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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통령의 '엄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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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통령의 '엄벌'이 아니다

[이렇게 읽었다] 아만다 리플리의 <언씽커블>

1917년 12월 6일, 캐나다 노바 스코티아 주의 핼리팩스 항에서 벌어진 비극은 "인간이 당한 재난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2500톤 이상의 폭발물을 실은 프랑스 화물선 몽블랑 호가 좁은 수로에서 대형선박 이모 호와 충돌했다. "물 위를 떠다니는 시한폭탄"이었던 몽블랑 호에 불이 붙었고, 항구 안으로 다시 흘러들어온 배는 부두에 부딪혔고, 부두에 그 불이 옮겨 붙었으며, 몽블랑 호는 20분 뒤에 마침내 폭발했다.

"검은 비와 쇠, 불, 바람이 도시로 휘몰아쳤다. 충격은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창문들을 박살냈고, 유리 파편 때문에 천여 명이 실명했다. 그 뒤 폭발로 인한 해일이 해안을 집어삼켰고, 도시 전역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항구에서는 불과 연기의 검은 기둥이 흰 버섯구름으로 변해 있었다. 생존자들은 하늘에 독일군 폭격기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며,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 그날 밤 핼리팩스에 몰아친 눈보라는 서사시의 대미를 장식했다. 대참사가 휩쓸고 지나간 뒤, 그곳의 사망자는 1963명에 이르렀다. 눈보라가 그친 뒤에 촬영한 필름을 보면, 핼리팩스는 핵무기로 파괴된 도시처럼 보였다."

▲ 1917년 핼리팩스 폭발 사건 이후의 풍경. ⓒWikimedia Commons

당시 핼리팩스의 재건을 앞장서서 도왔던 영국 국교회 신부이자 학자 새뮤얼 헨리 프린스는 1920년 "재난에 직면한 인간 행위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연구서"인 논문 '재난과 사회 변화’를 발표했다. 그는 논문에 이렇게 썼다.

"삶이 쇳물처럼 녹아내렸다. 고래의 관습은 무너져 내렸고, 모든 것이 불안정해졌다."

95년 전에 쓰인 이 문구가 가슴을 짓눌렀다. 현재 한국을 뒤덮고 있는 슬픔과 경악과 분노와 무력감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 <언씽커블>(아만다 리플리 지음, 조윤정 옮김, 다른세상 펴냄). ⓒ다른세상
하지만 아만다 리플리의 책 <언씽커블>(조윤정 옮김, 다른세상 펴냄)은 20세기 내내 인류를 고통스럽게 한 각종 재난의 이유를 탐구하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의 부제는 '생존을 위한 재난재해 보고서’다. 그녀는 '재난'이라는 영어 단어 'disaster'가 "라틴어 dis(벗어나다)와 astrum(별)이 합쳐"졌음을 지적하면서, 재난이란 "운명의 별이 궤도를 벗어나 운수가 사납다"는 식의 공포와 미신에서 벗어나, 혹은 "신과 정부의 소관"으로만 생각하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위험지대에서 안전지대로 가기 위해 우리 모두 지나가야 하는 생존의 길"을 찾자고 제안한다. 어찌 보면 '서바이벌 실용서'에 더 가깝다.

아만다 리플리는 쓰나미든, 화재든, 추락사고든, 침몰사고든, 교통사고든, 혹은 테러든 어떤 종류의 재난에 맞닥뜨리는 순간 사람들은 세 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했다. 거부-숙고-결정적인 순간이 그것이다. 불운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대개 "만사가 괜찮다",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어"라고 여기며 움직이지 않거나 애써 상황을 과소평가하거나 또는 공포에 압도당한 채 그저 '놓아버린다'. 하지만 관련 정보를 제대로 숙지했고 재난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생존에 필요한 몇 초(몇 분이 아니다)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 판단력을 가졌다면, 재난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사는 지역, 자신의 행동 패턴에 언제라도 끼어들 수 있을 어떤 종류의 재앙을 미리 예측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우리의 뇌와 몸에 기계적으로 생존의 습관을 들여놔야만 실제 재앙 앞에서 두려워하고 움츠러들고 '누군가 구해주겠지'라고 기다리느라 시간을 지체할 게 아니라 생존할 수 있는 단 몇 초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는 점점 복잡해지며 평범한 사람들의 안전에 무관심해지고 있지만, 그에 순응하며 사고 현장에서 희생자로 등장하지 말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재난은 계급, 인종, 성별을 막론하고 덤벼들며,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초인이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이고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리플리의 결론이다.

"공포는 두 가지를 요구해요. 위협에 대한 인식과 그런 위협에 대처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죠." (…) 공포는 이해하면 물리칠 수 있다.

<언씽커블>의 전체적인 논조는 낙관주의다. 자신감에 찬 저자 아만다 리플리는 재난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에 대한 적극적인 대비를 해야만 한다고, "여러분을 구해줄 사람은 여러분 자신이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라며 강조한다. 그는 인간의 능력이 급박한 상황에서 상상 이상의 힘을 낼 수 있음을 굳건하게 믿는다. 물론 이런 주장은, 세월호에서 "대기하라"라는 안내 방송만 믿고 구명조끼를 입은 채 얌전히 기다렸다가 참혹한 변을 당한 단원고 학생들에게 문자 그대로 적용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리플리의 주장은 모든 책임을 개인이 져야 한다는 '자력 갱생'이라기보다는, 개인들이 그와 같은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시스템에 의해 뒷받침된 정확한 정보 제공이 필요하다는 경고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17년 핼리팩스 항의 무참한 사고를 겪고 난 다음, 2001년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가 벌어진 다음,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집어삼키고 난 다음, 2005년 346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던 메카 순례 이후, 2007년 버지니아 공대에서 32명을 무차별 난사 살해한 조승희 사건 이후, 1994년 852명의 승객과 함께 발트 해 밑으로 침몰한 에스토니아 호 사건 이후 각국 정부와 해당 단체들은 다시는 유사한 사고가 벌어지지 않도록 돈과 시간을 들여 만전을 기했다. 그들은 이전의 안전불감증과 게으름을 답습하지 않으려 했다.

일례로 아만다 리플리는, 1993년 알카에다가 처음으로 세계무역센터에 폭탄테러를 가한 뒤 그곳에 입주했던 모건 스탠리 딘 위터 사의 보안책임자 릭 레스콜라가 취했던 조치를 대단히 감동적으로 기술한다. 레스콜라는 이후 8년 동안, 분초단위를 다퉈야 하는 주식 중개인들의 불만을 무시한 채 매우 자주 대피 훈련을 실시했다. 세계무역센터 73층에 입주한 모건 스탠리의 직원들은 투덜거리며 레스콜라의 지시에 따라 44층까지 걸어 내려가는 훈련을 거듭했다. 그리고 2001년 9월 11일, 또 다시 테러가 발생했을 때 레스콜라는 메가폰을 든 채 계단참에 서서 "조용히 하시고, 진정하세요.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라고 되풀이 격려하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모건 스탠리 직원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무사히 건물을 빠져나왔고, 미처 사무실에서 나오지 못했던 열세 명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 2687명은 그렇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 팽목항의 체육관에서 애타게 구조 소식을 기다리는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 ⓒ프레시안(최형락)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런 것이다. "법과 규정을 어기고 매뉴얼을 무시해 사고원인을 제공한 사람들과 침몰 과정에서 해야 할 의무를 위반한 사람들, 또 책임을 방기했거나 불법을 묵인한 사람 등 단계별로 책임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민형사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는 대통령의 '꾸지람'이 아니라, 앞으로 이러저러한 대비를 실행에 옮기겠다라는 구체적인 약속이다. 이를테면 시민단체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가 지난 4월 24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해양안전정책 주무부처인 해양수산부가 2013년 작년 실시한 위기대응훈련은 고작 3번이었다. 그나마도 현장 훈련이 아니라, 실내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논의한 '토론식 훈련'이었다고 한다. 요식적인 탁상 논의로 규정을 대강 지키는 시늉만 하다가, 막상 참혹한 비극이 닥쳤을 때 우왕좌왕하며 서로 말이 엇갈리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언씽커블>은 전적으로 한국 상황과 맞아 떨어지진 않더라도,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무기력증을 벗어나기 위한 몇몇 단초들을 제시해준다. 2009년에 출간된 이 책이 벌써 절판 상태라는 게 아쉽지만, 우리에게는 '우리가 직접 쓰는' 책이 더 시급하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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