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그때 그 자리에, 그 사람이 있었다. 그런 것을 '운명'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인도의 간디는 변호사였던 젊은 시절, 일자리를 찾아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 남아공의 어느 기차 안에서 백인 차장에게 모욕을 당하고 쫓겨나는 일을 겪지 않았더라면, 간디는 그냥 평범한 변호사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인해, 간디는 남아공에서 인도인들이 받고 있던 차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차별반대운동을 이끈 후, 인도로 돌아가 인도독립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평범할 수 있었던 한 사람의 삶이 크게 전환하게 된 것이다.
마틴 루서 킹 또한 미국 남부의 평범한 침례교 목사로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가 평범한 삶을 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킹은 몽고메리시의 버스승차거부운동에 참여한 1955년부터 격렬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흑백차별 철폐를 위한 시민권운동에서 시작해,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반전평화운동, 경제적 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한 사회정의운동까지, 39년이라는 짧은 생을 그가 추구한 사회적 가치를 위해 헌신했다.
마틴 루서 킹은 결국 1968년 4월 4일 멤피스의 한 모텔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런 마틴 루서 킹의 삶은 제대로 기억되어야 한다. 왜곡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이다. 킹은 시민권운동에 헌신한 바를 인정받아 1964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킹은 미국 정부로부터 감시를 당하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어떻게 보면, 킹을 요주의 인물로 만든 운동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는지도 모른다.
마틴 루서 킹은 간디의 영향을 많이 받아 비폭력저항 원칙을 강조했다. 저항 수단은 '시민불복종'이었다. 시민불복종은 정의나 평등 같은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그것을 가로막는 부당한 실정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흑백차별을 규정한 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는 것도 시민불복종이다. 시민불복종은 비폭력적인 방식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많은 흑인들은 비폭력저항 방식에 대해 답답하게 생각했다. 실제로 폭동을 일으켜 자신들의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틴 루서 킹은 비폭력저항을 고수하며 '우리의 힘은 화염병 속에 있지 않다'고 설득한다.
마틴 루서 킹은 비폭력 원칙을 끝까지 강조했지만, 차별과 빈곤에 항의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강조한다. 그는 1968년 멤피스에서 파업 중인 청소노동자들 앞에서 "압제자는 결코 자발적으로 자유를 주지 않으며, 자유는 억압받는 사람들이 요구할 때에만 얻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암살당하기 전에 여러 연설에서 이런 요지의 발언을 한다. 치열하게 저항해야 한다고. 마틴 루서 킹의 말처럼, 비폭력저항이 '저항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치열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행동해야 한다.
마틴 루서 킹의 비폭력저항은 미국 사회를 움직이던 기득권 세력에 큰 위협이었다. 베트남전쟁을 벌이고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킴으로써 이익을 보는 기업들이 있었고, 이들과 연결된 정치인, 권력기관이 있었다. 그래서 마틴 루서 킹의 발언이 핵심을 건드릴수록 압박은 심해졌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의 연방수사국(FBI)는 마틴 루서 킹을 위험인물로 규정하고, 전화를 도청하고 협박했다. 마틴 루서 킹 암살의 배후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미국의 권력기관이 개입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마틴 루서 킹의 삶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들: 시민권, 반전운동, 기본소득
흔히 마틴 루서 킹 하면, 시민권운동을 떠올린다. 물론 그는 시민권운동을 통해 지도자로 부상했고 그가 이끈 운동은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시민권운동의 성과에 대해서는 회의도 존재했다.
일상적인 흑백차별이 사라지고, 흑인들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지게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미국에 살던 흑인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았다. 흑인들은 가난했고, 일자리가 없었으며, 주택, 의료, 교육 등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1965년부터 1967년까지 미국에서는 흑인들의 폭동이 자주 일어났다.
이런 폭동을 연달아 겪으면서, 마틴 루서 킹은 흑인들의 절망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1965년 로스앤젤레스에서 30명 이상이 사망하는 폭동이 발생했을 때, 그곳을 방문한 그는 경제적 곤경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깊은 절망감이 폭동의 근본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1966년에는 시카고의 빈민가에 머무르며 흑인들의 생활상을 개선하고 주거, 교육 등에서 일어나는 차별을 없애는 운동에 주력한다. 당시에 그는 '미래 세대들이 다 쓰러져가는 주택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일할 기회를 보장받는 것', '흑인들의 생활수준을 일반적인 미국인의 생활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심각한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베트남과 전쟁을 일으키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에 끌려나간 청년들은 흑인이든 백인이든, 애꿎은 목숨을 베트남에서 잃었다. 또한 베트남에서는 민간인 학살 같은 잔인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보며 마틴 루서 킹은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발언과 행동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 결심은 주변 사람들의 우려를 낳았다. '왜 시민권운동에 집중하지 않고 베트남전 반대운동까지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틴 루서 킹은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기에 침묵을 깨고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운동에 나섰다. 1967년에 그는 "나는 미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내 조국의 지도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이 전쟁을 일으킨 커다란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전쟁을 끝내는 것도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라고 발언한다.
"킹에게 중요한 문제는 그 반전운동이 옳은 일이냐는 거였지. 그는 말헀어. 비겁한 이들은 이렇게 질문하죠 - 안전한가요? 편리주의자들은 이렇게 질문하죠 - 정치적으로 이로운 일인가요? 허영심이 가득한 이들은 이렇게 질문하죠 - 사람들이 지지하는 일인가요? 하지만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한답니다 - 옳은 일인가요?" (125쪽)
베트남전은 흑인들의 빈곤을 해소하는 데에도 큰 장애물이 되고 있었다. 전쟁에는 막대한 돈을 쓰면서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 정부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킹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문제의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전쟁과 경제적 빈곤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베트남전쟁과 같은 사악한 사건이 사악한 흡혈귀처럼 사람들과 기술과 돈을 빨아들이는 한, 미국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활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 필요한 자금이나 행동에 투자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마틴 루서 킹은 빈곤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본소득(basic income, guaranteed income)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친다. 1967년에 쓴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 혼란인가 공동체인가?(Where Do We Go from Here : Chaos or Community?)>에서 빈곤을 해결하는 직접적인 방법이 기본소득의 보장임을 제시한다. 그는 1968년 암살당하기 직전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Poor People's Campaign)'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운동에서 요구하고자 했던 세 가지 핵심 사항은 기본소득, 완전고용, 싼 임대주택이었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킹이 죽은 후에도 미국의 현실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미국의 많은 흑인들은 가난하다. 흑인의 기대수명은 백인보다 낮고, 실업률은 백인보다 높으며, 미국의 감옥 수감자들 중 다수가 흑인이다. 마틴 루서 킹의 운동은 이룬 것도 있었지만, 이루지 못한 것도 많았다.
어떤 사람의 활동이, 그리고 어떤 시기의 사회운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마틴 루서 킹은 이제 없지만,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활동가들이 빈부격차를 완화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런 운동은 세계 곳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지고 있다.
이런 운동은 정의가 더 많이 실현되기를 요구하고,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반대한다. 원전, 기후변화, 환경파괴, 전쟁에 반대하고, 모든 인간과 생명이 존중받는 사회를 추구한다. 온갖 폭력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을 외친다. 그리고 부당한 법에는 시민불복종으로 맞선다.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만약 마틴 루서 킹이 지금의 대한민국에 있다면 어떤 활동을 하고 있을까?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의 편에서 그들의 인권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지 않을까?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집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지 않을까? 전쟁, 파괴, 차별과 같은 단어들에 맞서 생명과 평화를 외치고 있지 않을까? 잘못된 법에 맞서 시민불복종운동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상상을 해본다.
오늘(4월 4일)은 46년 전(1968년)마틴 루서 킹이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난 날이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꿈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 하루만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삶을 기억하기를, 그가 꾸었던 꿈을 되돌아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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