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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노역' 허재호에게 돌 던지면 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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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노역' 허재호에게 돌 던지면 끝인가

[편집국에서] 한국 사회 노동의 가치를 다시 물어야 할 때다

썩은 내가 진동한다. 진원지는 일당 5억 '황제 노역'으로 공분을 불러일으킨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이다. 악취를 풍기는 건 허 전 회장 한 사람만이 아니다. '황제 노역'을 가능하게 한 검찰과 법원, 그리고 선처를 호소한 지역 기관장들 등의 비호 세력은 사회를 좀먹는 추악한 카르텔의 전형을 보여줬다.

뒤늦게 대법원이 '황제 노역' 개선안을 내놨다. 재판부 맘대로 고무줄 노역을 부과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문제가 된 '향판'(지역 법관) 제도를 손볼 뜻도 밝혔다. 물론 '황제 노역'의 길을 열어준 법관을 제대로 단죄했는지는 의문이다. 광주지법원장 자리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이 사안에 대한 관심이 잦아든 후 유력 변호사로서 전관예우를 누리며 활동할 길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검찰도 '황제 노역' 논란이 커지자 허 전 회장 관련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여론의 관심을 모은 마당에 검찰이 다시 솜방망이 처분을 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물론 "허 전 회장이 벌금을 내면 끝"이라는 문제 발언으로 또 비판을 자초한 데서도 드러나듯이,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황제 구형' 당사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 역시 필요하다.

사법 당국이 허 전 회장 관련 사안을 이제라도 제대로 파헤칠지는 지켜봐야 하지만, 일당 5억 기록은 당분간 깨지기 어려워 보인다. 타이거 우즈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같은 스포츠 스타의 하루 벌이보다도 훨씬 많다는 일당 5억을 능가할 사람이 나타날 가능성은 지금으로선 높지 않다.

'황제 노역'의 밑바탕에 놓인 노동의 가치에 대한 왜곡된 잣대

짚을 것이 있다. 이것으로 끝인가? '허재호 황제 노역'을 막은 것으로 이 사안을 정리해도 괜찮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더 생각하고, 확장해야 할 영역이 있다.

이번 논란 과정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 게 있다. 벌금형이 선고된 주요 재벌 회장들의 노역 일당(1일 환형 유치금)이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돼왔다는 것이다. 평범한 국민은 통상 1일 5만 원, 많아봐야 10만 원 수준인 데 비해 재벌 회장들은 대부분 수천만 원 혹은 억대다. 똑같은 죄를 지었다고 할 때, 재벌 회장은 노역을 하루만 하면 되지만 서민은 몇 천 일, 몇 만 일을 노역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 가운데서도 어처구니없이 높아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던 허 전 회장만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고액 환형 유치금은 노역 기간을 최장 3년으로 제한한 데서 비롯된 기술적인 사항일 뿐이라고 여기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재벌 회장들을 비롯해 이 사회에서 힘깨나 쓴다는 양반들의 범법 행위 규모가 그만큼 어마어마함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그럼에도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에서 서민과는 비교도 안 되는 특급 대우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것이 정당한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재벌 회장은 노역 대신 벌금 납부를 택할 것이니 현실에서 문제가 될 일은 별로 없다고 반론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눙칠 일이 아니다. 헌법이 규정한 평등의 원칙에 부합하는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아니던가.

'회장님들은 경제의 중추로서, 서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여를 하고 있다'고 반박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회장님에게 평등의 원칙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발칙한 짓이자 경제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허재호 한 사람에 그치는 대신 재벌 회장들의 '노역 일당'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여길 이들의 속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이다. 더 생각하고, 논의를 확장하고, 더 짚어야 할 것이 바로 이 문제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그간 판사들이 재벌 회장들의 환형 유치금을 서민들의 몇 천 배, 몇 만 배로 책정한 원인을 고무줄 잣대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그 밑바탕에는 노동의 가치에 대한 사회 일각의 왜곡된 잣대가 놓여 있다.

그 잣대가 옳은 것인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할 때다. 매일 만원 버스와 지하철에 시달리면서도 가족을 위해 땀 흘리는 당신의 노동이 재벌 회장의 그것에 비해 그토록 하찮은 것인지 물을 때다. 상사의 구박에 시달리며 허리가 휘고 목뒤가 뻣뻣해지도록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당신이 재벌 회장의 몇 천분의 일, 몇 만분의 일에 불과한 존재로 취급을 당하는 것이 정당한지를 따질 때다.

모든 사람이 무조건 똑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경력, 역량 등을 고려해 적절하게 차등을 두는 것은 대다수가 공감하는 사항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의 차등이 적절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는 노동의 가치에 대한 왜곡된 잣대와 맞닿아 있다.

▲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 ⓒ연합뉴스

'황제 노역', '유령', 씁쓸한 보수 공개는 이어져 있다

민주공화국임을 무색케 하는 '황제'들의 준동은 수많은 '유령'을 양산하는 현실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예컨대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을 하면서도 화장실에서 찬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까지 놓이며 '유령' 취급을 받았던 청소 노동자들의 처우 문제 역시 노동의 가치에 대한 왜곡된 평가와 무관하지 않다.

어디 이들뿐인가. 팔다 남은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때로는 최저 임금에도 못 미치는 시급에 만족해야 하는 '알바'들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도 등록금을 충당하지 못해 수천만 원의 빚을 지고 사회로 나와야 하는 이들에게 한국 사회는 '너희는 하찮고 너희 노동은 보잘것없는 것이야'라고 매일 속삭이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이런 '유령'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사회, 생활 임금을 보장하면 경제가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세력이 쥐락펴락하는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한국 사회가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더 생각하고 동료들과 의견을 나누는 것은 모진 사회를 바꾸는 첫걸음이다. 생활 임금 보장은 '유령'들만이 아니라 노동력을 팔아 살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깨닫고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구조 개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노동의 가치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바로잡는 것은 경제의 재도약과도 맞물린 문제다. 수많은 사람을 늪에 밀어 넣은 채 경제가 다시 도약하길 기대할 수는 없다.

3월 마지막 날, 연봉 5억 원 이상 등기 임원의 보수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수많은 이들이 엄청난 격차에 허탈함을 느껴야 했다. 비등기 임원까지 포함하면 그 격차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더 커질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격차는 있지만 그래도 살 만한 곳으로 거론되는 나라들의 공통점은 노동의 가치에 대한 평가가 한국만큼 왜곡돼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곳 자본가와 권력자의 마음이 비단결이어서 그런 게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묻고 따지고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낸 것이 쌓인 결과다.

'황제 노역', '유령', 그리고 씁쓸한 보수 공개는 이어져 있는 문제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체념하고 씁쓸하게 소주를 들이붓는 것에 그친다면, 자녀들이 마주할 세상 역시 잿빛일 가능성이 높다. 묻고 따지고 바로잡지 않으면, 큰 도둑을 권하는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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