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논리는 강력하다. 사람 목숨보다 돈이 우선이라는 논리는 지극히 위험하고 한없이 천박하지만 무척 힘이 세다. '산업 재해 사망자,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오명을 장식품처럼 달고 다니는 한국 역시 이 마수(魔手)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도 아주 강하게. 마각을 드러내는 방식은 산재만이 아니다. 일터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이 마수에서 자유로운 영역은 거의 없다. 대형 참사 때는 그 괴물 본색을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도 이는 되풀이됐다. 선사(船社)가 탐욕에 눈멀어 승객의 생명을 뒷전으로 미뤘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줄줄이 나오고 있다. 끼리끼리 어울려 잇속을 차리는 데 정신이 팔려 국민의 안전은 저버린 일부 관료들의 행태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사람보다 돈, 국민보다 잇속을 앞세운다는 점에서 한통속이다.
검찰은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로 알려진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일가를 둘러싼 각종 의혹을 수사하고 있다. 여러 언론도 유 전 회장 일가와 구원파, 청해진해운, 관료주의의 문제점 등을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다.
모두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의문이 드는 대목도 있다. 돈의 논리가 사람 목숨보다 우선하는 데 힘을 실어준 정치 권력엔 어떻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해당 부처의 일선 관료 몇몇에게 포화가 집중되고, 큰 틀에서 모든 것을 조율한 최고 권력자는 유유히 빠져나가는 일이 재연되지 않도록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참사 단초 제공한 MB 정권, 책임지지 않는 MB
청해진해운이 세월호를 운항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건 이명박(MB) 정권이다. 선령 제한을 20년에서 30년으로 늘려 낡고 위험한 배들이 승객을 싣고 바다를 오갈 수 있게 해줬다. 국정 운영 기조를 어기며 해당 부처에서 독불장군처럼 밀어붙인 사항이 아니다. MB 정권이 줄기차게 내세운 규제 완화의 일환이었다. 해운 관련 법규를 어겼을 때 처벌을 약화하는 등의 조치도 MB 정권 때 이뤄졌다. 선사는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지만 승객 안전엔 치명적인 사항이었다. 안타깝게도, 세월호 참사에서 이는 분명히 드러났다.
참사의 단초를 제공한 전 정권을 이끈 이들은 어떤 책임을 지게 될까? 선령 제한 규제 대폭 완화 사실이 알려지면서 MB 정권은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MB는 말할 것도 없고 전 정권 고위층에서 책임 있게 해명하거나 국민에게 사죄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국민들은 'MB의 입'으로 통하는 이동관 전 청와대 대변인이 종편에 출연해 박근혜 정권의 세월호 참사 대응을 비판하는 어이없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전 정권 고위층, 그중에서도 특히 MB가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반성한 적이 있던가? 없다. 그런데도 마치 성역인 것처럼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 예컨대 4대강 사업 문제만 해도 MB의 기조에 발맞췄던 건설사들에 과징금이 부과되거나 몇몇 관계자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됐을 뿐, MB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뿐인가. MB 정권 인사이자 감사원장 시절 4대강 사업을 옹호했던 김황식 전 총리는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선 후에도 여전히 4대강 사업은 타당했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감사원이 4대강 사업에 대한 세 번째 감사 결과를 발표했을 때 MB 정권 인사들이 보인 반응의 연장선이다. 당시 감사원은 4대강 사업이 대운하를 염두에 두고 추진됐으며 MB에 대한 사법 처리 문제도 검토했다고 밝혔다. MB 정권 인사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MB 측 한 인사는 "기후 변화 시대에 200년 앞을 내다보고" 결정한 4대강 사업의 성과는 "국민과 역사가 평가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관련 기사 : 감사원 농락한 MB 정권, '감사원 탓' 적반하장)
토건 세력 배 불리기, '녹조 라떼' 등 4대강 사업의 실체와 그것이 낳은 재앙적인 결과가 눈앞에 드러나는데도 국민에게 돌아온 건 저들의 강변뿐이었다. 이런 저들이 세월호 참사의 책임 문제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까? 묻지 않을 수 없다. 200년 앞을 내다보고 4대강 사업을 했다는 저들은 도대체 몇 년 앞을 내다보고 낡고 위험한 배가 다니게 만든 것일까? 규제 완화라는 양의 탈을 씌워 국민의 생명을 뒷전으로 미루지 않았어도, 4대강 사업을 통해 토건 세력에게 혈세를 퍼주는 대신 그 돈을 국민 안전 강화 방안에 썼어도 오늘날과 같은 참담한 상황을 맞이했을까?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명박근혜'의 길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MB 정권 책임 문제는 적당히 넘어가서는 안 되는 사안이다. 적어도 유 전 회장 일가와 몇몇 실무 관료의 책임을 묻는 만큼은 물어야 한다. 대통령이 재임 중 한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대해 퇴임 후 이런 식으로 따지는 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어긋난다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천만의 말씀. 전직 대통령도 국민의 한 사람일 뿐이다. 여긴 왕정 국가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이다. 그 주권자인 국민 302명과 그 가족이 엄청난 일을 당하는 데 단초를 제공한 전 정권의 최고 권력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면, 그건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지난해 말, 이동관 전 대변인은 MB가 회고록 작업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어떤 내용을 담을지 자못 궁금하다. 걱정도 된다. IMF 구제 금융 위기 때 일이 떠올라서다.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쫓겨나고 삶이 파탄 났는데도, 국정 최고 책임자이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몇몇 측근만 법정에 섰을 뿐이었다. 퇴임 후 YS는 잘못을 성찰하기보다는 IMF 위기에 빠진 원인과 관련해 '야당 탓, 김대중 탓'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IMF 위기의 후유증이 여전히 한국을 사로잡고 있는 오늘도 YS는 전직 대통령으로서 예우를 받고 있다. '학살자' 전두환도 여전히 어깨에 힘주고 다니며 천수를 누리는 한국에서 YS의 그런 모습은 놀랄 일 축에도 못 끼는 것일까?
MB는 회고록에서 이와 다른 모습을 보일까? 크게 기대하지는 않지만, 무분별한 규제 완화 따위를 치적으로 내세우는 일만은 없기를 바란다. 그로 인해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해야 했던 세월호 희생자 등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무분별하게 규제를 푼 MB 정권과 규제를 "암 덩어리"로 몰아붙이는 박근혜 정권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이명박근혜 정권'이라는 비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유 전 회장과 구원파, 일부 관료에게만 칼을 들이대는 대신 전 정권 최고위층이든 현 정권 책임자든 성역을 두지 말고 문제를 파헤쳐야 한다. 그리고 규제를 "원수"로 몰아가는 국정 기조를 바꿔야 한다. 박근혜 정권이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이다. 이번 참사를 겪고도 '이명박근혜'의 길만 고집한다면?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결과를 국민들에게 또 안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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