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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갔어도, 그의 정신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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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갔어도, 그의 정신은 살아있다

[김성훈 칼럼] 다산의 3農 사상과 農策

구원(久遠)의 개혁사상

다산 저술과 그 사상의 요체는 “개혁(改革)”이다. 그가 살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은 조선 봉건사회의 해체기(解体期)로서 누적된 봉건적인 병폐가 도처에 드러나 있었다. 이러한 총체적 위기의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고 바로 세우는 길은 개혁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산은 깊이 통찰한 것이다. 그 시작은 모름지기 관료와 정치지도자들의 마음과 몸가짐의 쇄신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믿고, 구체적인 개혁대안서인 “경세유표”의 완성에 이어 목민심서를 내놓은 것으로 해석된다. 

33세(1794) 때 일찍이 그는 경기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몇 개 고을을 암암리에 순찰하고 몇 탐관오리들을 탄핵했다. 이 순찰 길에서 그는 토지(土地)와 환곡(還穀)과 군포(軍布), 즉 3政 문란을 둘러싼 관료 세족들의 협잡과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직접 목격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의 전 생애를 일관하는 민중 지향적인 사고의 출발점이 된다. 이로 인해 같은 고장 출신의 정승(당시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徐鏞輔)의 미움을 사 일생을 내내 시달림을 받는다.

“우리 나라를 새롭게 하자” 新我之旧邦의 다산 정신은 500여권의 방대한 저서 가운데 그 3분의 1이 정책관련 개혁론(改革論)이라는 점에서 잘 드러나 있다. 조선 왕조는 임진․정유 왜란(1592-8)과 병자호란(1636-7) 등 엄청난 규모의 국난을 겪으면서 왕조 재정과 민생파탄, 그리고 3정(三政)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였다. 시대적으로는 봉건왕조체제의 무능과 당쟁의 병폐가 끝이 없었고, 나라의 운이 특정정파의 정략과 실정으로 크게 기울고 있었다. (대우학술총서, 丁茶山과 그 時代, 민음사, 1986 및 고승제, 다산을 찾아서, 중앙일보사, 1995 참조.)
 
백성들로부터 받아들이는 토지 조세제도와 군대 관련 징포(徴布)제도 및 정부 양곡을 봄에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받아들이는 환곡제도를 시행함에 있어서 각종 횡포와 병폐가 극심하여 그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땅을 꺼지게 할 정도이었다. 

남부여대(男負女戴)의 이농․이촌 행렬이 줄을 잇고 남은 사람들은 백골징포(白骨徴布)에, 묵은 밭(白地) 세금, 어린이 어른 똑같이 매긴 세금 (黄口簽丁) 등 갖가지 세목(税目)비리와 국정문란으로 산업생산은 위축될 대로 위축되고, 민생은 문자 그대로 도탄에 빠져 있었다. 앞서도 잠깐 설명한 바 있지만, 다산은 사회시를 통하여 이같은 서정의 불의(不義)를 고발하고 1표2서를 통하여 그 개혁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마침내 다산은 조선조 초기 개혁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伝)과 마찬가지로 “군주와 목민관 등 통치자가 백성(民)을 제대로 사랑하고 위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존경하고 따르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통치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다.”라는 민본(民本)사상(정약용, 湯論, 李翼成 訳註, 다산논총, 을유문화사, 1984, pp.89-92.)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무위무능하고 부패한 군주(君主)나 목민관을 백성들이 바꿀 수 있다는 역성혁명적(易姓革命的)인 사상을 피력한 배경이 이러하다.  본디 역성혁명론을 주창한 원조는 맹자(孟子)이었다. 임금(紂王)이라 할지라도 인(仁)과 의(義)를 해쳐 임금답지 못한 임금은 죽여도 좋다는 뜻의 말을 하였다. 정도전도 공․맹자의 영향을 깊이 받아 조선 왕조 개국 후 1394년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에서 임금의 자리를 바르게 하는 원리를 밝히고 있다. 민심을 얻으면 백성은 군주에게 복종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백성은 군주를 버린다. (조유식, 정도전을 위한 변명, 푸른역사, 2001. pp.140-143.)

다산선생이 강진에 유배 중에 있었을 때(1797) 그가 도호부사로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황해도 곡산(谷山)에서 다시 폭동이 일어나고 곧이어 홍경래 난(洪景来 乱, 1811-2)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접한다. 다산은 즉시 전라도 유생(儒生)들에게 이를 토벌할 것을 주장하는 통문을 띄웠다. 그 내용을 일별하면, “주권(主権)은 원칙적으로 백성에 있고, 그 담당자는 국왕을 비롯한 양반관료층이다. 백성이 나라의 주인인 이상, 국가의 반란을 진압하는데도 백성이 선봉에 서야 한다.”는 주장(고승제, 다산을 찾아서 (개정판), 중앙아일보사, 1995, pp.465-476.)을 폈는데, 이는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나라의 원래 주인인 백성들이 임금과 목민관도 바꿀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찍이 다산은 1797년 36세의 나이로 곡산부사로 부임하여 과감한 행정개혁을 단행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준 바 있다. 특별히 곡산에서 천연두 기술서인 「마과회통(麻科会通)」 12권을 완성하게 된 계기도 바로 백성을 살려내려는 충정 때문이었다. 곡산부사로 재임한 1년7개월 동안 다산은 여러 가지 중요한 체험을 했다. 그로서는 지방행정의 실무를 처음 맡아본 셈인데 이 기간동안 그는 백성들의 뼈저린 생활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고 하급관리들의 비행이 어떻게 국가와 백성의 삶을 멍들게 하는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후일 지방관들의 행정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목민심서」를 저술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곡산부사 시절의 유명한 일화 하나를 소개해 보면, 그가 부임하던 날 이계심(李啓心)이란 자가 10여 항목의 건의서를 가지고 다산 앞에 나타났다. 이계심은 전임 부사 때 그곳 백성 1000여명을 이끌고 관가로 쳐들어가 사또의 부정을 항의하다가 쫓겨나 도망자의 신분이었다. 요즘말로 지명 수배 중이던 농민 데모대의 대장격이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가 스스로 다산 앞에 나타난 것이다. 당장 체포하자는 주위의 권유를 물리치고 그는 “한 고을에 모름지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서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백성을 위하여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은 얻을 수 있을지언정 너와 같은 사람은 얻기가 어려운 일이다.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한다.”라 했다. 다산의 한 면모를 뚜렷이 보여주는 일화이다.

「목민심서」에서도 “민(民)과 목(牧)은 근본적으로 평등하며 牧이 그 자리를 제대로 관리하려면 봉공(奉公)과 애민(愛民)을 잘해야 한다.” 국가의 기본은 백성(民)이며, 국가는 백성들에게 어진 정치(仁政)를 펴야한다는 민본주권론(民本主権論)을 펴고 있다. 이간은 개혁사상이 시종여일하게 다산의 모든 저작과 주의주장의 기조(基調)를 이루고 있다. 

다산의 3農 哲學과 산업진흥론

일찍이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은 임금께 드리는 ‘농책(農策)에서 “대저 농(農)이란 천하의 가장 큰 근본으로서 때(天時)와 땅(地利)과 사람(人和)의 화합을 기해야 그 힘이 온전하게 되고, 심고 기르는 것이 왕성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낳는 것은 하늘이고, 기르는 것은 땅이며, 키우는 것은 사람이다. 이 삼재(三才)의 도(道)가 하나로 모인 다음에야 농사일과 나라사일에 모자람이 없게 된다.…그런데 천하 사람이 차츰 (나랏일의) 근본(本)을 버리고 끝(末)만 도모하니 기름진 논밭과 살찐 흙이 모두 묵히게 되고, 높은 모자, 좋은 옷을 입은 놀고 먹는 사람이 늘어난다.…농사일의 고통스러움을 근심하지 않고서 어찌 왕업의 터전이 굳건하길 바랄 수 있으며, 농민의 고달픔을 어루만지지 못하면서 어찌 모든 백성의 평안함을 기대할 것인가? 차라리 대박대기를 끌며 바다를 건너 이민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라고 크게 한탄했다.

불행하게도 다산의 예언은 적중하고 만다. 입으로만 개화를 부르짖던 구한말의 조정은 계속된 서정(庶政)과 농정(農政)의 실패에 겹쳐 외세의 강압으로 강제 개항(開港)을 당한다. 그리고 이를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민생은 더욱 도탄에 빠지고 외세는 발호했다. 그 결과 마침내 동학농민혁명과 을사보호조약으로 이어졌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전후하여 이 땅의 뭇 선남선녀들이 대도시로, 만주대륙으로, 하와이로 한 많은 유랑 길에 나서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에 대해, 다산은 지주제도의 폐해를 혁파하는 토지개혁론(田論)을 주창한다. 그는 반계의 공전론(公田論)과 성호의 한전법(限田法)을 뛰어 넘어 ‘경자유전(耕者有田)’과 ‘협동경영’의 원칙에 입각한 여전법(閭田法)을 제안한다. (田論, 다산논총(이익성 역), 을유문화사, 1984, pp.15-29.) 농민이 농민으로 존재하려면 농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확고히 하되 공동경영(협업)의 중요성도 함께 강조하였다. 농민을 농지의 주인으로 삼는 입민지본(立民之本)은 오로지 농지의 재분배를 통해서 세울 수 있다고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주장을 펴는 등 다산의 농업관은 대단히 원칙적이면서도 오늘날에도 그 시사성과 실천성이 뛰어나다. 

원래 “농업이란 하늘(天時)과 땅(地利)과 사람(人和)이라는 3재(三才)가 어울려 농업의 道(農策, 전게서, pp.161-166.)를 일군다라는 사상은 오늘날 현대경제학 용어로 말하면 친환경적 친자연적 농업관을 피력한 것이다. 특히 농업은 태생적으로 세 가지 불리점(不利点)이 있는 바,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는 다음과 같은 농업, 농촌, 농민살리기 3농(三農)정책(応旨論農政疏, 전게서, pp.225-248.)을 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첫째는, 대저 농사란 장사보다 이익이 적으니, 정부가 각종정책을 베풀어 “수지맞는 농사(厚農)”가 되도록 해주어야 하며, 

그 둘째는, 농업이란 원래 공업에 비하여 농사짓기가 불편하고 고통스러우니, 경지정리, 관개수리, 기계화를 통하여 농사를 편히 지을 수(便農)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며,

그 셋째는, 일반적으로 농민의 지위가 선비보다 낮고 사회적으로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함에 비추어 농민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上農)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다산은 만일 농업 농민을 이처럼 우대하지 않으면 바다를 건너 막대기를 벗 삼아 떠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토로할 만큼 농업․농촌문제를 나라와 겨레 발전의 필수기본조건(national minimum requirement)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농민들에 대한 관료와 토착세력들의 수탈을 고발한 “애절양(哀絶陽)”이나 “기민시(飢民詩)”와 같은 수많은 시문을 통해 사회정의 확립과 민생의 바른 길을 깨우쳐 준 것도 그 일환으로 보인다. 

다산은 또한 상업(商業)을 발전시켜 생산과 부(소득)를 늘리되, 특권을 갖는 상업이라든지 매점매석은 억제하고 중소생산자와 소상인은 보호해야 한다는 현대적 상업관(商業観)을 주창하였다. 즉 정부는 도매(市廛) 상인들의 과도한 독점권(禁乱廛権) 행사를 일정하게 제한하는 통공(通共)정책을 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정조대왕 당시 좌의정 채제공이 건의하고 국왕이 여러 신하에게 물어서 채택한 “신해통공(辛亥通共)” 개혁정책에 茶山의 기여가 적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정조실록)
 
세도정치나 특정권력에 기생하거나 지방 토호세력 및 아전세력들과 결탁한 늑매(勒買, 강제로 사게 하는 행위)와 호상활매(豪商猾売, 특권적인 매점매석 행위)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지금도 대형 다국적 유통회사들의 횡포에 대해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그 외에도 그가 주장하고 일부 실천한 바 있는 과학기술개발론(科学技術開発論) 이라든지 광산국영론(鉱山国営論), 조세 및 화폐제도 개선론 등은 지금도 가히 경청해야 할 탁견이라 할 만큼 당시의 사회경제 여건에 비추어 아주 빼어나다.

다산의 개혁사상은 경제부문 이외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오늘날의 고등(행정, 사법)고시, 즉 과거제도(科挙制度)의 폐지, 중화사상(中華思想)의 거부와 민족주체의식의 강조, 신분․당파․지방 차별제도의 타파와 공평하고 공정한 인재등용 (通塞議, 전게서, pp.216-221.), 오늘날의 향토방위체제에 해당하는 민보의(民堡議) 제창 등, 행정 및 정치․사회 거의 전 분야에 걸쳐 혁신적인 정책이 논의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양반(両班)이 되면 군포(軍布)도 안내고 이른바 놀고먹을 수 있는 썩은 제도, 문벌주의, 지방차별, 적서(嫡庶)의 차별, 당파 차별 등 각종 차별정책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뭐니 해도, 다산이 되풀이하여 강조한 분야는 현대적 의미의 부정부패(不正腐敗) 비리척결론이다. 탐관오리와 아전들의 횡포를 척결하지 않고는 나라의 미래도, 백성들의 편안함도, 부국강병도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고 부단히 그 대안을 찾아 개혁정책의 전파에 노심초사한 것이다. 

茶山은 영원히 살아 있다.

다산이 강진에 귀양 온 3년째 된 1803년과 14년째인 1814년, 중앙 정치무대에서 두 차례나 곧 해배가 될 사안이 일어났는데도, 그 때마다 정적들의 악랄한 반대로 시행이 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흘러, 꿈에도 잊지 못하던 둘째 형 약전(若銓)은 동생의 해배 소식을 고대하다가 1816년 절해의 고도 흑산도 유배지에서 「자산어보(玆山漁譜: 우리나라 최초의 물고기 도감)」 한권을 남기고 외로이 병사하고 만다. 다산이 가장 사랑하고 따르던 형을 잃은 시름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은 고인 생전에 뛰어난 학식으로 그를 격려, 자문해주던 저술활동을 더욱 강도 높게 계속하는 일뿐이었다. 마침내 1817년 불후의 명저인 「경세유표」를 끝내고, 그 이듬해(1818년) 「목민심서」를 마무리(8월) 하자, 마침내, 기다렸다는 듯이 18년의 귀양살이가 풀린다. 

귀향(帰郷) 길에 오르기 전 8월 그믐날, 다산은 18제자와 함께 다신계(茶信契)를 만들고 강진 다산초당의 뒤치다꺼리 일들을 신신당부한다. 그리고 나서야 18년전 귀양 올 때 형(약전)과 함께 걸어왔던 한양으로의 길을 터벅터벅 홀로 걸어 고향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걸음마다 눈물자국이 서리고 차마 혼자 길을 재촉할 수 없었다. 2주를 걸려 9월13일  마현 고향집에 도착하였으나 노처와 아이들의 얼굴빛이 굶주림에 처량하다. 그런데도 귀양길을 떠날 때 기록해 두었던 재산목록과 비교하여 더 불어난 여유분 재산은 주변 친지들에게 나누어주도록 조치하다. 다산은 여생을 주로 고향집에 칩거하며 우리나라 제례(祭礼) 모음 책인 ‘흠흠신서’를 완성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먼저 떠난 옛 친구와 지인들의 묘지명 지어주기, 산수유람하기 등으로 자유인이 되어 나비 따라 청산을 오르고 냇물은 건너며 다음 세상을 조용히 준비하고 기다린다.

그리하여 부인 洪氏와의 결혼 60주년이 되는 회혼일(回婚日) 아침, 즉 1836년 음력 2월22일 辰時(아침 7-9시), 茶山 丁若鏞 선생은 마재(馬峴) 자택에서 고요히 눈(正寝)을 감았다. 다산이 이승을 하직하는 날 마지막 남긴 그의 회혼시(回婚詩)는 지금도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60년 세월, 눈 깜짝할 사이 날아갔으나,
복사꽃 무성한 봄빛은 신혼 때와 같구려.
살아 이별, 죽어 이별에, 사람은 늙었지만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박무영 옮김, 뜬세상의 아름다움, 태학사, 2001. 7, p. 4의 원문․번역문 참조.)

유언에 따라 두 분은 지금 마재 여유당(与猶堂: 겨울 시내의 살얼음판을 건너듯 조심하고 삼간다는 뜻) 뒤 언덕의 한 무덤에 나란히 누워 계신다. 마지막 남긴 시는 너무나 아름답다.

님(偉人)은 갔어도, 님의 정신과 사상은 영원히 살아있다. 지금도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앞으로도 다산의 정신과 사상은 오고 올 후손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다산연구소(소장 박석무)는 7일 오전 양수리 다산묘역에서 정약용 선생 서세 제178기 묘제와 헌다례를 올리고 실학박물관에서 다산 선생 기념강연회를 개최했습니다. 김성훈 장관의 이 글은 이날 강연에서 발표할 내용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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