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민주주의는 30년 가까이나 자랐으면서도 지금 제대로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시들해져 가고 있다. 선거, 언론의 공정성, 사법부의 독립, 결사의 자유 같은 가장 기본적인 절차적 민주주의의 요건들마저 이런저런 방식으로 돈과 권력의 논리에 의해 결정적으로 오염되어 있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 사회가 '형식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완성했는데 '실질적 민주주의'는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식으로 말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현실은 그 형식적 민주주의 자체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거나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방증하고 있다.
일그러진 채로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형식적 민주주의는, '좌익효수'를 내세우는 이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민주주의를 계급 지배의 도구라고 여기는 세력들을 척결하겠다고 나서는 방식으로 유린당하고 있다. 극단적 증오와 배제의 정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더 우리를 낙담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좌익효수의 활동 본거지인 '일간베스트(일베)' 같은 영역이 우리 시민사회의 중요한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적 의견 차이에 대한 단순한 반대 의사 표명을 넘어 이견을 가진 동료 시민들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와 척결을 선동하고 공격적 폭력성을 조장하는 공간이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쟁 논리의 격화와 그에 따른 사회 양극화의 심화 현상이 기름을 부은 탓인지, 숱한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며 제 발로 이른바 '일베충'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더 이상 '가스통 할배들'만이 극단주의자들이 아닌 것이다.
이들을 '꼴통'이라 부르며 또 다른 종류의 극단적 혐오감을 폭력적으로 드러내는 반대 진영의 사람들 또한 적지 않다. 머잖아 '좌파' 가스통 할배가 등장할 기세다. 민주적이고 진보적이기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이견을 가진 다른 세력이나 사람들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과 반감에 사로잡히고, 배제의 언어와 행태에 오염되어 자기들끼리 서로 반목하고 갈래갈래 찢겨져 있다. 이들도 민주주의를 잘 모르고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며 민주 사회의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지향과 품성과 태도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한마디로 우리는 지금 절차적 민주주의의 손상 때문만이 아니라 진영의 좌우를 막론하고 '시민적 덕성(civic virtue)'을 기르고, 또 이를 표현하는 시민 문화의 부재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시민성(citizenship)'의 위기다. 강퍅하게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챙기는 사람들, 이념을 떠나 다름을 포용하며 서로 존중하고 이견을 지닌 상대라도 품위와 예의를 갖추어 대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이루고 꾸려갈 수 없음은 자명하다. 언론이나 정치권이 선동하고 실천하는 극한적인 증오와 배제의 정치는 궁극적으로는 바로 이렇게 올바른 민주적 시민 문화의 부재가 낳은 결과이자 또한 그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일베충들의 섬뜩한 혐오 발언을 처벌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같은 당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통일전쟁을 위한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준비'를 선동하는 정치 세력을 어떻게 다룰 지도 매우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민주적인 가치와 지향과 태도를 지닌 시민들이 없이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은 진리다. 우리 사회는 지금 민주화 이후 30년이 다 되어 가도록 이 근본적인 진리를 외면해 온 데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목도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그 점을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시민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시민은 길러지고 교육되어야 한다. 가정에서부터 학교를 거쳐 일상적인 삶의 공간으로 나오면서 민주적인 가치와 지향과 태도를 몸에 배워 익히고, 자신의 삶과 사회의 과정에 나름의 몫을 갖고 참여하여 조율할 줄 아는 능력을 키운 사람만이 온전한 시민이 될 수 있다. 동료 시민들을 어떤 말씨와 태도로 대해야 할지, 자신의 이해관계가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며 또 어떻게 정치적으로 관철할지, 나아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공동체 전체의 이해관계와 어떻게 조율할지 등에 대해 나름의 답을 내릴 수 있는 제대로 된 역량을 갖춘 시민들만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분명한 목적과 방향과 내용을 갖춘 교육만이 이 과제를 감당할 수 있다.
우리나라 교육기본법은 모든 구성원이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천명하고 있다(제2조). 하지만 우리 사회의 공교육이 그와 같은 목적을 제대로 추구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까지 학교들은 대학 입학을 위한 준비 기관이 된 지 오래되었고, 대학은 대학대로 직업교육기관으로 전락해 버렸다. 일베충 같은 '청년 극우'의 등장은 우리 사회가 이렇게 스스로 설정한 교육의 본래 사명을 오랫동안 방기한 결과이기도 하다.
학교 바깥이라고 사정이 나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열악하다. 대부분의 시민이 단지 '먹고 사는 문제'에 우선적으로 매달리는 삶을 살아야 해서만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삶의 문법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몇 년에 한 번 이런저런 선거에 나설 기회는 가지나, 생계 때문에 그마저 제대로 챙길 여유가 없는 시민들이 부지기수인 점은 문제다. 게다가 투표장에 가서도 제대로 된 정보를 바탕으로 충분한 숙고 뒤에 권리를 행사하는 시민은 소수에 불과한 것 같다. 언론이든 행정 기관이든 시민 단체든 올바른 민주적 시민성을 함양하기 위한 기회를 거의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관계망(SNS)이 그런 역할을 하는가 싶더니, 오히려 이견을 가진 동료 시민들에 대한 상호 불신과 반목을 조장하는 듯하다. 선거 때마다 불거지는 지역주의의 망령이 사라질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은 이런 탓도 크지 않을까 싶다.
민주화를 이루어내고 민주주의를 지켜 온 한국 시민사회의 힘은 결코 약하지 않다. 때로는 목숨을 걸고 자유와 정의를 외칠 결기를 지닌 숱한 시민들의 참여와 헌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수준의 민주주의도 결코 누릴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우리 시민사회는 일상적인 시민문화와 시민적 삶의 기풍을 민주적으로 벼려내고 뿌리내리게 하는 데에는 무관심했고, 무능했다. 보통의 시민적 삶의 민주화보다는 운동의 일상화에만 매달린 탓이다. 시민운동의 성과와 업적을 부정할 일은 아니지만, 지나온 과정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모색도 필요해 보인다.
시민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한 사회 차원의 노력이 절실하다. 학교 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지역 자치 단체나 시민사회 조직 모두에서, 그리고 민주적이기를 지향하는 모든 정치 진영을 아울러, 우리 민주주의를 지키고 일상적으로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시민성 함양 교육의 원칙과 틀을 마련하려는 공동의 노력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아파서 신음하고 있다. 머지않아 죽을지도 모른다. 서둘러야 한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일그러진 채로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형식적 민주주의는, '좌익효수'를 내세우는 이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민주주의를 계급 지배의 도구라고 여기는 세력들을 척결하겠다고 나서는 방식으로 유린당하고 있다. 극단적 증오와 배제의 정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더 우리를 낙담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좌익효수의 활동 본거지인 '일간베스트(일베)' 같은 영역이 우리 시민사회의 중요한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적 의견 차이에 대한 단순한 반대 의사 표명을 넘어 이견을 가진 동료 시민들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와 척결을 선동하고 공격적 폭력성을 조장하는 공간이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쟁 논리의 격화와 그에 따른 사회 양극화의 심화 현상이 기름을 부은 탓인지, 숱한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며 제 발로 이른바 '일베충'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더 이상 '가스통 할배들'만이 극단주의자들이 아닌 것이다.
이들을 '꼴통'이라 부르며 또 다른 종류의 극단적 혐오감을 폭력적으로 드러내는 반대 진영의 사람들 또한 적지 않다. 머잖아 '좌파' 가스통 할배가 등장할 기세다. 민주적이고 진보적이기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이견을 가진 다른 세력이나 사람들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과 반감에 사로잡히고, 배제의 언어와 행태에 오염되어 자기들끼리 서로 반목하고 갈래갈래 찢겨져 있다. 이들도 민주주의를 잘 모르고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며 민주 사회의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지향과 품성과 태도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한마디로 우리는 지금 절차적 민주주의의 손상 때문만이 아니라 진영의 좌우를 막론하고 '시민적 덕성(civic virtue)'을 기르고, 또 이를 표현하는 시민 문화의 부재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시민성(citizenship)'의 위기다. 강퍅하게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챙기는 사람들, 이념을 떠나 다름을 포용하며 서로 존중하고 이견을 지닌 상대라도 품위와 예의를 갖추어 대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이루고 꾸려갈 수 없음은 자명하다. 언론이나 정치권이 선동하고 실천하는 극한적인 증오와 배제의 정치는 궁극적으로는 바로 이렇게 올바른 민주적 시민 문화의 부재가 낳은 결과이자 또한 그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일베충들의 섬뜩한 혐오 발언을 처벌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같은 당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통일전쟁을 위한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준비'를 선동하는 정치 세력을 어떻게 다룰 지도 매우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민주적인 가치와 지향과 태도를 지닌 시민들이 없이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은 진리다. 우리 사회는 지금 민주화 이후 30년이 다 되어 가도록 이 근본적인 진리를 외면해 온 데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목도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그 점을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시민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시민은 길러지고 교육되어야 한다. 가정에서부터 학교를 거쳐 일상적인 삶의 공간으로 나오면서 민주적인 가치와 지향과 태도를 몸에 배워 익히고, 자신의 삶과 사회의 과정에 나름의 몫을 갖고 참여하여 조율할 줄 아는 능력을 키운 사람만이 온전한 시민이 될 수 있다. 동료 시민들을 어떤 말씨와 태도로 대해야 할지, 자신의 이해관계가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며 또 어떻게 정치적으로 관철할지, 나아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공동체 전체의 이해관계와 어떻게 조율할지 등에 대해 나름의 답을 내릴 수 있는 제대로 된 역량을 갖춘 시민들만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분명한 목적과 방향과 내용을 갖춘 교육만이 이 과제를 감당할 수 있다.
우리나라 교육기본법은 모든 구성원이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천명하고 있다(제2조). 하지만 우리 사회의 공교육이 그와 같은 목적을 제대로 추구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까지 학교들은 대학 입학을 위한 준비 기관이 된 지 오래되었고, 대학은 대학대로 직업교육기관으로 전락해 버렸다. 일베충 같은 '청년 극우'의 등장은 우리 사회가 이렇게 스스로 설정한 교육의 본래 사명을 오랫동안 방기한 결과이기도 하다.
학교 바깥이라고 사정이 나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열악하다. 대부분의 시민이 단지 '먹고 사는 문제'에 우선적으로 매달리는 삶을 살아야 해서만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삶의 문법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몇 년에 한 번 이런저런 선거에 나설 기회는 가지나, 생계 때문에 그마저 제대로 챙길 여유가 없는 시민들이 부지기수인 점은 문제다. 게다가 투표장에 가서도 제대로 된 정보를 바탕으로 충분한 숙고 뒤에 권리를 행사하는 시민은 소수에 불과한 것 같다. 언론이든 행정 기관이든 시민 단체든 올바른 민주적 시민성을 함양하기 위한 기회를 거의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관계망(SNS)이 그런 역할을 하는가 싶더니, 오히려 이견을 가진 동료 시민들에 대한 상호 불신과 반목을 조장하는 듯하다. 선거 때마다 불거지는 지역주의의 망령이 사라질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은 이런 탓도 크지 않을까 싶다.
민주화를 이루어내고 민주주의를 지켜 온 한국 시민사회의 힘은 결코 약하지 않다. 때로는 목숨을 걸고 자유와 정의를 외칠 결기를 지닌 숱한 시민들의 참여와 헌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수준의 민주주의도 결코 누릴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우리 시민사회는 일상적인 시민문화와 시민적 삶의 기풍을 민주적으로 벼려내고 뿌리내리게 하는 데에는 무관심했고, 무능했다. 보통의 시민적 삶의 민주화보다는 운동의 일상화에만 매달린 탓이다. 시민운동의 성과와 업적을 부정할 일은 아니지만, 지나온 과정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모색도 필요해 보인다.
시민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한 사회 차원의 노력이 절실하다. 학교 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지역 자치 단체나 시민사회 조직 모두에서, 그리고 민주적이기를 지향하는 모든 정치 진영을 아울러, 우리 민주주의를 지키고 일상적으로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시민성 함양 교육의 원칙과 틀을 마련하려는 공동의 노력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아파서 신음하고 있다. 머지않아 죽을지도 모른다. 서둘러야 한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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