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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쓰기는 지식으로 하는 게 아니오!"

[프레시안 books] 전제성 외 <맨발의 학자들>

개강 직전이었던 2월의 마지막 '불금' 저녁, 나는 한 출판사의 첫 번째 책의 출판기념회에 초대를 받았었다. 늦겨울의 기운이 잔설처럼 남아있던 쌀쌀한 저녁으로 기억되는데, 기념 촬영을 위해 저자들은 기꺼이 양말을 벗고 카메라 앞에 섰다. 그들이 함께 쓴 책의 제목처럼 맨발의 학자들이 되어.


▲ 출판기념회의 모습. ⓒ엄은희

오늘 소개하는 책 <맨발의 학자들>(전제성 외 지음, 눌민 펴냄)은 여섯 명의 동남아시아 지역연구자들이 자신들이 박사논문을 위한 현지조사의 경험을 모은 결과물이다. 여섯 명의 필자와 나는 같은 동남아시아 지역연구자 그룹에 속해있는데, 저자들은 나보다 3~15년 앞서 박사논문을 쓴 선배들이다. 이들이 현장에서 마주했던 재미, 환대, 흥분, 곤란, 위험, 혼란, 후회, 두려움의 경험들, 그리고 각종 난관에도 불구하고 현지조사를 무사히 마치고 박사논문을 썼던 노력의 과정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필자도 현지조사에서 겪었던 기억들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지역연구자들 사이에서 "불의 세례"라 불릴 만큼 강력한 현지조사라는 경험은 사실 지역, 대상, 시간의 측면에서 모두 개별적이고 특수한 경험이다. 하지만 필자들은 공동의 질문들 - 예컨대 현지조사는 어떻게 계획되었나? 조사 자금은 어떻게 조달했나? 현지에서의 의사소통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어떻게 핵심주제를 발굴하고 접근하였나? 자민족 중심주의를 넘어 현지적 관점에서 취하기 위한 노력은 어떠했는가? 등등 - 을 서로에게 던지며 자기 연구의 독자성을 지키면서 동시에 지역연구의 보편성을 함께 찾고자 노력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지역연구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안내서가 될 만하다.

이미 각자의 전공분야 학계나 동남아 지역연구자 그룹 내에서 중견의 지역 전문가로 활약하고 있는 저자들은 이 책을 자신들의 성장 드라마라고 말한다. 회고담 소설이 그러하듯 그렇다면 이 책은 동년배들에게나 소구력을 갖춘 것일까? 저자들보다 0.5 세대쯤 뒤에 있는 나는 이 책을 '깊이를 갖춘 동남아 여행기'로 읽었다. 명소 앞 사진 찍기로 점철된 주유식 동남아 여행기가 아니라 그곳의 사람들과 기꺼이 "맨발의 친구"가 되기 위해 좀 길-게- 내면으로 들어간 여정이 오롯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 <맨발의 학자들>(전제성·김형준·홍석준·황인원·채수홍·이상국 지음, 눌민 펴냄). ⓒ눌민
여섯 명의 동남아학자들이 안내하는 자신들의 현지조사 지역과 주제는 다음과 같다. 인도네시아 자바의 "보통 농촌마을"의 이슬람 문화(김형준, 인류학), 말레이시아 무슬림 농촌마을의 이슬람화 현상(홍석준, 인류학), 말레이시아 정치엘리트들과의 인터뷰에 기초한 권력정치의 역동성(황인원, 정치학), 체제 전환기 베트남 호치민의 한-베 합작 공장 노동자들의 저항, 일상, 문화(채수홍, 인류학), 인도네시아 수라바야 지역에서 만난 노동자 계급의 노동운동 현장(전제성, 정치학), 태국-미얀마 국경지역에서 형성된 초국가적 사회 공간(이상국, 인류학).

저자들이 현지에 머물렀던 시간대는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걸쳐있고, 공간적으로는 동남아 도서부에서 대륙부를 넘나드는 여정이 담겨있으며, 연구자들이 만난 사람들은 한 국가의 최고 정치엘리트에서 촌부, 하숙집 딸, 밀수꾼, 난민, 노동자들까지 다양했다. 이 현지인들이 자신의 삶의 한 토막을 이들에게 내보여주기까지의 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다.

현지조사의 실질적인 시작은 주요 정보제공자들과 친밀감에 기초한 신뢰관계, 즉 라포(rapport)가 형성된 이후에야 열리게 된다. 이 과정은 그 동안 피부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던 자민족 중심주의를 극복하며 다른 문화에 대한 편견의 벽을 넘어 현지인들에게 다가가는 과정인데, 이 책의 저자들이 풀어놓는 '가로지르기의 경험'이 참으로 다채롭다.

어떤 학자들은 부두(budu, 말레이시아 끌라딴 지역의 특산물인 멸치로 만든 액젓으로 특유의 비릿함이 있다)나 박쥐 피를 섞은 샐러드를 먹거나 독주를 들이켜야 하는 쓰디쓴 과정을 거친 후에야 현지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한국인 관리자와 현지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당신은 누구의 편인가?"라는 질문을 받는 다소 곤란한 상황에 처했던 에피소드도 인상적이다. 지역주민의 권유로 소작농이 직접 벼농사를 짓는, 인생에 다시없을 경험을 한 저자도 있고, 난민촌의 젊은이들과 개고기를 짊어지고 소풍을 떠난 즐거운 경험의 가운데 신뢰 쌓기를 이어간 사례도 소개되고 있다.

이상의 과정을 거쳐 현지인들의 마음열기에 성공한 이후, 이들은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까지 이어진 장기적인 현지조사를 통해 현재의 그들을 있게 한 박사논문 작성까지 오롯이 이어갈 수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동남아 지역연구의 제 3세대에 속한다고 말한다. 주로 한국과 동남아 국가 간의 비교연구처럼 부수적인 사례연구가 주종이었던 1세대와 전공자들의 문헌연구에 기초했던 2세대 연구와는 달리, 이들은 현지어를 습득하고 장기간의 현지조사를 통해 동남아에 대한 박사논문을 쓴 세대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내가 속한 한국의 동남아 지역연구자 그룹에 대한 자랑을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 이 연구 집단은 3세대 연구자들의 현지조사를 계기로 장기간의 현지조사를 통해 지역연구에 입문하는 것의 중요성을 집단적으로 공유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한-아세안 학술연구 교류사업"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학문 후속 세대를 위한 현지조사를 제도화한, 거의 유일한 지역연구 집단이다. 필자 역시 이 프로그램의 지원 덕분에 필리핀에서 장기간의 현지체류와 조사를 수행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다국적 기업에 의한 투기성 광산개발과 사고 이후 주민들의 저항을 주제로 한 박사논문을 쓸 수 있었다. 선배 세대의 경험이 개별적 관계 사이에서만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정착된 제도를 통해 이어지는 까닭에, 동남아 연구자 그룹은 드물게 후속 세대 양성에도 일정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건강한 연구공동체이기도 하다.

서구 이론에 기초한 현실 해석이 주를 이루고, 해외 사례 연구라면 여전히 선진국의 경험을 더욱 비중 있게 바라보는 한국 학계의 현실에서 "지역연구"라는 학문 영역의 토양은 여전히 척박하다. 선진국의 지역연구의 초기 역사가 자체의 학문적 논리보다 국익 혹은 국제 사회의 권력지형에 따라 도구적으로 활용된 것으로 인해, '지역연구=제국주의(였던) 국가들이 잘 하는 학문'이라는 인식도 여전하다. 그렇지만 이 책은 저자들은 다른 식의 지역연구, 성찰적인 지역연구를 희망한다고 말한다. 기꺼이 현지로 들어가 현지인들과 친구가 되고자 하는 노력하는 태도를 중시하며, 저자들은 이를 "맨발의 방법론"이라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통해 나에게 전달된 건강한 에너지와 다짐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갈수록 생각은 쪼개지고, 글쓰기의 단초들은 잡힐 듯 말듯 부유하는 통에 글 쓰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박사 5년차에 접어든 작년 하반기부터는 부쩍 결과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고민도 깊어져왔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동안 몇몇 문구가 울림으로 다가왔다. "학자는 글로 싸우는 거다." "논문(글)을 쓰게 만드는 것은 지식의 축적보다는 용기의 축적이다." 학위논문 쓰는 후배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문구도 발견했다. "박사학위는 마스터피스(master piece)를 써서 받는 것이 아니라 퍼스트피스(first piece)를 써서 받는 것이다." 공부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라면, 책상 앞에 적어두고 싶은 명언들이라 생각된다.

이미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동남아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지식을 얻고 싶은 사람들, KOICA든 선교든 동남아에서의 장기 체류를 준비 중인 젊은 벗들, 지역연구에 입문하려는 자, 사례연구에 기초한 글쓰기를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에게 저자들이 뛰어들었던 현지조사의 열정과 도전의 정신이 전달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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