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말 남북 이산가족 상봉 이후 얼어붙은 남북관계가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은 지난 3월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했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이를 두고 안보리 결의 위반이라며 경고성 내용을 담은 언론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북한은 4차 핵실험을 시사하는 ‘새로운 형태의 핵실험’을 하겠다고 나서면서 한반도 긴장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이 와중에 이달 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다. 일각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의 방한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모멘텀을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한미일 6자회담 수석대표들이 미국 워싱턴에서 만나 6자회담 재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벌였다는 이야기도 나오면서 회담 재개에 청신호가 켜지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방한이 북핵 문제 해결의 전기를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현 원광대 총장)은 “오바마의 아시아 순방 목적은 북핵 문제보다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동맹국과의 동맹 강화와 이를 통한 중국 포위”라며 “지난달 헤이그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3국은 북한의 선조치가 6자회담 재개에 필요조건이라고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한 달도 채 되기 전에 입장을 뒤집기는 어렵다는 분석이다.
정 전 장관은 오바마 대통령의 이번 아시아 순방에 원래 한국 방문은 빠져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정부가 오바마의 ‘방한 답례 선물’로 무엇을 내줄 것인지가 우려된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가 방한의 답례로) 미국에 핵심이익을 챙겨줬다면 결국 무기 구매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정부가 미사일 방어체제(MD)를 비롯 미국의 첨단무기를 구입하는 것을 미국에 주는 선물로 내놓았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미국에 위와 같은 선물을 주면 북핵 문제 해결은 더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정 전 장관은 “우리가 미국의 첨단 무기를 사거나 MD를 구축해서 미국과 안보·군사 협력을 강화해나간다면 북한은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며 “그러면 핵에 대한 북한의 집착은 더 커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핵 문제를 빌미로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전략이 북핵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정 전 장관은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면서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상과 국익을 지켜나갈 수 있는 카드로 북핵을 잡은 것”이라며 미국은 내심 북핵 문제의 해결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고 관측했다.
미국이 실제로 이런 방침을 갖고 있다면 우리에겐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이 정 전 장관의 지적이다. 그는 “우리가 이런 판세를 잘 읽고 한미 관계의 특수성을 활용해 미국이 적극적으로 북핵 문제 해결의 길을 먼저 열어나가라고 요청해야 한다. 그래야 북핵 문제를 해결할 모멘텀을 얻을 수 있다”며 “미국의 전략적인 북핵 정책을 우리가 한미동맹 강화 차원에서 관성적으로 추종하면 박근혜 대통령 임기 내 북한이 핵 보유 국가로 확정되는 비극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인터뷰는 지난 10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편집국에서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오는 25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박 2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습니다. 당초 일정에 없던 방한을 우리 측이 강력히 요구해 이루어진 만큼, 그 대가로 미국이 뭔가를 요구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는데요.
정세현 : 오바마 대통령 아시아 순방의 원래 일정은 일본, 필리핀, 말레이시아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국을 방문하는 일정이 1박 2일 끼어들어 갔습니다. 정부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굳이 이런 식으로 오바마 방한을 유치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이번 방한의 대가로 우리가 미국에 소정의 선물을 줘야 하는 상황일 거라고 봅니다.
지금과 비슷한 경우가 예전에도 있었습니다. 1996년 4월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거쳐 중국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한국 방문은 원래 일정에 없었죠. 김영삼 정부는 이때 빌 클린턴의 방한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한 4자회담이라는 선물을 내놓았습니다. 남, 북, 미, 중이 모여 이 문제를 협의하자는 제안을 미국과 함께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이 선물을 받아들였습니다. 다만,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일본을 거쳐 중국으로 가는 도중 몇 시간 동안 제주도에 들러 주기로 했습니다. 한미 정상이 노란 유채꽃밭 앞에서 4자회담을 제안하는 장면을 연출한 후 클린턴 대통령은 베이징으로 날아갔습니다.
당시 김영삼 정부가 클린턴 대통령의 방한을 어떻게든 추진하려고 했던 이유는 총선 때문입니다. 만약 클린턴 대통령이 한국을 건너뛰고 일본과 중국만 방문한다면, 한미 동맹을 금지옥엽처럼 여기는 집권 여당 지지자들의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고, 그렇다면 선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불안감이 정부·여당 내에 퍼져있었습니다.
당시 한국과 미국의 대북정책을 들여다보면 4자회담이 왜 미국에 ‘방한 답례 선물’이 됐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김영삼 정부는 대화로 북핵 문제를 풀어보려는 미국의 정책에 계속 딴지를 걸고 있었습니다. 한미 간 대북정책에 엇박자가 나고 있었던 것이죠. 이 때문에 미국은 종종 한국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소위 ‘통미봉남’(通美封南)이라는 말도 이때 많이 회자됐습니다.
당시는 1994년 제네바 합의로 북핵 문제는 일단 봉합이 됐고 미사일 문제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미사일 문제 등을 풀기 위한 북·미 양자회담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중심이 돼서 북한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남한의 입장은 반영해주지 않고 결과만 통보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한미 관계가 삐걱거리게 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렇듯 대북협상에 대해 미국과 다른 입장을 갖고 있는 한국이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한 4자회담을 하자고 하니, 미국은 이를 뿌리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클린턴으로서는 미국이 주도해서 동아시아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 외교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동북아 국제정치에서 미국의 리더십과 주도권을 부각시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이 정도 수준의 대가로 성사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보다는 더 큰 대가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최근 동아시아 정책과 관련해 미국에 절대적으로 이익이 되는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는 약속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 핵심이익을 챙겨준 것이라고 본다면 결국 무기 구매 문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프레시안 : 안 그래도 한국 정부가 오바마 방한의 대가로 미사일방어체제(MD)를 비롯해 미국의 무기 체계를 구입해 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는데요. 실제로 미국이 무기 판매에 집착하고 있는 건가요?
정세현 : 미국은 자동예산삭감제도(시퀘스터) 때문에 앞으로 10년간 국방비를 줄여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 유지에 필요한 중국 견제 차원의 무기현대화를 무슨 재원으로 하겠습니까. 결국 일본이나 한국 등 미국의 동맹국들이 미국산 신형 무기를 사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 일본을 방문한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이 일본의 무기수출 3원칙 해제를 적극 지지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 헤이글 장관은 중국에 가서 영토 문제와 관련해 일본 편을 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은 미·일 동맹을 강화해가면서 아시아 국가들과 손잡고 중국을 포위해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말레이시아 방문도 중국을 포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봐야 합니다.
오바마는 중국 견제에 중요한 계기가 될 이번 아시아 순방에 굳이 한국을 들르고 싶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런 오바마를 서울로 끌어당겼다면 미국의 첨단무기를 사거나 MD(미사일 방어체제)와 관련해 좀 더 진전된 입장을 미국에 약속하는 정도의 선물을 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정도 수준이 아니고는 미국을 움직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황이 이렇게 되면 북핵 문제의 해결은 더욱 어려워진다는 점입니다. 북한이 항상 주장하는 것이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을 철폐하라는 것 아닙니까? 북한은 미국이 이 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절대 핵을 내려놓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와중에 우리가 미국의 첨단 무기를 사거나 MD를 구축해서 안보·군사 협력을 강화해나간다면 북한은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핵에 대한 북한의 집착은 더 커지게 되겠죠.
미국은 북핵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이 먼저 행동을 통해 핵폐기 의사를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6자회담을 개최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북한의 선(先)행동을 끌어내는 데 중국의 대북 압박이 필요하다며 중국 역할론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로는 북핵 해결을 외치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한미일의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있는 미국의 행보를 지켜본 북한은 6자회담 개최에 별로 기대를 걸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즉 북한이 회담을 통해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전망을 가져야 하는데 미국의 실제 행보는 그런 전망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올해 22년 만에 가장 강도가 높은 한미 상륙훈련인 쌍용훈련도 실시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북한으로 하여금 협상을 통해 핵을 내려놓는 대가로 미·북 수교, 평화협정 등을 받아내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요인입니다.
프레시안 : 결과적으로 이번 오바마 대통령의 방한으로 북핵 문제 해결에 진전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보시는 건가요?
정세현 : 그렇다고 봅니다. 헤이그 한미일 3자 정상회담에서 3국은 북한의 선조치가 6자회담 재개에 필요조건이라고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도 안 지난 현 상황에서 이를 뒤집고 북한이 북핵 문제 해결에 협조해 나오도록 유도하겠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오바마의 아시아 순방 목적은 북핵 문제보다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동맹국과의 동맹 강화입니다. 중국에 대한 군사적 포위망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죠. 센카쿠 열도(尖角列島, 중국명 댜오위다오· 釣魚島) 등 중·일 간 영토 분쟁이 생겼을 때 미국이 확실하게 일본 편에 설 것임을 이번에 분명히 천명했고, 또 필리핀, 베트남 등이 연관된 남사군도 영토 문제에서도 미국은 중국과 반대편에 설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한 가지 변수는 있습니다. 북한의 도발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는 15일은 김일성 생일인 태양절이고 25일은 북한의 군 창건일입니다. 오바마 방한이라는 뉴스 가치를 떨어뜨리려는 전략적인 목적으로 북한이 도발을 감행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미국, 내심 북핵 문제 해결 바라지 않아
프레시안 : 말씀하신 대로 올해 22년 만에 가장 큰 규모의 한미 연합 상륙훈련인 쌍용훈련이 열렸는데 이것이 북한을 자극할 만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사안을 왜 굳이 언론에 공개했을까요? 군 당국이 대대적인 홍보를 벌인 의도가 있어 보이는데요.
정세현 : 그런 대규모 훈련이 언론에 공개되는 것을 보면 마치 북한에게 “반발해 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북한이 새로운 핵실험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만들었죠. 이는 “저런 협박 공갈이나 하는 자들과 무슨 회담을 하느냐”는 여론이 일어나길 바라는 노림수가 있다고 봅니다.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문제가 안 풀리도록 상황을 만드는 고도의 양면전술입니다. 실제 우리 사회 내에서도 북한과 협상을 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여론이 점점 더 세지고 있지 않습니까?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는 데에는 국내 정치적 계산도 깔려있다고 봅니다.
실제 1996년 총선을 앞두고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판문점에서 북한이 박격포 진지를 구축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당시 대통령이 이 이야기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꺼냈습니다. 그러면서 연일 언론에 보도됐습니다. 결국 여당이 이 사건으로 재미를 봤었죠.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무인기 사건만 봐도 그렇습니다. 국방부가 초기에는 대공 용의점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게 실체적인 진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2000년대 이후 우리 국방부의 정보수집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쪽입니다. 그동안 그쪽에 투자를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이를 국내 정치적으로 활용해보려는 정치인들과 일부 언론에 의해 이 문제가 증폭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무인기가 대단한 무기인 것처럼 돼버린 겁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군 대비 태세에 문제가 있다며 질책하고 나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국방부는 자신들도 열심히 했다고 항변하면서 우리의 무인기도 공개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상대 전력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알아내느냐는 것보다 우리 측의 군사력이나 국력에 대한 정보를 잘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데도 말입니다. 불판이 뜨겁다고 뛰다가 불 속에 빠져버린 결과가 된 셈입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무인기가 북한에서 출발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국방부 발표입니다. 그런데 무인기 이슈가 실체적 진실과는 별개로 대단한 일인 것처럼 포장되면서 이스라엘의 저공 레이더를 사들인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커지게 된 데는 국내의 보수 언론이나 논객들의 국내 정치적 목적 외에도 다른 의도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주한미군 및 주일미군의 예산 문제와도 이 문제를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미국의 예산심의가 오는 7월부터 하원에서 열립니다. 그런데 이미 지난 3월부터 미군 태평양사령관이 북한과 관련해 위험한 사태가 올 수 있다면서 서태평양 지역, 특히 주한미군이나 주일미군의 예산을 깎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론을 조성해가고 있는데 무인기 이슈도 이와 연결돼 가는 느낌이 듭니다. 국방부가 처음에는 대공 용의점이 없다고 했었는데 불과 며칠 사이에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북한 소행으로 추정은 되는데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못 찾았다면서 한미가 합동으로 조사하기로 했다는 발표까지 했습니다.
만약 이 무인기가 정말 북한의 것이라면 북한은 아주 싼 값으로 남한의 국방비를 탕진시키는 효과를 본 셈입니다. 물론 북한이 이 정도까지 계산하면서 움직였을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과잉대응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 북핵 문제와 관련해 한국과 미국의 말과 행동이 다른 것 같습니다.
정세현 : 공개적으로 표방되는 정책과 실제로 추진되는 전략이 다른 경우는 많습니다. 공식적으로 한미는 북핵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양국은 “그동안 회담을 통해 이 문제를 풀려고 했지만 북한이 회담을 하고 나서 합의 사항을 이행하지 않고 약속을 어겨서 비핵화가 지금까지 진전이 안됐다”, “북한이 핵문제를 풀려는 의도가 없었고 회담을 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벌어 자신의 핵 능력을 강화시켜서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논리로 책임을 북쪽에 넘겼습니다.
양국은 이런 논리를 동원해 북핵 문제 미해결 책임을 전부 북한에 넘기면서, 6자회담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핵폐기 의지를 행동으로 먼저 입증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북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핵 카드로 북한이 얻어내려는 반대급부가 있는데, 이를 미국이 줄 의향이 있는지 자신들에게 확인시켜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북한만 의지를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도 의지를 보여 달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국은 그동안 북한한테 여러 번 당했다면서 이번에는 북한의 선행동을 확인하고 나서 비로소 움직이겠다고 합니다만, 그러면 그동안 미국이 북한 같은 작은 나라한테 당할 만큼 어리석었다는 말인가요? 미국은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국제장치를 좌지우지해온 나라입니다. 군사력도 막강하지만 정보력이 특히 강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습니다. 초강대국 미국이 북한한테 속았다, 당했다고 말하는 건 자가당착이고 대국답지 않은 처신입니다. 책임 전가의 의도가 따로 있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북한이 약속 이행을 잘하는 나라는 아닙니다. 남북 간에도 회담에서 합의한 사안들을 이핑계 저핑계 대면서 질질 끌거나 합의 문구를 자기네에게 유리하게 재해석해 가면서 약속 불이행의 책임을 우리 측에 떠넘기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책임 공방하는 동안 딴 꿍꿍이를 시도한 적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외교나 국제정치에서 절대선, 절대양심 같은 건 없다는 말입니다. 북한도 실제로 미국에게 뒤통수를 크게 맞은 적이 있습니다. 2005년 9.19 공동성명 합의 당시 미국은 합의가 나온 바로 다음 날, 방코델타아시아(BDA)에 있는 북한 계좌를 동결해버리지 않았습니까? 이러다 보니 북한도 미국의 본심을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 상황에서 미국은 북핵 문제를 더 악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까지 듭니다. 북핵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면 미국은 동북아에 무기를 팔 수가 없습니다. 특히 미국은 MD를 팔아야만 중국의 군사력도 제압하고 군산복합체의 수익을 보장할 수 있는데 MD를 팔려면 북핵 문제가 꼬여있어야 합니다. 북핵을 구실로 MD의 필요성을 한국과 일본에 설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북핵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진짜 의도는 북핵 문제를 미해결로 남겨두거나 북한의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해서 한일 정부가 MD를 구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라고 봅니다.
프레시안 : 미국이 북핵 문제를 자신의 전략적 목적을 위해 활용하고 있다는 말씀이신데요.
정세현 : 그렇습니다. 2002년 10월 미 켈리 특사가 평양을 방문해 고농축 우라늄 문제를 제기하면서 결국 제네바 합의는 그해 말에 파탄 나고 맙니다. 이 때문에 1994년 제네바 합의에 의해 2002년 말까지 8년 동안 동결됐던 북한의 핵 활동이 풀리면서 이후 북한은 3차례의 핵실험을 했고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돼가고 있습니다. 미국은 왜 그랬을까요? 고농축 우라늄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협상에 의한 해결을 모색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북한을 무작정 압박해 제네바 합의의 파탄을 몰고 왔을까요?
그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는 중국의 경제력이 1990년대보다 훨씬 커지기 시작하면서 국제정치적 발언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때였죠. 후진타오 주석이 등장한 시점(2003년)입니다. 이때부터 미국은 중국 견제를 대외정책의 주요 목표로 삼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정책 목표를 위해 북핵은 아주 좋은 빌미가 된 것입니다.
덩샤오핑(鄧小平)과 장쩌민(江澤民) 주석 때만 해도 중국의 외교방침은 ‘도광양회’(韜光養晦: 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힘을 키운다)였습니다. 그런데 후진타오 집권 이후에는 ‘평화롭게 우뚝 선다’는 의미의 ‘화평굴기’(和平崛起)를 외교방침으로 내세웠습니다. 이제 자신들도 힘이 있으니까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겠다는 뜻이죠. 또 해야 할 일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뤄낸다는 의미의 ‘유소작위’(有所作爲)도 함께 내세웠습니다. 국력 신장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배어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급기야 시진핑(習近平) 주석 취임 이후 지난해 6월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 중국은 미국과 ‘신형 대국관계’를 구축하겠다면서 태평양을 나눠 쓰자는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따라서 2002년 당시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파탄내면서 북핵 문제를 악화시켰던 것은 부시 정부의 호전적 성향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때는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 때문인 걸로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더 큰 틀에서 그런 정책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즉 미·중 관계를 관리하는 레버리지로서 ‘북한 때리기’를 시작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북핵 문제를 빌미로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면서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상과 국익을 지켜나갈 수 있는 카드로 북핵을 잡은 것입니다. 역시 100년 가까이 국제정치를 좌지우지해왔던 미국답게 멀리까지 본 겁니다. 오바마든 부시든, 보수든 진보든 국제정치의 세계에서 그리고 국가이익 앞에서 미국은 하나입니다. 말로는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외치면서도 실제 행동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차원에서 북한을 압박해 북핵을 고질적 문제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미국의 이런 방침은 우리에겐 굉장히 위험한 상황입니다. 우리가 이런 판세를 잘 읽고 한미 관계의 특수성을 활용해 미국이 그야말로 ‘진정성’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북핵 문제 해결의 길을 먼저 열어나가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그래야 북핵 문제를 해결할 모멘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 정부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전략적인 의도를 갖고 있는 미국의 북핵 정책을 한미동맹 강화 차원에서 관성적으로 추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박근혜 정부의 북핵 정책이 이런 식으로 완전히 미국과 동일한 입장을 유지한 채 진행된다면 임기 내 북한이 핵 보유 국가로 확정되는 비극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프레시안 : 지난 8일 한미일 3국의 6자회담 대표가 워싱턴에서 만나 회담 재개를 위해 유연성을 보이겠다고 밝혔는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정세현 : 북한이 선제적 조치를 할 수 있다는 시그널이 오면 3국이 유연하게 나갈 수 있다는 것이지, 먼저 유연하게 나서겠다는 뜻을 아닐 겁니다. 일부에서는 회담을 열기 위해 문턱을 낮춘다는 말도 있던데, 결국은 중국 역할론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한미일이 유연하게 나설 수 있으니까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담은 선제적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중국에 대북압박을 넣으라고 주문하는 것이죠. 즉 한미일은 “북한이 조금만 성의 있게 나오면 우리가 얼마든지 유연하게 나설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면서 중국에 대해 “그러니까 북한 좀 열심히 설득해 봐”라고 압박을 넣는 것입니다.
북한의 선 조치에 대해서도 북한이 선 조치를 조금만 해도 회담을 할 수 있는 조치로 인정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북한이 선 조치를 하겠다는 말만 하면 한미일도 양보하면서 조건을 완화시킨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중국이 나름의 역할을 하라는 중국 역할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황준국 신임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이 중국을 방문했다는데 일단은 새롭게 임명됐으니 인사외교 차원의 만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한미일의 다소 유연해진 접근의 내용이 무엇이든, 그 종착점이 중국 역할론으로 모아진다면 현 상황에서 6자회담이 재개될 모멘텀을 만들긴 어려워 보입니다.
문제는 북한도 그렇게 쉽게 움직이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겁니다. 자신들 입장에서 당한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핵 문제를 갖고 협상했던 역사를 놓고 보면 수석대표 급에서 합의문을 만들어놓고 난 뒤에 이를 이행하기 위한 실무협상을 하기 시작하면 거기서 북한이 반발하고 협상장을 뛰쳐나갑니다. 이후에 회담장 밖에서 벼랑 끝 전술을 썼습니다. 북한이 이렇게 하도록 미국이 유도하는 측면이 많았습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북미 간 핵 협상을 꼽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미국은 9.19 공동성명 직후처럼 합의문을 멋지게 만들어 놓고 바로 금융제재를 가해서 북한이 도저히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도록 만들곤 합니다. 그래놓고도 합의 파기의 책임을 북한에 뒤집어씌우는 것이죠. 미국은 지난 2.13합의 이후에 실무협상 과정에서 북한이 칼자루를 완전히 미국에 넘기지 않으면 합의 이행하지 못한다고 버틴 적도 있습니다.
박 대통령 대북제안, ‘북한 진정성’에 가로막혀 있는 셈
프레시안 :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정세현 : 동독 출신 루뒤거 프랑크 비엔나대학 교수가 지적했듯이 북한한테 “내 말을 들으면 오늘날의 드레스덴처럼 만들어줄 수 있다”라고 말한 셈인데 바로 이 대목이 북한으로 하여금 드레스덴 구상을 거부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북한이 받기 어려운 사안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드레스덴 제안 중에 북한의 농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항목이 있던데, 이것은 북한이 받기 어려운 제안이라고 봅니다. 미국이 한국전쟁 이후에 우리나라에 food for work(식량을 거저 주지 않고 일하는 대가로 식량을 주는 방식) 방식으로 농촌문제 해결을 돕기도 했었지요. 물론 분배 투명성 보장 차원에서 미국 사람들이 현장에도 많이 들어갔었습니다. 이런 일은 ‘혈맹’이라고 부르는 한미 간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우리가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또 의존한다고 해도 큰 문제가 없는 상황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당시의 한미 관계와 전혀 다른 현재의 남북 관계 상황에서 북한의 농촌 개발을 우리가 책임지겠다는 것은 북한으로서는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북한주민들의 현실생활에 직접 남한이 개입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북한 입장에서는 신탁통치 이상의 위협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지금 한반도 정세는 아직 긴장되어 있지만,. 5~6월로 넘어가면 북한이 인도적 문제 해결을 명분으로 드레스덴 구상 중 일부 분야에서 호응해 올 가능성은 없지 않습니다. 지난번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약속했다가 군사훈련 핑계로 갑자기 미루면서 “좋은 시절에 다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맥락에서 북한이 인도적 문제 해결에 호응해 나올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 쪽에서 5.24조치를 해제하거나 그에 준하는 조치를 취해가면서 북한에게 경제적 이득을 안겨줄 수 있다는 신호기 나가야 가능해지리라 봅니다.
프레시안 : 어쨌든 박 대통령은 드레스덴 연설을 통해 남북 협력을 하자고 제안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북한의 비핵화 이야기도 했는데요. 비핵화에 대한 진전 없이 남북 교류협력이 진행될 가능성은 있을까요?
정세현 : 박 대통령이 비핵화가 돼야 대북제안이 잘 이행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대북제안도 비핵화라는 조건이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이 말한 대북제안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5.24조치도 해제돼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북한의 비핵화도 별다른 진전이 없고 현 정부가 5.24조치를 해제할 생각도 없습니다. 결국 이 연설 역시 ‘말 잔치’로 끝날 가능성이 큰 것 같습니다.
정부는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진정성 있는 선제적 조치가 있어야 6자회담에 나설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천안함 사건에 대한 북한의 진정성 있는 조치가 있어야 5.24조치를 해제할 수 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진정성에 박 대통령의 대북제안이 전부 막혀있는 셈입니다.
프레시안 : 북한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에 대해 유엔 안보리는 언론 성명을 발표했고, 이에 대해 북한은 새로운 종류의 핵실험을 하겠다고 위협하고 나섰는데요. 북한의 4차 핵실험 가능성, 얼마나 될 것으로 보십니까?
정세현 : 북한이 말로는 핵실험 할 것이라고 했는데, 만약에 4차 핵실험까지 가면 중국이 굉장히 불편해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북한도 조심할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그동안 6자회담이 6년째 열리지 못하고 표류하는 동안 북한이 핵무기의 경량화, 소형화 기술까지 확보했다면, 대미 대남 협상력을 키우기 위해서 중국이 불편해하더라도 실험을 감행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의 기술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실험 횟수만 거듭하다 보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원료인 플루토늄만 소진되는 것이기 때문에 북한도 쉽게 실험에 착수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물론 고농축 우라늄으로 핵실험을 한다는 전망도 있지만 그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전략적으로 큰 이득이 없는 핵실험을 실제 실행하기보다는 협상력을 높이려는 위협전술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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