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반민족적' 정권으로 비판받았다. 1965년의 굴욕적인 한일 협정이 첫 발단이었다. 이 협정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 한동안 한국에서 사회운동을 대표하게 되는 이른바 '재야'가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민족주의가 재야의 주요 이념이 되었다.
이 전통은 오늘날도 완강히 지속된다.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는 근거 중 가장 자주 접하는 게 '반민족적'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비판이 전제하는 대립 구도는 박정희-박근혜/새누리당 계보를 한편에 놓고 그 반대편에 민주주의와 함께 민족주의를 놓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명료하지 않다. 물론 박정희 정권이 처음부터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걸며 민족주의를 누구보다 강조했다는 것쯤이야 기만 책동이라고 치부해버리면 될지 모른다.
하지만 장준하나 계훈제만큼이나 민족주의자임을 의심할 수 없는 인물들이 박정희 정권을 적극 지지하고 심지어는 그 한 축을 맡기도 했다는 사실은 결코 예사로 볼 게 아니다. 김구의 아들 김신이 그러했고(<조국의 하늘을 날다>(김신 지음, 돌베개 펴냄)), 김원봉의 비서 황용주가 그러했다(<황용주 : 그와 박정희의 시대>(안경환 지음, 까치글방 펴냄). 이들이 단순히 '변절' 혹은 '전향'했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사태는 훨씬 복잡하다.
이 문제를 파고들면, 엄청난 물음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박정희 정권과 민족주의의 관계에 대해, 더 나아가 민족주의 이념 자체를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다른 지면에서 좀 더 깊이 있게 다뤄야 할 쟁점이겠고, 여기에서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 하나만을 부각하고자 한다.
그것은 20세기 중반이라는 시점에 일군의 민족주의자들이 만주군 장교 출신이 군사 쿠데타로 수립한 정권에서 공동의 지향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박정희를 지지한 것은 그에게서 자신들과 같은 꿈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 꿈이란 곧 강력한 '국가'의 열망이었다.
그들 모두는 서구보다는 몇 백 년이 늦고(정말 그랬는지는 별개 문제다) 일본보다는 한 세기가 늦은 '근대화'를 자기 세대 안에 압축 수행하길 고대했다. 이들이 보기에 이 과업은 서구 경제학 교과서대로 기업에 맡겨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4월 혁명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민(民)에 기대를 걸 일도 아니었다. 민의 진출에서 그들이 본 것은 오히려 혼돈이었다.
대안은 오직 강력한 국가였다. 국가가 앞장서서 사회의 나머지 부분들을 채찍질해 끌고 가야 하는 일이었다. 당시 남한에서 이런 국가를 가장 원형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대표한 게 군이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군사 정권은 어떤 탈선이 아니라 뒤처진 역사의 만회를 위한 필연이었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계몽 전제 군주' 박정희도 꼭 필요한 존재였다.
이런 강한 국가를 승인하는 한, 박정희 정권 비판은 처음부터 한계를 안고 있거나 자가 당착일 수밖에 없었다. 함석헌이 당대인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오직 그만이 이 한계를 직시하고 이를 뛰어넘었다는 데 있다. 그는 박정희 정권 비판을 '국가(지상)주의' 비판으로 확대했다. 국가주의에서 벗어나야 군사 정권과 제대로 싸울 수 있다고 보았다. 민족주의자들마저 유일한 대안으로 떠받든 그 국가권력이 함석헌에게는 진정한 대적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적 현실 때문에 이제라도 강한 국가주의로 나가야 된다는 생각에 빠지기가 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말 살아나려면 우리야말로 이 대세(국가주의 극복 : 인용자)의 앞장을 서야 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국가지상주의 때문에 희생이 되어 역사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이기 때문에 그 역사적 죄악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살고 세계도 산다.
그것은 남이 다 써먹고 내버리는 국가지상주의를 뒤늦게 따라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번 죽기를 각오하고 그것을 용감히 부정하고 그 결박에서 스스로를 해방함에 의해서만 될 수 있다. 앞차의 엎어진 바큇자리를 밟지 말란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비상사태에 대하는 우리의 각오'(1971년), <함석헌 저작집 4 :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한길사 펴냄, 2009년), 225쪽)
그러나 함석헌이 이 말을 토해낼 무렵, 한반도는 국가주의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남한에서는 박정희가 '계몽 전제 군주'임을 헌법으로 확인하는 유신 체제가 들어섰다. 반공 기독교도 함석헌이 국가주의 비판으로 나아간 데 반해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는 소련식 국가사회주의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수령을 정점으로 한 국가에 인민을 일체화시키는 극단의 국가주의로 치달았다.
그 후 한 세대가 지나며 역사의 커다란 변화가 있기는 했다. 특히 남한이 그랬다. 민이 다시 꿈틀거렸다. 그래서 국가에 대해 자율적이면서 국가를 변화시키기도 하는 세력, 즉 '사회'를 식별할 수는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이런 변화의 최대 수혜자는 따로 있었다. '자본'이었다. 군부 독재 시절만 하더라도 재벌은 국가권력의 봉신(封臣) 정도에 불과했으나 민주화 이후 이들은 국가 권력의 집행자를 호선하고 일상적으로 감독하는 이사회의 막강 실세로 부상했다. 국가주의의 인큐베이터에서 자라난 자본주의가 이제는 국가주의와 결합해 권력 복합체를 이룬다. 한반도 전체로 보면, 박근혜-이건희-김정은 복합체가 군림하고 있다.
이에 맞서자면 '자본주의 비판'과 '국가주의 비판'의 결합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데 문제는 '자본' 권력과 '국가' 권력에 함께 맞설 토대가 여전히 취약하다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조직된 민, 즉 '사회'가 아직 유아 상태다. 1987년을 거쳤는데도 그렇다. 그래서 한국은 본래 중앙 집권적 국가의 전통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사회가 허약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숙명론이 힘을 얻기도 한다.
나도 자주 이런 숙명론에 기울곤 한다. 그러나 최근 <옥천신문>에 실린 역사학자 백승종(한국기술교육대 교수)의 2월 14일 강연('120년 전 갑오 동학 농민 혁명 주역은 마을')은 우리에게 정반대의 진실을 일깨운다.
백승종은 동학 농민 혁명이 허공에서 일어난 게 아니라고 지적한다. 마을 조직이라는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농촌에서는, 특히 호남을 중심으로, 관(官)과 구별되는 농민들의 자생적, 자율적 조직들이 발전했다. 동학은 다름 아니라 이 새로운 힘이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게 해준 이념이었다.
물론 동학농민혁명 직전의 마을 조직들을 현대의 결사체들과 곧바로 등치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120년 전의 환기가 곧바로 답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만은 이제 확연히 알겠다. 우리에게 '국가'로부터 자율적인 '사회'의 전통이 부재했다는 속설은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그런 전통이 강력히 존재했다. 단지 동학 농민 혁명의 패배 이후 식민 지배와 전쟁과 돌진적 산업화로 이 전통이 잠시 단절된 것뿐이다. 국가주의가 승리를 구가한 20세기야말로 한국사의 본궤도로부터의 심각한 탈선이었다. 20세기 한반도의 승자는 잠시나마 '국가'였고, 지금은 '자본-국가' 복합체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갑자 전 갑오년의 뼈저린 패배 이후 득세한 반역의 역사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땅의 21세기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국가'와 '자본'에 대한 '사회'의 거대한 반격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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