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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델에 푹 빠진 동아시아, 진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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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델에 푹 빠진 동아시아, 진짜 이유는?

[동아시아를 묻다] 정치와 덕치

정의와 공정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시큰둥했었다. 하버드 대학이라는 브랜드, 대형 출판사의 마케팅이 한 몫 했을 것이다. 유식자라면 이명박 시대의 도덕적 결핍을 드러낸 문화 현상이라고 그럴듯하게 말을 보탰을 수도 있다. 상투적이지만, 영판 틀렸다고 하기도 힘들다.

그런데 일국적 현상에 그치지 않았다. 솔깃해진 것은 도쿄에서 일본어로 번역된 <정의>를 마주치면서였다. 베스트셀러였고, 마이클 샌델의 책이 여럿 소개되어 있었다. 간단치 않구나 여긴 것은 베이징에서였다. 베이징 대학과 칭화 대학 등 중국의 두뇌들이 결집되어 있는 쭝꽌촌(中关村)의 서점에서도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살피니 대만(타이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차이라면 양안을 비롯한 화어(華語)권에서는 <공정>으로 번역되었다는 점 정도였다. 베트남은 또 조금 다르다. <공리>라고 소개되었다. Justice를 공리(公理)로 옮긴 것이다. 정의와 공정과 공리. 말은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뜻은 통한다. 동아시아를 횡단하는 문화 현상이었다.

출판사들 간의 상호 참조의 연쇄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웃 나라의 신간들과 베스트셀러를 살피는 것은 습관적인 직업병이기도 하다. 하지만 출판과 판매는 엄연히 별개의 영역이다. 공히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적 현상으로 자리매김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에 유독 정의와 공정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럴듯한 진단이다. 조금 더 곱씹어볼 수도 있다. 동아시아인들이 유난히 정의와 공정에 대한 감수성이 높다고 말이다.

돌아보면 미묘한 시점이었다. 민주화에 대한 피로도가 깊어가던 무렵이었다. 특히 2012년은 각별한 해로 기억해 둘만하다. 동아시아에서 민주와 진보를 당명으로 삼고 있는 모든 정당들이 선거에서 패배한 해였다. 일본의 민주당은 정권 교체 3년 만에 허망하게 권좌에서 물러났다. 한국의 민주당과 대만의 민진(민주진보)당도 정권을 탈환하지 못했다. '민주'와 '진보'라는 기호 자체가 동아시아를 가로질러 쇠퇴하는 형국이었다. '87년 체제'가 흔들리고 있었다. 한 시대의 역량을 모두 소진해 버리고 퇴행하는 듯 보였다.

바로 그 무렵에 정의와 공정이라는 열쇳말이 보편적인 호소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명박 시대로만 결부 짓는 것은 국지적일뿐더러 얕은 독법이라는 생각이 일었다. 자세를 고쳐 잡고 샌델을 정독하기 시작한 것은 2013년이었다. 뒤늦은 독후감이자,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앓고 있는 동아시아의 작금에 대한 참견이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 ⓒ김영사
잠시 미국 정치철학사부터 우회할 필요가 있겠다. 샌델의 <정의>가 자리하고 있는 맥락을 정확히 해두기 위해서이다. 그 편이 <정의>와 동아시아의 조우를 이해하는데도 한결 유익할 것이다.

샌델의 <정의>는 존 롤스의 <정의론>를 겨냥한 책이다. 1971년 출간된 <정의론>은 정치적 자유주의의 정전의 반열에 올랐다. 복지 국가를 떠받치는 분배적 정의를 이론적으로 집대성한 역작이다. 그 후 현대 영미권의 정치철학 및 법철학은 롤스의 자장 아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른쪽에서 롤스를 비판한 기수로는 로버트 노직을 꼽을 수 있다. 대표작 <아나키, 국가, 유토피아>는 1974년에 출간되었다. 잘라 말하면 시장을 강조하며 최소 국가를 지향했다. 민영화를 옹호하고 무정부 자본주의를 추구했다. 가장 날카롭게 반응한 이는 영화감독 폴 보허벤이었다. 영화 <로보캅>(1987년)은 경찰 기능을 시장에 떠넘긴 미래 사회를 묘사했다.

우리는 그 미래 사회를 직접 목도할 수 있었다. 이라크 전쟁은 군대의 역할 중 일부를 민영화한 새로운 전쟁이었다. 즉,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정치적으로 승리하는 과정은 노직의 시장주의가 롤스의 복지 국가적 자유주의를 사상적으로 대체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작은 국가', '규제 완화', '세계화' 등이 익숙한 구호가 되었다. 근래 일각에서 제기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란 롤스로의 복귀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반대편에서 롤스를 비판하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마이클 샌델이다.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를 통해 이론적이고 내재적으로 롤스를 비판했다면, 1996년에 출간한 <민주주의와 그 불만>을 통해서는 (신)공화주의를 천명했다. 역시나 문제는 '국가'에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롤스의 국가관을 비판했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국가의 중립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진(眞)과 선(善)을 분리한다.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만인이 지켜야할 최소한의 규정만을 담당한다. 좋은 삶은 각자의 판단과 선택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즉, 국가는 특정한 선(善)을 억압하지도 않지만, 딱히 장려하지도 않는다. 가치의 다원화, 다문화주의의 토대이다.

샌델이 딴지를 걸고, <정의>가 되묻고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미국 사회에 만연한 도덕적, 문화적 후퇴의 책임을 자유주의적 국가관, 중립적 국가관에서 찾는 것이다. 그는 공화주의의 기치 아래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 공유하는 공통선(common good)을 강조한다. 바람직한 삶의 구상을 권장할 수 있어야 하고, 구성원들의 공감과 공유를 얻어 내어야 한다.

공통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시민적 덕성'(civic virtue)도 필요하다. 그 덕성의 함양 또한 개개인에게 맡겨둬서는 아니 된다. 국가가 적극 배양하고 고취해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의 질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즉, 덕의 육성은 국가의 책무 중 하나이다. 적극적으로 교화와 덕화에 매진해야 한다. 물질적 복리를 담당하는 복지 국가에 그쳐서는 모자라는 것이다. 그래서는 북유럽형 '차가운 사회'에 머물고 만다. 참살이(well-being)까지 규율하는 도덕 국가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자그만치 미국 하버드 대학 교수의 일갈이다. 헌데 동방인의 귀에는 좀체 설지가 않다.

애당초 자유주의란 '덕'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쪽에 가깝다. 모름지기 만인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다. 그래서 누구의 판단도 동등하며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나와 너는 다를 뿐임을 쿨하게 용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탓에 대화도 이해도 공감도 필요가 없게 된다. 갈등과 분쟁은 법정에서 해결하고, 정치적 결정은 다수결의 합리성에 맡기는 것이다.

법치와 선거(=인구 정치)의 결합이다. 그래서 미국의 정치 사회는 세계관도 가치관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제각기 따로 살아가는 '두 개의 미국'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This is not your business." 자유주의의 불문율이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거리는 갈수록 아득하다. 한 지붕, 두 가족이 된 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샌델이 주창하는 신공화주의 또한 난처가 없지 않다. 다양성을 표방하는 자유주의가 공통의 가치관의 결여로 공동체 유지에 난맥상을 노출하고 있다면, 진과 선의 일치를 주장하는 공화주의는 구성원 전체에 극도로 높은 덕성을 구비하라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안고 있다.

기실 '시민적 덕성'이라는 개념부터가 지극히 모호하다. 어떠한 지향도 품어낼 수 있다. 그래서 실천적으로는 매우 무기력한 개념이 되기 쉽다. 그리고 그 실천적 난망함은 모든 구성원들이 유덕자가 되어야 한다는 여전한 자유주의적 신념의 지속 탓인지도 모른다. 즉 공화주의를 주창하는 샌델이 안고 있는 난점조차도 기실 자유주의와 그리 멀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지극한 이상주의, 지대한 낭만주의를 간직하고 있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안성맞춤은 아니다.

과연 모든 시민들이 유덕자가 될 수 있는가? 아니라고 했다. 동방의 경세가들의 결론이었다. 하루 이틀 숙고한 것도 아니다. 모두가 유덕자가 될 수 없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정치 유학의 출발이었다. 그렇다면 최소한으로 혹은 최대한으로 통치자들만이라도 덕의 구비를 요청해야 했다. 제한을 둔만큼이나 더욱 더 엄격하고 치열하게 말이다. 그래서 나고 자랄 때부터 훈육을 시킨 것이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말로는 충분치 않았다. 제도적 거름 장치도 마련했다. 누구나 정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할 수는 없도록 했다. 대신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역동성의 경로만은 활짝 열어 두고자 했다. 중앙의 과거제만으로는 부족했다. 지방과 민간의 서원과 서당을 허브로 삼은 향촌 사회 건설을 통해 '사회 투자 국가'를 구현코자 했다.

'첫째도 교육, 둘째도 교육, 셋째도 교육'이라 했던 토니 블레어의 발화는 신유학 국가의 오래된 메아리처럼 들린다. 고로 신유학이 표방했던 덕치란 공자 왈, 맹자 왈, 공소한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강박에 얽매이기보다는, 불가피한 현실의 수긍에서부터 출발하는 지극한 리얼리즘, 지독한 현실론이었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와 공화주의가 봉착한 서구 정치이론의 난맥상을 풀어줄 뜻밖의 단서를 통치자와 피치자의 분리를 노정했던 정치유학에서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도래해야만 하는 '이상주의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도래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주의적 민주주의'로서 말이다.

불가능한 것을 꿈꾸되, 리얼리스트가 되자. 도학(道學)과 실학(實學) 사이에서 동방의 사(士)는 고투를 거듭했다. 따라서 뜻밖이 아닐 수도 있겠다. 본디 세속을 다스리는 경세학의 역사는 동방이 훨씬 오래 축적해 왔다. 20세기의 민주주의가 도리어 '발전도상국형'에 그쳤을 수도 있는 것이다.

새 정치와 옛 정치

진선의 분리를 문제 삼는 샌델의 발상부터가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유학 정치의 평범한 상식에 그친다. 정치(政)는 올바름(正)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학은 잠재적, 현재적 주권자의 덕에 관한 배움이었다. 과거 시험 또한 덕성 함양 프로젝트에 다름 아니었다. 항산(恒産)이 없이도 항심(恒心)을 지속할 수 있는 '비합리적인' 사람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군자라 했다. 군주(君主)는 군자(君子)여야 했다. 군주를 모시는 관료도 군자여야 했다. 군자끼리의 관계는 리(利)가 아니라 의(義)로 맺어진다. 계급과 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당(party)과는 다르다. 공화주의에 대한 매우 정치한 논의를 장대한 체계 아래 온축해온 것이다. 동아시아의 독서 대중이 유독 샌델에 호응했던 것이 우연만은 아니지 싶다. 굉장한 친화성이 있던 것이다.

기실 천부인권설은 왕권신수설과 크게 다르지가 않다. 왕권도 인권도 신과 하늘이 부여해준 선험적 권리라는 것이다. 신분제적 발상의 지속이자, 근거가 불투명한 정치적 가설일 뿐이다. 그래서 교화와 덕화라는 주권자 만들기 과업을 방기하고 말았다. 선천에 몰두하면서, 후천을 소홀히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일정 나이만 지나면 아무나, 누구나 주권을 행사하는 대중 민주주의 시대가 개막했다. 20세기는 소인(小人, Homo Economicus)의 대중 독재가 좌우를 막론하고 빈발했던 세기로 기록될는지 모른다. 그에 비하면 누구나 천성은 타고나되, 이를 갈고 닦아 덕을 배양해야만 인성이 천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유학적 수양론이 훨씬 더 인간적 현실에 부합하는 측면이 크다.

그럼에도 일방으로 편을 들지는 않겠다. 지난 100년의 민주주의 실험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동방형 민주의 단점을 간과하지도 않는다. 의회 정치에 기반을 둔 1인 1표제에 견주어, 덕치주의적 민주화가 품은 필연적 위험성도 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정치적 입장이나 경제적 합리성을 축으로 삼는 논의에 비하면, 도덕적 논의는 타당한 해답은 하나뿐이라는 독점적 발상과 결부되기 쉽다. 복수의 당파의 분립을 승인하지 않고, 다원성을 허용하지 않는 경향이 기질적으로 강하다. 동방형 민주가 다당제보다는 일군만민(一君萬民)형으로 귀결되고, 20세기에는 일당만민(一黨萬民)체제로 계승된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중간 세력을 일소하는 반면으로, 하부의 '인민 민주'와 상부의 '민주 집중'이 공존하는 형태로 귀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민 민주와 민주 집중 간의 긴장 구도는 양명학과 주자학의 사상적 갈등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지속하는 것은 유교적 현실주의라고 하겠다.

인민은 평등하다. 누구나 당원이 될 수 있다. 다만 아무나 되지는 못한다. '숙의 민주(Deliberative democracy)'도 오로지 성적과 성품으로 선발된 당원들에서만 관철된다. 애당초 '참여 민주'에 대한 환상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덕치는 드높은 이상주의가 아니다. 차라리 투철한 리얼리즘이다. 탓에 대중적 열정을 소구하기 못한다. 엘리트주의의 혐의를 떨쳐내기 힘든 것이다.

인민 민주가 만사형통이 아니듯, 민주 집중 또한 만병통치는 아니다. 20세기의 실험이었던 민주주의를 고수하되, 어떻게 도덕적이며 유능한 엘리트 통치 또한 확보할 것인가를 함께 숙고해야 한다. 헌데 이 또한 전혀 새로운 화두가 아니다. 명말청초를 살아간 황종희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 <명이대방록>을 저술하여, '학자 관료 의회'를 궁리하기도 했다.

지금 살피노라면 로마 공화정의 원로원에 근접해 보이기도 하고, 19세기 미국의 상원과 유사해 보이기도 한다. 유난스럽거나 새삼스러운 발상이 아니다. 동과 서가, 고와 금이 더 좋은 정치를 향한 탐구 속에서 서로 통하는 지점이 있다. 좌우합작 만큼이나, 고금합작이 긴요하다.

이미 새 기운은 지펴지고 있다. 대륙과 대만, 홍콩 등에서 유학과 민주의 창조적 결합을 모색하는 시도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예감컨대 '민주'를 깃발로 내세웠던 5·4 운동(1919년) 100년을 전후하여 무성한 숲을 이루어갈 것이다. 정치의 기축을 뒤흔드는 도저한 물결이 될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한국의 지식 사회는 이러한 동향에 둔감한 듯 보인다. 여전히 고/금보다는 좌/우를 잣대로 삼은 편향과 편식이 심하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동방 민주'의 현재를 소개하고 논평도 곁들여 볼 작정이다. 실체를 알 길 없는 새 정치의 고삐를 다잡는 데도 옛 정치의 반추가 일정하게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 아래 새 것은 없으며, 우리가 이고 사는 하늘은 변함없이 동방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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