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충성'뿐이다. 충성이 있기에 믿음이 있고 조직이 유지되고, 위기에서 리더를 믿고 따라 탈출할 수 있다. 충성을 위해 사람들은 자발적인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 얼마나 더 위험을 떠안느냐에 비례해서 충성도도 높게 평가된다. 하지만 이런 충성은 위험할 수 있다. 충성으로 뭉친 집단적 유대는 사기를 높이고 조직의 힘을 강하게도 하지만, 구성원의 범죄 행위를 감싸고 서로 비호하게 만든다. 히틀러의 SS친위대 버클에는 "나의 명예는 충성"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 위험한 충성이 보이고 있다. 리더를 보호하고 자기 조직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려는 그들의 충성은, 구할 수 있는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애끓는 부모의 절규를 외면하게 했고, 전체 사회 공동체의 안전은 가치 판단의 뒷전으로 놓이게 했다. 맹목적 충성에 반대하려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할 때다.
성현석(<프레시안> 기자) : 9일자 <한겨레>에 실린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의 글을 다시 찬찬히 읽는다.
"대통령의 거의 소시오패스 수준에 이른 공감 능력의 결여, 권력자들의 무책임성과 무교양이 자주 이야기된다. 그들은 공감하지 않았기에 그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책임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높은 자리로 올라와야 했던 자들이다. 구질구질한 민중의 삶으로부터 유체이탈한 '구별 짓기'가 그들 인생의 목적일지도 모른다."
이 대목에서 목구멍으로 딱딱한 게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 그들이 권력을 잡으려 발버둥친 건, 그 힘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왼쪽이건, 오른쪽이건 이루고 싶은 꿈이 있어서 권력의 윗자리로 기어 올라간 게 아니었다. 아래쪽에 있는 이들과 멀어지고 싶어서, 몸으로 박박 기며 일하는 이들의 땀내가 싫어서, 그래서 위로 올라갔다.
그들이 권력을 몹시 탐하면서도, 동시에 정치를 혐오했던 이유 역시 이해가 된다. 표를 얻기 위해 지저분한 시장 바닥 장돌뱅이에서 굽실거려야 하는 정치가, 그들은 싫다. 그들에게 권력이란 군대 내무실의 병장 계급장 같은 것. 궂은일을 면제받을 수 있는 특권일 뿐이다. 이렇게 또는 저렇게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포부가 없는 건 그래서 당연하다. 할 수만 있다면, 정치를 말끔히 발라낸 권력을 누리고 싶은 게 그들의 속내이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꽉 붙잡아야 한다. 권력이 정치를 벗어날 수 없게끔. 권력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행동 하나하나를 정치적으로 통제해야 한다. 그리하여 정치적이라는 말이 더 이상 나쁜 뜻이 아니게끔 해야 한다. '1원 1표' 원리로 움직이는 시장 사회에서 그나마 우리가 숨을 제대로 쉬려면 '1인 1표'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가 살아나야 한다. 정치가 살아야 사람도 산다.
좌파전선이 내세운 대선 후보였던 장 뤽 멜랑숑은 한때 지지율이 18퍼센트까지 치솟았다. 비록 실제 득표율은 11.05퍼센트에 그쳤지만, 이 역시 가벼운 숫자는 아니다. 프랑스 공산당의 전성기가 끝난 이후 사회당 왼쪽에서 10퍼센트 이상 득표한 후보가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건 멜랑숑의 공약집이다. 책으로 출간됐는데, 소리 없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정치인의 대선 공약집을 자발적으로 돈 내고 산 사람이 30만 명이 넘었다. 여기서나 거기서나 상상하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이 공약집이 지난 대선 직전에 역시나 소리 없이 한국에 상륙했다. <인간이 먼저다>(장 뤽 멜랑숑 지음, 강주헌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가 그것. 세월호 참사 동영상을 보며 이 책을 다시 꺼낸다. 제목 그대로다. 돈보다 인간을 앞세우는 정치적 비전. 만약 우리가 다시 거리로 나선다면, 이 책을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이 공약집이 지난 대선 직전에 역시나 소리 없이 한국에 상륙했다. <인간이 먼저다>(장 뤽 멜랑숑 지음, 강주헌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가 그것. 세월호 참사 동영상을 보며 이 책을 다시 꺼낸다. 제목 그대로다. 돈보다 인간을 앞세우는 정치적 비전. 만약 우리가 다시 거리로 나선다면, 이 책을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안은별(<프레시안> 기자) : 독서가 어려운 요즘이다. 겨우겨우, 미처 못 읽은 저작들을 아껴 읽을 정도로 좋아하는 요네하라 마리의 <유머의 공식>(김윤수 옮김, 마음산책 펴냄)을 잡았다.
이 책에는 똑같은 얘기라 하더라도 사람을 웃게 만들 수 있도록 순서를 바꾸거나 양념을 쳐서 유머를 창작하는 방법 열두 가지가 제시되는데, 각 장 맨 끝에 실린 '응용문제'는 한 문제도 못 맞췄다. 가벼운 마음으로, 가끔은 진짜 허를 찔리며 실실 웃기도 하면서 봤지만, 결코 쉬운 얘기가 아닌 것이다. 평소에도 나는 남을 웃게 하기가, 그것도 이렇게 머리 써서 구성한 유머로 웃기기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 생각해 왔고,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처럼 '웃기게 글 잘 쓰는' 재주를 가진 사람을 부러워해왔다.
하지만 지금 노력과 생각 없이 웃기고 자빠져 있는 최고의 사례를 꼽자면, 청와대 앞과 KBS 앞에 행정력을 배치하고 '순수한 유족' 운운하는 박근혜 대통령과 그 하수인들 아닐까. 어두울 때일수록 유머가 극대화된다는 원칙은 역시 맞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건 우스움을 넘어 너무 끔찍하다. 그는 대체 언제쯤 '개드립'의 소재를 그만 두고 정치를 할 것인가?
요네하라 마리가 살아 있다면, 지금 한국의 상황을 알았다면, 다음과 같은 트윗에서 힌트를 얻어 멋진 유머를 구성해냈을 것 같다. "북한 무인기한테만 청와대 개방하는 종북 정권" "정부는 왜 검찰총장의 아들만 찾아주는가?" 그 응용은 언젠가 <유머의 공식>을 읽을 독자들에게 맡기며, 다음은 고이즈미가 남긴 희대의 유머다. 이 책 183쪽에 나오는데, 어째 기시감이 쨍하게 든다.
2004년 11월 10일, 당수 토론에서 민주당의 오카다 대표가 물었다.
"이라크 특별조치법에서 비전투 지역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고이즈미 총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법률상으로 말하면, 자위대가 활동하는 지역은 비전투 지역입니다."
노정태(자유기고가·<논객시대> 저자) : 이제 확실히 알 수 있다. 하지만 늘 그랬다. '윗분'들은 '아랫것'들을, 예나 지금이나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특히 농민들이 그러한 시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인간은 반드시 먹어야 살 수 있지만, 그 식량을 생산하는 자들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가장 '아랫것' 취급당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아라카와 히로무는 <강철의 연금술사>(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로 유명한 일본의 만화가이다. 다른 만화가들과 그의 이력 및 작품 세계를 확연하게 갈라주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그가 일본의 식량 창고인 홋카이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농민 출신 만화가라는 데 있다. <은수저>(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는 아예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농업고교 학원물이며, 그게 아니어도 그가 그리는 만화는 언제나 한결같은 내적 태도를 유지한다.
<백성귀족>(김동욱 옮김, 세미콜론 펴냄)은 그러한 자신의 농가 경험을 에세이 형식으로 살려낸 작품이다. 따로 극화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농가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몰고, 포크레인 등을 다룰 수 있는 대형특수면허를 따며, 어지간한 부상과 상처와 어려움은 스스로 혹은 가까운 친지들과 해결해낸다.
저자는 농촌이라는, 넓지만 좁은 사회에서 벌어지는 인간관계의 부대낌과 피곤함 등을 전혀 다루지 않음으로써 '농촌 계몽 만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마루야마 겐지의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고재운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와 상당히 다른 각도에서 방점을 찍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시골을 바라보는 마루야마 겐지의 리얼한 시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라카와 히로무가 말하는 자조, 협동, 근면한 삶의 태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나는 자랑스러운 백성(이 단어는 일본어에서 '천민'에 가까운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이라고 선언하는 그의 당당함을 배우고 익힐 수도 없을 것이다.
'아랫것'들이 미개하다고, 천박하다고, 경제적으로 소비를 위축시킨다고 함부로 내뱉고 있는 '윗것'들을 향해 우리는 무어라고 대꾸하고 쏘아붙일 것인가. 가볍게 읽은 만화를 두고 깊게 고민해 보았다.
김용언(<프레시안> 기자) : 레이먼드 챈들러가 현대 작가였다면,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매우 즐겼을 것 같다. 그는 수많은 이들에게, 친구나 동료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편지를 자주 보냈고, 먼 나라에서 날아온 팬레터에도 상당히 친절하고 성의 있는 답장을 보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작품에 대해, 탐정 필립 말로에 대해 가능한 한 정확하게 말하고 싶어하는 욕구로 가득한 것 같았다. 일종의 결벽증이랄까.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엮고 옮김, 북스피어 펴냄)는 그가 썼던 수많은 편지 중 일부를 발췌한 책이다. 당연하게도, 필립 말로가 쓰는 편지를 읽는 기분이 든다. “나와 내 작품을 일치시켜 생각하지 마라”고 정색하고 항변하는 수많은 창작자들을 보아왔지만, 나는 아무래도 그 둘을 떼어놓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챈들러의 경우는 그야말로 ‘정직한’ 작가였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됐다. <빅 슬립>(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북하우스 펴냄)이나 <기나긴 이별>(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북하우스 펴냄)을 읽으며 수없이 밑줄을 그었던 때처럼, 이 책을 읽는 내내 연필을 손에 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나긴 이별>에서)미스터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가 하는 점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람들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상하고 부조리한 세계에 신경을 썼지요. 그리고 정직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결국에는 어떻게 감상적으로, 내지는 더없는 바보로 보이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도.”
“보통 사람이 헤밍웨이 같은 상태였다면 감히 글을 쓸 배짱 따위 없었을 겁니다. 나도 분명히 쓰지 않았을 거예요. 그게 챔피언과 칼잡이의 차이예요. 챔피언도 자기에게 있는 무엇을 순간이든 영원이든 잃어버릴 수 있고 장담할 순 없어요. 하지만 챔피언은 더 이상 스트라이크 존에 높고 빠른 공을 던지지 못할 땐, 자기 심장을 대신 던집니다. 무언가를 던지죠. 그저 마운드를 빠져나가서 울어 버리지 않아요.”
“타락한 사회에 반항하는 것이 미숙한 것이라면, 필립 말로는 극단적으로 미성숙하지요. 더러운 면을 더럽다고 보는 것이 사회적 부적응이라면, 필립 말로는 사회 부적응자입니다. 물론 말로는 실패자이고 본인도 그 점을 알고 있어요. 그가 실패자인 이유는 가진 돈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 아주 훌륭한 사람들도 실패자가 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들이 지닌 특별한 능력이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길게 보자면 우리는 모두 실패자일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가 이런 식이 되지는 않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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