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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구제 안 한다는 인권위, 장애인은 투표하지 마?

[인권오름] 6.4 지방선거 신형 기표대, 장애인 참정권 침해

'누구에게 투표할까' 아닌 '투표할 수 있을까?'

6.4 지방선거에 대한 기대와 관심으로 2014년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성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한 표를 어떤 사람에게 던져야 할지 신중하게 고민을 거듭해야 하는 때, 다른 한편에는 그 주어진 한 표를 제대로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다. 장애인에게 선거권은 그런 것이다. 누구에게 투표할지보다 내가 과연 무사히 우리 동네 투표소에서 투표할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장애인에게 선거권은 공평하게 주어지는 한 표가 아니다.

1948년 5월 10일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라는 민주적 선거제도의 4원칙을 도입하여 최초로 국회의원 선거가 시행된 이후 66년 동안 크고 작은 선거가 치러졌다. 그리고 국민의 선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수많은 제도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변화하고 성장하는 선거권 보장제도 속에서 66년의 세월 동안 변화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 아직도 투표소가 2층에 있어서 휠체어 장애인은 올라갈 수 없으며, 시각장애인은 후보자의 홍보물 내용을 알 수 없고, 청각장애인은 후보자 토론회를 수화와 자막 없이 시청해야 한다. 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고자 하는 정부와 관계 기관의 의지는 66년째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신형 기표대는 왜 만들었을까?

그래서 장애인단체는 선거가 치러지는 해마다 장애인에 대한 후보자의 복지정책을 점검하고, 장애인이 과연 비장애인과 함께 어려움 없이 투표할 수 있는지를 점검하는 모니터링을 한다. 올해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중앙선관위)의 6.4 지방선거와 관련한 계획을 점검하고 공직선거법 등 관련 법률을 검토하던 중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다.

우선 선관위는 지난 2월 21일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이유로 국민 의견수렴 과정이 전혀 없이 공들여 제작했다는 신형 기표대를 홈페이지에 발표하였다. 새로운 기표대 모델이 필요했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선거를 불과 3개월여 남겨둔 시점에 발표된 신형 기표대는 일반용과 장애인용 두 가지로 제작되었는데, 공개되지 않은 장애인용 기표대의 사진을 직접 요청해 확인한 결과 많은 문제점이 예상되었다.

신형 기표대는 스쿠터 장애인만을 고려하여 제작됐다. 양손과 상체가 자유로운 사람만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중증 뇌병변 장애인들의 투표권은 전혀 보장되지 않았다. 또한 일반용과 장애인용으로 구분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일반용에 휠체어 장애인도 함께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기표대 폭이 너무 좁아 장애인의 접근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이는 장애인을 분리,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긴급히 신형 장애인용 기표대의 제작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선관위와 면담하였고, 이를 계기로 6.4 지방선거와 관련한 장애인의 투표 참여에 대한 문제 제기가 시작되었다.

▲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6.4 지방선거에 도입하기로 한 신형 기표대. 중증 뇌병변 장애인이 투표하기 어렵다. ⓒ연합뉴스

선관위는 하기 싫고, 인권위는 할 수 없다?

선관위는 신형 기표대의 제작을 중단할 수 없으며, 디자인을 수정할 수도 없다는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우리는 소송인단을 구성하여 법원에 신형 기표대의 수정을 요구하는 임시조치를 신청하고, 동시에 진정인단을 구성하여 국가인권위원회에 장애인의 참정권에 대한 긴급 구제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선거가 이제 겨우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미 장애인이 투표에 참여할 수 없음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국민의 권리를 지켜내야 하는 인권위가 시급하게 장애인 참정권을 구제하기 위해 긴급 구제 조치를 내리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하지만 인권위는 이 사안은 긴급 구제 사항이 아니라고 밝혀왔다. 또한 선관위와 논의하여 문제를 조용하고 차분하게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우리는 선거가 있을 때마다 모니터링을 하고 결과에 따라 집단으로 진정서를 제출한다. 그리고 매번 그 진정서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선거 때마다 반복적이고 악의적인(해결할 의지가 없기 때문에) 차별 상황이 발생함에도 인권위는 법무부에 시정 명령을 요청하기는커녕 제대로 된 권고조차 내리지 않고 있다.

장애인의 참정권이 십수 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공공기관 어디에서도 장애인이 한 표를 행사하는 데 관심이 없는 이 모든 상황은 결국 권리를 구제해야 할 의무가 있는 인권위의 무관심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선거가 끝나면 장애인은 행사하지 못한 투표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도 다시 투표할 수 없다. 국민 누구나 가진 한 표이지만, 장애인의 한 표는 그렇게 선거마다 그냥 묻힌다. 긴급 구제를 요청하면 인권위는 매번 긴급 구제 사항이 아니라고만 이야기한다. 과연 인권위가 생각하는 긴급 구제는 무엇인가? 선거는 얼마 안 남았으며, 장애인은 이미 투표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는데 긴급 구제 사안이 아닌가? 더구나 이러한 상황은 선거 때마다 되풀이됐다. 장애인의 투표권을 보장하고 투표를 독려해야 할 선거관리위원회도 이를 개선할 의지가 전혀 없는 상황이다.

도대체 이러한 여러 현실적 사유 중에 긴급 구제 사항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인권위법상 긴급 구제는 '인권 침해나 차별 행위가 계속될 상당한 개연성이 있고, 이를 방치할 경우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할 때에' 행한다. 6월 4일 선거가 끝나면 선거권 행사는 전혀 할 수 없어 '회복하기 어려운' 권리 박탈이다.

장애인 참정권, 선관위와 인권위는 어떤 논의를 했나

3월 7일 진정서를 제출한 지 한 달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인권위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이제 공직선거법상 공식적인 선거기간이 시작되었다. 장애인은 후보자의 명함을 받아도 되는 걸까? 아무리 고민해도 나는 투표할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이야기해야 할까?

지난번 선관위를 방문했을 때 관계자는 함께 간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에게 "거소투표(변경 전 부재자투표)라는 편한 제도가 있어서 집 안에서 그냥 하시면 될 텐데 왜 힘들게 투표소에 와서 하시려고 하세요"라고 친절하게 물었다. 이렇게 감수성 넘치는(다시 말해 장애인의 선거권 행사를 제한하는 일을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장애인에게 건네는 선관위와 투표가 두 달 남았어도 긴급 구제하기 어려우니 그냥 투표하지 말라고 하는 인권위, 이 두 기관이 과연 장애인의 참정권에 대해 어떤 논의와 합의를 했는지 너무나 궁금해진다.

* 이 글은 주간 인권신문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 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http://www.freeuse.or.kr을 찾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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