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공약 이행은 유권자에 대한 책임정치의 시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에게는 정치인이 공약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이 팽배해 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 후보 시절에 처음부터 지킬 생각 없는 공약을 발표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것은 공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예산이 부족하거나 정치적 난관에 부딪혀 지키지 못하는 일반적인 경우와 다른 문제이다. 이런 허위 공약에 대해서도 아무런 규제 없이 그냥 지나가야 하는 걸까.
지난 2013년 3월 내가만드는복지국가, 노년유니온, 세상을바꾸는사회복지사 등 복지시민단체들은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발표가 처음부터 허위 사실을 공표한 것이어서 위법이라는 이유로 서울지방검찰청에 공직선거법상 허위 사실 공표죄와 형법상 사기죄에 해당한다는 내용으로 고발했다. 결과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었다. 그 이유는 공약이란 장래에 대한 것이므로 허위 '사실'에 해당하지 않고, 투표 행위는 사기죄의 '재산상 처분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허위 공약과 일반 공약 구분
일반적인 공약의 경우 무조건 법적 처벌을 요구할 수는 없다. 공약이란 미래에 대한 계획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여야 간 정치 상황과 예산 부족으로 인해 당선 후 최선을 다해 이행하려 하더라도 결국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책임 있는 공약을 발표하도록 유도하고, 그 후 공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다음 선거에서 유권자에게 정치적인 심판을 받는 게 일반적 수순일 것이다.
그러나 공약을 처음부터 이행할 의사 없이 허위로 발표하는 경우는 전혀 다르다. 이 경우는 규제가 필요하다. 허위 공약을 그대로 둔다면 너도나도 지킬 생각 없는 허위 공약을 통해 유권자를 현혹할 것이다. 허위 공약 유포는 매우 악질적인 공정 선거 질서 방해 행위다.
현행 공직선거법은 공약의 '내용'에 대한 아무런 규제를 두고 있지 않다. 겨우 공약집의 부수, 형식, 배포 방식과 같은 공약의 지극히 '형식적인 사항'에 대해서만 몇 가지를 규정할 뿐이다.
허위 공약에 대한 현행법상 규제 수단
그럼에도 현행법을 엄격히 해석하면 처벌은 가능하다. 공직선거법 제250조는 허위 사실 공표죄를 두고 있으므로 이를 활용할 수 있다. 허위 사실 공표죄는 당선을 목적으로 연설·방송·신문·통신·잡지·벽보·선전문서 기타의 방법으로 후보자에게 유리하도록 후보자의 행위·출생지·신분·직업·경력·재산·인격·소속단체 등에 관하여 허위의 사실을 공표하거나 공표하게 한 자를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이 죄의 의미에 대해 대법원은 허위 사실 공표죄가 성립하려면, 우선 허위의 사실을 공표하여야 하고, 여기에서 허위의 사실이라 함은 진실에 부합하지 않은 사항으로서 선거인으로 하여금 후보자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그르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성을 가진 것이면 충분(대법원 2007.8.24. 선고 2007도4294 판결)하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공직선거법의 내용과 대법원의 해석, 처벌 선례를 종합하면 공약 공표 당시에 확정된 사실로서 투표권자로 하여금 후보자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그르치게 할 가능성이 있는 사실에 대한 표현이라면, 허위 과장 공약은 허위 사실 유포죄에 의해 처벌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복지단체들의 대통령 고발은 법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박근혜 대통령의 후보 시절 4대 중증질환 치료비 공약이나 기초연금 20만 원 즉시 지급 공약을 보자. 박근혜 후보가 발표한 공약집과 TV 방송 토론, 당선 이후 진영 장관의 국회 발언 등을 종합해 보면, 당선 이후에는 4대 중증질환 치료비를 100% 지급하지 않을 의사였고 기초연금을 당장 동일하게 20만 원 지급하지도 않을 의사였다.
그런데도 그렇게 할 것처럼 공약을 배포한 것은 이미 지급하지 않을 의사가 확정된 사실을 알린 것이고, 그 사실은 진실에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공약이 사실상 당선에 유력한 근거로 작용하였으므로 선거인으로 하여금 후보자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그르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성을 가진 것이었다. 허위 사실 공표에 해당할 수 있다.
그런데도 검찰은 공약은 '사실'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불기소했으나, 허위 공약의 경우는 미래에 대한 단순한 의견 제시가 아니다. 과거에 이미 실제 내심의 미래의 계획과 다른 허위 계획을 발표한 것이므로 확정된 '사실'을 발표한 것이다.
재산상 불이익을 끼친 사기죄에 해당
특히 허위 공약이 복지와 관련된 경우에는 사기죄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다. 4대 중증질환 국가 보장 공약의 경우 당선 이후에는 4대 중증질환 치료비를 100% 지급하지 않을 의사면서도 공약에서 '100%'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에 4대 중증질환으로 치료 중인 국민들에게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면 더 이상 병원비 중 자기 부담금 부분 등을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했고, 투표권을 박근혜 후보에게 행사해 부담 면제될 뻔했던 병원비 상당액의 손해를 보게 했다.
그런데 검찰은 공약은 미래의 사실에 대한 것이므로 허위 사실 공표죄의 사실에 해당하지 않고, 투표 행위는 사기죄의 재산 처분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아 불기소 처분하였다. 불기소 처분을 내리면서 공약 내용이 허위인지 여부는 판단하지 않았다. 이후 시민단체들은 항고했으나 기각되었고 대검찰청 재항고도 기각되었다. 검찰은 허위 공약에 대해 처벌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심히 유감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과장 허위 공약이 판을 칠지 걱정이다. 공약조차 믿지 못한다면 유권자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후보를 판단해야 한단 말인가.
공약, 만들 때부터 민주적 과정을 거쳐야
공약은 미래에 대한 계획이다. 따라서 공약을 만드는 과정부터 실현 가능성 있는 공약을 만들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제도적으로 강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아래와 같은 법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매니페스토란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 추진할 정책들을 담은 권위 있는 문서이다. 매니페스토의 시조인 영국에서 매니페스토는 정당 차원에서만 만들어지고 후보 개인 차원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작성 과정 자체가 정당 주도로 이루어지고 수개월에 걸쳐 의견이 수렴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매니페스토는 플랫폼(Platform)이라는 용어로 불린다. 이들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매니페스토는 선거가 실시되기 전에 당내의 다양한 목소리를 수렴하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만들어지고 전당대회를 거쳐 확정된다.
미국의 경우 공화당과 민주당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는 4년 주기로 매니페스토를 출판한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매니페스토는 플랫폼 준비위원회가 전당대회 때 완성된 매니페스토를 제시하고 이에 대한 대의원들의 투표로 확정된다. 당원이면 누구나 약 200명으로 구성되는 플랫폼준비위원회 위원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도 공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장기간, 충분한 검토를 거칠 필요가 있다. 일부 전문가와 후보의 의사가 중심이 될 것이 아니라 당의 색채를 드러낼 수 있도록 다수 당원의 참여가 보장될 수 있는 방향으로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우선 아래와 같은 법제도적 정비를 검토할 수 있다.
공약 이행을 위한 법제도적 개선 과제
현행 공직선거법은 선거에서 공약서를 작성하여 배포하도록 하고 있으나 공약 내용에 대해 아무런 규정이 없다. 그러므로 적어도 "공약은 성실히 이행되어야 한다"는 선언적 규정을 신설하여 원칙을 세울 필요가 있고 "공약은 소요 재정과 이행 시기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해야 한다"는 내용도 같이 규정되어야 한다.
공약을 평가하고 배포하는 과정에서 이를 규제할 기관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권한이 확대되어야 한다. 공직선거법 개정을 통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공약 발표 기한을 준수하는지, 공약의 내용에 구체적 실현 계획이 포함되고 그 내용이 적절한지를 평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또한 선거에서 시민단체와 국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이 공약을 평가 비교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확보되어야 한다. 공약이 선거 기간 내에 엄정히 평가된다면, 후보들도 감히 허위 과장 공약을 내놓지 못할 것이다. 이에 공약을 확정 배포하는 기한이 공직선거법에 명시될 필요가 있다.
공약 급조를 막기 위해서는 지금보다는 후보 역시 빨리 확정될 필요가 있다. 각 당은 공약을 선거 기간이 되어 만들 것이 아니라 수개월 전에 당내에서 민주적 절차를 거쳐 정책을 수렴하여 확정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정당의 정책연구소가 제 기능을 해야 한다.
* 내만복 칼럼은 필자가 참여하는 팟캐스트 <만복라디오>에서 상세히 논의됩니다. 지난번 칼럼을 들으세요. (☞바로 가기 : http://mywelfare.or.kr/511)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