 수석대표로 참석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DTT는 애초부터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가기 위한 사전 준비 성격을 띤 회의이라 할 수 있다. 성 김 주한 미국대사의 후임으로 국방장관 비서실장과 한·미·일 3자 국방회담(DTT) 수석대표를 지낸 마크 리퍼트가 내정되었는데 이것은 미국이 한국에 어떤 강도(degree)로 미·일 군사동맹에 참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그러나 아무리 강하게 미국이 요청한다고 한국이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을 수 있을까? 또 만약 그렇게 한다면 경제적 생존기반을 무역으로 하는 한국이 자신의 제1통상국인 중국 (한-중간 무역 총액은 한-미, 한-일 무역 총액을 합한 것보다 많다) 그리고 한국경제 미래성장의 발판 (박근혜 대통령은 남·북 경협 그리고 러시아와의 자원 개발 및 협력의 주로(走路)로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제안하였다)이 된다고 하는 러시아와 군사적으로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지정학적으로 한국은 중국과 러시아를 군사적으로 봉쇄하는 한·미·일 군사동맹의 전초기지가 될 것이다).
국익을 생각한다면 결코 취하기 어려운 선택이다. 또한 그 역(逆)도 마찬가지이다. 대립구도가 구체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쪽에도 한발 또 저쪽에도 한발 걸치는 양다리 전략은 국익에 부합하지도, 실현 가능한 대안도 아니다.
한국이 국익을 위에 놓고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중립 노선이다. 나아가 북한과 협력하여 어느 진영에도 치우치지 않는 한반도 중립화를 도모하여 한반도 전체를 완충지대로 만든다면, 현재 가시화 되고 있는 대륙과 해양세력의 대립과 갈등을 중화(中和)시켜 화해와 협력으로 진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동북아중심에 그리고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한반도에 평화 없이는 동북아시아 전체의 번영과 발전을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 중립화의 첫 번째 단추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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