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반도 위기가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러시아 사회과학원의 한반도 프로그램 소장을 맡고 있는 그레고리 톨로라야(Georgy Toloraya)가 던진 질문이다. 톨로라야는 평양과 서울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전문 외교관 출신으로 러시아의 대표적인 동북아 전문가이다.
그는 최근 <38노스>에 기고한 글(☞바로보기)을 통해 우크라이나 위기가 한반도 문제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병합되면 서방 국가들은 대러 봉쇄 정책을 강화할 것이 분명하고, 러시아는 ‘동진 정책’을 통해 이를 상쇄하려고 할 것이라는 점은 대전제에 해당된다. 이렇듯 유라시아 대륙에서 지정학적 경쟁이 격화되면 동북아 지정학의 핵심인 한반도에 미칠 영향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진단이다.
‘미니 6자회담’의 무산, 그리고 이후
톨로라야 소장은 이미 그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4월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동북아협력대화(NEACD)가 미국의 불참 통보로 이미 무산되었다는 것이다. 동북아협력대화는 6자회담 참가국의 관료와 전문가가 참여하는 ‘트랙 1.5’ 회의체로 ‘미니 6자회담’으로도 불린다. 6자회담은 2008년 12월 결렬 이후 산소마스크를 낀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동북아협력대화마저 무산되면서 6자회담의 동력은 더욱 위축될 공산이 커지게 된 것이다.
톨로라야는 이게 시작에 불과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우선 “한반도 문제는 정상회담을 포함한 미·러 대화의 10대 의제 가운데 하나”였는데, 당분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는 것이다. 또한 미·러 관계가 악화되면서 러시아가 북한 문제와 관련해 중국 쪽으로 기울 가능성도 높아졌다고 진단한다. 러시아는 최근 몇 년 동안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와 관련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응에서 대북 규탄 및 제재에 적극 동참해왔다. 러시아의 이러한 태도는 중국이 유엔 안보리 대북 결의안을 찬성하게 만드는데 중요한 배경이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싸고 미국과 러시아가 정면충돌하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중국 및 북한을 보다 많이 배려해야 할 지정학적 사유가 커졌다는 것이 톨로라야의 분석이다. 아울러 그는 미·러 관계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북한 체제에 대한 전문성을 갖고 있는 러시아가 미국의 대북정책에 유용한 정보와 조언을 제공했던 협력관계도 어렵게 될 소지가 커졌다고 본다.
그는 특히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미국의 태도에 불만은 품은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북한이 주장하는 “핵 억제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라고도 전망한다. 이전에도 북한의 위성 발사에 대해 유엔 안보리가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는 것은 과도한 대응이라는 비판이 있었던 만큼, “앞으로는 북한이 추가적인 로켓 발사를 하더라도 러시아 정부가 이전과 같은 분개를 표하는 데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러시아의 대북정책도 바뀔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진단한다. 대북 제재를 느슨하게 적용하고 나진-하산 프로젝트와 신규 투자 확대 등 경제협력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민수용 핵 이용과 군사 분야로까지 협력을 확대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로서는 안 그래도 초읽기에 들어간 북한의 실험용 경수로 가동이 걱정거리였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사태를 거치며 미국의 입장을 배려해야 할 동기가 위축되면서, 북한에 원전 운영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원전 수출 가능성을 타진하는 등 핵 협력에 나설 동기가 커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동맹국이 없는 것보다 북한이라도 있는 게 낫다”는 판단하에 러시아가 북한과의 제한적인 군사협력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톨로라야는 또한 우크라이나 사태를 거치면서 동북아가 “대륙 세력(중국-러시아-북한)과 해양 세력(미국-일본-한국) 사이의 대결로 회귀할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고 진단한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를 둘러싼 게임이 또 다시 다자간 ‘제로섬’ 게임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그는 아울러 “한러 간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도 당분간 희망적 사고에 머물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안 그래도 양국 관계는 소치 올림픽을 거치면서 냉랭해졌는데,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한국이 동맹국은 미국의 입장을 두둔하고 러시아의 사활적인 이해를 간과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교훈은?
톨로라야의 지적처럼 우크라이나 위기는 한반도와 동북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필자는 이미 북한 지도부가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핵 억제력”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우려한 바 있다.(☞관련 기사 보기) 또한 유럽에서 조성되고 있는 신냉전 분위기가 냉전 질서를 극복하지 못한 동북아에서 신냉전을 재촉할 우려도 키우고 있다.
미·러 관계의 균열은 6자회담을 둘러싼 한-미-일 대(對) 북-중-러 사이의 이견을 키울 수도 있다. 크림반도가 결국 러시아에 병합되면, 미국은 한국에도 대러 경제제재에 동참해달라고 요구하고 나설 공산도 크다. 이렇게 되면 박근혜 대통령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시동도 걸지 못한 상황에서 큰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이러한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통합의 동심원’을 만드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대통령이 직접 통일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로 한 만큼, 합리적인 보수와 진보를 아우를 수 있는 인적 구성을 통해 초당적 협력과 국민적 합의를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대북정책의 핵심은 북한 주민들의 민심을 얻는 데 두어야 한다는 점을 우크라이나 사태는 거듭 확인시켜준다. 크림반도 주민들이 러시아로의 병합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데에는 자신들이 우크라이나 2등 국민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6년째 통일을 국시처럼 말하고 있으면서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얻고자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사례이다.
결국 대박형 통일을 위해서는 종북 사냥의 유혹을 뿌리치고 남남통합에 힘써야 한다. 북한은 곧 무너질 것이라는 자해적 희망적 사고도 이제는 화해협력과 평화공존에 기반을 둔 남북통합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한-미-일이 뭉치면 북-중-러도 손을 잡게 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지정학적 현실을 직시하고 동북아 통합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3박자 통합’이 우리의 미래를 위해 얼마나 절실한지, 우크라이나 사태가 웅변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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