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실이 비명처럼 들린다
한전의 용역들이 기계톱을 들고 송전탑 예정지의 나무를 베려할 때마다 밀양의 할머니들은 그 나무를 껴안으며 톱날에 몸을 갖다대었다. 이 책 <밀양을 살다>는 할머니들이 꼭 껴안고 있었던 것, 그들 스스로가 껍질이 되어 지키고자 했던 그 연한 고갱이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가슴 속에서 불로 태우고 눈물로 재웠던 이야기들. 하지만 지금 이런 식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전이 토벌이라도 하듯 힘없는 노인들을 전력으로 몰아치고 있는 이때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별이 총총한 여름날 모깃불을 지피다가, 아니면 겨울밤 솜이불에 발을 넣고서 들었다면, 비록 눈물은 그렁그렁해졌을지언정, 우리는 그들 삶의 두께 아래서 얼마나 포근히 잠들었을 것인가. 하지만 기계톱이 베어내고 포클레인이 파헤치고 경찰들이 끌고가는 지금 이때에는 이 이야기들이 우리 삶이 내지르는 비명처럼 들린다.
책 한 권을 참 오래 걸려 읽었다. 밀양 사람들이 구술한 생애의 페이지들을 넘기는 게 쉽지 않았다. 좀처럼 눈길이 안 떨어지는 이야기들. 밀양의 할매들은 이것이 속절없이 사라지는 게 안타까워 그렇게 주저앉았구나. 밀양의 할배들은 이것을 잃을 수 없어 물러설 수가 없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10년 가까이 밀양은 이것으로 싸웠고 이것 때문에 싸웠음을 알겠다.
2. 과거는 떠나지 않고 깃든다
도곡마을의 김말해 할머니. 송전탑이 들어설 자리는 시어른이 누워있는 곳이다. 김말해 할머니가 스물두 살, 어린 새댁이었을 때 남편은 보도연맹 사건으로 억울하게 끌려가 사라졌다. 시어머니는 아들 이름을 부르며 여기저기 헤매다 결국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억울하게 끌려간 신랑, 피를 토하며 죽은 시어른. 새댁 김말해 할머니는 어린 아이들을 껴안고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다. 그런데 송전탑은 그 모든 일들이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조계순 할머니도 같은 마을에 산다. 가난한 살림에도 자상한 영감님이 너무 좋았던 할머니. “너무 자상스럽고, 정도 많고, 일도 도와주고, 일도 열심히 하고, 몸뚱이가 저렇게 부지런할까 싶으고, (…) 어른한테도 잘하고 색시한테도 잘하고.” 시어른도, 남편도 너무 좋아서 “죽으면 딴 사람 만날 것 없이 대대로 또 만나고 싶다”는 할머니. 하지만 송전탑은 남편이 나무 지고, 감 내고, 콩 내고, 쌀 내고, 그렇게 모았던 땅을 다 헛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자상하고 부지런한 영감님,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그 존재를 헛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떠나는 게 아니라 여기 깃드는 법이다. 마음에도 깃들고, 땅이나 나무에도 깃든다. 평밭마을의 이사라 할머니는 성당 다녀오는 밤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길가 나뭇잎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 그런 나뭇잎들이 나를 붙잡아. (…) 이렇게 가면서 걸으면서 시어머니도 만나보고 신랑도 만나보고.” 할머니가 헛것을 본 것이 아니다. 나뭇잎이 나뭇잎인 줄 모를 리 없지만, 거기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보이고 손길이 느껴지는 것이다. 밭을 매면 호미 끝에 돌멩이와 함께 기억이 튀어나오고 깻잎을 접다 마룻바닥을 짚으면 점자책이나 되는 듯 사연이 떠오르는 것, 이것은 결코 헛것이 아니다.
위양마을의 손희경 할머니가 한사코 귀신이나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대종손의 종가에 태어나 양반집 며느리로 살아온 자부심을 가진 손할머니는 오래 전에 돌아가신 시아버지와 자신이 대면할 것임을, 아니 이미 대면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시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석 달 전 막내며느리인 손할머니에게 고향을 맡긴다고 했다. “예, 제가 맡을 게예. 아버님매로 저도 잘 지켜가지고 또 밑에 물려주고 갈게예.” 그때 무슨 생각으로 그리 말했는지 모른다며 울먹이는 할머니. 시아버지는 오래 전 돌아가셨지만 그 분의 말은 시간을 넘어 할머니께 남겨졌고 그렇게 마음속에 깃들어 있다. 저승에서 시어른께 떳떳하려면 싸우다 철탑 아래 묻혀야 한다는 손할머니. 할머니 마음에 이토록 생생하게 깃들어 있는데 어떻게 귀신이나 영혼이 없다고 할까.
3. 나락은 뜨고 돌은 가라앉는다
그런데 송전탑은 이종숙 할아버지의 ‘눈썰미’를 헛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막내에게 논을 물려주면 “풀씬풀씬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들은 “송전탑 세우면 여 안올랍니더”하더란다. “그 말이 들어보니 망한 거라.” 할아버지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 “아무리 해도 빛이 안 나고 갈수록 진보성이 없고 끝이 참해야 하는데 내가 슬퍼요.” 내 눈썰미가 틀렸나. 내가 땅에서 배운 게 틀렸나. 내 삶이 틀렸나. 이종숙 할아버지가 싸움에서 쉽게 물러서지 않았던 것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서는 위양마을의 권영길 할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내한테는 돈이 안 통한다’는 말을 곧잘 하는 권할아버지는 “땅을 대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걸어가면 언젠가 바로 서는 날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는 세월이 흐른 뒤 “틀림없는 사람, 믿어도 될 만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이종숙 할아버지도, 권영길 할아버지도, 살아오면서 배운 원칙이 있다. “물에다 돌하고 나락을 넣으면 나락은 떠 있고 돌은 가라앉는다.” 그런데 송전탑은 왜 이렇게 되지 않는 것일까. 마을 사람들이 마늘쪽처럼 다 찢어지자 이종숙 할아버지는 허탈한 듯 말한다. “돈한테는 안 되는가 봐요. 힘듭니더.”
4. 삶은 패배하지 않는다
고갱이가 빠져나간 삶은 껍데기다. 껍데기를 포장도로로 두르든, 문화센터로 두르든, 목욕탕으로 두르든, 보상금으로 두르든 마찬가지다. 껍데기로 고갱이를 보상할 수는 없다. 박말해 할머니의 원통함과 조계순 할머니의 그리움이 없고, 손희경 할머니의 약속, 이종숙 할아버지의 눈썰미, 권영길 할아버지의 믿음이 없다면, 그 삶은 껍데기다. 한전이나 정부는 물어볼지 모르겠다. 겨우 그런 걸 지키려고 이 엄청난 규모의 국책사업을 막느냐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빼고 우리 삶에 남는 것이 무엇일까.
지금 우리는 이 싸움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송전탑이 하나둘씩 올라갈수록 삶의 이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어디서 무엇으로 싸워야 하는가. 사실 이 책이 잘 말해주고 있듯, 송전탑이 파괴하는 것과 송전탑에 맞서는 것의 정체는 같다. 한전은 송전탑을 이으며 과거와 현재를 끊어버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끊어버렸지만, 밀양의 촌부들은 뿌리에서 뿌리를 내고 줄기에서 줄기를 내는 덩굴식물처럼 서로의 삶을 엮고 이야기를 엮으며 싸워왔다. 이를테면 이 책 후반부에 사연이 소개되는 용회마을의 구미현과 김옥희, 여수마을의 김영자와 성은희, 골안마을의 안영수와 천춘정, 동화전마을의 박은숙과 강귀영 등이 그랬다.
이 싸움을 멀리서 보는 이들은 섣불리 절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용회마을 구미현의 다음 말을 읽고 몹시도 부끄럽고 또 기뻤다. 거기에는 살아있는 한 결코 패배할 수 없는 삶의 어떤 유형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송전탑은 하나하나로서 절대 완성이 되는 거 아니잖아요. 한 기만 안 들어서도 연결이 안 됩니다. 만약 송전탑이 다 완성된다 해도 그 다음에 선이 안 걸어지게 해야되고예. 진짜 한전과 경찰이 잔인하게 또 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또 밀리죠. 우리는 이제 거까지 생각해야 되거든예. (…) 그리 됐을 때 우리는 어떤 희망을 가질 것인가. 원전 반대해야 된다고 봅니다. 송전탑으로 보낼 전기 없어야 됩니다. (…) 일본처럼 절전형 상품 만들어내고 피크타임에 수요 분산하고 이러면 지금 발전력 가지고 충분하죠.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이고, 또 발전소 필요하다면 도시의 대량 수요지 근처에 발전소 쫌 짓고요. 그렇게 될 때까지 싸워야 될 거 같애요. 지금 송전탑 바라보고 절망을 느낄 때는 아니라고 봅니다. 근데 그렇게 될 때까지 주민들이 살아야 되지 않겠어요. 주민들이 같이 농사지어서 이렇게 살게끔 또 끝없이 연대해주시면 좋겠어요.”
- 밀양을 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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