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죽은 링컨', '죽은 인디언' 위에서 철도는 움직였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죽은 링컨', '죽은 인디언' 위에서 철도는 움직였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23> 미국의 대륙횡단철도

남북전쟁의 전환점이 된 전투는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정부"라는 링컨의 연설로 유명한 게티스버그 전투였다. 1863년 7월 1일부터 3일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리(Robert E. Lee) 장군이 이끄는 7만5000여 명의 남군은 펜실베니아주의 게티스버그에서 북군과 운명적인 결전을 치르게 된다. 리 장군은 북군과의 정면대결을 통해 빠른 승리를 얻고자 했다. 남부의 전쟁 수행 역량이 여러모로 부족한 것을 안 리 장군은 전쟁을 오래 끌면 끌수록 승리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리 장군은 남부의 전략 요충지인 빅스버그를 북군에 빼앗기자 남부를 지키는 수세적인 전략을 버리고 워싱턴을 압박하는 '돌직구' 전략을 선택했다. 이 워싱턴 공격작전의 마지막 전투가 게티스버그 전투였다.

워싱턴 공격 작전의 첫 대규모 전투는 6월 9일 기병전으로 치러졌다. 버지니아주의 쿨페퍼(Culpeper)카운티는 북부의 수도인 워싱턴과 남부의 수도인 리치먼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였다. 남군은 그들의 자랑인 기병대를 보내 쿨페퍼의 브랜디 역(Brandy Station)을 장악해 철도를 남군의 지배 아래 두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철도를 남군이 점령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북군도 대규모 기병대를 보내 기습 작전을 펼쳤다. 브랜디 역을 차지하기 위한 양측 기병대간의 공방전은 남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남군의 기병대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원래 기병 전력은 남군이 우위였다. 남부의 대농장에서 말을 다루는 것은 기본이었기에, 말을 이용한 전투에서는 북군이 감히 맞대응 하지 않았다. 하지만 브랜디 역 기병전에서 북군의 기병은 패주했지만 대등한 싸움을 펼쳐 앞으로 진행될 전투에서 남군이 고전을 하게 될 것을 예고해 주었다. 리 장군은 게티스버그 회전에서 승리해 워싱턴 D.C나 필라델피아를 점령할 경우 링컨의 항복이나 양보를 받아 남부연합을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한 북군을 향해 게티스버그의 평원을 돌진한 남군의 병사들 상당수는 그날 저녁을 먹을 수 없었다. 북군의 포병부대는 들판을 가득 메운 채 달려오는 남군 병사들을 사냥했다. 남군은 병력의 1/3을 잃고 도망갔는데 이 전투 이후 북군은 더 강력해졌고 남군은 서서히 몰락해 갔다. 전쟁의 마지막 분수령이 된 곳은 리치먼드 공방전이었다. 리치먼드는 버지니아주의 주도인데, 남부 연합이 정부를 만들고 대통령을 임명한 뒤 수도로 삼은 곳이었다. 리치먼드의 함락을 노리는 북군은 최고 사령관 그랜트 장군과 피도 눈물도 없는 장군으로 알려진 월리엄 셔먼 장군을 내세웠다. 그들이 이끄는 부대는 남군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작전에 돌입한다. 셔먼 장군은 진격하는 도시마다 불을 놓아 초토화시켰는데 이는 적군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아예 제거해 버리자는 전술적 고려 외에도 적에게 공포를 심어주게 하자는 의도가 있었다.

▲피터스버그 선로위의 13인치 대포를 장착한 평판 화차 ⓒ구글 http://www.buckstix.com/images/13seacoast.gif

셔먼 장군은 점령한 아틀랜타를 불태워 버린다.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1939년작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불타는 도시가 이 아틀랜타다. CG 기술 같은 게 없던 시절의 영화라, 불타는 장면을 찍기 위해 12헥타르에 이르는 넓은 땅에 불을 놓았다고 한다. 남군과 북군의 마지막 전쟁터인 리치먼드에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것은 피터스버그(Petersburg) 공방전이었다. 피터스버그가 중요했던 이유는 이곳이 철도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다. 남부 여러 지역에서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로 연결되는 철도노선의 집중지인 피터스버그를 장악하게 되면 남군의 전쟁 수행 능력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피터스버그를 러시아어로 부르면 페테르스부르크이다. 1924년 볼세비키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이 죽자 레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뀐 페테르스부르크는 1941년 독일군에 의해 포위된다. 러시아 제2의 도시인 페테르스부르크를 함락하기 위해 독일군은 1941년 9월, 페테르스부르크로 향하는 철도노선을 봉쇄하고, 그해 11월 해상 교통로인 라도가 호수를 장악하여 도시를 고립시킨다. 이후 900일에 걸친 장기간의 공방전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금방 꺼질듯 한 촛불처럼 고립된 페테르스부르크의 러시아 인들은 "레닌의 기치를 이어받아 인민의 혁명으로 세워진 도시를 히틀러에 넘겨줄 수 없다"며 기적적으로 도시를 사수한다. 1944년 1월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가 나치 독일군을 물리치고 페테르스부르크를 포위에서 해방시키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레닌그라드 공방전이다.

그러나 1865년 미국 버지니아주의 페테르스부르크(피터스버그)는 사정이 달랐다.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이 피터스버그로 병력을 이동시키자 남군의 리 장군도 병력을 이끌고 피터스버그에서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남군의 워싱턴 공격작전 상황과 정 반대로, 이번엔 북군의 공격을 남군이 막아내야 했다. 북군의 포위 공격에 맞선 남군의 사활을 건 방어는 전투를 장기전으로 끌고 갔다. 1865년 4월, 10개월에 걸친 공방전 끝에 그랜트 장군의 부대가 피터스버그 남서쪽의 철도 조차장(여러 지역의 철도가 모이는 곳에 조성된 차량기지)역할을 하는 지역을 장악하게 되자 남부로 가는 철도 연결이 끊기게 된다. 남군에게 더 이상 식량과 탄약 등 전쟁 수행에 꼭 필요한 것들이 공급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자원 채취를 할 수 없게 된 팀이 항복을 선언하듯, 남군의 리 장군은 남부연합 정부에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이 불가능함을 타전했다. 1975년 4월 30일, 월맹군에 의해 베트남의 사이공이 함락되기 전 미국 대사관에 몰려들어 탈출 헬기를 타려고 발버둥 쳤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처럼 남부 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와 내각 장관들, 그리고 돈 있는 지주들은 긴급 운송 수단을 마련해 몇 시간 만에 리치먼드를 탈출했다. 틈만 나면 안보를 이야기 하고 목소리 높여 정부가 시민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이야기 했던 정치 권력과 그 주변의 사람들이, 결정적 순간에는 자신들의 안위만 챙겼다는 사실은 역사 현장의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코 앞에 다가온 북군이 리치먼드에 도달하기 전, 흥분한 시민들은 자신들을 버리고 간 권력자와 부자들의 집을 털고 불을 질렀다.

남부 연합의 수뇌부가 달아난 다음날 북군 병력이 불타는 남부 연합의 수도 리치먼드에 진입했다. 거리로 행군해오는 군인들 가운데 미합중국 대통령 링컨이 있었다. 흑인들은 메시아처럼 다가온 링컨을 둘러싸고 환호했다. 리치먼드 공방전에서 패한 리 장군은 2만5000여 명의 남은 남군 병력을 모아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북군의 추격으로 도주로가 차단당하자 그는 더 이상의 전쟁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다. 4월 9일 버지니아주의 애퍼매턱스 코트하우스(Appomattox Courthouse)라는 작은 마을의 가정집에서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가, 항복 의사를 밝힌 남군 총사령관 리와 마주섰다.

로키 산맥이 철도 기술을 발전시키다

철도 센트럴 퍼시픽(CP) 레일로드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어야 했고 유니온 퍼시픽(UP) 레일로드는 네브라스카 초원을 횡단한 뒤, 로키 산맥을 넘어야 했다. 산과 철도는 서로 상극이다. 철도는 직선으로 놓을수록 건설과 운영이 수월한데 산속에서 직선으로 길을 놓는 방법이라고는 터널 외에는 없다. 그러나 거대한 산맥을 터널로만 뚫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산을 넘기 위해서는 곡선으로 이어진 길을 달릴 수밖에 없다. 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오르막과 내리막 경사도 열차에 큰 부담을 주었다. 오르막 경사가 심할수록 기관차 출력은 높아야 했고 내리막 경사가 심하면 제동 능력이 완벽해야 했다.

열차의 브레이크는 조지 웨스팅하우스(George Westinghouse)가 만들어낸 자동 공기 브레이크 장치가 1867년 특허를 따내면서 성능이 대폭 향상되었다. 자동 공기 브레이크 장치는 기관차에서 맨 뒤의 객차까지 관을 연결, 기관사가 브레이크를 동작시키면 전체 객차에 제동이 걸리는 장치이다. 이 자동 공기 브레이크 장치는 현대화된 오늘날의 열차 제동 장치에도 쓰이고 있다. 객차나 화차의 밑 부분을 보면 각종 공기관들이 연결되어 있고, 또 이런 공기관들에 공기를 공급하는 공기통들이 붙어있다. 기관차에 설치된 공기압축기에서 보내온 공기를 담아두는 장치들이다. 객차와 객차, 화차와 화차를 연결할 때에는 각각의 객화차에 장치된 관의 끝에 달린 공기 호스를 맞대어, 전체 열차에 공기를 공급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장치의 장점으로는 전기적 제어, 즉 전원이 필요 없다는 것이고 어느 한곳이라도 연결된 공기 호스가 파열되거나 객차나 화차 밑의 제동관이 파손되면 자동으로 정차하게 되어 큰 사고를 막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열차 운행 중 연결된 객차가 분리되더라도 두 열차를 이어주는 공기호스가 파열되는 순간 자동적으로 브레이크가 작동된다. 기관사가 운전실 제어대에서 연결된 전 차량에 제동을 걸 수 있고 연결된 곳 중 한곳이라도 파열되면 비상제동이 걸리기 때문에 열차에 적용된 브레이크 방식을 자동공기제동이라고 부른다. 열차가 달리는 장면이 나오는 액션 영화중에는 심심치 않게 열차를 분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악당을 골려주거나 위기의 순간에 극적인 탈출을 감행하는 신에서 주인공이 열차 공기호스를 조작하지 않은 채 열차를 떼어버려도 자동으로 서지 않고 잘 달리면 '철도 오타쿠'들이나 철도를 좀 아는 사람들은 재미가 반감된다.

▲보기 대차의 모습. 차체의 밑에 장착되어 선로 모양에 따라 축을 회전시켜 곡선구간에서의 주행능력을 높여준다.ⓒ구글 https://encrypted-tbn2.gstatic.com/images?q=tbn:ANd9GcRTqzWxZjIIFoWTZYB8a7rx5QRunenBp5_zQ6GADmlFNMjzUBo75E116js

산을 타고 넘는 곡선 선로를 극복하기 위한 기술 개발도 이루어졌다. 철도에 이용되는 객차는 마차와 같은 형식이었다. 승객이 타는 객실 밑바닥에 바퀴를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고정된 축에 연결된 바퀴는 급한 곡선에서는 원심력에 의해 큰 저항을 받고, 심할 경우 한 쪽이 공중에 뜨는 경우도 생긴다. 궤도 위를 달리는 열차에서 바퀴 한쪽이 공중에 뜨거나 안쪽 바퀴와 바깥쪽 바퀴가 다른 방향의 힘으로 압력을 받으면 탈선의 위험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철도를 위한 차축 시스템이 개발되었는데 이름 하여 보기(Bogie) 대차다. 골퍼들에게는 피하고 싶은 단어겠지만 철도에서는 보기 대차가 개발되면서 곡선부 주행 안전성 뿐만 아니라 고속 주행 안정성이 높아졌고, 그만큼 탈선 위험은 줄어들게 됐다.

보기 대차란 차량과 일체형으로 용접된 축이 아니라 차체 밑에 일정한 각도만큼 회전할 수 있는 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곡선부에서 차체는 원 바깥을 향하더라도 바퀴 축은 휘어진 선로를 따라 달리게 하는 것이다. 이 대차 축에 두 개의 바퀴 축을 연결하는데, 한 개의 축으로 선로를 달릴 때 보다 훨씬 강하게 선로를 잡아주어 안정성이 높아지게 된다. 열차의 승차감이 대폭 향상되는 효과도 생겼다. 자동공기장치와 보기 대차의 도입으로 열차의 안전성과 승차감이 높아지자 장거리 여행을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자기 구상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죽은 링컨이 철도의 역사를 쓰다

조지 풀먼(George Mortimer Pullman)이라는 발명가는 뉴욕주의 버팔로(Buffalo)에서 웨스트필드(Westfield)로 가는 야간열차에서 수직으로 세워진 널빤지 의자에 앉아 한 숨도 못자는 극도의 불편함을 겪었다. 그는 결국 이제 까지 볼 수 없었던 객차를 구상한다. 붉은 카펫, 화려한 가구로 치장된 객실, 안락한 의자, 흰 시트가 덥힌 깨끗한 침대, 고풍스런 식당 칸을 갖춘 최고의 럭셔리카를 현실화 시킨 풀먼의 첫 번째 고객은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대륙횡단 철도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태평양철도법에 서명함으로서 초기 미국철도의 부흥기를 만드는데 기여한 링컨 대통령이 가장 화려한 객차에 누워 여행을 하는 첫 번째 인물이 된 것이다. 풀먼이 만든 럭셔리 침대차는 여러 가지 획기적인 내장을 하는 바람에 폭이 넓을 수밖에 없었다.

나무로 만든 오두막 같은 모습에 나무 의자를 장착한 기존의 객차에 비해 훨씬 큰 크기를 보인 풀먼 객차가 운행되기 위해서는 승강장이나 다리, 그리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선로의 간격을 넓혀야만 했다. 철도회사들은 시설 공사를 수반해야만 운행이 가능한 풀먼 객차를 도입하는 것을 꺼려했다. 풀먼의 성공을 도운 것은 링컨이었다. 그것도 죽은 링컨이었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재선 대통령 링컨이 1865년 4월 14일 워싱턴 시내의 포드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던 중 암살자의 총에 맞아 죽자 풀먼은 장례위원회에 풀먼 객차를 무상으로 기증한다. 연방정부는 암살된 대통령의 장례식을 거국적 행사로 만들어 국가통합의 기회로 삼아야 했고, 링컨을 새로운 영웅으로 승화시켜야 했다.

장례위원회는 링컨을 고향에 안치한다는 명목으로 워싱턴에서 일리노이주의 스프링필드까지 2600여 킬로미터(km)에 이르는, 당시로서는 전국 순회에 필적할 만한 장례열차를 운행하기로 결정한다. 대통령의 시신을 운구하기 위한 객차로는 풀먼이 기증한 객차만큼 격식을 갖춘 것은 없었다. 당장 워싱턴에서 스프링필드까지 선로 구조물과 다리의 시설물들을 개조하는 공사가 시작됐다. 4월 21일, 링컨의 영정사진을 앞에 건, 검은색으로 칠해진 증기기관차는 윤기가 났다. 9개의 객차가 증기기관차에 연결되어 있었다. 파이오니어(선구자)라고 이름붙여진 풀먼의 침대차에는 링컨과 함께, 3년전 11살의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링컨의 셋째 아들 월리엄 링컨이 아버지와 같은 장소에 묻히기 위해 누워있었다.

오전 8시, 링컨의 마지막 여행을 책임진 기차가 커다란 기적소리와 함께 움직였다. 링컨의 장례 열차는 미국 최초의 철도 노선이 시작되는 볼티모어를 비롯해 필라델피아, 뉴욕 등 수 십 개의 도시와 마을을 지나가며 장례 행사를 치렀다. 장례식이 끝나자 조지 풀먼이 만든 객차를 사겠다는 주문이 여기저기서 밀려 들어왔다. 1867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객차 제작 회사를 만들었다. 이후 미국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풀먼 객차는 호화로운 최고급 객차의 대명사가 되었다.

▲링컨의 장례열차. 풀먼객차는 링컨의 시신을 운구하게되면서 고급객차로서의 이미지를 미전역에 알리게된다.ⓒ구글 http://www.the2015lincolnfuneraltrain.com/wp-content/uploads/2012/04/LincolnFuneralTrain-photo-doubled.jpg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죽음 위에 건설된 철도

아이오와주 오마하에서 시작한 대륙횡단철도의 또 다른 주인공, 유니온 퍼시픽 레일로드(UP). 이 철도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들은 아일랜드 이민자들이었다. 이민 대열의 후반기에 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 동부의 해안에 내린 아일랜드인들은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른 동부의 도시들에서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가장 고된 노동이 기다리고 있는 철도 현장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대서양을 건너기 위해 돈을 다 써버린 가난뱅이들이 서부로 갈 수 있는 길은 별로 없었다. 이들은 아주 천천히 레일을 깔면서 서부로 이동하는 길을 택했다. 오마하는 태평양 철도의 기점답게 날로 번성했다. 레일, 침목, 기관차, 객차 등 철도건설을 위한 자재들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몰려드는 인파로 늘 시끌벅적했다. 곳곳에 도박장이 들어섰고, 밤은 매춘부를 찾아다니는 술 취한 인간들의 차지가 되었다.

UP가 새로운 활력을 찾게 된 것은 UP의 경영진들의 전역 요구를 받아들인 닷지 장군이 UP의 기관장이 된 이후 부터였다. 전역하기 전까지 UP의 철도 건설에 방해가 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소탕했던 닷지는 북군의 호랑이 셔먼 장군의 허락을 받아 군대를 나왔다. 닷지는 사기꾼 같은 UP의 실권자 듀란트에게 철도 건설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는 조건으로 기관장 자리를 받아들였다. 닷지는 기관장에 취임하자마자 북군의 장군답게 UP의 조직을 군대식으로 재편했다. 직원들 상당수도 북군에 투입되었던 군인들이었다. 닷지는 거대기업이 된 UP를 움직이는 방식은 군대식 체계가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명령을 내리고 이에 따르는 일들이 몸에 밴 북군 출신의 UP직원들은 총 대신 연장을 들고 서부를 향해 진격했다.

UP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계기 중의 하나는 남북전쟁의 종전이었다. 전쟁에 쏟아 부어졌던 에너지가 철도로 옮겨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CP가 대륙횡단철도 건설 초기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만나 고통을 겪은 것과는 다르게, UP의 철도 건설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로키 산맥을 만나기 전까지 UP는 네브래스카 평원에 선로를 깔면 그만이었다. 미국 철도는 유럽의 철도에 비해 건설비가 적게 들었는데 철도 건설을 위한 부지 매입비용이 거의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선로가 연장될수록 정부의 보조금이 증가하기에 듀란트를 비롯한 UP의 경영진들은 일부러 먼 거리를 우회하는 노선으로 선로를 놓기도 했다. UP의 선로건설을 반대한 것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땅의 본래 주인이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저항이 점점 더 커져갔다.

대륙횡단철도 건설은 백인들의 아메리카 상륙 이후 미국 건설 과정에서 일관되게 진행된 아메리카 원주민 몰락을 완결 짓는 과정이었다. UP는 철도 건설 과정 내내 연방정부에 군대를 요청했다. 인디언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 달라는 것이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 연방군이었던 북군의 총부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향했다.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는 1965년 7월 셔먼 장군에게 철도 건설을 방해하는 인디언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국의 신문 지면들은 남북전쟁과 관련된 기사 대신, 인디언과의 전투를 다룬 기사들로 채워졌다. 1967년 5월, UP의 철도 건설 시작 지점인 오마하에는 셔먼 장군의 명령으로 플렛 군관구라는 부대가 창설되고 사령부가 들어선다. 기병대를 주력으로 한 이 부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공격으로부터 UP의 철도 건설 현장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언덕위에서 자신들의 땅을 가로지르는 기차를 보고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 전사들. 철도는 원주민들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장치였다.ⓒ구글 https://lh6.googleusercontent.com/4Z3x4vMoqPIdYNWNPCtzRDiUlkcF2laDatedYOclQQgMconJUX3BkPaK_agmgjsfbrIWi5fXFxO3f5pOsxCUOUaVDrl0eLIOiJ4-JuGUyaGUHtP02HUguukUeA

그러나 군인들이 모든 건설 현장을 보호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UP의 기관장 닷지는 노동자들을 무장시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닷지의 입장에서 UP의 상당수 노동자들이 북군 출신으로, 무기를 다루는 데 능숙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부분이었다. UP의 횡단철도가 건설되면 될수록,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공동체는 파괴 되었다. 네브래스카 주에 삶터를 갖고 있던 수 족과 샤이엔 족은 자신들의 생존이 위협받는 만큼 격렬하게 UP를 공격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버펄로였다. 그런데 이 버펄로 무리를 횡단철도가 끊어 버리고, 무차별 사냥 대상으로 삼게 되면서, 원주민들의 위기감은 극에 달했다.

버펄로는 인디언의 삶을 책임지는 모든 것이었다. 버펄로 고기가 주식이었고 가죽으로 신발, 담요, 물병, 주거용 막사까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었다. 배설물을 말려 연료로 사용했고 뼈는 칼과 화살촉으로 쓰여지는 유용한 재료였다. 버펄로의 심줄로는 활시위를 비롯해 탄력이 필요한 여러 가지 재료로 사용됐다. 백인들은 사냥단을 꾸려 평원을 누비벼 버팔로를 사냥했다. 버팔로 사냥꾼들의 상당수는 그저 재미삼아 장난으로 총질을 해댄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달리는 열차에서 창틀에 총을 대고 평원의 버팔로 떼를 향해 총을 쏘았다. 철도회사들이 레크레이션의 하나로 버팔로 사냥객을 모집했고 부자들이 앞 다투어 몰려들어 달리는 열차 안에서의 버팔로 사냥을 만끽했다. 버팔로를 누가 더 많이 죽이느냐 하는 내기도 횡행했다.

유럽인들이 북아메리카에 도착하기 전에 4000만 마리, 1865년 1500만 마리가 넘던 버팔로 개체수가 그 10년 뒤에 1000마리도 남지 않게 되었는데, 그 만큼 아메리카 원주민 공동체는 파멸의 길로 내몰렸다. 셔먼 장군은 인디언 절멸이 미합중국의 미래를 보장한다고 믿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선량한 인디언은 오로지 죽은 인디언 뿐"이라거나 "올해 인디언을 많이 죽일수록 내년에 죽일 인디언이 그만큼 줄어든다"며 아메리카 원주민 살육 작전에 매진했다. 셔먼의 휘하 부대는 전투에 임할 때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해 노인이나 여성, 어린이를 구분하지 말라는 장군의 명령을 정확히 수행했다.

아메리카 원주민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데에는 UP의 철도 건설과 홈스테드 법(Homestead Bill)이라고 불리는 자작농지법안도 한 몫 했다.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위한 태평양철도법이 만들어진 것과 같은 해인 1862년 제정된 홈스테드 법은, 서부 개척을 촉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었다. 누구든 서부 개척지에 160에이커의 공유지를 차지하고 5년 이상 거주하게 되면 거의 돈을 안 들이고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홈스테드 법에 의해 땅을 차지하려고 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아메리카 원주민 공동체는 더 빠른 속도로 무너졌다.

▲태평양 횡단 철도는 버팔로를 멸종위기로 몰아넣었다.ⓒ구글 http://webodysseum.com/wp-content/uploads/2013/01/buffalo-extermination-06.jpg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저항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현대적 무기와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군인들, 그 압도적인 병력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땅을 지켜낼 수 없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군대와의 전투뿐만 아니라 민간인과의 전투에 의해서도 희생됐다. 캘리포니아에서만 1850년에서 1880년 까지, 5000명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민간인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콜로라도에서는 전투를 앞둔 주지사가 백인에 적대의사가 없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군대 주둔지로 모이도록 요구한 일이 있었다. 아라파호족과 샤이엔족의 원주민들이 이에 응했다. 이들을 이끈 블랙캐틀(Black kettle) 추장은 백인 군대의 보호를 믿었기에 비무장으로 군대가 지정한 야영지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치빙턴(J.M Chivington) 대령이 이끄는 병력이 원주민들의 야영지를 급습, 일방적인 학살을 시도하여 133명을 살해했다. 살해된 사람 중 105명은 여자와 어린아이였다.

백인들의 신문은 인디언의 공격을 불법적인 약탈과 살육으로 표현하고 백인들의 공격은 전투라고 명명함으로서 자신들의 행위를 야만에 맞선 정당한 방위로 치장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백인들과 평화공존을 원했다. 많은 것을 양보했고 백인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백인들이 지정한 구역으로 이동하고 정착하면 일시적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다시 백인들이 새로운 이주자를 위한 땅 배분이라거나, 도시 건설, 철도 부설 등을 이유로 내쫓게 되면, 그나마 일궈온 공동체가 또 파괴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백인들은 야금야금 원주민들의 삶을 갊아 먹었다.

정의로운 백인이 창조한 미합중국, 철도의 기적이 커질때마다…

1876년 인디언 전사들은 몬태나에서 위대한 추장 미친 말(Crazy Horse)과 웅크린 소(Sitting Bull)의 지도 아래 전의를 불태웠다. 1867년 조약에 따른 약속을 깨고, 다코다 준주의 원주민 부족에 할당된 땅에 백인이 들어와 무단 정착을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북부 평원에서 봉기한 수족이 몬태나로 합세했다. 연방군은 제7기병대를 보내 이들 원주민을 보호구역 안으로 밀어넣으려 했다. 필요에 따라서는 질서를 명분으로 살인적 진압을 하려고 했다. 융통성 없이 무엇이든 힘으로 밀어붙여 사고를 쳐왔던 조지 커스터 대령이 제7기병대를 지휘했다. 몬태나 남부의 리틀 빅혼에서 2500여 명의 대부대를 형성한 인디언 전사들은 제7기병대를 포위해 몰살시켰다. 이 전투는 건국 이래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대결에서 승승장구해 왔던 백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결과적으로는 더 많은 군대를 보내 원주민 공동체를 분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90년 12월 9일 제7기병대가 사우스다코타의 운디드니에서 수족 350여명을 포위한 채 진행한 일방적인 학살은 사실상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로 볼 수 있다. 운디드니의 하얀 눈밭은 인디언들의 붉은 피로 물들여졌다. 제7기병대는 만주 철도를 보호하기 위해 창설되었던 관동군처럼, 철도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대였다. 리틀 빅혼 전투로 유명해졌고, 이후 수많은 헐리우드의 서부영화에서 소재로 쓰였다. 대체적으로는 야만인들의 공격으로부터 백인을 지키는 정의로운 용사들로 그려졌다.

헐리우드의 시나리오가 그렇듯, 착하고 정의로운 주민들이 압도적인 숫자의 인디언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다 거의 저항을 포기할 때쯤, 언덕 저편에 흙먼지가 날리며 제7기병대의 깃발이 보인다. 음악이 장중하게 바뀌고 극악한 인간 사냥을 일삼았던 인디언 무리들을 향해 정의의 수호신 제7기병대 용사들이 돌격을 하면, 관객들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서부영화의 전설 존 포드 감독의 <아파치 요새>나 더스틴 호프만이 젊은 시절 출연했던 <리틀 빅 맨>같은 영화에서 백인들의 인디언 학대와 제7기병대의 무식함이 나오긴 하지만, 주류의 시각은 언제나 '백인이 정의'라는 것이었다.

정의로운 백인이 창조하는 미합중국, 그것을 완성시키는 철도의 기적소리가 커질수록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설 땅을 잃게 됐다.

▲아파치족 제로니모(앞줄 오른쪽 세번째)가 1886 미국군대에 항복한 직후 찍힌 사진. 철도 길 아래의 아메리카원주민들의 모습이 철도와 원주민들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구글 http://api.ning.com/files/JYqhtBJ3QFIifLNNGgAzk9wur7OaTKnwWjYondx*hRRbXQS2xUTDVdqtdZbITGMfn1OcPjstnp6PD-TKrHRJVR2Qm5cJlFiL/GeronimoToFloridalarge.jpg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