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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절대 갖지 못한 것, '올드 보이' 결말도 이것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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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절대 갖지 못한 것, '올드 보이' 결말도 이것 때문?!

[2014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④] 철학 : 이진경, 자유를 말하다

1987년 20대의 대학원생이 쓴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은 대학가 운동권의 필독서가 되었고, 저자는 본명보다 '이진경'이라는 필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이름의 사내는 이후 <철학과 굴뚝청소부>, <노마디즘> 등 많은 철학책을 집필하는 한편, 연구실과 거리에서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혁명을 고민해 왔다. 그의 최근작 <삶을 위한 철학수업>(문학동네 펴냄)은 무겁지 않은 태도로 더 자유롭게 살기 위한 용기와 삶의 양상들에 대해 풀어놓는 책이다.


▲ <삶을 위한 철학수업>(이진경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그는 "1인칭을 주어로 쓰는 글이란 (3인칭도 아닌 부정형의 주어, 비인칭의 주어를 쓰는) 철학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유로운 삶을 촉발하고 그것을 위한 작은 용기를 '선동'하기 위해서" 1인칭 주어의 리얼리티를 빌려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누군가'라는 말로 표시된 빈자리를 자신을 주어로 채워주는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이 비로소 철학이란 이름에 값할 거라고 덧붙인다. 이렇듯 <삶을 위한 철학수업>은 철학자의 일상적인 고백이 1인칭으로 섞여 있는 기록이자, 삶을 진지하게 대하는 독자와의 '대화'를 상정하고 쓴 책이다.


이 철학자는 지난 2월 24일, 독자와의 직접 대면에 나섰다. 출판사 문학동네와 YES24, 프레시안이 함께 하는 연속 강연 '5인의 명사에게 듣는다 - 2014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마지막 시간이었다. 홍대입구역 인근 인사이트클래스에서 약 2시간에 걸쳐 펼쳐진 강연에서 그는 자신의 수감과 여행 경험, 만델라와 전두환의 대조, 하이데거에서 <올드 보이>에 이르는 다양한 예시를 통해 자유란 무엇인지, 자유를 얻기 위해 내야 할 용기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많은 얘기를 풀어놨다.

자유는 철학은 물론 정치학이나 사회학, 문학이나 예술 등 많은 영역에서 반복하여 다루어온 주제이지만 그만큼 "언제 어디서나 피해갈 수 없는 주제"이자, 그렇게 빈번히 다루어짐에도 언제나 새롭게 발견해야만 하는 개념이다. 우리가 입버릇처럼 되뇌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라는 요청에 철학자가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문학동네+YES24+프레시안
'5인의 명사에게 듣는다 - 2014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시리즈 전체 보기

문학,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2월 14일 진행)
예술, <화첩기행> 김병종 (2월 17일 진행)
사회, <애완의 시대> 이승욱&김은산 (2월 18일 진행)
④ 철학, <삶을 위한 철학수업> 이진경 (2월 24일 진행)


"흔해빠진 자유"의 아이러니


오늘 강연 주제는 '우리 삶을 구원하는 한 줌의 철학'인데요. 꽤 거창합니다. 이 책 <삶을 위한 철학수업>을 쓰면서 구원이란 주제를 생각한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 자유롭게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라는 고민은 줄곧 했던 것 같아요.


자유라는 개념만큼 잘 알려진, 또는 대부분이 잘 알고 있다고 믿는 개념이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지요? 이상하지 않나요? 알고 있는 이들은 그리 많은데, 참 기이한 일이죠.


생각해 보면, 자유롭다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그 생각이, 자유롭게 살기 위한 진짜 노력을 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 않나 싶어요. 자유라는 물음을 던지면 '다 아는데?' 이러면서 낚이지를 않는 겁니다. 그래서 자유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오히려 자유롭게 사는 사람은 적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한 번 진지하게 다루고 싶었어요.


자유=선택 가능성이 많은 것?


▲ 저자 이진경(서울과학기술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자유에 대한 내용이 이 책의 전부는 아닙니다만, 오늘의 주제는 자유로 좁혀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유를 뭐라고 생각하세요?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는 답이 가장 흔하게 나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선택 가능성을 많이 갖는 것'이나 '강제나 구속이 없는 상태'라 이해합니다.


'자기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도 사실 선택 가능성을 많이 갖는다는 것과 비슷한 말입니다. 자유는 언제나 필연과 반대되는 것으로 정의되어 왔죠.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선택 가능성이 없다고 자유가 없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음악을 어떤 형태로 들으시는지요? 저는 LP로도 듣고, CD로도 듣고, MP3 파일로도 듣습니다만, 파일의 경우 테라 수준으로 가득 가지고 있지요. 가끔 주변인들에게 파일을 보내주곤 하는데 대부분이 안 듣습니다. 아니, 못 듣죠. 왜 그럴까요? 너무 많아서, 뭘 들어야 할지 몰라서 못 듣는 겁니다.


만약 제가 10개쯤 되는 파일을 보내줬다면 한 번쯤 눌러는 보겠지요. 하지만 몇 만 개쯤 되면 그 생각도 못합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선택 가능성이 10개일 때는 뭔가를 하는데, 만 개쯤 되면 아무 것도 못 한다는 겁니다. 마케팅 연구자들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마트에 세제를 대여섯 종류 진열해 놓으면 손님들이 많이들 골라서 사는데, 20개쯤 놓으면 조금 고민하다가 돌아가고, 40개쯤 되면 즉시 지나간다고 해요. 선택 가능성이 많다고 자유로운 게 아니죠.


만 개쯤 되는 파일을 주었을 때, 실제로 듣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 중에 자기가 아는 게 있거나, 비슷한 취향의 계열을 아는 게 있다면 골라 듣는 거지요. 그건 선택 가능성에다 무언가가 더해진 경우입니다. 그러니 선택 가능성보다는, 선택지를 앞에 두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한 겁니다.


자유=구속의 반대?


다음으로 자유가 강제나 구속과 반대되는 것이라는 생각도 실제로는 소박하고, 소박한 만큼 부정확한 생각입니다. 단적으로, 지난해 별세한 넬슨 만델라는 살아 있을 때 27년간 수감 생활을 했습니다. 감옥이란 구속을 징벌로서 체제화한 거고요. 그런데 같은 시대에 정권을 잡았던 전두환을 떠올려 보세요. 둘 중 누가 더 자유롭다고 할 수 있나요?


자유를 강제와 구속의 반대로 생각한다면 만델라가 더 자유로웠다고 말하기 어렵지요. 하지만 과연, 바깥에서 아무 거나 할 수 있었던 전두환이 더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답하기 꺼려지죠.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권력을 잡은 전두환이 할 수 있는 행동의 폭은 굉장히 좁았습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가 할 줄 아는 거라곤 다른 이들을 두들겨 패서 복종시키는 것뿐이었으니까요. 당하는 사람들은 저항을 했죠. 그러면 그는 또 다시 폭력을 가했습니다. 그것 밖에 못 했으니까요. 능력이 있다면 선택지를 만들어냈겠지만, 안 되는 겁니다. 반면 만델라는 감옥에서 풀려난 뒤의 얼굴이 결코 구속에 찌든 얼굴이 아니었지요.


어디까지나 짐작이지만, 갇혀있는 게 더 자유로운 경우도 있어요. 저 역시 주변에서 목격한 일이 있지요. 저는 예전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약 2년간 교도소 생활을 했습니다만, 그때 같은 구치소에 있던 노회찬 씨가 그랬습니다. 당시에 유명한(?) 분들이 다 잡혀 들어와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신문 볼 시간도 없어요. 밖에서는 한 데 모아놓지 못할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기 위해서였죠. 이 방 놀러가고, 저 방 놀러가고 그랬죠.(웃음) 그런데 노회찬 씨의 방문은 잠겨 있었어요. 본인 스스로 잠가 달라고 요청한 거였죠. 밖에서 활동할 때 간절히 읽고 싶었던 책들을 좀 읽으려고 했더니, 하도 사람들이 찾아와서 일부러 요청했다나요.


한마디로 자유롭기 위해 문을 잠가 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교도소 안도 부족해서 방문을 잠그기까지 한다는 것이죠. 자유가 구속의 반대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일상의 자유를 위하여


자유란 선택 가능성이 없음을 견디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그렇게 말했지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1980년 5월 18일 광주 금남로에 있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누군가가 거기에서 군인들한테 두들겨 맞고 있는 걸 봤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하지 않을 수 없겠죠. 어떤 이는 주저하고, 어떤 이는 즉시 도망갈 것이고, 어떤 이는 바로 달려들겠죠.


하이데거는 이런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dasein'이라는 개념을 썼습니다. 주로 '현존재'로 번역되는 개념인데, '거기 있음'이라는 뜻입니다. 하이데거는 '내가 어딘가에 있다'라고 할 때, 그 '있음'의 의미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보았습니다.


종종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질문을 던질 때가 있지요. 거기엔 도피라는 선택지도 있습니다. '거기에 있음'을 빠져나간다는 의미이지요. 그게 아니라 '다른 선택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고 견디는 것', '잡혀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떤 종류의 행동을 취하는 것', 그게 바로 하이데거가 말한 자유였습니다.


하이데거는 가미가제를 예로 들었습니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가미가제에 탄 이들은 태평양 전쟁 말기 무너져가는 조국을 보며 '살아있다는 게 무엇인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청년들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천황 폐하 만세!"하는 우익적인 청년들만 있던 게 아니었어요. 그들 중 많은 경우는 몰락하는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벚꽃처럼 화려하게 지고 싶다는 미의식도 결합했겠죠. 어쨌든 그게 바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자유, 즉 선택 가능성이 없음을 견디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미리 죽음으로 달려가 보는 결단"이라고도 표현했는데, 굉장히 영웅적인 개념이지요.


이런 식의 자유 개념은 선택 가능성의 많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설득력을 지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맹점이 있지요. 여기서의 자유는 영웅적인 결단을 하는 사람에게만, 혹은 중대한 결단의 순간에만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이야기할, 일상 속 자유를 생각할 때는 도움이 되지 않아요. 자칫 엄한 데다 목숨을 거는 행동을 정당화할 수도 있고요. 오늘 제 물음은 "우리 일상생활 속 어떤 순간순간마다, 어떻게 자유롭게 살 것인가" 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자유,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예전에 어떤 기사를 보니, 삼성그룹 전체가 가진 예비금, 즉 아직 재투자하지 않고 회사에 비축해 둔 돈입니다만, 그게 120조 원이라고 합니다. 삼성을 포함한 4대 재벌 예비금을 다 합치면 한국 정부의 1년 예산보다 많은 430조 원이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많은 것이 곧 능력이기는 합니다. 사랑도, 사람도 살 수 있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전 그 예비금 이야기를 듣고, 대체 이 회사는 할 줄 아는 게 뭘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돈을 잘만 쓰면 세상에 좋은 일도 하고 스스로도 명예를 얻을 수 있는데, 아마 돈 되는 데 투자하는 것 외에는 생각을 못 했겠죠. 그게 그들의 시각이자 사고 능력인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120조 원을 남겨두고 돈을 더 벌 생각을 한다니, 바보 아녜요? 말하자면 120조 원 만큼의 무능력 아닐까요?


<또 하나의 약속>을 보니, 그들은 사람 입 막는 데 10억 원 쓸 생각은 하지만 노동자의 병을 고치는 데는 돈 쓸 생각을 안 하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그렇게 막으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온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가 되었지요. 만일 그 돈으로 병을 입은 노동자를 치료해주고, 그 전에 병에 걸리지 않도록 환경이나 복지제도를 갖췄더라면 모두 삼성에 박수를 치고 존경을 보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돈을 '입막음'에 쓰는 것밖에 생각하지 못해요. 이게 제가 말하는 안목이고 능력입니다.


반면 전혀 다른 능력을 가진 기업도 있습니다. 예전에 한 번 강연을 요청받아 알게 된 곳으로, 언론에서 '꿈의 직장'이라 소개되기도 하는 회사입니다. 이 회사에는 수영장이 있고, 거기에서 수영을 한 것도 근무시간으로 계산한다고 해요. 놀랍죠? 그곳 대표 말에 따르면, 직원 한 명 뽑는 데 2400명이 몰린 적이 있답니다. 대표는 그걸 한 달에 걸쳐서 다 읽고, 붙은 1명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일일이 답장을 썼다고 해요.


전 자본가들은 모두 흡혈귀라고 생각했는데, 이 회사를 보면서는 저런 자본가는 비난할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할 일이 없어지고 있어요. (웃음) 물론 이런 관점에도 타협적이라느니 여러 비난을 할 수는 있겠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그 대표에게 능력이 있고 안목이 있기 때문에 회사는 작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겁니다. 능력이 없으면 500조 원도 아무런 쓸모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자유롭고자 한다면,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요. 자유란 개념을 알고 있어도, 나름대로 정의를 해도 능력이 없으면 자유롭게 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겠지요. <삶을 위한 철학수업>의 3부에서는 그 능력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감각적 능력


가장 단순한 방법은 감각과 관련된 겁니다. 아마 '감각이 능력이야?'라고 갸우뚱하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 감각 역시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여서 수용하고 인식하는 하나의 능력이지요. 외부의 무엇과 대면하고 받아들이는 그 층위에서 자유의 폭이 확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합니다.


예전에 여행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던 유학생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맛있는 한국 음식점' 정보라고 합니다. 즉, 외국 여행을 하는 한국인 관광객들 대부분이 거기까지 와서 한국 음식을 찾아 먹는다는 거예요. 그들에게 관광 장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사실 사진으로 봐왔던 건물이나 그림을 '아, 그게 여기 있구나' 식으로 확인하는 게 관광이기는 하지요. 에펠탑을 봤어, 모나리자 앞을 지나가 봤어, 이런 의식을 갖는 것 말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그 의식을 가진 다음에 먹으러 갈 한국 음식이라고 해요. 타지에 나가 한국 음식 찾아먹은 것을 무용담처럼 말하는 이마저 있는데, 설마 그걸 애국이라 생각하는 걸까요?


제가 보기에 이것은 혀의 무능력이라고 할까, 감각의 무능력입니다. 다른 나라를 여행한다는 것은 다른 종류의 공기, 다른 냄새, 다른 문화, 다른 음식, 다른 사람과 언어를 대면하고 즐기는 과정이어야 할 텐데, 어딜 가도 한국 음식만 찾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아무리 많이 다녀도 모른다는 거죠.


▲ 소니 롤린스의 'the bridge'(1962)
소니 롤린스라는 재즈 뮤지션이 있습니다. 굉장한 색소포니스트였고, 이미 50년대부터 유명했습니다. 그가 1956년에 낸 <색소폰 콜로서스(Saxophone Colossus)>는 재즈사의 명반입니다. 그런데 1959년, 모든 것을 다 중단시키고 사라져버립니다. 2년간 행방불명이 되었죠. 그리고 다시 나타나서 <더 브릿지(The Bridge)>(1962)라는 앨범을 냅니다. 그는 잠적한 동안 청소부나 막노동꾼으로 일했고, 일이 익숙해진 뒤부터 동네에 있는 다리 위에 올라가 색소폰을 불었다고 해요. 그래서 앨범 제목이 '다리'였던 것이죠.


이 앨범을 그 전의 앨범과 비교해 보면, 기량이 문제가 아니라 음색이 다릅니다. 그 전에는 편안하고 푸근하고 퍼진 소리가 났다면 <더 브릿지>에서는 옹골차고 단단하며 윤기 있는 소리가 납니다. 제 짐작이지만 잠적하기 전에 자신이 그때까지 비슷한 것을 반복해 왔다는 생각, 그래서 감각이 닫혀 버렸다는 생각을 한 게 아니었을까요? 그 감각을 바꾸기 위해 이른바 '엄한 짓'을 하고 다닌 거죠. 그럼으로써 음악적 표현의 자유가 확장되었겠지요.


반면 익숙한 것에 안주하는 경우는 너무 많습니다. 북한산에 올라가다 보면 '뽕짝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는 분이 많아요. 이어폰이 남아도는 시대인데, 행인들에게 음악을 선물한다는 의미일까요? 그들이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도 있지만,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 평소에 듣는 익숙하고 편안한 것에만 안주한다는 느낌을 받아요.


입만큼 귀도 보수적인 겁니다. 듣지 않던 것을 듣지 못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음악에서 촉발받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고, 그 속에 응결된 미적 감각을 느낄 감수성이 없기 때문이에요. 흔히 '취향의 존중'을 전가의 보도처럼 내밀곤 하는데, 어떤 면에서 그건 능력의 부재를 자랑삼는 것 아닐까요? 그건 무능력한 거예요.


감각의 자유란 결국, 익숙하지 않은 것, 새롭고 이질적인 것들 안에 깃들어 있는 어떤 것을 감지하는 능력입니다. 처음에는 불편하기에 피하고 싶은 어떤 것을 향해 귀를 여는 작은 용기면 누구나 올라가기 시작할 수 있는 평범한 계단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 앞에서 그저 편안하다면 그것은 혹시 구속의 징표는 아닌지 한번쯤 의심해야 하고, 반대로 어떤 것 앞에서 불편하다면, 우리는 거기서 자유를 향해 '비상할' 수 있는 계단을 발견해야 합니다.


감정의 능력


우리 삶에서 감각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우리를 제약하는 것은 감정입니다. 감정 가운데서도 특히 분노나 원한, 미움이라는 감정은 어떤 관계를 망쳐놓거나 누군가를 다시 볼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다들 느껴본 적 있겠지만 원한만큼 강렬한 감정, 복수만큼 강력한 동기(動機)가 없지요. 그래서 힘이나 능력이라 오해되는 경우도 많아요. 실제로 뭔가를 만들어내기도 하고요.


그래서일까요? 복수극 형태의 서사가 많습니다. 중국의 무협영화는 거의 다 복수극이죠. '나쁜 놈'들이 습격해 와 도장을 부수거나 사부님을 죽이는데, 그걸 본 나는 열 받지만 아직 힘이 없기 때문에 산으로 도망칩니다. 거기서 귀인을 만나 무공을 쌓습니다. 복수의 일념으로 힘든 것을 참아 이겨 내고, 결국 나쁜 놈을 다시 찾아 가서 혼을 내고 세상은 평화를 되찾고… 요즘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이런 줄거리가 많죠.


대부분의 복수극은 여기에서 끝납니다. 그런데 복수가 끝난 다음, 복수의 주체는 어떻게 살아갈까요? 이 질문은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이제 평화를 되찾고 권력을 되찾았으니, 복수한 사람이 통치하면서 살아갈까요? 안 될 겁니다. 그 사람이 평생 한 건 복수를 위한 폭력의 단련일 텐데, 통치는 다른 능력을 필요로 하니까요. 장사를 하면 될까요? 그것도 배운 적 없죠.


복수의 주체도 원한을 다 갚기 전에 하고 싶은 게 있었을 겁니다. 공부를 하고 싶다거나 그림을 그리고 싶다거나, 애인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거나…. 그런데 복수의 주체로 임하는 순간 다 불가능한 꿈이 됩니다. 복수를 성공적으로 완수해야 하니까 하고 싶은 것 따위는 다 포기해야죠. 그렇다면 이 사람의 삶은 자신이 미워하는 그 원수에게 헌정된 거나 다름없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원수를 위한 삶인 거죠.

<올드 보이>는 이우진(유지태 분)의 복수가 다른 복수, 즉 오대수(최민식 분)의 복수에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하게 승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복수극입니다. 반전도 없고, 오대수의 모든 반격조차 사실은 이우진의 계획 안에 있었죠. 그런데 이 영화가 그런 뻔한 데서 그치지 않은 대단한 영화라 생각하는 이유는, '복수가 끝난 뒤 복수의 주체는 어떻게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복수가 끝난 뒤 이우진이 묻죠. "아저씨, 나 이제 뭐하고 살지?" 만약 이 질문이 없었다면 평범한 영화였을 거예요. 그렇게 묻고 그는 자살해 버립니다. 복수가 원수에게 인생을 바치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잘 보여주는 장면은 없다고 생각해요.

▲ 영화 <올드 보이>(2003). 유지태가 연기한 이우진.


이우진은 복수 대상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농락했죠. 자유를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 정의한다면, 이우진은 자유로워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요? 그럴 리 없었겠죠. 인생이 복수에 매여 있는데요. 마음대로 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그 '마음'에 강하게 매이게 되었던 겁니다.

원한과 분노, 복수심은 이유가 무엇이든 반동적(reactive) 감정에 속합니다. 반동이란 밀쳐내는 것이고요. 무언가 내게 작용한 것이 싫어서 튕겨내는 '반발' 내지 '반작용'이죠. 그런 의미에서 능동적인 감정과 반대됩니다. 말 그대로 리액션(반응)이니까요. 여러분은 '화내야지' 하고 화낸 적 있으세요?


단순한 리액션에 머무르는 정도로 끝나거나 그 감정을 벗어나지 못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분노를 야기한 것과 결별하거나 복수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되겠죠. 이렇게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얼굴을 돌려버린다면, 관계라는 것은 다 사라질 겁니다. 그럼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어요. 이런 점에서 인간의 삶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은 반동적 감정 아닐까요?


결국 우리가 새롭게 발견하고 훈련해야 할 것은 '능동적 감정'입니다. 그건 관계를 끝내는 감정이 아니라, 관계를 새롭게 만드는 감정입니다. 반동적 감정을 넘어서는 감정이기도 하고요.


제가 좋아하는 선생 한 분이 있어요. 보통 이 일 저 일 벌이길 좋아하시고 언제나 제게 함께 하자고 하시는데, 저도 바쁘다 보니 모든 일을 다 도와드릴 순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분을 만나 인사를 했더니 얼굴을 돌려버리더라고요. 삐친 거죠. 리액티브한 감정이에요. 저도 평소 같으면 '나도 바쁜 사람인데, 날 부하로 아는 거야 뭐야?'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이 역시 또 다시 리액티브한 감정이죠. 여기서 저도 얼굴을 돌리면, 다시 볼 일이 없어집니다. 인간관계는 바로 이런 식으로 끊어지고는 하죠.


그런데 그날은 왠지 그 분에게도 이유가 있겠다 싶어서, 졸졸 쫓아가서 인사를 하고 괜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번 뵈었을 때도 얼굴을 돌리시더군요. 그래도 쫓아가서 인사를 했죠. 세 번째 봤을 땐 웃으시더라고요. 그게 바로 능동적 감정이구나 싶었습니다.


"능동(action)이란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이고, 능동적(active) 힘이란 어떤 것을 새로 시작하게 만드는 힘이다. 능동적 감정이란 호감이나 기쁨처럼, 무언가를 시작하게 만드는 감정이다. 가령 사랑이나 우정이 그렇다. 그것은 이제까지 오던 길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가게 한다." (<삶을 위한 철학수업> 164쪽)


우리의 삶이 자유롭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반동적 힘들의 은밀한 드라마로 쓰여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우진만큼은 아니어도 누군가의 실패와 몰락을 기원하곤 하죠. 또한 인간은 누군가 자신에게 행한 열 번의 좋은 일을 잊기 위해선 한 번의 나쁜 일이면 충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은 나쁜 일, 불행의 기억으로 점철돼 있죠.

그게 우리가 선택한 삶입니다. 하지만 그게 우리가 선택한 삶이라면, 다른 선택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자유가 선택이라면, 그 은밀한 반동적 감정의 드라마를 정지시키는 그 '다른 가능성의 선택'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프레시안(최형락)


두 번의 부정이 아닌, 두 번의 긍정으로


능력과 자유에 관해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시간에서 자유롭지 못하군요.(웃음) 마지막으로는 능력이 아닌, 욕망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욕망이란 '하려고 하는 것', 능력이 can일 때 will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을 어디에 투여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죠.


그 욕망과 관련해서, 상반된 두 가지 힘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부추기는 긍정적인 힘, 그리고 '하지 말라'고 하는 부정적인 힘이지요. '하지 말라'는 힘이 작동하는 경우는 권력을 지닌 이들이 권력을 행사할 때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대학교 학위논문 심사장 같은 곳에서요. (웃음) 교수들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간이라 그런지, '안 돼'라는 말이 그렇게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더욱 나쁘게도, 우리 삶에서 부정은 이렇게 행사되지 않고 이중의 부정으로 행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아는 시인 한 명은 원래 화가가 되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재학 시절 아버지로부터 "미쳤니? 굶어 죽어!" 소리를 들었대요.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로를 선택할 때 벌어지는 광경입니다. '나쁜 것을 하지 말라'는, 부정의 부정이라는 방법이지요.


부정의 부정이 긍정이라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쁜 것을 안 하는 것'과 '좋은 것을 하는 것'이 같을 수 있나요?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아니라 그냥 두 번의 부정일뿐이죠. 같은 맥락에서 현실과 상황을 참는 능력을 자랑 삼는 경우도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고 봅니다.


학교에서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물어봤습니다. 너희들이 잘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게 뭔지 안다면 손을 들어보라고요. 잘 하는 것을 물었을 때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10년간 매 학기, 모든 수업에서요. 두 번째, '적어도 10년은 하고 싶은 일'을 물었을 때 손을 든 친구는 여태까지 다섯 명 정도였습니다. 미술을 계속하겠다는 친구, 돈 벌어서 여행을 하고 돈 떨어지면 다시 돈을 벌어 여행 자금을 만드는 일을 반복하고 싶다는 친구, 커피와 함께 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친구, 사진을 찍고 싶다는 친구들이었죠.


숫자가 이렇게 적은 건, 자기가 해보지 않으면 그 일을 좋아할 수 있는지 잘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나라도 하려면 깊숙이 들어가 봐야, 터널 하나를 통과해 보아야 해요. 그래야 그 일을 진짜 좋아하는지, 잘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거든요. 흔히 말하는 '젊은 날의 방황'이란 이런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방황할 여지가 없어요. 제가 만난 학생들 대부분은 20년간 학교 공부만 한 겁니다. 그들이 시험할 수 있었던 건 하나뿐입니다. 시험공부를 잘 할 수 있는가 아닌가인 거죠. 능력의 종류란 천차만별인데 오직 시험을 잘 보는 능력만이 기준이 되어버립니다. 이건 공부 잘 하는 능력과도 다릅니다.


이거 말고는 해본 적이 없으니 다른 일에 대해 알 길이 없고, 대학에 가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취업 준비한다고 바쁘게 보내기 때문에 더욱 더 기회와는 멀어지죠.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나요?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채 인생을 끝마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라'로 살아요. '대학 가려면 공부해야 한다더라', '대학 나오면 취업해야 한다더라'… 이런 삶은, '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사는 겁니다. '그들'이 부모님은 아니에요. 그분들조차 어디서 듣고 '한다더라'라는 화법을 쓰는 거죠. 그것은 모두 익명의 그들이 말하는 삶입니다.


요즘 인간의 평균 수명이 80세라고 하죠. 정년퇴임은 대부분 60세에 합니다. 진짜 좋아하는 것을 시작한다면, 10년 동안 몰두해도 죽을 때까지 두 번이나 할 수 있는 나이예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기하고, 돈 있는 사람들은 늙어서 관광 다니는 걸로 위무합니다. 심지어 회사에 한창 다니는 30대의 친구들도 자기는 이미 늦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건 대학 졸업하기 전에 했어야 할 생각이야'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웃긴 건, 대학생들 역시 늦었다고 생각하기는 마찬가지란 겁니다.


전 이런 방식을 '나쁜 것을 하지 않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결국 긍정의 삶이 아니라,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삶'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삶이 즐겁거나 행복할 리 없습니다.


부정의 부정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한 번의 긍정만으로도 부족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한 뒤에 결과로서 오는 고통마저 긍정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 따르는 장애로 가난이란 현실적 문제를 들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 오히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입니다.


무언가 삶을 걸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옆에서 비난하는 소리도 잘 안 들립니다. '가난해도 좋아', '고독해도 좋아' - 이렇게 두 번의 긍정을 했을 때 그 사람은 대체 무엇으로 불행해질 수 있을까요? 자기가 선택한 것과 하는 일에 자긍심을 가지는 것, 이게 바로 진정 자유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긍정의 긍정, 두 번의 긍정이 중요합니다. 니체가 "삶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 바로 이 두 번의 긍정을 말한 겁니다. 이게 바로 자유로운 삶을 위한 최고의 방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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