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진중권, 유시민, 박노자, 우석훈, 김규항, 김어준, 홍세화, 고종석. 우리는 모두 그들의 이름을 알고 있고, 그들이 쓴 책을 한 권이라도 읽었거나 혹은 여타 매체에 실린 그들의 칼럼을 접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격변의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 한복판에 그들이 있었다. 대중들은 그들의 격문에 귀 기울였고 반응했고 발언이 발언으로만 그치지 않게 이후 행동을 이어나가는 기폭제로 활약했다. 그런데 2008년 이후부터 상황은 조금씩 달라졌다. 그들의 발언은 조금씩 자기분열과 자기모순을 드러냈고, 단지 한국만의 것이 아닌 전세계적인 위기 앞에서 위축되어갔다. 그들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도 조금씩 시들해졌다.
2008년 무렵부터 '20대 논객'으로 활동했던 노정태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는 자신의 10대 시절과 20대 시절 세계관을 수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던 위의 논객들의 선택과 결과를 되짚어보며, 그들을 통해 우리의 아주 가까운 과거를 소환하고 곧 닥쳐올 미래를 건너다보기로 결심했다. 노정태가 냉정한 시선과 애틋한 심정으로 써내려간 비판적 성찰의 결과물이 <논객시대>(노정태 지음, 반비 펴냄)다. 2013년 봄부터 '프레시안 books'에 연재했던 원고를 수정하고 재배치함으로써, 단행본이라는 형식 내에서 비로소 온전하게 조망되는 인문·사회 담론의 지형도는 단순히 '야사'거나 '회고담'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은 뜨겁고 흥미진진한 현재진행형의 아카이브다.
<논객시대> 저자 노정태는 3월 7일(금)에는 <아파트 게임><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저자이자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과, 3월 21일(금)에는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텍스트 펴냄) 저자이자 <미디어스> 기자 김민하와, 3월 28일(금) <88만원 세대>(레디앙 펴냄)·<모피아>(김영사 펴냄) 저자이자 경제학자 우석훈과 대담을 갖는다. 아래 글은 지난 3월 7일 저녁 동대문구 정보화 도서관에서 열렸던 <논객시대> 저자 노정태와 <아파트 게임>(휴머니스트 펴냄)·<콘크리트 유토피아>(자음과모음 펴냄)의 저자이자 디자인 연구자인 박해천의 대담 전문이다. <편집자>
(21일, 28일 대담에 참여하고 싶은 독자들은 이 게시판에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가기)
문학평론가 김윤식이 '논객' 사이에 등장한 이유
박해천 : 먼저 <논객시대>를 시작하게 된 배경부터 설명해 주시죠.
노정태 : 나 스스로 가장 가까운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했을까를 더듬어보면, 저만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논객시대>에서 다뤘던 분들의 글을 책이나 인터넷으로 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형성하고 업데이트했습니다. 어느 시점부터 그 시각이 유효하지 않다고 느꼈는데, 처음엔 군대를 다녀와서 그런가 싶었어요. 시간이 좀 지난 뒤에는, 그 전부터 달라지고 있던 상황을 모르고 있다가 세계와 단절된 '군대'라는 공간을 거친 뒤에 보이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의 원대한 꿈은 시간대별로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고 변했는지 죄다 정리하고 싶었지만 역량이 부족했습니다. 게다가 가까운 시대일수록 자료화가 안 되어있거든요. 이 시대를 어떻게 정리할까 궁리하다가 '신자유시대' 이런 제목도 생각했는데, 너무 대학교 새내기 같더라고요. (웃음) 실제로 책에서 다루는 분들이 근 15년 동안 한국 사회 속 수많은 위치에서 발화하면서 각자의 좌표를 설정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논객시대'라는 제목이 말이 되겠다, 나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의미 있겠다 싶어졌어요. 그래서 방향을 잡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박해천 : 처음 '프레시안 books'에 연재될 무렵에는 이 기획이 어느 정도 진화된 강준만식 글쓰기가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았어요. 개인별로 자료를 수집하고 나름대로의 서사를 만드는, 노정태 씨 표현을 빌자면 '서사적 논픽션'인데, 이런 방식 자체가 강준만식 글쓰기의 업그레이드 버전 같았거든요.
노정태 씨를 개인적으로도 알고 있으니까, 좀 위험한 방식일 수 있다고 우려했어요. 하지만 막상 책으로 나온 <논객시대>를 구입해서 읽어보면서 제 예상이 틀렸구나 하는 판단을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근본적 계기는 맨 앞에 실린 '책을 펴내며'라는 글과 그 다음 이어지는 서문을 읽으면서였어요. <논객시대>가 본인한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쓰다가 갑자기 김윤식 선생이 등장하죠. 김윤식 선생에게 일본이라는 나라, 이광수라는 작가가 어떤 의미였는지, 김윤식 선생이 작가 이광수를 통해 자신의 시대를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분석하는 두 권의 책 <이광수와 그의 시대>(김윤식 지음, 솔 펴냄), <내가 읽고 만난 일본>(김윤식 펴냄, 그린비 펴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시차가 있긴 하지만, <논객시대>가 던지고 있는 질문들, 그러니까 2014년 30대 초반의 노정태 씨가 본인이 20대를 어떻게 보냈고 20대의 자신에게 영향을 줬던 필자들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문제의 후경으로 김윤식과 이광수가 어른거리고 있습니다. 근대성이라는 문제, 글쓰기와 매체라는 문제, 한국 사회에서 근대적 주체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김윤식 선생의 분석 서사를 굉장히 기술적으로 뛰어나게 도둑질(?)한 거죠. (웃음)
이광수 작가와 김윤식 선생에게 책과 글쓰기가 의미했던 바는 무엇인지, 근대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근대화를 성취하거나 극복하기 위해 어떤 사람이 있어야 하는지, 그 사람들을 계몽을 통해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문제들이 중요했던 거였잖아요. 그 맥락이 <논객시대> 안으로 들어오면서 어떤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어느 시점에선 근대를 달성했다고 생각했었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한국사회가 이전과 결정적으로 달라졌죠. 그러면서 그전까지 한국의 주류 매체였던 책의 시대가 조금씩 저물고 영상문화의 시대로 넘어왔고, 근본적으로 <논객시대> 진중권 편에도 나오지만 디지털 문화로 넘어가는 변화를 겪습니다. 김윤식 선생이 이광수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가, <논객시대>에 이르러 21세기 한국에선 어떤 방식으로 반복되고 굴절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논의됩니다.
제 느낌으로는 <논객시대>에 등장하는 아홉 분의 논객들이 노정태식 방식으로 극복되는 것 같은 효과가 발생했고, '논객시대'라는 제목이 감당하기 힘든 논의까지 담고 있지 않았나 싶기도 했어요. 김윤식이라는 평론가를 맨 앞에 이야기함으로써, 의미의 맥락들이 정치적 차원에 갇히지 않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입체적으로 확장될 수 있었던 기폭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뒤 '논객시대' 연재를 시작하게 됐을 때, 논객들의 시대에 대한 글이다 보니 당연히 강준만 선생님부터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서론을 먼저 쓰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김윤식 선생 얘기를 썼어요. 아까 말씀하신 대로, 김윤식과 이광수부터 시작해야 강준만 선생에서 시작되는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의 문제적 주체를 발굴하려는 시도와 실패의 역사의 닮은꼴을 어렴풋하게 보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논객의 시작, 강준만
박해천 : <논객시대>는 1장 '강준만 : 태초에 강준만이 있었다'로 시작합니다. 38페이지를 보면 "실명비판은 어쨌든 비판하는 자와 비판받는 자, 즉 '주체'와 '객체'를 개인 단위에서 명료하게 드러냈다. 주체와 객체로 이루어진,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근대 세계의 문이 열린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죠.
'민족'이나 '계급'에 의지해야만 했던 이전의 '모더니티'와 전혀 다른 의미로, 말 그래도 개인 단위로 호명되는 근대의 문이 열렸다고 표현하는 대목이, '조직시대'나 '정당시대'가 아닌 '논객시대'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가장 잘 드러낸 대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강준만 선생이 제일 앞에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강준만 선생은 논객이라는 타이틀을 만들어낸 토대를 닦은 분인데, 정작 본인은 논객이라기보다는 매체 운동가 같은 존재잖아요? 예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저널룩(Journalook : journal + book)'을 만들었죠.
노정태 : 워낙 글을 빨리 쓰시니까, 책을 빨리 내면 잡지와 똑같이 움직일 수 있다는 발상을 할 수 있었죠. 분기별로 책이 한 권씩 나오면 계간지잖아요.
강준만 선생이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공로를 말하자면, 정말 그거죠. "나는 너에게 반대한다"라고 공개적으로 발화하는 것. 논객이라는 단어로 쓰는 사람은 그 전에도 많았죠. 논객의 사전적 의미라면 정치라든가 공적인 여론에 대해 신문지상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강준만 이전과 이후의 논객이 다르고, 강준만 이후 그의 정신적 세례를 받은 사람들한테는 이전과 이후의 논객이 전혀 다르게 다가와요. 왜 다를까? 그때의 논객들은 무엇이었는가? 생각해보면,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라든가 '국민이 우려한다'라는 말 뒤에 숨지 않고 '내 생각은 이러하다, 내가 볼 때 너의 의견은 옳지 않다'고 확실하게 호명하는 게 달랐죠.
강준만 선생은 그에 분연히 떨쳐 일어나 '스승의 등에 칼을 꽂은 청부업자'라고 이한우 기자를 비난했고, 이한우 기자는 명예훼손소송을 겁니다. 홍세화 선생은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분노하여 "<조선일보> 기자가 최장집 교수를 빨갱이로 몰기 위해 '스승의 등에 칼을 꽂은 청부살인업자'가 되어 '마조히즘적인 정신분열증상'을 보이며 사상검증을 했던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나를 고소하라!"고 외칩니다. 그러면서 '안티조선' 운동이 시작됐고요.
중요한 건, 강준만 선생이 '내가 너를 욕한다'라는 주체와 객체와 행위 세 가지 요소가 모두 들어간 언어를 만들었고,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어하던 이들에게 공간을 제공했고, 본인의 왕성한 생산력으로 매체를 띄워 거기서 이야기를 끊임없이 끌어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 진중권 선생과 고종석 선생이 등장하죠.
박해천 : 사실 고종석 선생은 그전까지는 정치에 대해 별로 그다지 직접적으로 말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노정태 : 누군가가 앞장서서 싸우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비슷한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이들이 연달아 등장했죠. 그때나 지금이나 논객들은 소수자였고, '강준만식 글쓰기'가 천박하다 내지는 상스럽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어요.
박해천 : <논객시대>의 목차 순서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는 나름대로 납득을 했지만, 좀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우석훈 선생과 홍세화 선생의 위치였어요. 우석훈 선생은 좀 더 뒤로, 홍세화 선생이 좀 더 앞으로 배치되었어야 하지 않았나 싶었거든요.
노정태 : '프레시안 books'에 연재할 때의 순서와 책의 목차가 딱 맞진 않지요. 연재 당시에는 서문 다음으로 김어준 총수 원고가 가장 먼저 실렸고, 책에서는 강준만 선생입니다.
우석훈이라는 논객은 다른 분들과 맥락이 많이 달라요. 한국 사회가 정치논객이 아니라 경제논객을 원하는 시점에 그걸 충족시켜줄 수 있는 왕성한 생산력을 갖춘 거의 유일한 진보진영 필자였기 때문에 급부상한 분입니다. 책에 실린 순서는 강준만, 진중권, 유시민, 박노자 다음에 우석훈인데요, 박노자 선생 같은 경우는 가장 근본적이고 극단적인 입장을 고수했고, 유시민 전 장관은 참여정부의 맥락을 그대로 따라갔다가 자유인이 되셨죠. 그 다음에 우석훈 선생이 등장하는게 맞다 싶었어요.
반면 홍세화 선생은…구 진보신당 당원들은 모두 홍세화 선생에게 언제나 부채감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홍세화 선생이 평소에는 그토록 신실하게 진보신당 운동을 하시다가 특정 국면에서 '어떻게 하면 한나라당의 영향력을 줄일 것인가'라는 발언을 한 순간의 괴리감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한국 진보정당이 가지는 근본적인 딜레마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만약 제가 군대에 있던 2010년 가을부터 2012년 여름 무렵에 <논객시대>를 썼다면 내용이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제대한 뒤 2012년 대선을 치렀고, 그 다음 이 책을 썼죠. 진보정치가 거의 '압살'된 상황에서 '그렇지 않다'고 쓴다면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일 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홍세화 선생에 관한 원고를, 적어도 <논객시대>에서 '우리'라고 호명하는 독자들의 입장에서 볼 땐 '지금 현재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위치상 뒤로 많이 빠졌지요.
1997년 '이후', 386, 안티조선
박해천 : 군대에 다녀온 공백기가 본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인식론적 단절을 가져온 걸까요. 예전과 다른 위치에서, '1997년 이후의 세계를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됐다'고 했는데, 그 단절이라 할 만한 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노정태 : 모든 남자는 군대를 갔다 오면 인식론적 단절이 생기지 않습니까. (웃음) 제가 카투사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금 편하게 지냈지만, 이런 건 있었어요. 얘기하자면 조금 긴데, 먼저 IMF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전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철이 들 나이가 아니니까 세상의 규칙이 바뀌었다는 걸 몰랐죠. 어릴 때 배웠던 대로 열심히 일하면 먹고는 산다, 그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어요.
박해천 : 90년대적 세계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군요. (웃음)
노정태 : 90년대식 풍요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죠. (웃음) IMF 외환위기를 1, 2년 뒤에 극복했다고 생각했어요. 신용카드가 좍 뿌려지면서 내수가 진작됐고, 많은 사람들이 신용불량자가 됐지만 어쨌든 한국 사회가 털고 일어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정치가 뜨거웠잖아요.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그렇게 정권 교체를 한번 하니까 논객의 시대가 열린 거죠. 정치를 소비할 수 있구나, 정치가 뭔가를 바꾼다라는 생각, 그전까지는 정치적 소수자들에게는 '어차피 안 될거야'라는 긴 절망의 시대가 있었는데 IMF와 이인제 탈당이 겹치면서 정권 교체가 실제로 벌어졌어요.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에 따라 IT 붐이 시작됐죠. 당시 김어준 총수는 개인 사업이 망한 다음 혼자 뚝딱뚝딱 <딴지일보>를 만들었고, 당시 포털이었던 야후에서 카테고리 클릭 몇 번이면 드러나는 좋은 분류 위치를 얻어요. 어떻게 가능했냐면 김어준 총수가 이메일을 보내서 '내 걸 걸어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일동 웃음) <딴지일보>가 그 후 2001년 문래동의 창고를 빌려 사무실을 열었어요. 전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온라인 기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역시 이메일을 보냈죠. 뽑혔습니다. 신나는 시절이었지요. IT 버블이었고, 사상과 담론의 자유시장이 열렸고,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은 얼마든지 떠들 수 있는 기회의 창이 열렸죠. 그러다가, 2008년 11월에 세상이 바뀌었어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돈이 말랐죠. 심지어 미국의 돈이.
박해천 : IMF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던 한국인들이 그때 비로소 바뀌었다는 건가요.
노정태 : 조금 더 넓은 차원에서 그걸 실감했어요. 대학교 동창 중 카투사를 다녀온 친구들이, 제가 입대하기 전에 "미군이랑 같이 있으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었어요. 막상 입대해보니까, 미군들이 거의 놀지를 못했어요. 자기 월급을 본국에 송금해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바빴거든요. 서울에 올라와서 노는 미군들도 전해 듣던 것처럼 기세등등하지 못했고요. 보니까 대도시 처음 와보는 촌놈들 투성이고. 모든 한국인이 '풍요와 방탕의 상징'으로 생각하던 미군이 사라진 거예요. 그러면서 저 역시 현재를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생겼고요.
박해천 : 안티조선 운동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의 진보 진영이라든가 새로운 매체 상황에 비춰봤을 때 안티조선이라는 운동이 타당했는가, 정치 과잉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정치 개혁을 향한 어떤 에너지들이 있는데 그게 투사되는 지점이 <조선일보>였고, 최장집-강준만-이한우의 관계를 통해 <조선일보>가 굉장히 적대적인 타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자리 잡게 돼요. 그러면서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에 관한 계보가 만들어져요. 그런 일련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계몽적 수준에서 필요한 일이었지만 또 동시에 지나친 단순화는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 때가 있어요.
하지만 <조선일보>를 친일파의 계보에 두고 역사의 악으로 만든 건 안티조선만이 아니에요. 친일파,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조선일보>의 계보 속에서 이런 악의 100년과 우리의 선한 100년이 싸우고 있다는 전쟁적 세계관은 운동권적 세계관이고, 강준만 이전과 이후 모두에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박해천 : 그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386세대가 자기 서사 속에서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60~70년대는 인문의 시대였죠. 이어령, 김현, 백낙청, 김윤식 등의 문학 평론가들이 세계의 모든 것을 다 읽어낼 수 있는 특권적 주체의 지위를 확보하려 시도했다고 하지요. 나름의 인정 투쟁을 통해 소위 '인문의 시대'를 열었다고 이야기되는 20년대 생부터 40년대 생까지의 계보 같은 것이 존재하지요. 그리고 1980년대 내내 수면 아래 잠복해 있던 386세대가 87년 민주화 이후 본격적으로 담론의 시장에 진입하면서 '80년대는 사회과학의 시대였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어요. '80년 광주'라는 외상적 체험을 발화점으로 삼아, 선배 세대들의 실패와 무기력을 비판하면서, 마르크스 레닌주의라든가 주체사상을 통해 전두환 시대의 한국 사회를 '과학적'으로 조망하고 정세 파악을 통해 민주화(?)를 향한 '혁명적 계기'를 발견하고자 했다는 서사가 그것이지요.
하지만 87년 민주화투쟁과 88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사회주의 국가들이 빠르게 몰락하면서 별안간 사회과학 시대가 문을 닫았습니다. 당시 386 중 일부가 프랑스 철학 담론이나 미국화된 유럽의 문화담론을 한국 사회에 끌어들였죠. 그러면서 90년대가 소위 문화의 시대로 떠오릅니다. 그 과정에서 학생운동은 위축되기 시작했고, 특히 1996년의 연세대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급속히 쇠퇴했습니다.
<논객시대>의 서사를 빌자면 90년대 어떤 측면에서 좌절됐던 특정 세대의 정치적 에너지가 1997년 IMF 외환위기와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 안티조선 운동을 발화점으로 하여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폭발했고, 그게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으로까지 연결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봤어요.
전 '67년 체제'라는 관점을 갖고 있는데, 즉 1967년부터 1997년까지 30년 동안 한국 사회가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사회'로 유지되는 데 있어서 밑바탕이 된 근본적인 이데올로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장제일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반공주의'입니다. 1987년 이후 도입된 형식적 민주주의 체계 내부에서 반공주의가 약간 완화된 형태로 변환되긴 했지만, 그 체제 안에서 80년대의 '사회과학도들' 중 상당수는 <논객시대> 속 논객들만큼이나 90년대에 만족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특히나 내가 정치적 대리인으로 삼고자 했던, 그러니까 지지했던 이들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계속 떨어지는 걸 지켜볼 때의 좌절감이 무척 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70년대 생인 저 같은 경우, 제가 20대를 보낸 90년대가 '문화의 시대'이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웃음) <논객시대>의 논객들에게는 그 시대가 뭔가 과도기, 시스템을 다시 리부트해야 하는 상황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그런 인식이 90년대 후반에 '안티조선'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사건을 촉매제로 삼아서, 외부로 폭발적으로 확산된 게 아닐까요. 80년대 말 90년대 초였다면 조직운동하고 있었을 사람들이, 조직이 와해된 다음 갈 곳을 잃었고 IMF 외환위기 이후의 체제에 이르러 인터넷을 배회하다가 논객의 위치를 택한 건 아닐까 싶은 거죠. 그러니까 지금의 상황은 일반 대중이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계몽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악을 악으로 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노정태 : 고전적 안티조선식 표현이네요. (웃음)
박해천 :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면요.
노정태 : 상대방이 '나의 뜻을 실현하지 못하게 하는 악당'이 아니라 '나와 같은 권리로 한 표를 행사하는, 그러나 어떤 이유로 나와 다른 정당을 뽑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 만큼 냉정하고 근대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그게 잘 안 됩니다. 사실 운동을 한다는 건 사회 내 소수자적 역할을 자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를 뺀 거의 모든 사람, 특히 바깥 사람들은 다 적으로 규정되지요. 386들의 한국 노동운동서사를 보면, 자신들이 대학에 입학하기 전엔 노동운동이란 게 존재하지도 않아요. 80년대 학출들이 노동운동을 조직해서 87, 88, 89 항쟁이 터졌다고 하는 게 당시 학번들의 정사(正史)죠. 그게 아니라 60~70년대에도 노동운동이 있었다고 하면 수정주의적 역사관이고.
박해천 : 그런 관점이 아주 잘못된 건 아니죠. 한국 사회가 본격적인 중공업을 육성해서 대규모 사업장들이 가동하게 되고, 그 사업장 내에서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이 발화되는 시점이 70년대 후반부터이긴 하잖아요. 그런 조건이 전두환 정권의 폭압 정치와 맞물리면서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더 강력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고요.
몇 달 뒤 유시민 전 장관이 비슷한 책을 냅니다.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개마고원 펴냄). 제목이 더 쉬워졌죠. <조선일보>는 악이고,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도 잘 다루고 숫자도 많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 책의 독자층으로 정확히 유시민 전 장관의 동세대를 겨냥합니다. 오리지널 386들은 서울경기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주된 직업은 IT 업종이다, 우린 지식 수준도 높고 숫자도 많다는 인구세대론적 분석을 해요. 결국 우리가 뭉치면 할 수 있다, 된다, 그런 결론으로 끝나죠. 세대적 자신감으로 뭉친 화끈한 선거용 책이었어요.
90년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박해천 : <논객시대>에서 또 하나 제가 흥미롭게 읽은 지점은 영상문화와 디지털 문화로의 전환에 관한 부분입니다. 진중권 선생에 관한 챕터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다'에 관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진중권 선생의 <호모 코레아니쿠스>(웅진지식하우스 펴냄)에 따르면, 8·15 해방 이전 한국 사회는 구술문화의 습속이 강했고, 1960~70년대의 인문학과 1980년대의 사회과학이 '문자문화'라는 근대성을 도입했지만, 그것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는 문제 의식이 등장하죠.
그러다가 1990년대에 영상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거기 심취한 '신세대'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주지하다시피, 고도성장의 결과인 신 중산층의 자녀 세대들로, 바로 이 시점에 대학에 입학한 1970년대 초반생들이었지요. 이들은 문화적으로 도시화된 감각으로 무장한 채 정치적으로는 리버럴할 태도를 선보이면서, '신세대'라는 호명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고 IMF 외환위기를 경험한 후, '전 국민의 인터넷 유저화'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면서, 그전까지 시각적 리터러시를 갖고 있지 못하고 문자 중심 사고를 하던 1950, 60년대생들이 ADSL이 깔린 전화선을 경유해 인터넷의 바다에 뛰어들게 됩니다. 제 생각에,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이 세대의 상당수들은 생애주기의 여러 가지 여건상 기본적으로 영상 매체에 친화적인 태도를 갖추기란 쉽지 않아요. 외부의 시각 정보를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문자 정보로 치환하기 위해, 비유하자면 언제나 '리터러시의 에뮬레이터'와 '진정성의 레이더'를 작동시키는 식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게 그분들의 시각적 리터러시의 특성 중 하나구요.
<논객시대>에서 노정태 씨는 유시민 전 장관에 대해 약간 놀리는 듯한 어조로, 그가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만 되풀이 언급한다는 걸 지적하죠. 김규항 선생 같은 경우 본인이 영화 관련 출판사까지 운영했으면서도 민족주의로 점철됐던 80년대 대중문화 속에서 본인이 60년대 영미권의 록음악을 듣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껴야만 했다는 글을 쓴 적이 있죠.
노정태 : 그래서 사람들은 연구 끝에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은 저항적 음악이니까 듣고 투쟁하자고 합의를 봤죠. (웃음)
박해천 : 그런 시대의 잔여가 이 책의 텍스트에 뒤섞여 들어가는 부분이 개인적으로 흥미로웠습니다. 한편, 진중권 선생에 대한 글 꼭지에서는 2005년 황우석 사태, 그리고 2007년 <디 워> 사태, 2008년 촛불시위가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주지하다시피 진중권 선생은 그 사건들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이제껏 아무도 누려보지 못했던 지식인-아이돌의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웃음) 그런데 2008년까지의 이 일련의 사태들은 역설적으로, 1997년 이후 진행되었던 논객 중심의 정치적 계몽주의 프로젝트, 그러니까 근대적 시민 만들기 프로젝트가 한계에 부딪히는 지점을 보여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노정태 : 아까 영화의 시대 얘기가 잠깐 나왔는데요, 그렇게 뜨겁게 지나간 다음 <디 워>를 본 관개들은 800만 명이 넘었습니다. 취향은 존중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디 워>는 CG 기술조차도 너무 조악하고 여러 모로 문제가 많았는데도, 영화에 대해 전문적으로 평하는 존재가 정말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황우석 사태는 가장 기본적인 사고, 즉 없는 건 없는 건데 없는 줄기세포가 있다고 하는 거짓말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국민의 적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죠. 논객들 각자가 생각하는 근대적 주체의 기획은 달랐을 텐데, 적어도 문화적 안목이 있고 생명에 대한 상식적 존중을 할 수 있는 그런 주체가 한국에서 성립할 수 없구나 라는 깨달음이 그때 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박해천 : 사실 개인적으로 황우석 사태는 매우 큰 충격이었습니다. 참여정부가 이전 정부와 다른 방식으로 정책적 차원에서 과학기술자를 우대한다는 걸 과시하기 위한 자리에 바로 황우석이라는 인물이 위치하고 있었죠. 그의 줄기세포 논문의 문제점이 처음 지적됐을 때, '교육'을 받은 한국인 상당수가 '과학적 실증'의 의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과학적 지식은 어떤 방법론을 통해 만들어져야 하고 어떻게 검증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오가는 과정 속에서, 그것이 지닌 사회적 의미를 제대로 직시하고 혈혈단신 그 전장 한복판에 뛰어든 논객은 진중권 선생뿐이었습니다. 반면 김어준 총수 같은 경우는 공공연한 황우석 팬이었지요.
저는 그 사건이 상식의 차원에서 한국 사회의 일반적 인식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386세대의 지식인 상당수가 자신들이 이전 세대과 다른 '사회과학의 세대'라고 했을 때의 그 '과학'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확실하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과학의 세대'라고 할 때, 방점은 '사회'가 아니라 '과학'에 찍혀 있었거든요. 마르크르주의, 사적 유물론이 바로 그 과학의 중추이었죠. '나는 역사에 대한 메타 이론을 알고 있고 그걸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발전'에 대한 인식론적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의 근간으로서 과학이기도 했지요. 그런데 바로 그런 사회 '과학'의 학습자들이 '황우석 사태'라는 초유의 사건에 직면했을 때, 너무 어설프고 초라하게 반응했어요. 그때 새삼스레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과학은 일종의 신학이었구나"라구요.
노정태 : 에코가 맑시즘에 대해 '토리노에서 기원한 묵시록적 종말론의 일부'라고 정의 내렸죠. 생산력의 발전은 과학적으로 증가하되, 우리가 주체적으로 발전을 더 이끌어내고 앞당겨야 한다는 주체적 행위의 논리가 결합되어 있는 거니까요.
박해천 :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논객시대>의 한 축이 정치적 이슈나 문화적 이슈들에 대해 이 논객들이 어떻게 대응했고 계몽의 전략을 구사했는지였다면, 그 배경음악으로 은은하게 깔리는 게 당시 경제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짚는다는 점입니다.
앞서 말했듯 67년 체제의 한 축이었던 반공주의가 기승을 부리다가 80년대 사회과학의 시대와 90년대 문화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약간 주춤했고, 1997년 이후 소위 한국 주류 언론이 적대 세력에게 '좌파'라는 표현을 붙이기 시작했어요. 사실 그 과정 속에서 반공주의에 대결하고자 했던, 반공주의를 완화시키거나 다른 식으로 재편하려고 했던 진영에서조차도 경제성장을 자연스러운 사회 발전의 일반 공리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경제성장은 당연한 것이고 그래서 그에 대해 논객인 '나'가 별로 할 말이 없는 거죠.
노정태 : 경제성장이야말로 사적 유물론이라는 과학의 근간이죠.
박해천 : 사적 유물론의 가장 중요한 지점 중 하나가 경제적 토대에 대한 과학적 분석인데, 20대 시절 좌파 지식을 습득했던 논객들 상당수는 사실상 경제에 대한 논의를 괄호로 묶어버린 게 아닌가, 사적 유물론의 표현을 빌리면 정치라는 상부 구조 안에서만 게임을 벌이는 상황들이 지속적으로 펼쳐지면서 적대의 악순환을 피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2008년 금융 위기 무렵이면, 이제 논객들이 제시하는 중요한 정치 쟁점에 대해 예전만큼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아고라 같은 곳에서 활동하는 '미네르바' 같은 무명의 경제 논객(?)들의 활동에 더 주목하게 됩니다. 바야흐로 새 밀레니엄의 첫 십 년을 장식한 정치 지향적인 '논객 시대'가 기울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예전엔 "내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대신 말해주는" 논객들을 지지했다면 이젠 차라리 트위터 등 SNS를 통해 내가 직접 발언해버리는 상황이 된 게 아닌가 싶은 거죠.
노정태 :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충격을 받으면 깨달음은 늦게 오지요. 예전까지 한국 사람들에게 경제 성장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경제는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이었고, 그러다가 IMF가 터진 다음에도 많은 이들이 그 의미를 몰랐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노력으로 경제 위기를 극복하자면서 금을 모았겠지요. 2000년대 초반 '부자 되세요!'의 유행이 찾아오고, 주식 펀드 가치가 막 상승하고 부동산 값이 치솟았습니다. 그러다가 2008년 금융 위기가 터진 뒤, 비로소 사람들은 한국의 정치를 바꾼다고 한국의 경제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여기서 정치 논객들은 할 말이 점점 더 없어지는 겁니다. 여러 가지 당위가 있지만 잘 먹고 잘 살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게 마련이고, 이건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경제는 하부구조가 아닌 겁니다. 한국 같은 주변국가에선 정치담론이 상부구조였지만, 이제 하부구조가 훨씬 더 빠르고 강하게 움직여요. 전 그래서 상부구조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고 한 논객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를 돌이켜보게 된 겁니다.
다시, 21세기의 '이광수와 그의 시대'
박해천 : 재-현재화된 현재, 본인의 입지에서 2000년대를 돌이켜 봤을 때, 그 논객들이 계몽하려 했던 대상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금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당시의 계몽의 의도가 충분히 성공했다고 보세요?
노정태 : 물론 아닙니다.
현재로 다시 돌아오면, 결과론적인 관점일 수도 있겠지만, 나름대로 계몽의 프로젝트를 통해 좀 더 살기 좋은 사회로 바꾸겠다는 '선한 의지가 '1997년부터 2006년까지'라는 매우 이상한 시기를 빼고 나면 현대사에서 패배와 좌절을 반복합니다. 그 상황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의 문제인데, 전 그래서 <논객시대>의 초입에 등장하는 이광수와 김윤식 선생이 이 책에서 기묘한 알레고리의 역할을 떠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과잉된 해석일 수 있겠지만, 우리는 어떻게 박근혜의 시대, 그리고 그 이후의 시대를 견뎌낼 것인가, 2020년쯤 되면 뒤늦게 지난 시대 고속성장의 부작용들이 지금보다 더 악마적인 방식으로 출몰하게 될 텐데, 과연 그런 상황에 어떻게 정치적으로 대응할 것인가? 이광수와 김윤식 선생은 이 책에서 그런 질문들을 독자들로 하여금 계속 되묻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노정태 : 제대한 다음 가장 먼저 쓴 칼럼의 제목이 '2012년, 논객 없는 대선'(☞기사 바로보기)입니다. 새벽에 그 글을 썼는데, 그날 오후에는 안철수의 대선 출마 기자회견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어요. 대선이라는 게 확 불타오르고 아무나 무슨 말만 하면 주목받을 수 있는 상황인데, 그때쯤 되면 진보 진영이 다시 시동 걸고 부활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출마를 하겠다는 건지 안 하겠다는 건지도 모르겠는 대선 후보가 있고, 진보정당은 시들어 가고 있었죠.
논객이 유효하려면 피아구분이 확실해야 합니다. 이쪽 편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는 이쪽 편 사람이 논객이잖아요. 그런데 모든 게 애매해졌고 우리 편이 뜨겁지도 않고, 박근혜를 악마화시키거나 하는 논법을 다들 구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젠 논객이 불가능한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논객시대>는 그런 절망으로 시작된 프로젝트였어요. 그래서 책 마지막이 고종석 선생의 절필로 끝난 건 필연적인 귀결이었죠. 안타깝고 납득 가능하면서도, 내가 이렇게 책을 끝낼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박해천 :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의 시대적 상황, 포스트-논객시대가 펼쳐질 상황에 대해 혹시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게 있나요?
노정태 : 각도를 좀 다르게 얘기할 수 있겠는데요. 책이라는 매체를 예로 들자면, 총 구매자 중 10퍼센트만이 그 책을 실제로 읽는다고 합니다.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이란 건 대단히 소수에 불과해요. 결국 특정 집단으로 환원될 수 있겠죠.
개인의 주체성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는 종류의 질문에 대해서, 순수하게 개인적인 차원으로 답하든 사회적 차원으로 넓게 답하든, 잘못된 질문이고 잘못된 답일 겁니다. 이 책이 모든 한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었고, 이 책을 쓰면서 '우리'라고 호칭할 수 있는 사람들은 총 인구의 50분의 1도 안 돼요.
'나는 사회로부터 공격당하고 있어, 한국사회는 통째로 희망이 없어' 식의 과잉된 절망감, 동시에 '난 너무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에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할 사람이 없다, 시대와 나의 불화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는 분열적인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동질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을 찾는 작업을, 숟가락으로 때렸을 때 비슷한 주파수를 내는 컵을 찾는 작업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해천 : 마지막에 그렇게 착하고 훈훈한 이야기를 꺼내실 줄이야…. (웃음) 원래 좌담의 마무리 대목에서 '논객시대'가 끝나고 '힐링'의 시대가 도래하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할 계획이었는데요, 이런저런 역사적 우여곡절 끝에 겨우 존재하게 된 개인들이 2000년대를 통과하면서 자기계발과 자기위안의 프로그램과 조우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 말이죠.
노정태 : 나의 참여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강한 절망과, 나의 물질적 삶의 조건이 침해당하고 있다는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시절이죠.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보상을 주는 체계를 만들 순 없으니까, "우리가 하지요" 이렇게 <상록수> 풍으로 끝내야 할까요. (웃음)
노정태 : 어떤 식으로건, 대중을 향한 발언을 갑자기 그만두거나 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제 일이고, 일이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됐고요. 저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20대 논객으로 호명됐을 당시를 생각해보면 사실 '내'가 '20대'를 대변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다들 고민했던 것 같아요. 카를 만하임의 <세대 문제>(이남석 옮김, 책세상 펴냄)를 보면, 세대 전체 내에 세대 단위와 세대 위치가 있다고 합니다. 세대 위치는 20대인데, 단위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단 말이죠. 20대 논객들은 괴로워하면서 내가 속한 단위를 위해서조차 뭔가 열심히 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도 사회도 아닌 그 중간 지점, 많지도 적지도 않은 그런 뭉침을 찾아내고 서로 환기시켜야 하지 않을까, 제 역할도 당장은 그 정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가운데 유지될 것 같습니다.
박해천 :진행이 울퉁불퉁하긴 했지만, 그래도 <논객시대>가 다루는 내용이나 전후맥락, 저자의 의도는 한 번씩 언급이 된 것 같습니다. 독자분들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긴 시간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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