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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소야대'만 해결하면 태평성대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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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소야대'만 해결하면 태평성대가 올까

[개헌 짚어보기 2]'강력한 위임'이냐 '견제와 균형'이냐

노무현 대통령은 8일 기자회견에서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불일치는 여소야대 정치구조를 만드는 주요 요인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개헌은) 1987년 이후 일상화되고 있는 여소야대 정치구도를 극복하여 대통령과 여당이 보다 책임 있게 일하고 다음 선거에서 평가받는 정치를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의회가 표면적으로는 여소야대 형태였고 최근 사학법 논란에서 잘 나타났듯이 '지난 4년간 한나라당의 국정발목잡기에 시달렸다'는 청와대의 주장도 일리가 없지 않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규정대로 여소야대가 과연 '악(惡)'인지에 대해선 의견이 크게 엇갈린다.
  
  대통령제 전문가인 경희사이버대 안병진 교수는 "대통령제의 근본적 철학은 강력한 권한의 위임이라기보다, 그 강력한 위임을 견제하기 위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라고 잘라 말했다. 국정 난맥상의 근본원인을 '여소야대'로 돌리는 것은 원천적으로 온당치 않다는 주장인 것이다.
  
  또한 이같은 주장은 1987년 이후 헌정사를 짚어 봄으로써 쉽게 뒷받침될 수 있다.
  
  '지체된 승리'에서 출발한 '여소야대'
  
  제13대 국회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섯 대에 걸친 의회의 상황을 모두 '여소야대'라는 개념만으로 획일화 하긴 어렵다. 또한 사후적 평가일 수 있지만 역대의 '여소야대' 상황 자체를 살펴보면 모두 나름의 이유와 정당성을 갖추고 있다.
  
  제13대부터 모두 다섯 번의 총선 가운데 제13대와 제14대는 노태우 정권 하에서, 나머지는 각각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기에 한 차례씩 치러졌다.
  
  노 대통령은 "1년 남짓만 혜택을 누렸다"고 평가절하 하고 있긴 하지만 현 정권 하의 제17대 총선(2004년 4월15일)만은 '여소야대'가 아닌 '여대야소'로 출발했기 때문에 일단 논의에서 제외하는 것이 맞겠다.
  
  먼저 제13대 총선(1988년 4월26일)은 전형적인 여소야대의 상황을 이뤄낸 우리 헌정사상 최초의 선거였다. 당시 여당인 민정당이 125석으로 과반수에 25석이나 미달했고 야3당(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했던 것.
  
  당시 표면적인 선거 쟁점은 '5공 청산'이었으나 실제로 표심을 가른 기본 요인은 지역주의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이 여소야대라는 결과는, 정치사의 흐름 속에서 볼 때, 김대중, 김영삼씨의 분열만 아니었더라면 이미 1987년 말 대선에서 이뤄질 수 있었던, 민심의 정확한 반영으로서의 '민주화 세력 승리'의 지체된 표출이라는 의미가 훨씬 더 강하다.
  
  인위적 정계개편에 대한 심판으로서의 여소야대
  
  제14대 총선(1992년 3월24일)은 노태우 정권 기간이기는 하되 1990년 2월의 3당 합당으로 정치적 지형이 완전히 바뀐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였다. 전체 의석의 2/3 가까이를 차지한 거대정당으로 재출범한 민자당은 이 선거에서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는 데 그쳤다. 149석으로 과반에 1석 미달했고, 민주당은 97석, '정주영 돌풍'을 일으켰던 통일국민당이 31석을 얻는 등의 결과를 보였다.
  
  이를 정확한 여소야대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3당 합당 뒤 정치사회의 급격한 퇴조에 대해 나름대로 국민들의 견제심리가 발동한 선거로 평가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민자당에 따라가지 않고 부산에서 출마해 낙선했다.
  
  제15대 총선(1996년 4월11일)도 민주주의의 퇴조기에 치러지기는 앞의 총선과 마찬가지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집권 이후 김종필 씨의 민자당 탈당과 김대중 씨의 정계복귀 등으로 정국 상황이 대단히 혼란스러운 가운데 치러진 이 선거는 제13대 때와 마찬가지로 지역분할구도를 바탕으로 하는 신3당체제를 불러왔다.
  
  결과적으로 여당인 신한국당이 139석으로 과반에 미달했기 때문에 여소야대임은 분명했지만 야권의 세력도 새정치국민회의 79석, 자민련 50석, 이른바 꼬마민주당 9석, 무소속 16석 등으로 분산됐다.
  
  이 선거는 유권자들의 극심한 정치불신 속에서 여당인 신한국당이 오히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과 이회창 선대위원장의 발탁 등을 통해 나름대로 선전한 결과로 평가받고 있다. 나아가 신한국당은 선거 직후 '의원 빼내기'를 통해 결국 작위적으로 과반수를 채운다.
  
  1년 반 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한 뒤에도 제15대 국회는 계속됐기 때문에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의 세력은 의회의 다수당일 수 없었다. 지역주의 틀 속에 갇힌 정국 상황의 정확한 반영이었던 것이다.
  
  김대중 정권 하에서 치러진 제16대 총선(2000년 4월13일)도 물론 결과는 여소야대였다. 여당인 민주당이 96석을 얻은 반면 한나라당은 112석을 얻었다. 공동 여당격인 자민련 17석이 있었지만 곧 떨어져나갔고 그 와중에 '의원 빼내기' '의원 꿔주기로 교섭단체 만들기'등 갖가지 진풍경이 연출됐다.
  
  이에 대해서는 'DJP 지역연합정권의 성격과 한계'가 고스란히 나타난 선거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소수파 정권으로서 다수 의석을 얻지 못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얘기다
  
  여소야대의 역사성과 정당성을 왜곡해선 안돼
  
  이렇게 보면, 제13대 이후 총선은 모두 지역구도를 기본 동력으로 하는 가운데 매 시기의 정치상황에 대한 유권자들의 판단과 평가가 보태져 어느 정당에게도 과반 의석을 제공하지 않는 여소야대 내지 그와 비슷한 상황을 낳았던 셈이다.
  
  특히 3당 합당 또는 DJP연합과 같은 인위적 정계개편으로 편의적 구도를 만들어 집권에 성공한 여당은 그 직후의 총선에서 여지 없이 유권자의 심판을 받았을 뿐이다. 작위적이고도 자의적인 구도가 통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런 마당에 '과반의석을 얻어 책임 있게 국정 운영을 했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편의주의적 발상일 뿐이라는 비판을 피해가기 힘들다.
  
  또한 17대 총선에서 탄핵 후폭풍으로 그야말로 기록적인 과반의석을 확보해놓고도 연이은 재보궐선거의 연전연패와 지리멸렬한 행보 속에 여당의 해체와 탈당 사태로 여소야대 상황을 맞은 노 대통령이 '여소야대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개헌을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강력한 위임보다는 견제와 균형이 필요"
  
  이같은 역사성을 지닌 '여소야대'에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근 노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 주목을 끈 바 있는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는 "임기를 일치 시키면 여대야소를 통해 정국교착의 문제가 일부 해결되니까 아젠다를 힘 있게 실현해 나갈 수 있다는 강점이 있긴 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 교수는 곧바로 "그런데 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고 강조했다.
  
  안 교수는 "대통령이 미국 예를 들기도 하던데 강력한 대통령제의 원조국인 미국의 경우, 대통령에 대한 강력한 위임을 견제하고 균형의 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건국 정신이고 대통령제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물론 노 대통령은 "민주주의가 확고하게 뿌리내린 오늘의 한국 현실"에선 견제보다는 책임있는 국정운영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에 대해서도 안 교수는 "노 대통령이나 측근들은 자신들이 조중동에 포위돼서 실패했고 이런 현상은 임기일치-여대야소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건 현실에 대한 왜곡"이라고 평가했다. 여소야대가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인 것이다.
  
  또한 안 교수는 "헌법 개정 등 제도적인 문제 제기는 당면의 구체적인 현실을 고쳐나가기 위한 것"이라며 "내가 볼 때 노 대통령의 문제는 고쳐야 할 당면의 현실이 무엇인지, 국민들로부터 무엇을 위임받았는지 잘 모른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본적 관점의 문제인데, 노 대통령은 개헌뿐 아니라 예컨대 한미FTA라는 제도도 새로이 추진하고 있는데 이 문제를 국민들이 노 대통령에게 위임했다고 볼 수 있느냐"고 문제제기하며 이같이 말했다.
  
  "클린턴에게서 배워라"
  
  한편 안 교수는 "지지율이 떨어지는 대통령일수록 프레지덴셜(presidential: '대통령스럽다'는 뜻)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안 교수는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스캔들로 곤욕을 치를 때 민주당도 중간선거에서 어려움을 겪자 부지런히 지원유세를 다녔었다"며 "그 때 핵심참모인 딕 모리슨이 클린턴에게 충고한 것은 '그러지 말라. 해외 순방이나 경제정책 등에 무게를 실으며 초당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 낫다'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갈등을 피하는 행보로 지지율을 올리는 것이 클린턴 자신은 물론 민주당에게도 도움이 된 것이고 이는 노 대통령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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