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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박정희는 숭배, 독재자 쫓아낸 건 찬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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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박정희는 숭배, 독재자 쫓아낸 건 찬밥?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32> 4월혁명, 첫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4월혁명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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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4월혁명은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를 가리키는 용어가 매우 다양하다.

서중석 : 4월혁명은 3.1운동, 해방과 함께 우리 근현대사에서 제일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헌법에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이렇게 돼 있다.

4월혁명이 일어나게 한 1960년 3.15 부정 선거 과정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전체 상이라고 할까, 그 성격을 총괄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3.15 부정 선거는 단순히 하나의 선거 부정이라기보다는 이승만 정권의 전반적인 성격을 한마디로 보여준 것이다. 4월혁명은 그런 이승만 정권에 대한 총체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헌법에까지 4월혁명이 들어가 있는 것 아니겠나. 단순한 시위나 의거, 이런 것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를 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4월혁명을 가리키는 단어가 참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3.15 부정 선거나 4월혁명에 대한 연구, 학문적인 토론과 논의가 별로 없었다는 걸 이야기해준다. 이렇게 헌법에까지 명시된 중요한 사안이 왜 그렇게 학문적으로 제대로 연구되지 않고, 공동 토론 같은 것이 충분치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런 게 별로 없으니까 이렇게 말을 쓰는 것 자체도 난맥상이 보인다고 할까, 복잡하다고 할까 하는 면이 많다. 그래서 헌법에도 그냥 4.19라고만 돼 있는 것처럼 4.19라고 부르는 경우도 옛날부터 많았고, 또 4.19의거라고도 했고, 또는 4.19학생혁명, 4.19학생운동, 4.19혁명, 4월혁명, 4월학생혁명,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학생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학생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희생자 중 절반 이상이 하층 노동자와 무직자라는 사실은 4월혁명을 학생이라는 틀에 가두는 대신 더 폭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의거라는 규정 역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그간 많았다.

서중석 : 학생운동이라고 하는 것도 물론 4월혁명을 깎아내리고 격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 뉴라이트에서 이걸 학생운동이라고 했다가 강한 반발을 사고 그러지 않았나.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포럼은 2006년 '4.19는 학생운동, 5.16은 혁명'이라는 내용을 담은 대안 교과서 시안을 갖고 심포지엄을 열려다 4월혁명 단체 회원들에게 저지됐다. 교과서포럼은 4월혁명 단체의 항의를 받아들여 학생운동 대신 '4.19 민주 혁명'으로 규정하고 5.16은 쿠데타로 표현한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2008년 출간했다. <편집자>)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건) 의거는 그것의 역사적인 의미, (4월혁명을 통한) 중대한 사회적 변화 같은 것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어떤 한 분노로 갑자기 들고일어나서 의롭게 싸웠다는 정도의 단순한 의미(만 담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단순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의거는 문제가 있다', 이런 얘기를 했었다. 5.16쿠데타 이전에도, '의거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5.16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후에 때로는 4.19혁명이라고 쓰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제3공화국 헌법을 보면 "3.1운동의 숭고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이렇게 4.19는 의거라고 딱 못을 박고 자기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5.16혁명이라고 아주 높이 평가했다. 혁명이란 건 중요한 결단에 의해 사회가 크게 바뀐다는 뜻으로 그 당시에 사용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4.19는 의거로 하고) 자기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5.16혁명이다, 이렇게 못을 박은 건 참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역사 교과서라든가 방송 등에서 의거라고 부르도록 해서 5.16쿠데타 이후엔 상당히 오랫동안 의거라고 많이 불렸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4.19는 의거, 5.16은 혁명?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프레시안 : 5.16쿠데타를 혁명이라고 규정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위대한 혁명가로 자연스레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는 일각의 박정희 숭배 움직임과 맞닿아 있다. 다시 4월혁명 문제를 짚으면, 이를 혁명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서중석 : 이야기한 것처럼 의거에는 역사적 의미가 약하고 자연 발생적인 의미, 일시적인 분노의 표현이라는 의미가 다분히 들어 있다. 그런데 또 이게 혁명이 맞느냐, 이 부분에 대해선 4.19 직후부터 논쟁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종률이라는 분의 주장이다. 이 사람은 4월혁명기의 대표적인 논객으로, 진보적 정치 이념을 이끌어가는 데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중 하나였다. 이 사람이 그해 6월, 그러니까 4.19 난 지 불과 한 달여 후 이일구라는 가명으로 짤막한 책을 하나 썼다. 이분이 이 책에서 그것을 문제 삼았다. '이것을 혁명으로 보아야 하는가. 난 그렇게 볼 수 없다. 항쟁이라고 보는 게 더 낫겠다.' 왜 그런가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혁명이라고 하면 생산 수단의 소유 관계와 관련된 사회적 경제의 영유권이 갑의 세력에서 을의 세력으로 넘어가는 변화인데.' 그 당시에는 지배자, 피지배자 같은 말을 쓰기 나빴기 때문에 (갑의 세력, 을의 세력) 이런 말을 쓴 것 같다. 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도 정치적인 변화와 함께 토지 문제 같은 걸 포함해서 경제적인 큰 변화를 수반하지 않았나.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그 대표적인 사례 아닌가. 그런 정도만이 혁명이라고 이분은 봤다.

이게 사실은 정통적인 견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사람은 '이건 3∼4월 민족 항쟁으로 봐야 한다. 반독재와 민족 자주를 혁명적으로 한 단계 높이기는 했지만 그것을 성취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혁명이라고 볼 수가 없고 혁명 전 단계에 도달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3∼4월 민족 항쟁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고 봤다. 이 양반은 민족 자주를 아주 중시했다. 그렇기에 4월혁명기의 대표적인 이론가가 된 것이다. (이종률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통일 운동 단체 중 하나인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의 이론가였고, 혁신계 신문인 <민족일보>에서도 활동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다른 이들은 어떻게 보았나.

서중석 : 이 시기는 물론 그 이후에도 많은 활동을 하는 박현채 교수, 그리고 백낙청 교수 같은 분들은 4월혁명을 '미완의 혁명'이라고 불렀다. 박현채 선생은 그걸 논리적으로 여러 글에 썼다.

예컨대, 왜 미완의 혁명이라고 보느냐에 대해 '민주주의와 진정한 민족 해방의 실현을 위한 건 아직 되지 않았다', 이렇게 설명했다. 미완의 민중 혁명이라는 말이다. '또 이 혁명은 민중 자신이 아닌 학생에 의한 대리 혁명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봤다). 그래서 진정한 민주주의와 민족 해방, 이건 민족 민주 해방 또는 민족 민주주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왔을 때 혁명으로 매듭지을 수 있는 것이고 그때까지는 계속 혁명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4월혁명이라는 규정이 적절한 이유

프레시안 : 역사학자로서 어떻게 평가하나.

서중석 : 우리가 혁명이라고 이름 붙인 것을 보면, (근본적인) 경제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고 큰 정치적 변화만 있어도 혁명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프랑스의 1830년 7월혁명, 1848년 2월혁명을 봐도 그렇다. 또 혁명이란 것을 너무 엄격하게 해석하는 쪽으로 꼭 규정해야 하는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난 4월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전후 맥락, 변화 같은 것을 볼 때 '이건 4월혁명이라고 불러도 좋겠다'고 본다. 단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4.19혁명과 4월혁명 가운데에는 4.19혁명보다 4월혁명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물론 4월 19일에 일어난 의분에 찬 굉장히 큰 시위, 그리고 학살이라고 할까, 100여 명이 피를 흘리고 젊은 사람들이 죽어간 그날이 갖는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중요한 건 사실이다. ('피의 화요일'로 불린 1960년 4월 19일 당일에만 123명이 사망했다. <편집자>) 그러나 2월 28일 경북 지방의 고등학생들 시위부터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날 때까지 전 과정을 얘기하는 말로 4.19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지 않느냐, 전체를 총괄한다는 의미에서도 4월혁명이라고 하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는 4월혁명이 던져준 역사적 과제, 4월혁명이 제2의 해방으로서 큰 의미를 갖는 역사적인 성격이 반드시 4월 19일과 4월 26일, 이 중요한 '피의 화요일'과 '승리의 화요일'에서 다 드러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승만을 하야시키고 자유당 정권을 붕괴시킨 건 아주 중요하지만, 우리가 4월혁명 정신이라고 부르는 또는 4월혁명의 의미를 살린 여러 가지 활동은 오히려 4월 26일 이후에 나타난다. 5.16쿠데타로 일단락된다고는 해도, 4월혁명 정신은 그 이후까지도 숨을 쉬면서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5.16쿠데타 정권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예컨대 혁명 입법이 만들어져 반민주 인사에 대해 여러 제한적 조치를 하려고 한다든가, 통일 운동과 노동 운동이 일어난다든가 하는 등의 중대한 사회적 변화는 4월 26일 이후에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 4월 26일부터 1961년 5월 16일 사이를 4월혁명기, 4월혁명 운동기, 4월혁명 시기, 이렇게 부르면서 4월혁명을 성숙하게 한다고 할까, 더 깊이 있게 가게 하는 시기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4.19혁명이라고 하면 이게 잘 들어맞지 않는 면이 있다. 4월 26일을 경계로 해서 그날까지는 이승만을 물러나게 하는 과정, 그 이후는 4월혁명 정신을 구체화하는 과정으로서 4월혁명 운동기 또는 4월혁명기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게 좋다. 그것까지 얘기할 때는 4월혁명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1960년 4월 19일, 대열을 정비해 스크럼을 짜고 경무대(오늘날 청와대)로 전진하는 시위대. ⓒ연합뉴스

민주주의의 고투의 한가운데에 5.18과 함께 4.19가 있었다

프레시안 : 독재 정권 시절, 4월혁명은 경계 대상이었다.

서중석 : 제3공화국 헌법에조차 4.19가 전문에 들어가 있었고 지금 헌법엔 아주 중요한 의미로 들어가 있지만, 이 4.19가 역사적으로 항상 대접받았느냐? 사실은 4.19 1주년만 대접을 아주 크게 받았고 그 이후에는 4.19 하면 불온한 분위기와 연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심지어 한동안은 4월 19일 그날은 대학 교정, (예컨대) 서울대 문리대 하면 그 교정의 문을 잠가 놔서 내 기억에 들어가지 못한 적도 있다. 이렇게 한쪽에서 4.19, 4.19 하면서 기념을 하기는 하는데, 그러면서도 4.19가 오히려 외면당하고 탄압과 감시를 받는 상황도 꽤 오랫동안 있었다.

그러다 1980년대에 가면 또 다른 현상이 일어났다. 1970년대까지는 기념을 할 수 있으면 대학들은 학술회의를 여는 정도로 끝냈다. 그런데 1980년대에 가면 그게 아니라, 중요한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1982~1983년 무렵부터 4.19 기념식 하는 곳에 학생들이나 민주화 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5.18이 다가오면 5.18을 전후한 시기를 '5월 항쟁기'로 선포하고 '4월혁명이 제대로 이루지 못한 민주주의 혁명을 이제는 제대로 이루자'(고 했다). 거기엔 민족 자주화 운동도 포함됐다.

그때는 4.19 날이 되면 먼저 정부 쪽에서 오전에 기념식을 했다. 국가 기념일이니까. 그러고 나서 그쪽과는 상당히 다른 성격과 의미를 부여하면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그때부터 한두 시간은 서울의 경우 (국립 4.19 민주 묘지가 있는) 수유리, 우이동 일대가 최루탄으로 자욱하게 돼버렸다. 정말 4.19 냄새가 난다고 할까, 4.19의 어려움이 배어 있다고 할까. 이러한 민주주의의 고투의 한가운데에 5.18과 함께 4.19가 있었다. (1987년) 6월항쟁까지 가는 데 4.19가 5.18과 함께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이걸 잊어서는 안 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서른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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