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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이유? 당신이 37번째 '이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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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이유? 당신이 37번째 '이것' 아닐까요!

[도정일에게 듣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요즘 같은 효용 만능주의 시대에 남 골려먹는 짓, 나쁜 짓보다 비난받는 게 있다면 '쓰잘데없는 짓'일 것이다. '이제는 슬픔을 추스르고 경제 성장을 도모해야' 운운하는 대통령과 정부는 이러한 시대정신을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그들의 '국가 운영 스케줄'엔 진심어린 사과, 충분한 애도, 다시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구조를 뜯어고치는 데 들이는 시간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목 놓아 그걸 요구하는 이들을 가로막는 시간조차 돈으로 환산하며 아까워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은 '쓰잘데없이'에 하나를 추가한다. '고귀한'이다. 그가 말하는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은 당장에 돈이 되고 배를 불리진 않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일들이다. 고향집 누렁이 황소의 눈을 최소한 1분쯤 들여다보며 그 눈의 문장을 읽어보는 일, 30밧 하는 오징어 세 마리가 100밧이라는 타이의 이상한 셈법, 우리 집 아이 말고 남의 집 아이를 위해 도서관 벽돌 하나 쌓는 일, 이런 것들이 그가 말하는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에 포함된다. 또한 그것은 "당신과 내가 앞으로 끊임없이 함께 만들어가야 할 미완의 목록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도정일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이는 도정일 대학장이 지난 2월 펴낸 두 권의 산문집 중 한 권의 제목이다. 문학동네의 '도정일 문학선'(전 7권) 중 1,2권인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그리고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는 그가 지난 20년간 문학 평단과 문화운동의 현장 양쪽에서 사회·문명에 대한 인문학의 책임을 고민하며 쓴 여러 지면 칼럼들을 엮은 책이다. 90년대 초반이나 바로 작년이나 글에 담긴 현실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은 암담하지만, 그만큼 이제부터 가꿔나가야 할 일들에 저자가 던지는 울림은 커진다.

오랜만의 저작 출간을 기념하여 도정일 대학장의 이야기를 듣는 행사가 지난 4월 23일 저녁,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 위치한 가톨릭청년회관(CY 시어터)에서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대부분의 행사들이 연달아 취소된 시점, 김민웅 교수는 "전 국민이 애도하는 상황 속에서 행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한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럴수록 함께 마음을 나누고 우리의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성찰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어 "우리가 비극 앞에서 사회적으로 애도하는 문화 자체를 잃어버린 것은 '고귀한 것들을 쓰잘데없는 것들로 목록화해서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라며 참사로 스러져 간 이들을 애도하는 노래를 부르고 묵념 시간을 가졌다. 두 사람의 대화와 책 낭독으로 이루어진 행사의 주요 내용을 재구성해, 도정일 대학장의 메시지를 큐앤에이(Q&A) 형식으로 다듬어 싣는다. <편집자>

Q. 성장사에서 가장 큰 질문은 무엇이었나요?

▲ 프랑스의 화가 레옹 보나가 그린 욥의 모습.(1880) ⓒwww.histoire-image.com
고교 시절 <욥기>를 읽고 충격 비슷한 것을 경험했습니다. 왜냐하면 욥은 다른 사람들 눈에도 정의로운 사람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야훼의 심판을 받게 되었거든요. 자식들은 다 죽고 갖고 있던 재산도 사라진 채, 혈혈단신으로 광야에 서서 울부짖는 것이 바로 욥의 모습입니다.

욥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정의롭다고 말해주는 인간을 혹독하게 대하는 것이 신이라면, 대체 정의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은 세상의 정의와 질서를 관장하는 절대자가 아니었나요? 그렇다면 대체 정의를 판별하는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것이 그 어떤 철학적 물음보다 제 삶에 가장 근본적인 파문을 일으킨 질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문학 작품을 포함해서 여러 차례 정의의 문제와 조우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보면 남편은 억울하게 감방에 가 있고 본인은 굶주리고 반쯤 미친 여자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허구한 날 장바닥을 돌며 사람들에게 질문합니다. '이보시오, 정의는 어디에 있소.' 문학의 전기를 쓴다면 그 정의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정의라고 하면 대단히 먼 이야기, 실용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로 여기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게 우리 사는 세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의는 '쓰잘데없는' 그 목록에 들어가는 항목입니다. 그것이 사라지고 없는, 고귀한 줄 모르는 것이 우리 시대의 아픔 중 하나라고 봅니다.

Q. 문학, 넓게는 인문학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인간이 지금과 같은 능력이나 정치적 형식을 발전시킨 비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인간이 '이야기하는 동물'로 진화해왔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은 미스터리입니다. 지금까지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지어져 왔는데도 계속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여러분은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는 이야기를 말로도 하고, 문자로도 남기고, 영화나 드라마로도 만듭니다. 어째서 인간은 이야기를 절대로 포기하지 못하는 걸까요?

간단히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그리워하는 일, 하고 싶지만 못했던 일, 그러나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일이 참 많지만, 가장 중요한 일 세 가지가 있습니다. 취직을 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 본질적이면서도 소중한 일, 인간으로서 가장 긴급히 요청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건 의미가 없는 곳에 의미를 만드는 일, 희망이 없는 곳에 희망을 주입하는 일, 그리고 정의가 없는 곳에 정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는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리워했고 앞으로도 그리워할 그런 일입니다. 이야기란 무엇이고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 세 가지 일을 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깁니다. 바로 그런 일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지상에 살면서 인간이 해야 할 일들은 아주 많다. 그는 돈 벌어야 하고 가족을 유지하고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 그는 친구들과 다투기도 하고 미운 녀석을 골탕 먹이기 위해 덫을 놓기도 해야 하며 사랑과 증오 사이를 하루에도 수십 번 왕래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하는 일들 사이에는 중요성의 차이가 있다. 인간은 유한성의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에 모든 일들에 같은 양의 시간을 투입하거나 동일한 중요성을 둘 수가 없다. 그는 가치 있는 일, 중요한 일들과 그렇지 않은 일들을 분별하면서 자신의 유한한 시간을 배분해야 한다.

중요한 일들 중에서 세상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동의할 만한 세 가지 '큰일'을 고른다면 무엇일까? 첫째는 의미 없는 곳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 둘째는 희망 없는 곳에 희망을 주입하는 일, 셋째는 정의가 없는 곳에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이야기는 왜 끊임없이 만들어지는가' 중,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217~218쪽)

▲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사진은 2010년). ⓒ프레시안(손문상)

Q. 책은 왜 읽어야 할까요?

사람들은 책 하면 지루해 하죠. 그런데 책은 '그런' 책이 아닙니다. 책은 우리에게 관계 맺기의 기술을 전달하는 매체입니다. 책은 그것을 읽는 사이에 다른 그 어떤 매체보다 내가 나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내가 나와 관계 맺는 방식이고, 그러면서 비로소 남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나와 나, 또 나와 남 사이 관계의 건축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책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매혹적인 매체 환경에 둘러싸여 있어서 조만간 책 같은 거 다 버리고 졸업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꽤 많습니다. 그건 착각입니다. 인공지능을 연구하시는 분들이 하는 얘기가 그렇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기계로 할 수 있지만, 생각하는 능력만은 할 수 없다고요. 그런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의 능력을 가장 잘 자극하는 것이 책이라는 매체입니다.

지금은 그 생각이란 것을 마치 쓰레기더미처럼 옆으로 치워 놓은 듯한 시대입니다. 그걸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생각할 줄 아는 아이를 키워내지 못한다면 교육이 무슨 소용입니까. 책으로 세상을 세우는 것은 우리 아이들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Q. 도서관과 기적의도서관 건립 운동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도정일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잠시 별 이야기로 우회하고자 합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당신은 다른 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문학 쪽으로 방향을 잡았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삶을 결정짓는 사건은 대부분 묘하기 마련이고, 기억하기 힘든 일들의 누적적 영향으로 비로소 그 방향이 잡히기도 합니다. 저 역시 이래서 문학을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특별한 계기는 별로 없습니다. 다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 인상 깊었던 별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제가 10대를 보낸 것은 전쟁 직후였습니다. 그때는 그게 무슨 전쟁인지 몰랐습니다. 물자 부족으로 종이가 없었던 때이지요. 그때 제목도 기억이 안 나는 동화를 한 편 읽었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밝게 빛나는 별이 있고, 매일 밤 그 별을 바라보는 지상의 소녀가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별나라의 왕자 역시 언제나 자신을 쳐다보는 지상의 소녀를 내려다봤습니다.

그런데 소녀를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너무 고개를 깊게 숙이는 바람에 별나라 왕자는 떨어지게 됩니다. 지상의 소녀의 눈에는 그 별이 불꽃을 뿜으며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지요. 그래서 그 떨어지는 별을 치마폭에 담으려고 달려 나갑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이지요.

지난해 개관 10주년을 맞은 순천 기적의도서관의 기념 자료집 축사를 썼습니다. 그 글 도입부에 미국 시인 스탠리 쿠니츠의 시 '핼리 혜성(Hally's Comet)'의 내용을 전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은 칠판에 '핼리 혜성'이라 써놓고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이 이상한 별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있잖아, 요놈이 우주를 돌다가 은하수를 건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와 오늘 박치기를 하면 어찌되는지 알아? 아이들은 눈이 동그래진다. "그렇게 되면 말야. 늬네들 내일 학교에 안 나와도 돼."

선생님한테서 그 얘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그날 저녁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어쩌면 그게 가족의 마지막 식사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년은 엄마한테 야단맞고 혼자 제 방으로 돌아가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지구의 끝장은 어떤 것일까? 그는 밤중에 식구들 몰래 다락을 타고 지붕에 올라가 밤하늘의 총총한 별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세계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지붕 위의 소년' 중,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19쪽)

최근 <코스모스> 다큐멘터리가 방송되면서 책을 다시 읽어보게 됐는데, 칼 세이건 역시 어린 시절 이 시에 나오는 소년처럼 늘 별에 대해 궁금해 했습니다. 아버지한테 이것저것 묻고, 도서관에 가서 별과 관련한 책들을 대출받았지요. 저 별은 얼마나 멀까, 저 별에 가려면 며칠이나 걸릴까, 그런 것을 생각하며 자란 아이가 우주과학자가 된 겁니다. 이런 방식의 호기심을 무한히 펼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공간으로서의 도서관을 지어보고 싶었습니다.

기적의도서관 운동을 시작할 때 저의 문제의식은, 지금 부모들이 각자 자기 아이한테는 굉장히 신경을 쓰는 것 같지만 공적 공간이나 공공 정책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배려가 전혀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단순히 어린이 도서관 몇 개를 여기저기 지어보자는 데 있었던 게 아니라, "아이들을 잘 키웁시다"에 있었던 거지요.

도서관 이야기를 하면 한국 사람 대부분은 먹고살기 바쁜데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그럽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한 요청이 무엇입니까.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미래 아닐까요.

"'기적'은 '경이'의 다른 이름이다. 아이들의 '경이로운 성장'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기적의도서관이 무엇일 것인가?" (같은 글, 같은 책 22쪽)

▲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사진 2010년). ⓒ프레시안(최형락)

Q. 책을 보면 일견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을 잇는 대목을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도서관은 기억과 상상을 용접하는 곳', '인문학은 관계의 건축술' 같은 표현도 눈에 띄는데요. 인문학과 '관계 맺기'는 어떤 상관관계를 갖나요?

예전에 어느 강연에서 누군가 질문을 했어요. 인문학, 인문학 하는데 너무 말이 어려우니 쉽게 이야기해 달라고요. 그래서 저는 '나무에 물주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내가 나무와 관계 맺는 방식이기 때문이에요. 거기서 인문학이 관계의 건축술이라는 표현이 나왔던 겁니다.

세상 살며 보면, 인간의 모습이란 '낙동강 오리알'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참으로 의미 없고, 희망도 없고, 정의도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거지요. 거기서 우리 삶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장치들이 필요한데요. 그걸 찾는 기술이 바로 '연결'입니다. 평소에 인문학은 연결의 예술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들을 이어주는 기술이지요.

김민웅 교수가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책 제목을 보고 "'별'은 천문학의 대상이고, '길을 놓다'는 토목공학의 대상인데, 그것이 책의 내용인 인문학과는 어떤 관계가 있나?"라는 재미있는 질문을 했습니다.

공학 하는 분들은 고개를 갸웃하시겠지만 교량을 세우는 작업은 사실 매우 강력한 인문학적 작업이기도 합니다. '종교(Religion)'의 어원은 다리를 세워 이것과 저것을 연결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야기를 말하는 '네러이트(narrate)' 역시 원뜻은 연결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종교나 이야기 모두 교량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어요.

인문학은 그 자체로는 '이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라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행복을 꾹꾹 눌러 담아 감기약 건네듯이 주는 게 아니거든요. 다만 무엇이 행복일까를 찾아내고자 할 때 소중한 길잡이 역할을 해줍니다. 그 길잡이가 되는 명령, 인문학이 우리 삶에 주는 하나의 명령이 있다면 바로 "연결하라"일 겁니다. 그것이 인문학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의 비결 가운데 하나입니다.

서로 관계없는 것들을 이어 붙이는 작업을 다른 말로 하면 환대입니다. 마음을 열고 낯선 것, 국적과 민족이 다른 이방인들을 내 가슴 속으로, 나의 식탁으로 초대하는 일이지요. 그것이 인문학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 <레 미제라블>(1권,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여러분 <레 미제라블> 보셨나요? 감방에서 출소한 장 발장이 배가 고파 한 성당을 찾아갑니다. 혹시 쫓겨나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성당의 문을 두드리는데 신부가 나와 문을 열고 말합니다. '들어오시오, 우리도 가난하게 살지만 당신에게 나눌 수 있는 음식은 있습니다' 하고요.

그리고 식사를 끝냈을 때 장 발장을 향해서 '오늘 우리를 찾아준 특별한 손님'이라고 부릅니다. 그 말을 듣고 장 발장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신부를 쳐다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누군가 자기를 '특별한 손님'이라 불러 준 적이 없었거든요.

이것이 바로 환대의 식탁입니다. 그리고 이 환대의 정신이 소설의 마음, 시의 마음, 궁극적으로는 인문학의 마음이지요. 문학이 만약 우리 독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이런 환대의 정신, 즉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삶의 태도를 가져주었으면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Q. 수도자에게 '애무하라'는 말도 쓰셨습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그 이야기가 나온 글('만해 선사의 침',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78~81쪽)은 1994년 조계종단 개혁 당시 쓴 겁니다.

이전에 한국 불교가 많이 타락해 있었어요. 승려들이 절을 뺏으러 다니고, 정치권과 결탁하는 등 부패 정도가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더 이상 이래선 안 된다, 승려들이 제정신을 차려야 한다 해서 전국의 승려 1000명이 서울 조계사에 모여 종단 개혁을 선언했지요. 한국 불교사에 큰 획을 그은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불교가 지금까지 죽지 않고 명맥을 이은 건 그런 위대한 정신의 힘 때문일 겁니다.

여러분,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지요. 망자에겐 주머니를 쓸 일이 없으니까요. 같은 의미에서 스님들이 입는 가사 장삼에도 사실 주머니가 달려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주머니가 달려 있잖아요. 한동안 우리 스님들은 그 주머니에 뭉칫돈을 넣고 다녔습니다.

그 주머니, 뭉칫돈 넣고 다니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스님이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은 오래된 무덤 속처럼 텅텅 빈 주머니 안의 공허를 맨손으로 만지기 위해서입니다. 불교적 구도의 핵심이 바로 그 비어있음, 제로(零)를 애무하는 겁니다.

여러분도 심심할 때 한 번 연습해 보세요. 내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느낄 때 자기 앞에 커다란 제로의 공이 있다고 생각하고 어루만져 보십시오. 그거 괜찮습니다. 팔 운동도 되고요.(웃음)

세속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겐 애무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동전도 애무하고 지폐도 애무합니다. 그걸 하지 말란 얘기는 아니에요. 애무할 것들은 애무하되, 애무할 수 없는 것, 만져보았자 형체가 없는 것을 애무하는 우리의 손길이나 자세 역시 소중하지 않겠는가 싶어서 하는 말입니다. 그 아무것도 아님에 고귀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프레시안(손문상)

Q.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이라는 표현을 쓰셨지만, 우리 사회에서 '쓰잘데없는' 일을 하면 바보 취급을 받습니다.

'타이 사람들의 오징어 셈법'(<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15~18쪽)에 산치(算痴) 예찬을 좀 썼습니다. 계산에 서툰 사람, 계산하기를 싫어하는 사람, 계산을 거부하는 사람, 세상이 똑똑하다고 찬양하는 방식의 계산을 버린 사람이 바로 산치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바보이지요.

이 책에 대해 여러 가지 반응을 접하면서 사람들이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보로 살지 말아야지'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야말로 바보 공포가 많은 한국인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학이 가장 사랑하는 인간의 형태가 바로 바보입니다. 러시아 문학 전통에서 이들은 '성 바보' 즉 '세인트 풀'이라고 표현됩니다. 어째서 문학이 이렇게 바보를 그리워하고 바보 앞에 높은 이름을 붙이는 걸까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구현 중 하나가 바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랬습니다. 옛날, 아주 멀리 갈 것도 없이 제가 어릴 때 어른들이 가끔 해 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게 영악하게 주판 튕기며 살려고 하지 말아라, 이 세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 번 크게 어리석어라' 같은 것들이지요. 자라고 보니 그때 들었던 어른들의 훈계처럼 바보로 살고자 했던 사람이 많아요. 김수환 추기경이 그런 사람이었지요.

바보 취급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내 안의 바보를 없는 척 감추기도 해야겠지만, 그래도 끝까지 추방하지 말고 간직하며 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보를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Q. 인간이 하찮은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 존재 하나하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오래 전 과학이 밝혀내지 못했던 물음이 있죠. '지구는 어째서 깊은 심연으로 추락하지 않고 그대로 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많은 신화가 나왔습니다. 그리스에서는 거인신 아틀라스가 지구를 떠받친다고 했고, 그게 인도 신화로 가면 거북이가 등에 지구를 지고 있다는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그런데 유대 민족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서른여섯 명의 감추어진 의인(義人)들이 사는데, 그 의인들 덕분에 지구가 추락하거나 망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세상엔 악한 놈, 고얀 놈이 많지만 그들의 선행이 신을 감동시켜서, 신이 한순간 인간 세계를 쳐서 멸하려다가도 징벌의 손길을 제어한다고 합니다. 상당히 인상 깊게 기억하는 민담이에요.

그런데 그 선행이라는 것을 그냥 선행으로만 새겨들어서는 아무래도 허전합니다. 여기서 그 의인들이 하는 일은, 세상의 고통을 흡수하는 일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가슴으로 흡수하지 않는 선행은 그냥 내보이기 위한 전시용 선행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옳은 일을 하다'의 의인이 아니라 고통을 흡수하는 능력을 가진 이들을 말하는 겁니다.

이 의인들은 누구일까요. 학벌 좋은 사람도, 유명 인사도, 고관대작도, 율법학자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냥 사람들이 저잣거리에서 보는 평범한 인간, 보통의 이름 없는 이웃, 대장장이, 목수, 농사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가 그 의인인 줄 모릅니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스스로 내가 의인이라 말하거나 '내가 의인이 아닐까' 생각하는 의인이 있다면 그는 즉시 죽습니다.

▲ 보르헤스의 <상상적 존재들의 책>(The book of imaginary beings)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이 전설을 받아서 37인의 의인 이야기를 씁니다. <상상적 존재들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계에는 언제나 37인의 의인들이 있다. 그들의 임무는 신에게 세계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들은 가난하고,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다. 자신이 의인이라 생각하는 순간 의인은 죽고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다른 의인으로 대체된다. 그 의인들이 우주의 비밀스러운 기둥이다. 그들은 우리의 구원자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그것을 모른다."

보르헤스는 왜 한 명을 더 보탰을까요? 제 해석이지만, 서른일곱 번째 의인이 바로 이걸 읽는 당신이요, 여러분 자신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의인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스스로 서른일곱 번째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더 이상 의인이 아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보르헤스는 이 이야기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흡수하는 능력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진실로 필요한 일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리스 신화의 아틀라스나 인도 신화의 거북이가 세계의 '토대'를 만들어주고 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토대의 토대는 무엇이냐'를 묻는 철학적 꼬투리 잡기가 빈번했습니다. 철학자들은 그 세계를 받쳐줄 튼튼한 토대는 아무 데도 없다고 곧잘 말했습니다. '36인의 의인' 이야기로 이 꼬투리 잡기에 대응할 방법은 없을까요?

"여보게, 철학하는 친구, 아틀라스의 어깨에 힘을 주어 세계를 지탱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일세. 거북이를 떠받쳐서 세계를 망하지 않게 하는 것도 인간이네그려. 그러니까 그 유명한 아틀라스를 받쳐주는 유명한 존재, 그 유명한 거북이를 떠받치는 유명한 존재는 인간일세." ('그 유명한 아틀라스, 그 유명한 거북, 그리고' 중,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61쪽)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유명한 인간'으로서 지금의 방식으로 제 생각만 하며 혼자 잘 살아서는 안 될 겁니다. 우리 인간은 세상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각자가 세상의 고통을 흡수하는 능력을 갖출 때에만 가능한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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