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감시사회의 정치학
세상은 정보로 구성된다. 지난 세기말 대중문화를 풍미했던 영화 <매트릭스>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의 정보통신기술은 세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일들을 디지털로 치환하고 이를 "정보"라는 이름으로 관리하기에 여념이 없다. 모더니티가 공동체 속에서 무한한 관계들로 구성되어야 할 인간사를 낱낱의 개인의 문제로 분리해버렸다고 한다면, 정보통신기술은 이런 개인들을 다시 낱낱의 기호로 전환하고 그것을 정보라는 잉여로 대체해 버렸다. 아무개 마을 대장장이 아들에게 범용의 이름을 부여한 것이 근대라면 그를 주민번호와 신용카드번호와 통장번호로 분해하여 저 스펙터클한 쇼핑몰로 던져 넣는 것이 정보사회의 위력이다.
물론 이런 분해와 조합의 동인은 초극단으로 치닫는 생산성 이데올로기다. 자본주의는 반드시 멸망한다는 마르크스의 예언을 빗나가게 만든 것이 광고의 존재였다는 냉소는 사람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투시하고 조종하는 권력과 자본에도 그대로 타당하다. 잉여의 권력이나 잉여의 가치는 노동과 교환을 넘어 이제 감시와 훈육을 통해 인간 그 자체로부터 직접 창출되어 이전되기 때문이다. 죄수들의 복종만 생각했던 벤담의 판옵티콘과 달리, 정보사회의 판옵티콘은 감시자가 원하는 대로 욕망하고 원하는 대로 작업하며 원하는 대로 소비하는 사회를 추구한다.
이곳에서 정보가 힘인 것은 이 때문이다. 정보는 권력이며 자본이며 문화다. 근대의 개인주의는 인간으로부터 공동체라는 보호막을 제거하고 직접 국가와 시장의 권력에 직면하게 만들었지만, 현대의 정보화사회는 한 인간의 욕망과 의지와 행동의 하나하나를 이러한 권력에 대면하게 만든다. 여기서 국가가 상대하는 것은 아무개라는 시민 혹은 개인이 아니라 주민번호와 몇 가지의 숫자로 코드화되어 있는 정보뭉치이다. 관료들은 자신의 모니터 앞에 있는 그의 정보뭉치로부터 필요한 것만 골라내어 그 사람을 프로파일링한다. 시장도 다르지 않다. 그의 신용카드정보와 과거의 구매경력은 삶의 전체가 아니라 가장 미세한 취향과 몇 푼 정도의 경제력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구매욕구를 이끌어낸다. 콜센터의 관리자 앞에 놓은 모니터가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감정노동자의 스트레스가 아니라 통화시간과 이미 코드화되어 있는 키보드 사용시간과 내역이다. 사람은 사라지고 정보만 남아 면대면의 관계들을 코드화된 지배의 체제로 변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감시는 권력의 결과이자 동시에 권력의 원천을 이룬다. 국가감시, 작업장감시, 소비자 감시 등으로 분화되는 이 정보권력은 기존의 권력관계를 반영할 뿐 아니라 동시에 그 권력관계를 강화하고 또 창출한다. 국가나 사용자, 판매자가 개개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하는 것은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세종 때에 만들어진 측우기는 농사의 풍흉을 가려 과세권이라는 국왕권력을 집행하기 위한 정보수집의 수단이었던 듯이, 주민등록을 강제하고 인구조사를 실시하는 것은 국가의 대인고권(대인고권)을 행사하여 인적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다. 주민등록표에 십지문을 찍어 경찰청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며 휴대폰 개통 시에는 하나 같이 주민번호를 제공하여 모든 의사소통이 감시의 대상이 되도록 하는 것은 공공질서 유지라고 하는 국가경찰권의 집행에 다름 아니다. 사람의 사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 자체가 권력의 한 모습이지만, 동시에 그렇게 들여다보고 필요한 정보를 획득하는 것 또한 권력을 집행하는 전형적인 예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감시의 문제는 이렇듯 사생활의 비밀이라는 인권과의 길항관계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고 욕망을 제어함으로써 권력의 의지가 마음대로 전횡할 수 있는 무한공간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문제시된다. 아키텍쳐(이는 창조주라는 의미도 가진다)는 도덕이나 관습, 법규범과 마찬가지로 인간행동을 통제한다. 감시카메라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인간은 감시카메라가 설치되고 조합되는 방식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조정한다. 집창촌에 놓여진 감시카메라는 성매매에 대한 죄의식을 조성하며, 국가기관의 민원실에 놓여진 감시카메라는 국가적 권위에 대한 민원인의 물리적 항의를 차단한다. 맥도널드 햄버거가 식사와 작업을 병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듯이, 유비쿼터스를 자랑하는 스마트폰은 노동과 휴식의 시간적·공간적 경계를 해체시켜 버렸다. 빅데이터 활용의 전범으로 거론되는 아마존은 접속하는 순간부터 내가 사려던 책이 무엇이었는지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게끔 나의 옛 관심사들을 되살려낸다.
<매트릭스>의 가상현실은 이미 우리의 현실로 스며든다. 영화 속 무수한 스미스들은 모니터 앞에 앉은 관료의 모습으로 혹은 "삐" 소리와 함께 열리고 닫히는 회사출입구의 모습이나 시도 때도 없이 시선을 교란시키는 스팸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근대국가의 일반적 양상인 감시국가의 수준을 넘어 감시를 통하여 시민과 노동자와 소비자들을 훈육하고 순치시키는 초감시의 사회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감시사회의 문제는 인권의 문제를 넘어 민주주의 그 자체로까지 이어진다. 자기의 삶은 자기가 결정한다는 자기지배의 이념이 부지불식간에 형해화되어 버리고, 누군가의 결정에 의해 강제되는 삶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자율적 선택으로 오인하게끔 하는 매트릭스의 사회가 현실이 되어 가는 것이다.
2. 신분증명과 주민번호, 그 문제점
하지만 이러한 초감시사회도 전체로서의 '인간'을 필요로 한다. 권력에 복종하여야 할 피지배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분증명의 문제가 초감시사회의 중심으로 들어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원래 국가가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리고 권리의무관계의 기초로 삼기 위하여 만든 신분증명제는 정보사회에 들어서면서 수많은 감시활동의 대상을 특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형된다. 잠재적 범죄자를 찾아내거나 복지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원하는 생활방식을 강제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어떤 사람의 경제능력과 취향과 욕망과 구매의지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감시의 대상이 특정되어야 감시의 내용과 방법이 결정되며, 그때에야 비로소 그 사람에 대한 지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근대적 신분증명제가 일제의 침략과 함께 진행되었음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1909년의 민적법, 1922년의 조선호적령, 그리고 1942년의 조선기류령은 지금까지도 그 틀을 견지하면서 고전적 감시국가의 행정수단이 되어 있다. 하지만 일제말기에서부터 이 신분증명제는 새로운 기능을 추가한다. 체제에 저항하는 '불순분자'를 색출하고 처벌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미군정이 발급한 거주등록표는 "남조선의 합법적인 주민인 것을 증명"하는 수단이자 동시에 "현재의 사태가 과도기에 있는 만큼 경찰 수사상에도 필요함"(안재홍 당시 민정장관)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1949년 빨치산토벌지역에서 발급된 국민증이나,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부가 반공을 내세우자 사람들이 부랴부랴 발급받은 시민증도 그랬다. 그리고 이렇게 왜곡된 신분증명제의 극단은 1968년 1.21 청와대기습사건에 이은 주민등록증발급제도의 도입으로 발전한다. 주민등록번호가 처음 등장한 이 주민등록증은 "국민들의 주거실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시·도민증보다 북괴간첩의 잠입을 막을 수 있을 것"(동아일보 1968.2.16)으로 기대되었던 것이다. 국가신분증명제도가 그 본래의 목적을 떠나 "주민"이라는 권력의 대상을 특정하고, 이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당시 모든 국민에게 주민등록증을 항시 지참하면서 공무원의 요구가 있을 때마다 제시하여야 할 의무를 부과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신분증명이 아니라 "간첩이나 불순분자"나 "병역기피자" 혹은 어떤 범죄자가 아님을 확인받기 위한, 일종의 '강제된 고해성사'의 수단으로 운용되었던 것이다. 주민등록증과 주민번호는 국가의 범죄자·수배자기록과 한 개인을 연동시키는 아날로그 방식의 식별자였던 셈이다.(최근 주민번호 폐지론에 대해 '이념적 공세'라고 폄하하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최첨단의 정보기술은 이 식별자의 역할을 경찰목적에서부터 모든 국가적·사회적 생활관계로 확장시켜 버렸다. 종래 치안정보와 주민등록정보, 호적정보를 연결시키는데 국한되었던 주민번호는 우리 국가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데이터베이스를 연동시키는 만능식별자가 되고 말았다. 첫 대면부터 '민증 까 보자'는 우리의 의식은 자연스럽게 어떤 기록 어떤 장부에도 주민번호를 기록하는 관행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모든 기록과 모든 데이터베이스가 손쉽게 연동됨으로써 발생하는 엄청난 부가가치는 사생활 침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주민번호제도를 당연한 것, 합당한 것 혹은 경제성, 생산성의 의미로써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최근 주민번호가 상품처럼 거래의 대상이 되어 유통되고 있는 현상은 이를 예증한다.
문제는 이미 설명하였듯이 이 과정에서 사생활의 비밀은 물론 그 삶의 형성까지도 방해받거나 조종당하는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민번호가 통일식별자가 되어 모든 데이터베이스를 여는 만능키의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민번호 하나만 있으면 그 사람의 건강, 재산, 신용, 학력, 가계내력, 취향이나 여가활동 심지어 헌금내역이자 정당활동에까지 이르는 모든 정보를 끄집어내어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 사람의 아바타를 만들고 이를 통해 자기의 권력이나 이익을 추구해 나갈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간첩을 잡겠다고 만든 주민번호가 오히려 신분증의 위조를 가능하게 만들어 간첩을 은닉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변질되는 것은 시대의 아이러니라 치부하더라도, 주민번호 하나로 어떤 아이의 학적부를 뒤지고 이로써 검찰총장까지도 잘라낼 수 있게 되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이 되어 버렸다. 나 아닌 사람이 나의 주민번호와 그에서 파생되는 나의 개인정보를 가지고 내 행세를 하고 다니면서, 위조여권으로 출입국하거나 SNS에서 내 명의로 사기행각을 벌이거나 스미싱 등으로 나의 재산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국가, 공공기관, 민간 등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수집하고 관리하는 주민번호는 그래서 전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제도가 된다. 국민 모두에게 강제적으로 번호를 부여하고 강제적으로 사용하게 하는 제도는 더러 있지만 이를 국가 안에 있는 거의 모든 데이터베이스를 연동시키는 만능식별자로 구축한 경우는 세계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 주민번호가 가지는 특성은 가히 경탄스럽다. 그것은 전국적으로 단일한 기준에 의해(통일성), 한 사람에 하나의 번호만 부여되고(전속성) 결코 중복되지 않으며(유일성), 일생동안 변하지 않으며(종신성·불변성), 생년월일부터 성별, 출생지 등의 개인정보까지 담고 있으며(식별성/개인정보성),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사용하여야 한다(의무성)는 점 외에도 모든 정보관리를 위한 기본식별자로 이용(범용성)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리는 엉성하기 짝이 없다.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조사에 의하면 1991년 주민등록전산망이 가동되자마자 불법채권추심사기단과 경찰관 등의 공모에 의해 15만 명의 주민등록정보가 도용된 이래, 지금까지 3억7000만 건이 넘는 개인정보가 주민번호를 중심으로 유출되었다. 실제 이 수치는 제1차 유출에 국한된 것이며, 이런 정보들이 돈을 받고 이리저리 유통되어 제2차 제3차 유출 등으로 무한 확산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단군 이래 최대의 수출품은 주민등록번호'라는 비아냥이 허언에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성인정보를 탐하는 아이들로부터 각종의 판촉·마케팅 회사들, 광고업체들은 물론 사생활조사를 하는 심부름센터, 불법채권추심단, 대출사기꾼들, 스미싱 업자들, 신분을 은폐하고 싶은 범죄자들, 돈세탁이 필요한 사람들 등 범죄자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주민번호를 손쉽게 확보하여 우리의 사생활과 우리의 안전과 재산을 위협하는 상태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3. 주민번호의 폐지 혹은 존치?
사실 엄격한 법리로만 따지자면 이 주민번호제도는 그 자체 위헌이다. 주민관리라는 본래의 목적이 아닌 국가신분증명목적 혹은 데이터베이스의 연동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한 국민들의 피해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기 때문이다. 단지, 그동안 공공부문은 물론 민간부문에서까지 관례적으로 사용해 오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이를 폐지하는 것은 상당한 비용이 수반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한편으로는 분단국가라는 현실에서 오는 안보위협의 공포로 인해 하루하루 그 생명이 연장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지난 1월 신용카드사의 정보유출사건 이래 주민번호제도의 획기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음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항간에는 폐지론이냐 존치론이냐라는 대립각이 있는 듯한 모습이 없지는 않지만, 양자는 핵심에 있어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현재의 주민번호체제로는 급변하는 정보사회의 현실로부터 개인정보를 보호할 수가 없으며, 기왕에 유출되어 버린 주민번호로 인한 시민들의 불안과 정신적'재산적 고통과 위험을 덜어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민번호의 변경을 허용하고 그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여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적어도 시민사회의 수준에서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은 아니게 되었다. 특히 새로 제정된 개인정보보호법은 올 여름부터 민간부문에서는 원칙적으로 주민번호를 수집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주민번호 변경의 경우에도 안행부를 비롯한 행정관료들은 난색을 표하고 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주민번호가 변경된 사례가 이미 24만 건을 넘어서고 있으며 심지어 사회생활관계에서 주민번호보다 더 중요한 이름조차도 지난 10년간 120만 명이나 변경하였음에도 별달리 심각한 행정장애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반대를 무색하게 만든다. 더구나 세종시의 경우 주민번호 뒷자리에 4자가 3~4번 겹쳐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주민번호의 변경을 허용하면서 자기 주민번호가 공개되어 불안에 떨고 있다는 이유로 그 변경을 요구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더라도 불합리하기 짝이 없다.
또 다른 문제로 주민번호 부여체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제기된다. 즉, 현재와 같이 일정한 개인정보를 담고 있는 주민번호 부여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느냐 아니면 난수표 방식으로 무의미한 숫자의 연속으로 만들 것이냐 라는 논쟁점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점은 비교적 간단하게 해결된다. 현재의 주민번호 부여방식은 주민번호의 중복을 막기 위한 아날로그 시대의 방식이었을 뿐이며, 따라서 오늘날과 같이 발달된 정보기술체제하에서는 더 이상 고집할 이유가 없는 방식이다. 물론 주민번호에 개인정보를 담고 지역번호를 대외비로 함으로써 "간첩이나 불순분자"를 곤란하게 만들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 또한 너무도 쉽사리 위조할 수 있음으로 인해 이미 별무소용의 지경이 되어 버렸다. 전시대의 필요가 현시대의 인권을 침해하는 도착된 현상은 되도록 빨리 치유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데이터베이스의 연동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의 문제는 현 시점에서 가장 첨예한 주제다. 일부에서는 민간부문만 통제하고 공공부문에서는 지금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개인정보수집에 있어 최소성의 원칙은 이미 전세계적인 보편기준이 되어 있다. 주민번호를 사용하는 것은 설령 공공부문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수준과 범위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주민번호가 필요한 데이터베이스와 그렇지 않는 데이터베이스를 구분하여 후자의 경우에는 그 나름의 번호로 대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불필요하게 주민번호를 요구하는 민원서식은 모두 정리되어야 한다. 개인정보파일 역시 마찬가지로 자체적인 번호체계로 관리가능하다면 그 파일에서 주민번호를 과감히 삭제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둘째, 데이터베이스의 연동을 최소화하여야 한다. 이는 첫째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으로 치안이라든가 조세와 같은 필수적인 국가목적이 아닌 한, 데이터베이스의 연동을 금지하고 지나친 열람이나 조회를 막는 방안을 강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데이터베이스를 하나로 통합하여 운영하는 종합적인 데이터베이스는 다시 해체할 필요가 있다. 교육부가 운용하고 있는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은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이런 개선을 위해서는 우리 공공행정, 특히 전자정부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구조조정의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쩌면 가장 실효적인 규제개혁의 작업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주민번호 자체가 국민의 전생활에 대한 전방위적 감시와 개입을 가능케 하는 인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 소요되는 비용과 시간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을 통해 획득되는 인권보장과 시민의 역감시라는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의 실현은 그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을 수준의 편익을 이룬다. 우리 헌정주의가 요구하는 최고의 국가이념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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