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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죽음'을, 하루키는 '질문'을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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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죽음'을, 하루키는 '질문'을 떠올리게 했다?

[취미는 독서] 여덟 번째 날

성현석(<프레시안> 기자) :
누구나 비슷할 게다. 독서 이력을 죽 돌아보다 보면, 일종의 '점프'를 한 대목이 있다. 지금까지 읽지 않았던 종류의 책을 읽게 된 경험. 누군가에게 그것은 '5월 광주'의 충격이었을 테고, 다른 누군가에겐 실연의 상처였으며, 또 어떤 이에겐 그저 '내가 너무 무식하구나' 싶은 깨달음이었을 수도 있겠다.

▲ <만남, 죽음과의 만남>(정진홍 지음, 궁리 펴냄). ⓒ궁리
내게도 그런 대목이 몇 번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죽음'이다. 죽음에 대해 골똘히 생각한 뒤로, 읽는 책의 종류가 달라졌다. 원로 종교학자 정진홍의 책을 즐겨 읽게 된 게 그 결과다. 삼성전자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 뇌종양 등 희귀병에 걸려 숨진 이들, 그리고 그 가족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탐욕의 제국> 시사회에 갔었다. 퇴근 후 책장에서 꺼낸 책이 <만남, 죽음과의 만남>(정진홍 지음, 궁리 펴냄)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상처가 아직 화끈거리는 이들에게 권할만한 책은 아니다. 그러기엔, 문장이 너무 담담하다.


스크린 속 뜨거운 장면들과, 눈가의 화끈거림, 그리고 극장을 나선 뒤 마주치는 차가운 서울 거리의 연쇄 반응이 "죽음은 '삶의 현실'"이라고 말하는 종교학자의 글을 찾게 했다.


인문학 전공자도 아니고, 관련 일을 하는 것도 아니어서 이런 이야기하기가 망설여진다. 우리나라 인문학계에 대해 느끼는 불만 말이다. 그래도 한 가지 이야기는 꼭 하고 싶다. 한국은 골목마다 교회와 절로 빼곡한데, 이토록 뜨거운 신앙의 나라에서 종교학은 왜 이토록 찬밥신세인가 싶은 불만이다. 인문학 문외한이 할 말은 아니지만, 인문학의 정수는 종교학이 아닐까 싶다. 인문학은 인간을 다루고, 종교는 죽음을 다룬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게 죽음이다. 죽지 않은 인간이 있다면, 그건 신이지 인간이 아니다. 종교학이 인문학계 안에서도 비주류 취급을 받는 현실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다. 인간을 이해하려면, 죽음을 직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자면, 종교에 대한 탐구와 성찰이 필수적이다. 종교학 관련 필자와 출간물이 늘어나길 바란다.


▲ <위기의 경제학>(신희영 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정승일(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 :
신희영이 지은 <위기의 경제학 : 경제 위기 시대에 다시 읽는 현대 경제사상>(이매진 펴냄)을 읽다가 다시 한 번 열불이 난다. 2008년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터지자 미국 정부와 연준이 자국의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취한 모든 대책들이 1997년 한국과 동아시아에 위기가 터졌을 때 IMF를 통해 구제 금융을 지원하는 대가로 요구한 것과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IMF와 미국 정부는 한국 등 동아시아 정부에 대해 파산한 은행 등을 빨리 해외에 팔아치우라고 요구했다. 그렇지만 2008년 자국 발 금융위기가 터진 이후에 미국 정부는 단 하나의 자국 은행도 해외에 매각하지 않았다. IMF 역시 미국 정부에 '감히' 그런 무례한 요구를 한 적이 없다. 왜 미국에게는 '무례한' 것이, 한국에게는 그렇지 않았을까?


정혜윤(CBS 라디오 PD·작가) :
-<더 스크랩>(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비채 펴냄). 하루키는 '응답하라 1980'을 쓰고 싶었던 걸까? 하루키는 1980과 어떻게 조우했을까?

▲ <더 스크랩>(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비채 펴냄). ⓒ비채
미국 신문 스크랩을 이용했기 때문에 미국발 기사가 많다. '어째서 섹스가 재미없어졌나?', '개츠비'의 저자 스콧 피츠제럴드의 기사(그의 평생 고민은 남보다 성기가 작았다는 것인가?) 등은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생각해보면 2010년대 자기만의 타임캡슐을 만들어서 몇 십 년 후에 펼쳐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하루키도 이 책을 '오래된 졸업앨범을 펼쳐보듯 읽으면 그만'이라고 했으니까. 나라면 무엇으로 시작할까? 어째서 사랑에 관한 책이 봇물을 이루었나로 할까? 아니면 우디 앨런? 누구일까? 뭘까? 계속 질문을 던져봐야겠다.


-질문이란 단어 하니 떠오르는 책이 있다. <무엇>(박중서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펴냄). 마크 쿨란스키의 책이다. 책의 문장 전체가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체 나의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은 뭘까?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일까? '나는 어디서 죽을까'일까? '나는 누구를 혹은 무엇을 사랑한 사람일까'일까? 내 친구의 질문은 "나는 어디서 살까?"였고, 우리 엄마의 질문은 "누가 나를 기억할까, 나는 무엇을 기억할까?"이다.


질문으로만 구성된 책의 맨 마지막 장은 인내심이고 거기에 선언문이 나온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글이다. 그 글이 무척 아름답다. 아름다울 뿐 아니라 최고로 현명하다. 인용하자면,


'당신은 매우 젊고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최대한 강하게 당신에게 간청하는 바입니다. 선생 부디 당신의 마음에서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을 인내하시고 질문들 그 자체를 마치 걸어 잠근 방들처럼, 마치 완전히 외국어로 저술된 책처럼 사랑하려 노력하십시오. 지금 답변을 찾으려 들지는 마셔야 하는데 당신이 답변을 얻지 못하는 까닭은 당신이 그 '답변'에 따라 살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모든 것'에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지금 '질문'에 따라 '살기'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은 점차적으로 미처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언젠가 먼 훗날에 살아가다가 답변과 마주할 날이 올 것입니다.'


김용언(<프레시안> 기자) :
우리는 '선생님들'에게 약하다. 나보다 한 살이라도 많으면, 앞서 살아온 단 1년의 시간만큼이라도 그 사람의 지식과 경험치를 존중해야 한다고 배웠다. 살아온 시간이 그 사람과 동일시되며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사람을 비판하고자 할 때에는 에둘러서, 우회하여, 완곡하게, 존중과 예를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물론 그 사람의 다른 장점도 같이 논하면서 신중하게 다뤄야만 뒤탈이 없었다.

▲ <논객시대>(노정태 지음, 반비 펴냄). ⓒ반비
그러나 '인문·사회 담론의 전성기를 수놓은 진보 논객 총정리'라는 부제가 붙은 <논객시대>(노정태 지음, 반비 펴냄)는 어름어름 지름길을 택하지 않았다. "태초에 강준만이 있었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강준만 편에서도 쓴 것처럼, 실명 비판은 "주체와 객체로 이루어진 (…) 근대 세계의 문"을 여는 작은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정태는 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자신의 10대와 20대를 사로잡았던 진보 담론 논객들, 즉 김어준과 강준만, 진중권, 유시민, 고종석 등을 차례로 호명하며 그들의 책에서 다뤄진 당대 논점들의 예각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키고, 또 그들 중 일부가 어느 시점부터 무딘 칼을 헛되이 휘두르기 시작했는지를 냉정하게 돌아본다.

이 책에서 다뤄진 지식인들이 90년대 우리에게 끼친 영향은, 한 순간의 인기나 변덕스런 유행이 아니라 당대 정치적 상황에 가장 치열했던 응답 자체였다. 그것들은 지금까지 생명력을 잃지 않은 채 혹은 자주 모습을 바꿔가며 우리 사회의 실체 있는 유령으로 떠돌고 있다. 그러므로 가까운 과거를 돌아보는 이 책은 우리의 미래를 점칠 수 있는 작은 수정거울이기도 하다. <논객시대>가 책으로 나오기 전, '프레시안 books'에서 연재할 수 있었던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 <각설하고,>(김민정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이명현(천문학자) :
<각설하고,>(김민정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를 읽다가 김민정 시인을 '젖과 좆'의 야릇하고 예쁜 시인으로만 기억하고 있던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고 부끄러워졌다.

각설하고, 그녀는 냉정함과 섹시함과 용기와 어눌함이 모두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미워할 수 없는 아름다운 괴물이었다. 또 각설하고, 그녀가 알고 싶어졌다.


노정태(자유기고가, <논객시대> 저자) :

'시적 도약'. 요즘 가장 많이 생각하는 주제 중 하나다. 말 그대로, 어떤 주제나 생각 혹은 당대의 경향 등을 잡아채어, 아주 길어봐야 몇 단어 수준의 어구로 압축해 허공에 띄워 다시 폭발시키는 것,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 '좋은 논의'가 부족하기도 하지만, 그 좋은 논의들을 함축하는 '좋은 레토릭'이 없다는 문제의식이 연장되어온 것이다.

▲ <세상물정의 사회학>(노명우 지음, 사계절 펴냄). ⓒ사계절
요즘 제목 좋은 책이 많이 나오고 있다. 노명우의 <세상물정의 사회학>(사계절 펴냄)은 그 중에서 가장 앞길에 놓일법하다. 사회학이라는 것이 원래 사회, 즉 '세상'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냐는 당연한 의문을 던지기도 전에, 이미 '세상물정의 사회학'이라는 제목은 입에서 좋은 울림을 내며 목으로 넘어간다. 저자가 밝히는 취지를 보면 왜 '세상물정'인지 알 법도 하다. "좋은 삶을 향해 가는 비법이라는 의미의 복원된 처세술을 위해서는 자기계발서 대신 세상물정의 이치와 냉정하게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19쪽)

물론 모든 시적 도약은, 그것이 높이 뛰어오르는 만큼, 완고한 상식 또는 편견을 디딤대로 삼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이 가진 비판적인 시선은 '세속'과 '상아탑', '세상물정'과 '학자들의 숫자 놀음'같은, 굳이 말하자면 반지성주의 혹은 반지식인주의적 이분법에 대해서까지 닿아 있지는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한국의 학계가 부실하다는 현실에 대한 책임을, 그 학계의 부실을 구태여 다시 한 번 폭로하는 아웃사이더에게 묻는, 다소 가혹한 요구일 수 있다. 그런 이야기를 얼마 전 모처에서 나누었고, 나는 스스로의 강퍅한 성미를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기록 차원에서, 이렇게 적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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