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국의 부상을 경계하며, 다시금 동아시아에서의 지위를 굳건히 하려는 미국의 행보가 위험한 수준에 오르고 있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지지하여 한중일 관계를 악화시키고, 동아시아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다. 중국과 주변국들이 마찰을 이용해 동아시아에서의 확고한 자리매김을 다시 하는 게 바로 미국이 추구하는 ‘아시아로의 회귀 (Pivot to Asia)’ 전략이다. 더욱이 우리는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딜레마에 빠져 있기에, 지금의 한 수 한 수가 더욱 중요하다.
전통시대 우리 동아시아의 역사가들은 역사에 ‘감계(鑑戒)’의 기능이 있다고 하여, 역사 교육을 중시하였다. 감계란 역사를 ‘거울(鑑)’로 삼아 ‘경계(戒)’한다는 뜻이다. 역사의 교훈을 통해 잘못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고, 또 현재와 유사한 과거의 경험을 분석하여 보다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위기에 처한 지금의 한국에 우리 선현들이 주는 감계는 없을까? 조선 중기 중국 대륙에서 한족의 명(明)이 몰락하고 만주족의 청(淸)이 들어서려던 시기, 조선의 명과 청에 대한 대응은 우리에게 좋은 감계가 된다.
급변하는 대륙, 위기의 조선
과거 ‘~군(君)’이라고 불렸던 왕들은 정치를 잘못했던 왕이었다는 것은 이미 중고등학교 역사 수업에서 배웠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연산군과 광해군 등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한국에 감계를 제시하는 광해군은 최소한 외교에서만큼은 역대 최고의 임금이었다.
광해군은 선조와 그 후궁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벌어지자마자 도망간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왜군을 막아 백성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이러한 공으로 그는 조선의 제15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잘 알다시피 우리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명의 원조였다. 그전에도 이미 명에 대해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사대(事大)’를 행하였던 조선이었는데, 나라가 망할 뻔한 위기에서 명이 도와주자, 명에 대한 조선의 ‘감은(感恩)’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오죽하면 선조가 명에게 다시 한 번 나라를 만들게 해준 은혜라는 뜻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말을 수차례 했을까?
임진왜란을 이제 막 수습한 조선에 새로운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전까지 명과 조선에 야만인이라고 무시당하며 요동지역에서 생활하던 여진족(후에 만주족으로 개명)들이 누르하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통일되어 후금(後金)을 세우고, 명의 변방을 침략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명은 이미 몇 대에 걸친 무능한 황제들의 연속 등장과 위충현과 같은 환관의 전횡 등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져있었다. 결국 이렇게 썩어빠진 명의 군대는 후금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중국 대륙은 남방의 부패한 명과 호시탐탐 남하를 노리는 북방의 후금으로 양분되었다.
광해군의 천재적인 외교술, 중립과 실리
광해 10년(1618년) 6월, 대륙의 불길한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던 조선에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후금의 맹렬한 공격을 견디지 못한 명이 급기야 조선에 원군을 요청한 것이다. 건국 초부터 사대 관계를 맺어왔고 임진왜란에서 크나큰 원조를 제공했던 명과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누가 봐도 중국 대륙의 차기 주인이 될 후금 사이에서 과연 광해군은 명과의 의리를 지킬 것인가, 후금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평화를 유지할 것인가? 그 역시 현재의 한국과 같은 딜레마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광해군의 천재적인 외교술을 볼 수 있다. 광해군은 어느 하나 포기하지 않고, 명과의 의리와 후금과의 평화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았던 것이다. 명의 지속적인 원군 요청에 강홍립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1만의 원군을 보내기로 약조하여 명의 요구를 만족시켜주었다. 이와 동시에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때를 맞추어 후금에 투항하라고 밀명하여, 후금과의 평화를 유지하려고도 노력하였다.
1619년, 결국 명과 청의 명운을 결정지었던 ‘사르후 전투(薩爾滸之戰)’에서 명군은 후금군에 대패하였다. 여기에서 강홍립이 이끌었던 조선의 원군은 광해군의 밀명대로 적당히 상황을 보아 후금에 투항하였고, 결국 명군 10만이 전멸한 데 반해, 조선의 원군은 절반 이상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광해 11년 4월 8일, 당시의 속사정이 사관(史官)의 손에 의해 생생히 기록되어있다.
"당초에 강홍립이 (압록)강을 건넌 것은, 왕(광해군)께서 천조(명)의 독촉을 어기기 어려워 억지로 출사한 것이지,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후금과) 적대하지 않았고, 실로 싸울 마음이 없었다. (광해군이) 비밀리에 강홍립에게 사람을 보내 후금과 통하게 명령하였기에, 심하의 싸움(사르후 전투)에서 후금군이 먼저 통사(通事, 통역)를 부른 것이고, 강홍립이 때에 맞추어 투항한 것이다. (강홍립이) 구금 중에 있을 때, (비밀리에) 장계(狀啓, 임금께 올리는 글)를 써서 종이끈 모양으로 만들어 보냈다."
후금 역시 조선과는 원한이 없다며 화친을 맺는 데 동의하였다. 광해군이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국의 군주로서 나라와 백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한 것은 현군(賢君)이 아닐까? 이렇듯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평화라는 실리를 달성하여, 조선이 전화에 빠지지 않는 최상의 선택을 하였다.
인조의 우매(愚昧)한 선택, 삼고구배(三叩九拜)
광해군과는 반대로 어리석은 선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또 다른 감계를 남기는 이가 있다. 바로 인조이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현란한 외교술’로 중립을 지키던 광해군은 얼마 못 가 축출당한다. 광해 15년(1623년) 4월, 광해군의 조카였던 능양군(綾陽君) 이종(李倧, 후의 인종)과 서인 세력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그의 중립외교를 중지시켰던 것이다. 인조는 광해군이 ‘명에 대한 사대와 의리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반정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정하며 ‘향명배금(向明排金, 명과 친하고 금을 배척한다)’이라는 시대에 역행하는 정책을 취하였던 것이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만주족을 이끌고 있던 황타이지는 본격적으로 명을 멸망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이 불안한 움직임이 보이자, 그는 배후의 안정을 위해 조선을 먼저 복속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인조 14년(1636년), 청은 10만의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바로 병자호란이다. 결과는 참혹했다. 청군은 압록강을 건넌지 5일 만에 파죽지세로 개성을 통과해 한양으로 향했다. 강화도로 도망가려던 인조는 청나라 군대에 막혀 남한산성에서 배수진을 쳤으나, 이미 상황은 종료되었다. 결국 어리석은 선택을 했던 인조는 청을 상국으로 받들며, 청 태종에게 이마에 피가 나도록 큰절하는 삼고구배(三叩九拜)를 하였다. 나라는 이제 청의 완전한 속국이 되어 해마다 막대한 세폐를 바치게 되었다.
또 수많은 전쟁 고아들이 발생했고, 무수한 조선인들이 만주족들의 노예로 끌려갔다. 여성을 비하하는 속된 말 중 하나가 바로 이때 끌려갔다가 다시 조선에 돌아온 ‘환향녀(還鄕女)’에서 비롯되었다. 이 이후 청과 조선의 종속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명청교체’라는 긴박한 국제정세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인조의 어리석은 한 수가 결국 이러한 큰 화를 초래했던 것이다.
한국, 현대판 광해군이 될 것인가?
중국의 부상에 이미 세계 각국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중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나라는 아이러니하게 기존의 초강대국인 미국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두뇌이며 세계 최고의 석학들이 모여있는 하버드 대학에는 수많은 중국 관련 연구기관이 있다고 한다. 페어뱅크 센터(Fairbank Center)와 옌칭 연구소(Yanching Institute) 등 수많은 중국 연구기관에서 해마다 세계 각국의 중국 전문가들을 불러모아 중국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고 한다. 초강대국 미국마저도 중국의 부상에 노심초사하며 발 빠르게 대응해 가고 있다.
하지만, 실상 중국 옆에서 중국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우리는 이들과 비교하면 어떤가?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전통적으로 사대관계를 맺어왔던 미국’만을 세상의 중심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과 중국인을 비웃으며 불쌍한 심리적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대부분이 아직도 중국이 ‘G2의 일원’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그에 따른 의식변화나 실제적인 대응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다방면에서 미국을 대체해가며 다시금 강대국으로 원위치하는 중국, 이미 세계의 지각변동은 시작되었다. ‘미·중 교체’라는 긴박한 국제정세의 급류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미국과 중국, 이 ‘두 고래’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러한 시기에 광해와 인조, 두 사람이 현대의 우리에게 주는 감계는 단순한 역사적 교훈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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