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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친아' 상속 재벌, 지상 낙원에서 지옥을 맛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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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친아' 상속 재벌, 지상 낙원에서 지옥을 맛보다

[프레시안 books] 카우이 하트 헤밍스의 <디센던트>

하와이 출신 소설가 카우이 하트 헤밍스의 장편소설 <디센던트>(윤미나 옮김, 책세상 펴냄)의 주인공, 맷 킹에게는 일반 한국인 독자 입장에서 공감해 줄 만한 여지가 없어도 너무 없다. 일단 맷 킹은 미국인 남성이고, 잘나가는 금융 변호사인 것도 모자라 하와이 왕족의 직계손으로 날 때부터 물려받은 땅만 수십만 에이커에 달하는 부동산 재벌이며, 미인 아내와 두 딸을 거느린 가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전 세계 바캉스와 허니문의 대명사인 지상낙원 하와이에 살고 있다.

도대체 이런 주인공의 어느 구석에 감정이입을 하며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읽어나가야 할 것인가.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책을 펼치자마자 주인공 맷 킹의 아내 조애니가 불의의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져 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게다가 남겨진 딸 둘은 철없는 초등학생과 고등학생이다. 사회계급의 절대 우위를 점하는 인물에게 가족의 상실이라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피할 수 없는 시련을 던져주는 것으로 독자들의 숨통을 틔워 주며 <디센던트>는 시작된다.

나는 내가 아이였을 때를,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들이었을 때를 기억한다. 나쁜 일을 저지를 때면, 알렉스가 알고 있듯 내가 아무리 애써도 절대로 곤경에 처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아마도 있는 집 자식들은 이런 특권을 억울하게 여길 테고, 그래서 어린 나이에 파멸을 동경하게 된다. 누군가는 우리를 잡아줄 것이다. 우리는 어찌 됐든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다. 우리가 저지르는 일 때문에 거리로 나앉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다니고, 어느새 우리가 저지르고 다니던 시시껄렁한 짓들이 저녁 술자리의 안주거리가 된 것을 기억한다. 그 때문에 내가 항상 실패자처럼 느껴졌다. 마치 다른 사람들처럼 밑바닥까지 가라앉기에는 내 안에 뭔가 부족한 것 같았다. (269쪽)

▲ <디센던트>(카우이 하트 헤밍스 지음, 윤미나 옮김, 책세상 펴냄). ⓒ책세상
맷 킹은 판에 박힌 상속 재벌은 아니다. 그는 아이들을 버릇없는 부잣집 아이들로 키우고 싶지 않다는 신념으로 스스로 돈을 벌어 생활한다. 백인 선교사였던 고조부가 하와이의 공주였던 고조모와의 결혼을 통해 얻은 거액의 부동산 지참금으로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가문의 내력과, 나아가 미국이 점령지 하와이에서 플랜테이션과 관광 사업으로 쌓은 자본에 대한 부채 의식도 갖추고 있다.

'개념 찬' 엄친아 맷 킹은 가장으로서는 행복하지 못하다. 아내 조애니는 식물인간이 되었고, 스스로 작성한 유언장에 따라 생명유지 장치를 떼어낼-즉, 안락사를 맞이할-예정이다. 충격을 감당할 틈도 없이 아내의 죽음을 두 딸과 친척들에게 알려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맷 킹에게, 바로 그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기 직전까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날벼락이 떨어진다. 그것도 다름 아닌 맏딸의 입을 통해서. 이후 맷 킹이 두 딸과 맏딸의 루저 남자친구 시드와 더불어, 아내의 불륜 상대였던 사나이를 찾아 하와이 군도에서 제일 오래 된 주도(洲島) 카우아이 섬으로 떠나며 빚어내는 일종의 로드무비가 <디센던트>의 주요 내용을 이룬다.

"넌 어떠니, 알렉스? 넌 괜찮니? 넌…너를 이용하지 않지, 그렇지?"
"이용이요? 맙소사, 내가 무슨 연장인가요."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뇨." 아이가 마침내 말한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아요."
"아무 짓도?" 나는 묻는다. "마리화나 냄새가 나던데. 시드한테."
"그건 시드죠." 알렉스가 말한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끊었니? 힘들지 않았어? 그건 전염병 같은 거다."
(268쪽)

맷 킹이 딸들과 소통하는 방식은 한국 일반 부모들과는 좀 거리가 멀다. 고등학생 맏딸은 아버지 앞에서 서슴없이 담배를 피우고, 초등학생 둘째 딸은 아무데서나 상소리를 지껄이며, 맏딸이 데려온 마리화나쟁이 사내아이 시드는 여자 친구의 아버지에게 "헤이" 라는 첫인사를 건넨다. 무엇보다도 한국 상식과 거리가 먼 부분은 아이들을 대하는 맷 킹의 태도인데, 그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교양과 '쿨'함이 넘치다 못해 거의 방임주의로 보일 정도다. (소설에서 맷 킹이 최고로 권위적으로 그려지는 순간은 죽어가는 어머니 앞에서 막돼먹은 소리를 하는 딸의 엉덩이를 단 한 대 때리는 장면이다.)

거의 유일하게 수동적 인물(식물인간이니까)로 그려지는 어머니 조애나도 과격한 수상스포츠와 파티를 즐기며 양육에는 무관심한 여자라는 비상식적 설정을 자랑한다. 미국 중산층 이야기에도 적응하기 힘들진대 타락한 미국 상류층 가정의 붕괴 이야기라니 솔직히 넘기 힘든 장벽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엄마에 대해 말했을 때 딸아이들이 지은 표정에 나는 사무치는 외로움을 느꼈다. 아이들은 절대로 조애니처럼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그녀를 알지도 못할 것이다. 그녀가 나 없는 인생을 상상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애니가 그립다. 나는 내 딸아이들을, 깜깜하게 불가사의한 존재들을 본다. 그리고 한순간 나 혼자 딸아이들과 이 세상을 살아가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들어 고통스럽다. 나는 딸아이들이 자신들의 어떤 점을 사랑하느냐고 묻지 않아서 가슴을 쓸어내린다. (284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센던트>에는 흥미를 놓지 않게 만드는 힘이 있다. 첫째로 섬세한 심리묘사와 대사들로 구성된 가족 서사의 위력이다. 한 중년 남자가 천방지축 딸들과 딸의 남자친구, 처가 식구들, 그리고 아내의 불륜 상대를 대하며 느끼는 갖가지 감정들, 그리고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미국과 한국의 간극, 상류층과 서민의 간극을 뛰어넘는 힘을 발휘한다.

▲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영화 <디센던트>.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물려받은 거액의 유산에도 불구하고 맷 킹은 제 힘으로 열심히 일하며 살지만 일평생 아내와 장인으로부터 '구두쇠'라는 비난을 듣는다. 자식들을 버릇없게 키우지 않겠다는 맷 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딸들은 아버지 보란 듯이 대들고 엇나가고, 마뜩찮은 사내아이와 연애를 한다. 사람이 혼자 그리는 이상적인 인생관과 배우자와 둘이서 그리는 인생관은 일치하지 않는다. 자식들의 비뚤어진 행동은 부모의 걱정거리가 낳은 결과물이 아니라 부모의 불화와 무관심이 낳은 결과물이다.

둘째는 하와이라는 특유의 배경이다. 내노라 하는 재력가들도 하와이안 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털털하게 출퇴근을 한다는 하와이 특유의 풍토와 장소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또한 하와이 배경은 맷 킹이 겪는 고난들이 실은 배부른 소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상속 재벌의 입장에 서 본 적 없는 나와 같은 일반 독자들의 비뚤어진 해석의 여지를 어느 정도 차단해 주기도 한다. '하와이'는 어쩐지 현실과 동떨어진 일들이 벌어지는 공상적인 장소-지상낙원!-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활자의 세계에서도 위력을 발휘하는 것일까.

<디센던트>는 복잡해 보이면서도 지극히 간단명료한 이야기를 통해 인생의 진리를 이야기한다. <사이드웨이>와 <어바웃 슈미츠>의 알렉산더 페인 감독이 2011년에 발표한 동명 영화를 추천한다. 원작 소설의 서사 흐름과 대사들을 모범적으로 활용한 이 영화는 소설에 끝내 적응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도 충분한 재미와 감동을 가져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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